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2화
라온은 벨가를 어깨에 들쳐메고 눈매를 좁혔다.
‘청루족이 말을 하다니….’
청루족은 짐승처럼 울음소리로 의사소통을 한다. 조금 어눌하다고 해도 인간의 언어를 구사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넌 누구지?”
어린 청루족이 도망칠 수 없도록 글래시아로 벽을 만들며 물었다.
“나, 난 들켜선 안 돼.”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머리를 물속에 담갔다. 흔들리는 동공에 극심한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라온은 어린 청루족의 전신을 훑어내렸다. 팔과 다리, 허리의 살점이 거칠게 뜯겨나간 채 녹색 핏물을 흘리고 있었다.
‘저 상처는….’
사람에게 당한 상처가 아니다. 맹수의 발톱이나 이빨에 당한 듯한 상흔이었다.
‘이 녀석이 벨가를 구한 건가?’
벨가는 기절한 상태로 물 위를 떠다녔고, 그 뒤를 청루족이 쫓고 있었다. 상황을 볼 때 이 어린 청루족이 다른 청루족에게서 벨가를 구해준 것 같았다.
“네가 이 사람을 구해준 건가?”
“으응.”
청루족이 물에 머리를 담근 채 고개를 끄덕였다. 빼꼼히 이쪽을 바라보는 맑은 눈동자와 인간처럼 작은 귀가 익숙했다.
“아!”
라온이 어린 청루족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제 남북맹이 청루족을 쫓아냈을 때 물속에서 이쪽을 바라보던 그 작은 청루족이었다.
“나를 본 적 있지?”
“어, 없는데.”
“어제 강물 속에서 내가 있는 쪽을 바라봤잖아.”
“아, 아니야. 처음이야.”
어린 청루족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분명 내 쪽을 봤… 설마.’
강가에는 광풍단과 틸러말고도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청루족의 시체. 틸러가 베었던 청루족의 시체가 물에 가라앉고 있었는데, 이 녀석은 그 시체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슬퍼 보인 건가.’
당시에 청루족의 눈동자가 맑으면서 서글프다고 생각한 이유는 동족 때문이었다.
“우, 우릴 풀어줘.”
어린 청루족은 수중화에 팔과 다리가 낀 채 괴성을 지르는 청루족을 가리켰다.
“다, 다들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니야.”
그는 어눌한 말로 확실한 의사를 전했다. 깨끗한 눈동자에서 진심이 묻어나왔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니다?”
방금의 말로 청루족의 폭주에 외부요인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너 이름은?”
“…없어.”
어린 청루족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고개를 저었다.
“시, 시간이 없어. 난 들켜선 안 돼.”
그는 조금 전과 비슷한 말을 하며 얼굴을 가렸다.
“지금이 안 되면 나중에는 나올 수 있나?”
“으….”
그 말에 청루족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불안에 떠는 푸른 눈동자로 한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도 되겠지.’
본인이 다치면서도 벨가를 구하고, 유일하게 전생에서 본 청루족과 같은 눈을 한 녀석이다.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화아아아아!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만화공을 일으켰다. 수면 위의 얼음이 녹아내리며 허연 수증기가 주변을 뒤덮었다.
“달이 하늘의 중심에 떴을 때 다시 이곳으로 오도록.”
“아, 응.”
청루족은 신기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다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지금 보니 등과 목에도 큰 상처가 있었다. 한참 전에 다친 곳인지 아물기는 했지만 섬뜩할 정도로 큰 상흔이었다.
“키이이익!”
“캬아악!”
팔과 다리를 묶고 있던 수중화의 얼음이 녹자 다른 청루족도 부리나케 빠져나갔다.
라온은 청루족과 반대 방향으로 사라진 어린 청루족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드디어 실마리가 잡혔군.”
* * *
도란 마을의 촌장은 넋이 나간 얼굴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도란 마을에서 태어난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가젤 강을 봐왔다. 장마가 와서 마을까지 물이 넘친 적도 있었고, 지진 때문에 물길이 갈라진 적도 있었으며, 거대한 해일이 솟구친 적도 있었다.
너무 많은 것을 봐왔기에 가젤 강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라온이 보여준 위용에 심장이 크게 두방망이질 쳤다.
“어, 얼음이라니….”
라온은 그저 물을 밟는 것으로 얼음으로 된 거대한 왕관을 만들어냈다. 찰나의 순간에 솟구친 얼음임에도 깰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지 청루족들이 빠져나가질 못했다.
‘틸러 님보다 더 해.’
틸러는 물 위를 걸을 뿐 공격은 등에 메고 있는 장창으로 한다. 하지만 라온은 발을 구르는 것만으로 모든 상황을 정리해버렸다.
‘얼음의 신 같군….’
강물을 타는 것처럼 물 위를 노니고, 발을 굴러 얼음의 감옥을 만드는 라온은 물이나 얼음의 신처럼 보였다.
“저, 저렇게 얼음을 만들다니!”
“허어어…”
“세상에나!”
“사람이 저런 게 가능해?”
다른 마을 사람들도 놀랐는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남북맹을 외치던 모두는 혼이 빠져나간 눈으로 라온만 쫓고 있었다.
“으음.”
촌장은 모두를 얼음에 태운 채 돌아오는 라온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한 거지?’
틸러는 30대고, 라온은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았다. 저 어린 친구가 남북맹주에게 직접 사사 받은 틸러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저게 지그하르트….”
“어떻게 봤어요?”
“허억!”
촌장이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중얼거리다 기겁하며 옆을 보았다.
“우리 라온 대단하죠?”
언제 왔는지 리메르가 씩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 저리 어린 분이 저런 무위를 보여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눈이 호강을 한 것 같습니다.”
“저 녀석은 특별하죠. 그리고 지그하르트도 특별합니다.”
“예?”
“잠시 걸음을 멈췄다고, 우리를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리메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촌장을 바라보았다.
“아, 저, 저는….”
“이해합니다. 이 마을에서 가까운 건 남북맹이고, 강가에 사는 이상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죠. 하지만….”
그는 입매에 매달린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검집을 툭 쳤다.
“지그하르트가 검을 들었을 때 우리 앞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곳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
촌장이 턱을 파르르 떨었다. 살기도, 기세도 없었다. 그저 나지막한 목소리일 뿐인데 등 뒤에 전율이 일었다. 그는 협박이 아니라, 선언 같은 말로 자신을 굴복시키고 있었다.
‘다, 달라.’
아까 함께 술을 마실 때 만해도 어디에나 있는 한량을 보는 듯했지만, 지금은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폭풍을 마주한 듯한 기분이었다.
“잘 생각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리메르가 강가로 다가오는 라온을 마중 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선택을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으니까.”
* * *
라온은 이름 없는 청루족과 약속 한 시간에 다시 강가로 나갔다.
고요하게 퍼져나가는 강물 소리를 듣고 있을 때 바로 앞 강물에서 동그란 머리가 빼꼼히 올라왔다.
“안녕.”
청루족은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정말로 왔군.”
안 오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녀석은 제시간에 나타났다.
“야, 약속했으니까.”
청루족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런가.”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바위에 걸터앉았다. 청루족은 물에서 나와 조금 거리를 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확실히 작군.’
아직 어린 녀석인지 다른 청루족보다 작았다. 다만 지느러미와 물갈퀴가 작아서 인간과 비슷한 외형인 건 이 녀석만의 특징인 것 같았다.
“너희를 청루족이라고 부르는 건 알고 있나?”
“으응.”
청루족이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기로 너희 청루족은 타 종족과 왕래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갔다. 공격은커녕 인간을 보자마자 도망치거나 피했고.”
라온은 예전에 본 청루족들의 순수한 모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들이 왜 저렇게 변한 거지?”
처음부터 가장 궁금했던 부분을 물었다.
“나, 나 때문이야.”
청루족이 손으로 무릎을 꽉 잡고 입술을 떨었다.
“너 때문이라고?”
“내, 내가 모든 걸 망쳤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녀석의 눈동자에 투명한 물기가 차올랐다.
-끙, 답답한 녀석이로다.
라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조금만 기다려봐.’
라온은 라스를 밀어놓고 다시 청루족의 눈을 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네가 말을 하는 것과 관계있는 건가?”
“후우!”
청루족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 * *
태어났을 때부터 형제들과 다르다는 걸 느꼈다.
생김새는 같았지만 서른 개도 되지 않는 울음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부족의 언어는 내 욕구를 채워주지 못했다.
그래서 부모의 말을 어기고 몰래 인간에게 다가갔다.
물론 대놓고 나설 용기는 없었다. 인간의 시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그들의 말만 들었다.
언어, 표현, 몸짓, 목소리의 높낮이를 통해 수없이 많은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전율했다.
배 밑에 붙어 다니며 인간의 언어를 꾸준히 듣다 보니, 어느새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좀 더 지나서는 어색하지만, 말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과 직접 대화를 해보고 싶었지만, 겁이 나서 다가갈 수는 없었다.
종족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인간에게 접근할 수도 없는 외톨이로 살아가고 있을 때 그가 나타났다.
“너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는 거니?”
틸러. 배 아래에 붙어 말을 연습하던 날 발견하고, 처음으로 말을 걸어준 인간이었다.
내 첫 마디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않지만 두려움보다 설렘이 앞섰던 건 확실히 기억난다.
“대단한데. 청루족이 말하는 건 처음 봐.”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흥미로워하며 직접 인간의 언어를 알려주었다. 덕분에 말은 물론이고, 책까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친구 할까?”
틸러는 언젠가 친구라는 단어를 꺼냈다.
“친구?”
들어 보기는 했지만, 정확히 어떤 뜻인지 모르는 단어였다.
“그래. 가깝게 지내며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는 친구라고 부르거든.”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기뻤다. 사람이라 불러준 것도, 날 이해해주는 사람이 생긴 것이 행복하여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틸러는 내 지식욕을 알고 더 많은 세계를 알려주었다. 여러 지식이 쌓였고, 지도를 볼 수 있는 독도법까지 익혔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강과 바다에 대한 여러 지식을 배웠을 때 틸러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부탁?”
“그래. 친구끼리는 부탁을 들어주는 법이거든.”
친구의 부탁이라는 말에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주변은 암초가 많아서 배를 타기에 위험 하거든. 네가 해도를 만들어줬으면 좋겠어.”
이미 지도를 보는 법과 여러 지식이 쌓인 상태였기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틸러를 위해 매일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여러 강을 돌아다니며 해도를 만들어 주었다.
해도가 완성될 때마다 인간의 마을이 불타고, 많은 사람이 죽어갔지만 틸러는 그저 문화라고 말하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친구의 말이기에 믿었다. 너무도 멍청하게 그저 받아들였다.
“너희에 대해 알려줄 수 있어?”
가젤 강의 해도를 반쯤 완성했을 때 틸러는 청루족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다.
기뻤다. 내가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듯 친구도 내게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아서 좋기만 했다.
나는 틸러에게 청루족에 대해 말해주었다. 어떤 방식으로 대화하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는 더 많은 것을 원했다.
청루족이 어떻게 물의 주술을 사용하는 건지, 청루족의 약점은 무엇인지, 가젤 강이 다른 강보다 더 맑은 이유는 무엇인지 말해선 안 될 것 같은 질문들을 연달아 던졌다.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말해줘선 안 될 것 같았다.
“유일한 친구의 부탁도 들어주지 않다니, 실망이다.”
틸러는 그 말만 남기고 떠났다.
불안했다. 내 유일한 이해자가 사라진 것만으로 손이 떨리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불안함에 밥조차 먹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샜다.
일주일 만에 돌아온 틸러는 화를 내긴커녕 선물을 주었다. 인간의 음식과 새로운 책들을 주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미안해. 난 그저 내 친구의 종족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을 뿐이었어.”
그 말에 불안감도, 초조함도 사라졌다. 행복함에 못 이겨 그에게 청루족의 비밀에 대해 모두 말해주었다.
물을 정화시키고 청루족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일족의 보물, 수신석에 대해 말해주었고, 탁한 물에서 청루족의 감정이 격해진다는 것도 알려주었으며, 아이를 귀하게 여기는 청루족의 풍습도 설명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기쁨이 아니라, 불안의 대답이었다. 틸러가 날 떠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인질을 가져다 바친 것이다.
틸러는 고맙다고 하며 활짝 웃었다. 그 미소를 보자 불길함이 사라졌다.
그는 이틀 뒤에 돌아와 선물을 준비했다며 시렌 강에 다녀와 달라고 말했다.
기쁜 마음에 단숨에 시렌 강까지 헤엄을 쳤지만, 한참을 뒤져도 선물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밤까지 기다렸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어서 틸러가 실수했다고 생각하며 돌아왔다.
그리고 보았다.
맑디맑은 가젤 강에 녹색 핏물이 흘러내리는 절규의 혈겁을.
바닥에 동족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고, 살아남은 동족은 목에 쇠로 된 목줄을 차고 있었다.
“아, 왔어?”
틸러가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손과 얼굴에 형제들의 핏물이 뿌려져 있었다.
“네 덕분에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었어.”
그는 족장의 머리를 밟은 채 수신석을 들어 올렸다.
“아이를 인질로 잡으니까 다들 무릎을 꿇더라고. 고맙다. 친구.”
나는 처음으로 괴성을 지르며 놈에게 달려들었고, 그 뒤는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가젤 강 깊은 곳에 홀로 있었고 내 위엔 부모와 형제의 시체가 올라가 있었다.
등에는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처가 그어져 있었다. 가족들 덕분에 놈들은 내가 죽은 줄 알고 버려두고 간 것 같았다.
울었다.
일주일 내내 울고 기절하기를 반복했다.
마음에 맺힌 모든 것들을 가슴에 쌓아 둔 뒤 동족을 뒤쫓았다.
틸러에게 들키지 않을 깊이와 거리에서 동족들이 사람들을 죽이지 않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고작 몇 사람을 구하는 게 다였고, 틸러가 떠올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본인이 조종하는 청루족을 죽이며 영웅이 되어가는 틸러를 볼 때마다 마음이 시꺼멓게 죽어갔다.
오늘도 인간들을 구하지 못해서 절망하고 있을 때 눈앞의 인간이 나타났다.
틸러보다 훨씬 무서운 분위기를 풍기는 이 인간의 눈빛은 이상하게도 따스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정말 오래간만에 인간의 말을 꺼내게 되었다.
* * *
“그…랬군.”
라온이 눈을 내리감았다.
‘심해.’
불쌍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전생의 자신과 비교해도 모자르지 않을 정도로 이 청루족의 삶은 기구했다.
‘그런데….’
내가 왜 화가 나는 거지?
이 녀석과 아무 관계도 없음지만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라스에게 받은 감정 만이 아니라, 본래 가지고 있던 분노까지 일어서는 것 같았다.
눈을 뜨고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조금 가깝게 앉은 어린 청루족의 눈이 비친다.
‘비슷하기 때문인가.’
틸러에게 목줄이 잡힌 채 사람을 공격하는 청루족의 모습은 세뇌당한 채 원치 않는 살인을 했던 전생의 자신과 꼭 닮아 있었다.
청루족에게서 데루스에게 목을 잡힌 전생의 자신이 비쳤기에 이렇게 감정이 격해지는 거였다.
“나, 나도 이걸 왜 말했는지 잘 모르겠어.”
청루족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가지 질문이 있다.”
“으응.”
라온이 눈을 돌리자, 청루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젤 강이 탁해진 이후 한참 지나서 청루족이 공격적으로 됐다고 들었는데, 그건 어떻게 된 거지?”
“가, 강물의 변화와 청루족의 공격성 사이에 여, 연관이 없도록 일부러 시간을 끈 거야. 비어버린 시간 동안은 이 강의 해도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 종족에게 암초와 강물의 깊이를 알아오라고 시켰어.”
“그래서였군.”
선원들은 물이 탁해진 이후 청루족이 강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녔다고 했었다. 그건 틸러의 지시대로 강물 속 암초와 깊이를 알아보기 위한 작업이 분명했다.
“지금 틸러는 그 수신석이라는 물건으로 청루족을 조종해서 사람들을 공격하는 거겠지?”
“으응.”
“이유는 이곳을 먹어치우기 위해서겠고?”
“맞아. 가, 가젤 강 전체를 가진다고 했었어.”
“역시.”
라온이 피식 웃었다. 가젤 강 전체의 해도를 만들려고 한 걸 보면 틸러는 도란 마을만이 아니라, 이 강에 닿은 모든 영역을 남북맹 밑에 깔 생각이었을 거다.
‘지그하르트가 우습게 보이나 보네.’
떡 하니 자리 잡은 지그하르트 영역까지 노린 걸 보면 틸러의 눈에 지그하르트가 차지 않는 게 분명했다.
‘가르쳐 줘야겠어.’
시비를 걸어온 건 그쪽이 먼저이니, 지그하르트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확실히 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그, 그럼….”
청루족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일어섰다.
-끄으윽!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청루족의 이야기를 들은 라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라온! 저 녀석 이대로 보낼 것이냐! 네놈 잘 하는 오지랖을 부리란 말이다!
녀석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코를 훌쩍였다.
라온이 피식 웃었다.
‘마왕이라….’
청루족의 사연에 울적해하는 라스와 갓난아이와 다를 바 없는 저 어린 녀석의 심리를 이용하여 청루족을 노예로 삼은 틸러 중 누가 진짜 마왕인지 모르겠다.
-야이 자식아!
‘기다려봐.’
어린 청루족을 부르려다가 멈췄다.
저 녀석은 전생의 자신과 달리 이름조차 없이 살아왔다. 이쪽도, 저쪽도 끼지 못한 채 고독하게 산 등이 너무도 작고 초라해 보였다.
“이름이 없다고 했었지.”
라온의 나지막한 말에 청루족의 걸음이 멈췄다.
“틸러는 널 뭐라고 불렀지?”
“너라던가, 친구라고….”
청루족은 돌아보지 않은 채 어깨를 떨었다.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건가?”
“응.”
이름을 지어주지 않을 걸 보면 틸러는 이 아이를 이용할 생각만 했던 게 분명했다. 역겨움이 밀려왔다.
“너 스스로는?”
“불러주지 않는 이름은 의미가 없으니까.”
그 말에 가슴이 울렁였다.
라온이 몸을 일으켰다. 청루족 옆으로 다가가며 강을 보았다.
“가람이라는 말을 알아?”
“모, 몰라.”
“맑은 강이라는 뜻의 고어다.”
“맑은 강….”
“네 이름은 가람으로 하지.”
“어?”
청루족이 입을 떡 벌린 채 돌아보았다.
“틸러는 주제를 모르고 지그하르트의 영역을 침범하려 했으니, 내가 처리할 생각이다.”
라온이 손을 내밀었다. 전생에서 누구에게도 받지 못했던 도움의 손길을 먼저 내밀기로 마음먹었다.
“네가 도와라. 가람.”
“난….”
가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를 악물었다.
“난 인간을 믿지 않아!”
“그럼 왜 나한테 네 사연을 말했지? 인간은 왜 구했고.”
“그건….”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 동족에게 사람을 죽이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
“그러냐.”
라온이 옅게 웃었다. 저 말에 확실하게 마음이 정해졌다.
“틸러는 내가 처리하지. 넌 네 동족을 구해라.”
“안 돼. 틸러는 강해. 난 볼 수 있어.”
가람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네가 가진 마나보다 틸러가 가진 마나가 더 커.”
“그렇겠지.”
틸러는 마스터 중급에 닿기 직전인 괴물이다. 하급에 오른 자신보다 더 강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못 죽일 건 없다.
“걱정 마.”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검병을 쥐었다. 강물에 비친 어둑한 눈동자에 새빨간 뇌광이 튀었다.
“내가 쓰레기를 치우는 데는 일가견이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