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화
틸러는 회의장을 나오자마자, 전선으로 향했다.
“무슨 일로 불렀답니까?”
갑판을 지키던 부선장 해킬이 웃으며 다가왔다.
“일이 꼬였다.”
틸러가 뒤를 힐끔 돌아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청루족을 숨겨둔 장소를 알아차렸다.”
“그, 그게 무슨….”
해킬이 눈을 부릅떴다.
‘말이 안 되는데?’
청루족을 숨겨둔 곳은 아무도 가지 않을 법한 구석이고, 놈들에게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명령까지 내려두었다. 그 위치가 발견됐다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잘못 아신 거 아닙니까?”
“레이블 강과 가젤 강 사이에 있다고 말하는 걸 보면 확실해.”
틸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놈이 실수할 리 없지.’
라온 정도 되는 인간이 가장 중요한 일을 확인하지 않았을 리 없다. 여기서 놈이 잘못 알기를 바라는 건 멍청한 생각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저 안에서….”
틸러는 해킬에게 회의장에서 있었던 대화를 말해주었다.
“놈이 어떻게….”
해킬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이제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
틸러가 짧게 혀를 찼다.
‘제대로 당했어.’
입으로 싸우는 전쟁은 누가 더 많이 알고, 많이 준비했냐가 승패를 가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왔기에 이번에는 그 어린 새끼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놈들도 모르는 게 있잖아.”
“아! 수신석!”
“라온 놈은 날 경계하고 있을 테니까. 네가 수신석으로 명령을 내려. 청루족에게 나오지 말고 무조건 숨으라고 그다음엔… 아니다!”
틸러가 고개를 저으며 해킬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섯. 다섯 정도만 내 앞으로 보내.”
“다섯이요?”
“누가 더 많은 청루족을 잡는지 내기했잖아. 내가 청루족 다섯을 잡고, 나머지가 도망친다면 도란 마을을 거저먹게 되는 거지.”
라온이 단단히 준비했다고 해도 수신석에 대해서는 알 리가 없다. 수신석으로 청루족을 조종한다면 내기 따위는 가볍게 이길 수 있다.
‘오히려 잘됐군.’
이번 일만 잘 끝내면 청루족의 소모 없이 도란 마을을 먹게 되고, 나아가 유인 마을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제 무덤을 팠구나. 라온 지그하르트.”
틸러는 배를 향해 다가오는 라온과 광풍단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흘렸다.
“가젤 강은 잘 먹도록 하마.”
* * *
라온은 배에 올라타기 전 물에 가라앉은 선수부를 보았다. 누구도 모르겠지만, 지금 저 아래엔 리메르와 가람이 숨어 있었다.
[웃어?]
물 아래에서 리메르의 오러 메시지가 흘러들어왔다.
[단주이자, 스승님을 물에 처박아놓고, 지는 따땃한 햇볕을 쬐면서 웃음이 나와?]
오러 메시지가 다가오는 방향을 보니, 빨판상어처럼 배에 등을 대고 있는 듯했다.
[단주님이 든든해서 웃음이 나옵니다.]
[웃기고 있네! 너 때문에 내가….]
[금화.]
[윽!]
금화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리메르가 입을 다물었다.
[가람아! 인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칼이 아니라 금이다. 금! 돈을 제일 조심해라!]
리메르는 신묘한 기술로 자신과 가람에게 동시에 오러 메시지를 보냈다.
가람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사람은 나이가 많든 적든 돈이 없으면 초라해진다고! 내 꼴을 봐. 이 나이 먹고… 크흑!]
[끝나면 한몫 제대로 챙기실 겁니다.]
[오? 진짜?]
[잘 부탁합니다.]
라온은 목을 푸는 것처럼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오냐!]
리메르는 성격이 가벼워 보여도 부탁한 일은 확실하게 해줄 사람이다. 누구보다 믿음이 갔다.
라온은 가람이 리메르를 달래주는 모습을 그리다가 광풍단과 함께 틸러의 전선 백창에 올라탔다.
‘생각보다 큰데.’
밑에서 봤을 때보다 갑판이 더 크고 화려하다. 수적의 배가 아니라, 군함을 보는 듯했다.
“와아!”
“엄청 크네.”
“이게 남북맹의 전선….”
광풍단 검사들은 탄성을 흘리며 배 이곳저곳을 눈으로 훑었다. 사실 정말 감탄한 게 아니다.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대비할 수 있도록 배 전체를 살피는 거다.
“제 배는 어떠십니까?”
라온이 다른 이들처럼 백창의 갑판을 탐색하고 있을 때 틸러가 웃으며 다가왔다.
“설화검협의 눈에 차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되는군요.”
“화려하면서도 멋들어진 전선입니다. 다만 파랑협의 명성에 비하면 상당히 작군요.”
“제가 맹에서의 위치가 그리 높지 않아서 어쩔 수 없네요.”
배가 조금 작다고 도발했지만, 틸러는 부드럽게 웃어넘겼다. 오히려 본인의 입지가 작다는 이야기까지 풀었다.
라온은 틸러의 반응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여유를 찾았군.’
틸러가 저렇게 편안한 안색이 된 건 수신석으로 청루족을 조종하여 본인이 내기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신석을 이용해서 청루족 몇 명만 유인해 오겠지.’
수신석으로 대략 셋에서 여섯 정도의 청루족을 끌어오고, 나머지는 숨으라는 명령을 내려서 혼자 청루족을 잡아서 내기를 끝낼 생각이 분명했다.
‘너무 뻔해.’
이 작전을 생각했을 때부터 틸러의 움직임을 예측했기에 그가 어떤 생각을 할지는 뻔히 보였다.
‘내가 수신석을 알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테니까.’
가람이 알려 준 정보들 덕분에 이 내기. 아니, 이 전쟁의 승자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높지 않다니요. 파랑협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마스터에 오르셨는데, 너무 겸손하시군요.”
라온은 틸러를 칭찬하며 글래시아로 감각의 바다를 열었다.
‘그럼 누가 움직일까?’
틸러는 지휘하는 입장이라 갑판을 떠나지 않을 거다. 수신석으로 명령을 내리기 위해서는 청루족이 보이는 거리에 있어야 하니, 분명 배 안에 숨겨놨을 것이고, 그걸 다른 누군가가 사용하기 위해 이동할 것이다.
‘저자.’
건장한 체구를 가진 중년인이 배를 점검하듯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는데, 단전에 깃든 기운이 단단하면서도 거대했다. 저 남자가 이 배의 부선장 해킬인 것 같았다.
‘외모도 듣던 대로야.’
체구가 건장하지만 눈은 뱀 같은 남자라고 했는데, 외모도 일치했다. 틸러 대신 수신석을 조종할 사람은 저 남자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이제 청루족 꼴을 안 봐도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군요.”
틸러는 속 편해지겠다고 중얼거리며 웃었다.
“예. 괴물은 이제 사라질 겁니다.”
라온은 해킬의 기척을 확실하게 기억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닻을 올려라!”
“닻을 올려라!”
“출항!”
틸러의 외침에 수적들 모두가 복명복창하며 배를 띄웠다.
쿠구구구구!
거대한 배가 움직이는데, 흔들림은 크지 않았다. 배 전체에서 느껴지는 마나를 보면 파도를 견디는 마법이 걸려있는 듯했다.
“그런데 저 배까지 올 필요가 있습니까?”
틸러는 전선의 뒤를 따라오는 도란 마을의 상선을 가리켰다. 전선에 못지않을 정도로 큰 배에는 촌장과 마을 사람들이 가득 타 있었다.
“우리 중에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협잡꾼이 있진 않을 텐데요.”
“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저분들도 고생 많이 하셨으니, ‘괴물’을 제거하는 모습을 확실히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이거 생각보다 잔인하신 분이군요.”
“그럴 지도요.”
라온이 옅게 웃었다. 물론 그 이유 때문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틸러와 남북맹이 어떤 놈인지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거기다 이 배는 사라져야 하니까.’
틸러를 처리한 뒤 이 전선을 부술 생각이기 때문에 저 상선은 당연히 따라와야 했다.
…
가람이 알려준 청루족의 거주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계획을 점검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그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여기입니까?”
“예.”
라온은 날카로운 바위로 가득 차서 큰 배가 들어가기 힘든 강어귀를 가리켰다.
“일단 청루족은 보이지는 않는군요. 정말 저 안에 있는 게 맞습니까?”
틸러의 말과 동시에 점을 찍어두었던 해킬이 선장실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의 움직임이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틸러와 해킬을 비롯한 수적 모두를 기겁하게 만들어야 한다.
“물론입니다. 도리안.”
라온은 그 남자가 움직이기 전에 도리안을 옆으로 불렀다.
“그걸 꺼내줘.”
“옙!”
도리안이 다가와 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살짝 둥그스름한 손아귀에서 사람 머리통만 한 허연 구슬이 튀어나왔다.
“어?”
“허억!”
틸러와 선장실 문을 열던 해킬이 동시에 신음을 흘렸다.
“이, 이거 어디서 난 거죠?”
틸러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턱을 파르르 떨었다.
“이 장소를 알려 준 사람에게 받은 물건입니다.”
라온은 도리안에게 가짜로 만든 수신석을 건네받으며 빙긋 웃었다.
“이 구슬이 있으면 청루족을 꺼낼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누, 누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체구가 작은 사람이었는데, 말이 많이 어눌하더군요. 하지만 직접 청루족을 통제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의 기운이 강한 걸 생각해보면 사람이 아닐지도….”
“끄윽….”
틸러의 표정이 손으로 구긴 종이처럼 일그러졌다.
‘떠올랐겠지.’
이제 틸러의 머릿속에 가람의 생존과 이게 진짜 수신석인지에 대한 의문이 깊게 박혔을 것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움직일지는 정해져 있었다.
“그, 그럼 한 번 움직여 보시겠습니까?”
“그러죠.”
라온이 가짜 수신석을 강물 쪽으로 내밀며 글래시아를 운용했다. 수신석이 하얗게 번쩍이며 푸른 마나가 줄기줄기 뻗어 나갔다.
부그그그그!
날카로운 바위 사이사이에서 거품이 일어나며 수십 명의 청루족이 일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허억!”
“지, 진짜 나왔어!”
“정말이잖아!”
“저 구슬이 대체 뭐길래!”
상선에 타고 있던 도란 마을 사람들은 정말 청루족이 나온 모습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아!”
“허억….”
“미, 미친….”
틸러와 수적들은 아예 혼이 빠져나간 듯한 눈빛이었다.
‘가람이 잘 해줬네.’
이건 수신석의 힘이 아니라, 가람의 능력이다. 녀석이 바닥에 붙어 있는 청루족을 빼내 준 것이다.
라온은 불의 고리를 통해 틸러의 오러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걸 파악했다. 해킬에게 빨리 수신석을 찾으라고 지시를 내리는 게 분명했다.
‘이제 시작이네.’
* * *
틸러는 라온의 손에 들린 수신석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수신석이야. 진짜 수신석이라고.’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는 듯했지만, 저 수신석은 진짜였다.
[해킬! 수신석 언제 확인했어!]
떨리는 손에 힘을 준 채로 바로 해킬에게 오러 메시지를 보냈다.
[그, 그저께 확인했습니다.]
[당장 가! 당장 가서 저놈이 수신석을 훔친 건지. 아니면 저게 두 번째 수신석인지를 확인해!]
[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있으면 계획대로 명령을 내려! 다섯 마리는 나한테 보내고, 나머지는 가젤 강 상류로 도망쳐서 숨으라고 해!]
[아, 알겠습니다!]
해킬은 틸러의 지시를 듣자마자, 선장실로 들어갔다. 바닥의 해치를 소리 없이 연 뒤에 가장 밑까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둥그런 문을 열었다.
“끼이익….”
“키아아….”
그 안에는 우리에 갇힌 어린 청루족들이 철창에 갇혀 있었는데, 물에 닿지 못했기 때문인지 비늘이 다 일어나고, 가뭄 난 논처럼 살이 쩍쩍 갈라져 있었다.
“입 닥쳐!”
해킬은 어린 청루족들에게 욕을 뱉은 뒤 벽으로 다가갔다. 손가락으로 벽의 이곳저곳을 두드리자 벽이 반으로 갈라지고 그 안에 있던 금화와 보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다른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가운데에 있는 투명한 구슬을 바라보았다. 구슬 속에서 푸른 기류가 일렁였다.
“있어! 그럼 그놈이 가진 건….”
“가짜지.”
“뭐, 뭐… 커헉!”
뒤에서 들린 나른한 목소리에 해킬이 다급하게 뒤를 돌려고 했지만, 상대가 더 빨랐다.
푸칵!
시릴 정도로 차게 빛나는 칼날이 그의 왼쪽 가슴을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끄윽….”
해킬이 피를 토하며 고개를 돌렸다. 붉은 머리의 엘프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대, 대체 언제 내 뒤를….”
“네가 해치를 열었을 때부터.”
리메르가 해킬의 심장에 박아 놓은 검을 비틀었다.
“끄어억!”
“라온. 그 망할 녀석의 생각대로 너나 틸러나 당황해서 날 눈치채지 못하더라고, 네 안내를 받으며 조용히 따라왔지.”
“제, 제기랄….”
해킬은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가슴을 움켜쥔 채 마른 바닥에 쓰러졌다.
“쯧.”
리메르는 철장 안에 갇힌 채 바들바들 떠는 어린 청루족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마른 비늘이 우수수 떨어지고, 갈라진 피부에서 녹색 진물이 흘러내렸다.
“쓰레기 새끼들.”
가람은 청루족이 아이를 소중히 여긴다고 했었다. 이곳에 어린 청루족들을 가둬둔 건 수신석에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한 인질이 분명했다.
‘더러운 기억이 생각나는군.’
공포와 절망만 가득한 어린 청루족들의 눈을 보자, 인간 세계에 처음으로 나왔던 때가 떠올랐다.
“다들 물러서라.”
리메르의 손짓에 청루족들이 몸을 움츠렸다.
차아아앙!
그가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철창의 입구가 두부처럼 갈라졌다.
“끼이….”
“키….”
겁에 질려 있던 청루족들은 입구가 열린 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집에 갈 시간이다.”
리메르는 창고 안쪽에서 진짜 수신석을 챙긴 뒤 어리둥절한 청루족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전에….”
그가 뒤에서 반짝이는 보석들을 힐끔 보고서 입맛을 다셨다.
“금화 몇 개만 챙겨도 되겠지?”
돈 없으면 서럽거든….
* * *
라온은 눈동자가 마구 굴러가는 틸러를 보며 차게 웃었다.
‘머리가 복잡하겠지.’
이게 진짜 수신석인지 혹은 두 번째 수신석인지, 가람이 살아있는 건지, 가람에게 무슨 말을 들은 건지 같은 의문들이 뒤섞여서 머리가 터지기 직전일 거다.
‘그리고 가장 답답해하는 건.’
해킬에게서 끊어진 연락. 수신석으로 명령을 내리고 돌아와야 할 그가 복귀하지 않아서 불안해 미칠 지경일 거다.
투웅.
배 안쪽에서 모두가 느낄 법한 큰 울림이 일어났다. 다 끝났다는 리메르의 신호였다.
“방금 그건….”
“틸러 님. 사실 이 구슬에 대해 들은 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라온은 이쪽도 시작할 때임을 느끼고 틸러에게 말을 걸었다.
“드, 들은 말이라니요?”
틸러의 표정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불안함에 젖어 있었다.
“이 구슬을 청루족의 눈앞에서 부수면 모두의 숨이 끊어진다고 하더군요.”
“마, 말도 안 되는….”
“손해 볼 건 없으니, 한번 해보죠.”
“잠깐!”
라온이 가짜 수신석을 허공에 던졌다. 베어버리기 위해 검을 뽑으려 할 때 틸러가 다급하게 뛰어올라 수신석을 잡았다.
“다른 방법으로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는 수신석을 끌어안은 채 허공에서 몸을 돌렸다. 이것 역시 예상된 움직임이었다.
딱!
라온이 손가락을 튕겼다.
콰아아아앙!
가짜 수신석이 터지며 틸러의 전신에 냉기로 뒤덮였다.
트드드득!
마스터답게 그 찰나의 순간에 오러를 운용하여 피부가 얼어붙는 건 막았지만 옷과 장비는 모조리 깨져버렸다.
“네놈이….”
틸러는 얼마 남지 않은 가짜 수신석 조각을 부수며 이를 갈았다.
“폭탄을 잡겠다고 달려드는 꼴이라니, 우습기 짝이 없군.”
라온은 고개를 모로 틀고, 코웃음을 쳤다.
“나를 공격하다니, 네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아직 안 끝났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선의 중앙에서 거대한 충격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전선 하부가 사정없이 터져나가고, 리메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이 촌장님! 배 좀 가까이 대 봐!”
그는 아직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촌장과 도란 마을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이게 대체 무슨….”
“어떻게 된 일이지?”
“왜 리메르 님이 저기에….”
“어떻게 되긴.”
리메르는 바람을 이용하여 갇혀 있던 어린 청루족들을 도란 마을의 상선으로 보낸 뒤 마지막으로 배에 내려섰다.
“저 수적 새끼들이 이 구슬과 청루족의 아이들을 이용해서 지금까지 청루족을 조종한 거지.”
“어?”
“바, 방금 뭐라고….”
“저분들이 왜 그런 짓을….”
마을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를 딱딱 부딪쳤다. 지금까지 남북맹과 틸러가 보여준 호의가 너무 컸기에 가짜였다는 걸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저놈들 배에서 이 녀석들이 이 꼴로 나온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리메르는 피부가 다 뜯어진 어린 청루족들과 부서진 배 중앙에 남은 철장들을 가리켰다.
“거기다 이 구슬은….”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허어!”
“그런 일이….”
“사, 사람도 아니야….”
마을 사람들은 어린 청루족들의 맑은 눈동자와 상처로 가득한 피부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고개를 들어 틸러와 수적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동자에는 혐오가 가득 차올라 있었다.
“저, 저 악마 같은 놈들!”
“어찌 인간이 이런 짓을….”
“금수도 너희 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
도란 마을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청루족과 공존하며 살았다고 생각했기에 극심한 분노를 느끼며 틸러와 남북맹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후우….”
틸러가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강대한 오러가 타오르며 그의 몸에 박혀 있던 서리가 모조리 으깨졌다.
“어떻게…. 어떻게 안 거냐. 네놈 대체 정체가 뭐야.”
“네 친구가 알려줬지.”
“친구? 그게 무슨 헛소리….”
“아, 전 친구라고 해야겠네. 가람!”
라온의 부름에 갑판 위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가람이 올라왔다.
“괜찮지?”
“응.”
가람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입고 있던 로브를 던졌다.
“너, 너!”
검은 로브가 바람을 타고 떠오른 순간 틸러의 뻘건 눈동자가 파랑을 맞은 듯 거칠게 흔들렸다.
“네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으….”
가람은 입술을 꽉 깨문 채 틸러의 악귀 같은 눈을 노려보았다.
“가, 가족들을 구하러 왔어!”
그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전신을 떨면서도 틸러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후욱!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다 네놈 때문이었어.”
틸러가 파르르 떠는 손으로 등에 멘 장창을 쥐었다. 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이 날 팔아먹었구나.”
“파, 판 게 아니야.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닥쳐!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괴물 새끼 주제에!”
그의 손에 잡힌 창이 극쾌의 묘리를 담은 채 섬광이 되어 쏘아졌다.
“성질 급하네.”
라온이 차게 웃으며 제천검을 뽑았다. 틸러에 못지않은 쾌와 강의 묘리를 칼날에 얹어 광아검을 그었다.
쩌어어어엉!
강대한 충격파가 터지며 갑판에 무너질 듯 뒤흔들렸다.
“멍청한 놈!”
틸러는 예절 바르고, 헌양했던 모습이 거짓말이라는 듯 짐승처럼 일그러진 눈동자를 굴렸다.
“고작 저런 짐승들 때문에 내게 싸움을 걸다니!”
“짐승은 너 같은데?”
라온이 코웃음을 치며 틸러의 창대를 밀어냈다.
쿠구구구!
인간을 초월한 근력과 오러에 틸러가 뒷걸음질을 친다. 놈이 물러설 때마다 기운을 풀어내지 못해 갑판 전체가 울렸다.
“난 남북맹주의 제자다!”
틸러가 창대를 올리며 악을 내질렀다.
“저 인간도 아닌 것들 때문에 지그하르트와 남북맹의 전쟁이 벌어져도 좋단 말이냐!”
“가람은 나와 손을 맞잡은 친구다.”
라온이 서늘한 눈빛을 발하며 창대를 짓눌렀다. 무시무시한 중압을 일으키며 틸러를 밀어냈다.
“친구를 위해서 검을 드는 건 당연한 일이지.”
전생에 이루지 못한 일과 실비아에게 들었던 진정한 검사가 되라는 말을 떠올리며 당당히 허리를 폈다.
“아….”
가람이 이를 입술을 떨며 글썽이던 눈물을 떨어뜨렸다.
“불리지 않는 이름에는 의미가 없다고 했던가? 가람. 앞으로는 우리가 네 이름을 불러주겠다.”
라온의 뒤에 광풍단이 붙으며 검을 뽑았다. 서릿발 같은 기파가 갑판 전체로 퍼져나갔다.
“끄윽!”
“저, 저게 지그하르트….”
“어린놈들이 무슨 기세가….”
수적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무기를 쥔 손을 떨었다.
“미친놈! 미친놈들이야! 난 파랑협 틸러 세이튼이다! 날 건드리는 순간 남북맹이 움직인다! 난 남북맹주의 제자라고!”
“네 이름도, 남북맹주도 관심 없다.”
“뭐?”
“내 앞에 있는 건 비루한 도적놈일 뿐이니까.”
라온이 제천검을 들어 틸러의 심장을 겨눴다. 은빛 칼날에서 뿜어진 장대한 서기가 모두를 침묵시켰다.
“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