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43화 (243/653)

제243화

“실패했다?”

틸러 세이튼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뺨에 긴 상흔이 새겨진 수적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왜?”

“죄, 죄송합니다.”

수적의 고개가 더 깊게 내려갔다.

“죄송이 아니라, 왜라고 물었는데?”

틸러가 빙긋 웃었다. 환한 미소 속에 살의가 뚝뚝 묻어나왔다.

“지그하르트 놈들이 도착하기 전에 배를 침몰시킬 시간은 충분했잖아.”

배를 침몰시키고, 선원들이 익사하는 모습을 마을 사람들과 지그하르트의 버러지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습격 시간을 맞췄다. 완벽한 계획이 틀어졌다는 것에 짜증이 돋아났다.

“처, 청루족이 배를 공격하려다가 갑자기 굳어버렸습니다.”

“굳어버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배, 배를 부수지 않고 물속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수적은 틸러의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 손을 떨었다.

“어, 얼마 안 가서 청루족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지체된 시간 동안 지그하르트 놈들이 도착해서 선원들을 구했습니다.”

“고장이라도 났나? 하여튼 모자란 놈들이라니까.”

틸러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청루족의 뺨을 후려쳤다. 피를 토할 정도로 얻어맞았음에도 청루족들은 자그마한 신음도 흘리지 않았다.

“지그하르트에서는 리메르가 나섰겠군.”

“리, 리메르가 아니라, 라온입니다.”

“뭐?”

“라온이 물 위로 뛰어들어 단숨에 청루족을 얼리고 사람들을 구해왔습니다.”

수적은 라온이 청루족을 어떻게 몰아내고 선원을 구했는지 모두 말해 주었다.

“무학 경지로 뜨는 건 아닐 테고, 지그하르트에 수상 보법이 있었나?”

“그건 저도 잘….”

“아냐. 충분히 있을 수 있지. 다만 지금까지 육지에서만 지낸 라온 지그하르트가 그걸 익히고 있는 건 이상한데….”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마을 사람들 반응은 어때.”

“그저 물에 뜨는 정도가 아니라, 강물 중심에서 얼음의 섬을 만들어내는 모습에 경악했다고 합니다. 무, 물과 얼음의 신이 강림했다는 걸 보면 몇몇은 단단히 빠진 듯합니다.”

“하아, 개새끼네. 남이 침 발라놓은 사탕을 빨아 먹으려 하다니, 눈깔을 뽑아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야. 그렇지 않아?”

“그, 그렇습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어린 새끼가 명성 좀 쌓았다고 건방지게 굴어서 혀를 뜯어버리고 싶더라고.”

틸러는 광풍단 앞에서 보였던 매너 있는 모습과 전혀 다른 사이한 미소를 흘렸다.

“이게 다 그 새끼 때문이야. 그놈만 있었어도 진즉에 가젤 강을 먹어 치웠을 텐데.”

그는 아쉽다며 짜증 어린 한숨을 뱉어냈다.

“말하는 청루족 말입니까?”

대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철탑을 보는 듯 웅대한 기세를 담은 중년인. 이 남자가 바로 틸러가 이끄는 전선 백창의 부선장 해킬이었다.

“그래. 청루족들을 교육시키면 다 그놈처럼 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어.”

틸러가 혀를 찼다. 아무리 교육해도 청루족은 인간의 언어를 말하거나, 글을 읽지 못했다.

언어가 통하질 않으니, 간단한 해도를 만드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인간의 언어를 스스로 배웠던 그 청루족이 특별한 놈이었다.

“다 대가리 텅텅 빈 병신들뿐이야.”

그는 발을 들어 무릎 꿇고 있는 청루족의 머리를 밟았다. 청루족은 머리가 바닥에 쓸려 피를 흘림에도 자그마한 반항도 하지 못했다.

“그놈을 살려뒀으면 레이블 강 하류에 가지를 뻗은 모든 강의 해도를 만들었을 텐데.”

그 말하는 청루족을 죽이지 않았다면 이미 가젤 강의 해도가 완벽하게 완성되었고, 그걸 바탕으로 도란 마을과 유인 마을까지 먹어 치웠을 것이다. 그놈을 제외한 청루족은 전투 빼고는 쓸 수 없는 모자란 것들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살려두는 거였는데.’

다 끝났다는 생각에 놈을 죽였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일 처리를 감정적으로 했다는 게 너무도 아쉬웠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그 청루족을 대체 어떻게 구워삶아서 비밀을 들으신 겁니까? 처음엔 거절했을 텐데요.”

“그야 간단하지.”

틸러가 밟고 있던 청루족을 걷어찬 뒤 빙긋 웃었다.

“처음부터 그 녀석의 세계는 나 하나만 있게 만들었거든. 매일매일 찾아가다가 걱정과 불안에 휩싸이도록 처음으로 일주일 동안 가지 않았지.”

유일하게 대화할 수 있고, 이해를 해주는 사람이 사라지게 되면 불안감은 머리를 넘어 온몸에 다다르게 된다. 그 고통이 녀석의 마음을 좀먹도록 일주일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이후는 더 쉬워. 그 괴물에게 선물을 주며 더 미안하게 만드는 거야. 내가 없어졌을 때 느끼게 될 고통과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고마움과 미안함이 자연스레 그 괴물의 입을 연 거지.”

“허어….”

“그놈은 인간 이상으로 머리가 좋았지만, 감정적인 부분은 아이만도 못해. 감정을 조종하는 거야 식은 죽 먹기지.”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그 청루족이 자신만 만나도록 이끌었다. 그런 어리숙한 놈의 심리를 이용하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역시 대장은 악당 중에 악당이라니까.”

해킬이 배의 난간을 잡은 채 히죽였다.

“악당이 아니라, 효웅이라 불러. 영웅과 악당은 일찍 뒤지지만, 효웅은 끝까지 살아남잖아?”

틸러는 난간에 턱을 괴었다. 그의 잔잔한 안광에 무너지는 마을이 비친다. 벨가가 친구를 만났던 바로 그 어촌 마을이었다.

“그런데 저길 아예 몰살시킬 필요가 있습니까? 좀 아까운데….”

“썩은 가지를 쳐내는 거야. 그래야 남은 가지들이 깨끗하게 자라거든.”

그는 뭉개지는 마을을 보며 흥겨운 미소를 흘렸다.

*     *      *

라온은 가람에게 로브를 씌운 뒤 도란 마을로 돌아왔다. 기다리라고 말해놨기에 광풍단은 숙소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왜 이리 늦어.”

버렌이 뭘 하고 왔냐며 인상을 찌푸렸다.

“뻔하잖아. 또 수련하고 왔겠지.”

마르타는 지겹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라온.”

루난은 별말 없이 이름을 부른 채 멍하니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을 꿈벅이는 게 이대로 쓰러져 잘 기세다.

세 사람 다 지금까지 수련하고 있었던 듯 호흡이 거칠었다.

“근데 네 뒤에 있는 건 누구냐?”

다른 검사들과 달리 숨이 넉넉하다 못해 나른한 리메르가 뒤에 있는 가람을 가리켰다. 물의 기운을 느낀 건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단주가 사람을 데려왔어?”

“누구지?”

“마을 사람인가?”

다른 검사들도 이 시간에 사람을 데리고 올 줄은 몰랐는지 고개를 쑥 내밀었다.

“다 앉아. 할 말이 있으니까.”

라온은 기막을 펼쳐서 소리가 빠져나가는 걸 막은 뒤 가람을 보았다.

“주, 준비됐어.”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그의 로브를 벗겼다.

“처, 청루족!”

“왜 청루족이 여길!”

“위, 위험한 거 아니야?”

검사들은 눈을 부릅뜬 채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윽….”

가람은 기겁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야들아. 쟤 눈을 봐라.”

리메르가 가람의 눈을 가리켰다.

“투명하니 맑잖아. 다른 청루족처럼 살기도 없고.”

“그, 그러네.”

“눈이 빨갛지 않아.”

“이게 진짜 청루족인가?”

검사들은 듣기만 했던 청루족의 맑은 눈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얘는 누군데?”

마르타는 아직 경계가 풀리지 않은 얼굴로 가람을 훑어내렸다.

“그걸 지금부터 말해 줄 거야. 이 녀석의 이름은 가람. 처음 만난 건 아까 강물에서 사람들을 구할 때….”

라온은 가람을 만나고 가람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모두에게 설명해주었다.

“뭐 그런 쓰레기 새끼가 다 있어!”

버렌은 틸러를 칭찬한 자신의 입을 뜯고 싶다며 이를 갈았다. 귀족적인 걸 가장 선호하는 그가 욕을 하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시발! 쌍놈의 새끼가….”

마르타는 당장 뛰어나갈 것처럼 오러를 일으켰다. 백혈교에게 어머니를 잃었기에 더 몰입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음….”

루난도 이번만큼은 화가 나는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멍했던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어렸다.

“크흑!”

도리안은 입을 틀어막은 채 눈물을 흘렸다.

“지, 진짜 고생했어.”

그는 가람에게 다가가 배 주머니에서 과자와 사탕들을 꺼냈다.

“일단 이거라도 먹으렴. 그래. 그래.”

“아, 고, 고마워.”

가람은 두 손 가득 과자와 사탕을 받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해하는 걸 보니 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이 녀석!”

도리안은 참지 못하고, 가람을 꼭 끌어안았다.

-그래. 본왕 대신 네가 안아주어라!

라스는 잘했다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매번 느끼지만,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 중 이 둘이 가장 마음이 여린 것 같았다.

“배를 공격하려던 청루족들을 멈춘 것도 너지?”

“아, 응….”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루족을 멈춰?”

“우리가 오기 전에 청루족이 몇 분 동안 가만히 있었다고 했거든요.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친구가 했을 것 같아서요.”

“동족들을 멈추게 할 수 있거든. 힘이 빠져서 얼마 못 하지만….”

그는 틸러에게 창을 맞고 죽었다가 살아난 이후에 얻게 된 능력이라고 말했다.

“사람에게 당해놓고, 사람을 구하려고 하다니….”

“어떻게 저런 삶을 살 수 있지?”

“고생했다는 말로 다 표현이 안 돼.”

“하지만 본인의 실수가 너무 커. 그런 비밀을 왜 말해서….”

“후우,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군.”

몇몇은 종족의 비밀을 밝힌 가람의 실수를 아쉬워했지만, 대부분은 그저 안쓰러워만 했다.

“가람의 일을 떠나.”

라온이 광풍단 모두와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남북맹의 틸러는 우리의 영역을 노리고 있다. 당연히 그냥 내어 줄 수는 없지. 전쟁이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어.”

마르타가 지금이라도 싸우자는 듯 검을 쥐었다.

“이번만큼은 나도 참기 힘들군.”

“응.”

버렌과 루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의 분노는 알지만, 그냥 움직일 수는 없어.”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놈들에게는 청루족이라는 인질이 있으니까.”

진실을 알게 된 지금 청루족은 적이 아니라, 인질이다. 그들을 구할 방법이 있지 않다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수신석부터 찾아야 해.’

틸러의 손에 있는 수신석을 찾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수신석의 위치는 알아?”

“배 안에 있는 건 확실한데 위치는 나도 몰라.”

가람이 고개를 저었다.

“잠깐. 수신석이 청루족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했었지?”

“응.”

“그리고 너도 청루족들을 잠시 멈추게 할 수 있고?”

“어? 응.”

가람은 알면서 왜 묻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루족들이 어디에 머무는지도 알고 있어?”

“가젤 강과 레이블 강 사이에 붙은 곳에 숨어 있어.”

“왜 그곳에 있는 거지?”

“틸러가 청루족을 이용하는 건 가젤 강만이 아니야. 어디에서도 움직일 수 있도록 레이블 강 옆에 거처를 만들어뒀어.”

라온이 가람의 대답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을 해결하기 위해 홀로 많은 준비를 한 건지 질문에 대답에 막힘이 없었다.

“수신석은 어떻게 생겼지?”

“해파리처럼 동그랗고 투명해.”

“흐음….”

라온이 글래시아를 운용하여 손아귀에 동글한 구슬을 만들었다.

“이렇게?”

“아니, 더 커.”

“그럼 이 정도?”

“응.”

사람의 머리통만 하게 구슬을 키우고 나서야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안에 하얀 구슬이 연기처럼 움직이고, 순수한 물의 마나가 깃들어 있어.”

“그거야 어렵지 않지.”

라온이 만들어 놓은 얼음 구슬에 글래시아의 순도 높은 냉기를 주입했다.

치이이익!

구슬 속 냉기가 물결처럼 흐르며 가람이 말한 대로 연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어, 맞아! 딱 이렇게 생겼어.”

가람이 거의 비슷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되겠는데?”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생각대로 움직이기만 한다면 수신석의 위치는 틸러가 직접 알려 줄 것이다.

“청루족들을 구할 수 있다는 거야?”

버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수신석을 빼낼 방법이 있어.”

라온 도리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리안. 내일 촌장님한테 틸러를 호출해달라고 해. 시간이 넉넉할 때로 골라서.”

“이렇게 빨리? 너무 급한 거 아니야?”

마르타가 침착하라며 눈매를 좁혔다.

“걱정 마. 확실하게 구할 수 있으니까. 다만 단주님의 역할이 좀 커서….”

“흠, 그래.”

리메르가 빙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내 차례군. 내가 그 쓰레기 자식의 목을 멋지게 베면 되는 거지?”

“아뇨. 그놈은 제가 벨 겁니다.”

“어? 너, 너한테 조금 버거울….”

“제가 벱니다.”

라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러던가.”

리메르는 라온의 열기로 타오르는 눈빛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뭐해?”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라온은 씩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이번 일의 주인공이시죠.”

*     *      *

틸러를 사흘 뒤에 부르기로 했기에 라온은 그 시간 동안 산에 올라 검술을 단련했다. 어찌 보면 일과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평소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이 멍청아! 검이 느리잖느냐! 거기서 그러면 안 되지! 환검의 변화는 더 늦게! 소리가 너무 크게 나잖느냐!

틸러의 악행에 분노한 라스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직접 검술의 모자란 부분을 지적해주었다.

-그래서 그놈을 벨 수나 있겠느냐! 팔과 다리를 뜯고, 몸통은 얼린 채 본인이 죽어가는 걸 보여줘야 할 거 아냐!

“그런 말 하니까 마왕 같네.”

라온이 피식 웃었다. 가람의 사정에 누구보다 슬퍼할 때는 사람 같더니, 틸러를 죽일 때는 마왕스러워진다. 참으로 모를 녀석이다.

-웃지 말고 검이나 휘둘러!

“조금만 있다가.”

고개를 젓고서 산길을 보았다. 잠시 후 바스락 소리와 함께 벨가와 모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라, 라온 님!”

벨가는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아 붕대를 감은 채로 무릎을 꿇었고, 모린 역시 절뚝이는 다리로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왜들….”

고맙다는 인사는 충분히 받았기에 여기까지 찾아와 고개를 숙이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제, 제 친구가. 제게 남북맹의 행패에 대해 알려 준 친구의 마을이 모, 몰살당했다고 합니다.”

“예?”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레이블 강에 붙어 있는 페렌이라는 작은 마을인데, 그, 그저께 전부 죽었다고….”

너무 힘을 줬는지 벨가의 입술이 뜯어지며 피가 턱으로 흘러내렸다.

“처, 청루족이 습격했다고 하는데,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벨가에게 남북맹 이야기를 했다고 본보기로 친 게 분명합니다!”

모린이 이를 악물며 손을 떨었다.

“나, 나만 죽이지 대체 왜 거길….”

벨가는 본인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다고 생각했는지 가슴을 움켜쥐며 피를 토했다. 하지만 이건 그의 탓이 아니다. 틸러의 밑에 있는다면 언제라도 일어났을 예정된 일이었다.

“제, 제발! 제발 그놈들을 막아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피나도록 바닥을 긁으며 머리를 숙였다.

“후….”

라온이 거친 숨을 뱉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다행이군.’

-다행? 이 미친놈이!

‘그게 아니라, 틸러를 바로 죽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어?

‘그런 놈은 그냥 죽여서는 안 돼. 철저하게 짓밟은 뒤에 부숴버려야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걱정하지 마세요.”

라온은 벨가와 모린을 일으키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놈을 영웅에서 쓰레기로 추락시킨 뒤에 치워줄 테니까.”

*     *      *

이틀 뒤.

라온은 가람 마을의 회의장에서 틸러와 마주 앉았다.

“얼마 전에 뛰어난 신위로 사람들을 구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역시 대단하시네요. 소문이 실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틸러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틸러 님이 보여주신 무력에 비하면 새 발의 피죠.”

라온은 겸양을 떨며 고개를 저었다.

“금칠도 잘해주시는군요.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절 보고 싶다고 하신 거죠?”

“일단 바쁜 와중에 불러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늘은 일이 없어서 한가했습니다.”

틸러는 괜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럼 다행이네요.”

라온이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틸러 님을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청루족의 은신처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으, 은신처? 정말 놈들의 은신처를 찾으신 겁니까?”

틸러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확실히 찾았습니다.”

라온은 담담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위치가 어디인지….”

“가젤 강과 레이블 강 사이에 숨어 있더군요. 정확한 위치는 가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으음….”

틸러가 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별로 마음에 안 드시는 듯한 표정이신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이제 끝을 낼 수 있다는 생각에 시원할 뿐입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라온이 옅게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끝이라고 하셨으니, 우리 내기 하나 할까요?”

“내기?”

“예. 오늘 ‘괴물’을 더 많이 잡는 쪽이 이 마을에 깃발을 꽂는 게 어떨까요?”

“하하, 마을을 내기로 거는 건 별로 같군요. 저희는 그런 욕심이….”

“그럼 저희가 보호해도 되겠습니까?”

라온의 말에 틸러의 웃음이 석고처럼 굳었다.

“며칠 있지도 않았는데, 촌장님이나 다른 마을 사람들이 저희를 꽤 좋아해주 시더군요. 틸러 님만 괜찮으시다면 도란 마을에 지그하르트의 깃발을 세우고 싶습니다. 어차피 바로 옆에 있는 유인 마을도 저희 영역이라 큰 파장이나 문제는 없을 겁니다.”

“하하, 그건 좀 그렇군요.”

틸러가 아주 살짝 입술을 깨물며 촌장과 마을 간부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도 이곳 분들과 꽤 친해졌는데, 지그하르트 영역이 되면 보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크흠….”

“음!”

“그게….”

촌장관 간부들은 틸러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음?”

틸러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촌장과 마을 간부들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라온이 틸러와 촌장을 보며 피식 웃었다.

‘보법을 보여주길 잘했네.’

수중화를 본 뒤 촌장과 마을 사람들의 지그하르트에 대한 호감도는 극도로 올라간 상태다.

리메르와 도리안이 친화력까지 펼친 덕분에 지금 마을의 여론은 남북맹과 지그하르트 반반으로 갈리는 중이었다.

“보기 힘들지 않을 겁니다. 저희는 영지를 통제하지 않으니, 아무 때나 찾아오셔도 됩니다.”

“음, 그렇다고 해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뇨. 정말 괜찮습니다. 얼마든지 오세요.”

라온은 파르르 떨리는 틸러의 입매를 보며 옅게 웃었다.

‘그래. 이대로 있지는 않을 거잖아.’

틸러는 다른 남북맹주의 제자들에게 밀리지 않는 세력과 자금을 모으기 위해 여러 강줄기를 먹으려 했다. 특히 가젤 강에 많은 공을 들였으니,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상징성도 있으니까.’

가젤 강의 절반은 지그하르트의 영역. 놈은 지그하르트의 땅과 강을 뺏었다는 명성도 노리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참고로 저희 단주님은 다른 임무 때문에 이번 전투에 참여하지 않으실 겁니다.”

라온은 미끼를 하나 더 던졌다.

“이거 참 곤란하게 만드시네요.”

틸러가 입매를 말아 올렸다. 조금 전과 같은 미소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청루족을 잡는 걸 떠나서 이 마을을 위해서라면 조금이라도 가까운 저희가 보호하는 게 여러모로 좋은 것 같습니다. 지그하르트는 좀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요.”

“그건 지부를 설치하면 해결될 문제죠.”

“으음….”

“개인적으로 말 길어지는 걸 좋아하지 않은데, 간단하게 끝내죠. 받아들이실 겁니까. 아니면 포기하시겠습니까?”

라온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치며 물었다.

“후, 어쩔 수 없군요. 이 마을을 위해서 그 내기 받아들이죠.”

틸러는 끝까지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마을을 위해서라는 말을 얹었다.

“받아들이실 줄 알았습니다. 필요 없는 말을 계속하실 줄은 몰랐지만.”

“이….”

라온이 피식 웃으며 뒷말을 흘리자, 찰나의 순간 틸러의 표정이 섬뜩할 정도로 굳었다가 풀렸다.

“라온 님은 제 생각보다….”

“그럼 바로 출발하죠.”

주절거리려던 틸러의 말을 끊어버리고 밖을 가리켰다.

“바, 바로?”

“예.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으니, 오늘 끝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희는 시간이….”

“조금 전에 오늘 일정이 텅텅 비었다고 하셨잖습니까.”

틸러와 남북맹에게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 그걸 위해서 촌장에게 틸러의 시간이 빌 때 그를 호출해달라고 부탁한 거다.

“가시죠.”

라온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틸러를 굽어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 ‘괴물’들을 모조리 처치하고 끝을 냅시다.”

두 사람이 칼 없는 싸움을 시작한 사이.

“아, 젠장….”

틸러가 타고 온 전선 백창의 바닥에서 누군가의 주절거림이 느슨하게 울렸다.

“이게 말이 돼? 내가 왜 물에 젖은 채 여기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 거야!”

리메르는 배 밑바닥에 붙은 채로 이를 갈았다.

“내가 단주고, 지가 부단준데 왜 내가 힘들어야 하냐고! 너도 그 자식이 나한테 눈 부라리는 거 봤지? 어?”

“차, 참아.”

물속에 있던 가람은 그런 리메르를 달래며 손을 저었다.

“이게 무슨 주인공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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