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46화 (246/653)

제246화

틸러는 라온이 검을 쥐는 걸 보고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어.’

저 냉정한 놈이 그냥 죽을 리 없었다. 예상과 달리 단검이 아니라, 장검을 쥐긴 했지만, 대비는 충분했다.

무회전.

지금까지처럼 창과 강기에 회전을 걸지 않고, 오직 힘과 속도만으로 라온의 심장을 노렸다. 어떠한 기교도 없이 무 그 자체를 담은 창격을 날렸다.

‘이놈도 있고.’

청루족으로 상체를 가려 정에 흔들리는 라온이 검을 휘두를 간격을 극도로 축소시켰다. 모든 상황에 대처한 완벽한 공격이었다.

라온은 창이 심장에 닿기 직전 검을 뽑았다. 자그마한 소리도 없이 튀어나온 붉은 칼날이 놈의 허리에서부터 사선으로 치솟았다. 창을 든 오른팔을 노리는 듯했다.

틸러가 히죽 웃었다.

‘느려!’

발검술 숙련도는 뛰어났지만, 이 찰나의 상황에선 굼벵이처럼 느렸다. 검이 창을 막기 전에 놈의 심장을 뚫어낼 자신이 있었다.

‘네 멍청함을 탓하며 죽어라!’

입술을 꽉 깨물며 끝까지 창을 내질렀다. 하지만 창날은 바로 앞에 있는 라온을 찌르지 못하고 허공에서 멈춘 듯 움직이질 않았다.

‘가, 감각이….’

손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풀리며 몸이 통제에서 벗어나는 듯한 기분이다. 무슨 이유인지 전신의 감각이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다.

‘상처 때문인가? 아니야.’

고작 칼 좀 맞았다고 이런 현상이 벌어질 리 없다. 라온이 검을 뽑으며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했다.

틸러가 부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더 빨라!

오감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라온의 검보다 창이 닿는 속도가 더 빠르다. 거기다 이쪽은 청루족으로 몸을 막고 있다.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공격을 고수했다. 창이 놈의 피부에 닿는 느낌이 들어 미소를 지으려 할 때였다.

‘끝났… 어?’

청루족을 잡고 있던 왼팔에서 미약한 통증이 일어났다.

‘뭐, 뭐?’

고개를 돌렸다. 왼팔이 소름 끼칠 정도로 깔끔하게 잘린 채 허공으로 떠올랐고, 손에 잡혀 있던 청루족은 강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게 무슨….’

현실이 아니라 꿈을 꾸는 듯했다. 먼저 공격한 자신의 팔이 왜 잘렸는지, 놈이 노린 건 오른팔인데 왜 왼팔이 잘렸는지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찌이이잉!

귀에 자글거리는 이명이 울림과 동시에 감각이 돌아왔다. 어마어마한 고통이 등골을 적셨다.

“끄아아아악!”

틸러가 목구멍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턱을 덜덜 떨었다.

“뭐야! 뭐야아아아!”

지독한 통증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통째로 날아간 왼쪽 어깨를 지혈하며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     *      *

“괜찮아?”

라온은 괴성을 지르는 틸러를 무시한 채 물에 빠진 가람에게 손을 뻗었다.

“으응….”

가람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을 잡았다.

“미, 미안해.”

“잘 했다.”

“어?”

“널 인질로 잡았기 때문인지 저놈이 방심했거든. 덕분에 팔을 벨 수 있었어.”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눈동자를 찌그러뜨린 틸러를 가리켰다.

“사람들을 구해주고, 틸러마저 약화시켰으니, 네 할 일은 다 해줬어.”

라온이 제천검을 휘돌린 뒤 검집에 넣었다.

“이제 내가 끝을 내고 올게.”

옅은 미소를 지어주고 앞으로 걸었다. 틸러가 마른침을 삼키고서 뒤로 물러섰다.

“너 대체 뭐야! 뭐냐고!”

“네 목을 벨 사람.”

라온이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다리를 굽혔다. 전형적인 발검의 자세를 취한 채 강물을 박찼다.

치이이잉!

시야에 가득 찬 푸른 강물이 별빛처럼 스쳐 지나가고 악마가 된듯한 틸러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귀신 같은 놈! 제발 좀 뒈져!”

틸러가 허리에 쥐고 있던 창을 내지른다. 두 번째 해람천창. 가지고 있는 모든 오러를 쏟아부었는지 지혈시켰던 왼팔에서 다시 피가 뿜어진다.

콰아아아아!

전방에서 몰아치는 강기의 파도를 향해 진각을 밟고 제천검을 뽑았다. 검집에서 드러난 은빛 칼날이 은검몽의 묘리를 머금었다.

제천검이 모습을 다 드러낸 순간 들리지 않는 음율이 퍼지며 틸러의 감각이 극소화된다. 놈도 그걸 느낀 듯 입술을 깨물었다.

틸러의 심장을 가를 것처럼 극쾌를 담아 검을 뻗어냈다. 놈이 방향을 알아차리고 창에 깃든 투로를 바꿨다.

‘넘어갔군.’

하지만 그건 환검의 속임수. 진짜는 아래에서부터 수직으로 쳐올리는 검격이었다.

“크윽!”

틸러는 두 번은 당하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창을 회전시켰지만, 제천검은 이미 목적지에 도달해 있었다.

쩌어어억!

틸러의 오른팔이 사선으로 기울어지며 손에 쥔 창과 함께 떨어져 나갔다. 양팔에서 살벌한 양의 핏물이 치솟았다.

“끄아아아악!”

놈은 감각이 돌아오자마자 수백 마리의 새가 우는 듯한 괴성을 터트렸다.

“으, 으으윽!”

틸러는 도망칠 힘도 없는지 강물에 무릎을 꿇은 채 울부짖었다. 고통으로 인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강물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바닥을 얼려서 놈이 강에 빠지는 걸 막았다. 이리 쉽게 죽어선 안 될 놈이다.

“부모와 형제를 잃은 아픔은 팔다리가 뜯어지는 것 같다고 하더군.”

라온이 제천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턱을 치켜들었다.

“그게 네가 지금까지 해온 행동들이다.”

사실 한참 모자라다.

죄 없는 청루족을 죽이고, 보물을 강탈하고, 아이들을 인질로 잡은 채 부모에게 살인을 지시한 틸러는 죽였다가 살린 뒤 다시 죽여도 모자란 놈이었다.

“그중에서도 단장.”

라온이 제천검을 고쳐 쥐고, 틸러에게 다가갔다.

“부모가 아이를 잃은 건 창자를 끊어내는 고통과도 비슷하다고 하지.”

제천검으로 틸러의 복부를 겨눴다.

“자, 잠깐!”

틸러가 떨리는 턱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 난 남북맹주의 제자야! 나를 죽이면 남북맹이 움직인다고! 감당할 수 있겠느냐!”

놈은 마지막 발악을 하듯 소리를 질렀다.

“상관없다고 말했을 텐데.”

“네, 네놈이야 지그하르트로 가면 그만이겠지만, 저 뒤에 있는 인간들은 어쩔 테냐! 네놈이 떠나자마자 수적들에 의해 고기밥이 될 것이다!”

“네 걱정은 필요 없다. 오늘부로 도란 마을은 지그하르트 소속이 될 테니까.”

“크흐흐! 네놈에게 그걸 결정할 권한이 있더냐? 그냥 마을이 아니라, 남북맹과 싸우게 될 마을을 지그하르트가 받아주겠냐고!”

틸러는 절대 아니라는 듯 히죽거렸다.

“잘 생각해라. 네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날 살려준다면… 커헉!”

“입 닫아.”

라온은 틸러의 말을 끊고 놈의 배에 칼을 박아넣었다.

“끄으으윽….”

“가주님은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본 글렌 지그하르트라면 상대가 시비를 건 순간 그 세력까지 지워버릴 남자다. 남북맹의 이름 따위를 겁낼 리 없다.

“다만 만에 하나라도 지그하르트에서 도란 마을의 보호를 포기한다면 이 땅과 강에 내 깃발을 꽂겠다.”

“뭐, 뭐….”

“지그하르트가 아니라, 라온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걸고 이 땅을 보호하겠다.”

제천검의 검날을 비틀어 틸러에게 극악의 고통을 주었다.

“끄아아아악!”

놈의 비명을 들으며 검을 뽑았다.

“그게 내 협이다.”

“자, 잠깐 아직 말하지 않은…끅!”

제천검의 칼날이 강물에 비친 햇살을 스쳐 지나가고, 틸러의 머리가 강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놈은 마지막까지 본인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듯 눈을 부릅뜬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끅. 끄으윽….”

울대를 조이는 듯한 억눌린 신음에 뒤를 돌았다. 가람이 손을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틸러와 함께 했던 시간과 그에게 당했던 시간이 겹쳐 보이며 감정이 폭발한 것 같았다.

“다 끝났어.”

라온은 가람에게 다가가 떨리는 어깨를 잡아주었다.

“돌아가자.”

*     *      *

“라온이 남북맹과 부딪친다?”

글렌이 옥좌에 턱을 괸 채로 눈매를 좁혔다.

“예. 청루족의 변화가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남북맹은 가젤 강 전체를 노리고 있습니다.”

로엔이 비연회의 보고 내용을 보며 말을 이었다.

“도란 마을만이 아니라, 유인 마을까지 먹을 생각일 테니, 광풍단과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리메르가 알아서 잘 하겠지.”

글렌은 별 관심 없다는 듯 눈을 내리감았다.

“정말 그리 생각하십니까? 지금의 리메르 님이?”

로엔은 말이 되냐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끄응.”

글렌이 앓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망할 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지….”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어쨌든 지금 광풍단을 이끄는 건 라온 도련님이고, 상대는 틸러 세이튼이니 정면에서 부딪치지 않을까 합니다.”

로엔은 보고서를 흘낏 보고서 입맛을 다셨다.

“보고에 의하면 실제 틸러는 영웅이 아니라, 협잡꾼에 가깝다고 합니다. 싸움이 크게 벌어지고,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까지 가게 될 가능성이 높죠.”

“그렇겠지.”

“남북맹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백혈교와 다릅니다. 틸러는 본인이 남북맹주 제자임을 이용하여 목숨을 구걸할 겁니다. 그때 라온 도련님이 어떻게 움직일 거라 보십니까?”

“당연히 벤다.”

글렌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즉답했다.

“그 아이는 내 의지를 잇는 손자다. 그런 저급한 명성에 겁먹을 리 없어.”

그는 당연하다며 차게 웃었다.

“만약 그 반대로 틸러에게 패해서 라온 도련님이 크게 다쳐서 돌아온다면 어쩌실 겁니까?”

“그 허약한 녀석에게 벌을 주어야겠지. 그리고….”

글렌이 옥좌를 쥐고 있던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남북맹 총단은 위치가 알려져 있었지?”

“예? 아, 예.”

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 속에 숨은 에덴이나, 백혈교의 총단과 달리 남북맹 총단 위치는 대략적으로나마 알려져 있었다.

“남북맹을 지운다.”

그 말이 진심인 듯 글렌에게서 세계를 짓눌러버릴 패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역시 가주님은 도련님을 가장 아끼시는….”

“크흠! 라, 라온이나 다른 아이들 때문이 아니다. 지그하르트가 무시당한 빚을 갚아줄 뿐이다!”

글렌은 절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십니까?”

“물론이다!”

로엔이 웃음을 참는 듯 입술을 살짝 비틀었다.

“그럼 조금 전에 라온 님이 의지를 잇는 손자라고 하신 건 무슨 뜻이지요?”

“어, 언제.”

“그러셨습니다. 의지를 잇는 손자가 그럴 리가 없다고.”

“으윽.”

“후후.”

로엔이 얼굴이 붉어지는 글렌을 보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도련님 빨리 돌아오시지요.’

손주만 생각하는 할아버지가 목 빠지게 기다리고 계시니까.

*     *      *

리메르는 강물 속으로 가라앉는 틸러의 시체를 보며 피식 웃었다.

“다 끝났구만.”

청루족을 모두 구했고, 남북맹 수적들의 악행을 알렸으며, 마지막으로 남은 수적인 틸러의 죽음으로 모든 상황이 끝났다. 사망자와 중상자가 없는 완벽한 승리였다.

‘청루족도 금방 회복하겠지.’

청루족들에게 수신석을 돌려준다면 가젤 강은 본래의 색을 찾게 될 거고, 그들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을 잊기 위해선 시간이 좀 필요할 테지만.’

물론 그건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부분이다. 정신적인 부분이 회복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리메르는 틸러의 죽음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청루족을 살피다가 고개를 돌렸다. 라온은 무릎 꿇고 엉엉 우는 가람의 어깨를 잡고 위로해주고 있었다.

‘깃발을 꽂는다고 했지.’

라온은 지그하르트가 도란 마을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본인의 이름이 박힌 깃발을 꽂는다고 말했다.

그 장대한 패기와 의지에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지고, 전신의 털이 곤두섰다.

‘비슷해.’

누가 조손 아니랄까 봐 라온과 글렌은 성격이 닮아 있었다. 자세히 말하자면 라온이 조금 더 무대포 기질이 있었지만.

리메르가 빙긋 웃었다.

‘저 녀석은 단이나, 대에서 멈추기엔 아깝지.’

라온은 지금까지 봐온 지그하르트의 인재 중 누구보다 가주에 가까운 성격과 재능을 갖췄다. 경험만 쌓으면 광풍을 타고 올라 저 하늘에 닿을 녀석이었다.

“단주님.”

돌아오는 라온을 바라보고 있을 때 버렌이 다가왔다.

“응?”

“저희도 저런 경지에 닿을 수 있습니까?”

그 질문은 버렌만의 것이 아니었다. 마르타와 루난 그리고 광풍단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빈말 안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 테니 솔직하게 말해주지. 너희도 될 수 있다. 다만….”

리메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라온을 따라가려 해서는 안 돼. 저 녀석은 먼저 가게 놔두고, 그 뒤를 보고 배우며 너희만의 길을 걸어라.”

“음….”

“너희의 경지는 육황에서도 빠른 축이야. 그 이유 중 하나는 라온과 함께 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경험했기 때문이지. 차근차근 계단을 밟다 보면 저 정도가 아니라 더 위로도 갈 수 있을 거다.”

“가,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희망을 주려는 게 아니라,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광풍단 모두의 얼굴이 밝아졌다.

알아서 희망까지 만들어주다니, 좀 웃기긴 하지만 라온은 역시 타고난 리더였다.

“쯧.”

“응….”

마르타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고, 루난은 멍하니 눈을 꿈뻑였지만 원래 그런 애들이니 그냥 놔두었다.

리메르는 라온을 바라보는 광풍단 검사들을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도 재밌는 일이 많겠네.’

말년이 지루하진 않겠어.

*     *      *

차악!

물기 젖은 발소리와 함께 라온과 가람이 배 위로 올라왔다.

“여기도 다 끝났네요.”

라온은 한 명의 수적도 남지 않은 갑판을 보고 피식 웃었다.

“네가 너무 늦은 거지.”

리메르가 팔짱을 낀 채로 어깨를 으쓱였다.

-맞느니라.

조용히 있던 라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팔찌 위로 올라왔다.

-더 쉽고 빠르게 잡을 수 있었으면서 왜 그리 시간을 끈 것이냐.

녀석은 수준 낮은 싸움을 보느라 지루했다며 하품했다.

“새로운 검술을 시험해보고 싶어서요.”

라온은 옅게 웃으며 검을 툭 쳤다.

‘사정도 있었고.’

-사정?

‘그래. 힘든 전투에서 이길수록 보상이 좋아지잖아.’

라스의 말대로 그저 이기는 싸움을 했다면 더 빠르고 쉽게 틸러를 꺾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틸러를 꺾는 게 아니라, 그가 익혔던 무학을 완전히 깨부수고 새로운 검술을 만들어냈으니, 곧 찾아올 보상은 훨씬 커졌을 것이다.

-시, 시스템이 주는 보상 때문에 시간을 끌었다고?

‘시간을 끈 게 아니라, 조금 더 어렵게 싸웠다고.’

-이 얍삽한 놈! 능력치가 땅 파면 나오는 줄 아는 것이냐! 다 본왕의 것이니라!

‘알아.’

당연히 알고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악하고, 사악하느니라. 진짜 악귀는 네놈이었어!

‘그럴지도.’

-끄아아악! 죽이고 싶느니라! 진심으로 죽이고 싶어!

계속 능글맞게 반응하자 라스가 파르르 떨며 비명을 터트렸다.

“라온.”

라온이 라스를 놀리고 있을 때 리메르가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이제 주셔야지.”

“뭘요?”

“금화 주기로 했잖아.”

“이미 줬잖아요.”

“어? 언제?”

“수신석 훔칠 때 금화랑 보석도 챙기셨을 거 아닙니까.”

갑판 아래를 가리키며 고개를 틀었다.

“어, 어떻게 그걸….”

그는 거짓말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입을 떡 벌렸다.

“수적 놈들이 뻔하죠.”

“아니, 그건 예외지. 네가 주기로 약속했잖아!”

“전 금화라고밖에 말 안 했는데요.”

“어?”

리메르의 열린 입에서 침이 줄줄 흘렀다.

‘맞네?’

정말 라온은 금화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준다는 말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 이 악마 같은 놈!”

-악귀 같은 자식!

한 명의 엘프와 한 명의 마왕은 한 인간에게 절규하며 악을 질렀다.

“자, 다 끝났으니 빨리 정리하죠. 일단 이 배는 부수고….”

라온이 둘을 무시하고 지시를 내릴 때였다. 북쪽에서 거대한 뱃소리가 울렸다.

쿠구구구!

레이블 강의 거친 파도를 가르고 웅장한 크기의 흑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 저 배가 여기에….”

리메르가 흑선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저게 뭡니까?”

“악운.”

그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남북맹의 제2 전함 악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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