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41화 (241/653)

제241화

라온은 홀로 강가로 나섰다. 조금 전에 일어난 전투들은 이미 잊은 듯 강물은 도도하게 흘러만 갔다.

“여전히 색이 짙군.”

가젤 강은 녹차잎을 뿌린 듯 청록색으로 일렁거렸다. 전생에 보았던 맑은 강과 같은 곳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탁했다.

‘청루족의 변화와는 관계없다고 했었지.’

혹시나 해서 선원들에게 물어보았지만, 강물이 짙어지고 난 후 한참 지나서야 청루족이 공격적으로 변했다고 했었다.

‘그래도 이상해.’

청루족은 누구보다 물에 대해 잘 아는 종족이다. 그들의 폭주와 물의 변화가 관계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말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청루족이 다른 아인종처럼 말을 하지 못하는 게 너무도 아쉬웠다.

라온은 잠시 강물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강물은 나중에 생각하자.’

청루족의 변화도, 강물의 색도 알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이곳에 머물며 차근차근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지금은 싸울 준비를 할 때야.’

도란 마을 사람과 가젤 강을 지나는 선원들이 틸러에게 빠진 가장 큰 이유는 물 위를 걷는 보법 때문이다.

‘뱃사람들은 물을 두려워하니까.’

강가와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모순적이게도 강과 바다를 두려워한다. 시기마다 제를 올리고, 안전을 기원하는 이유도 물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틸러가 칭송받은 이유도 그 때문이지.’

틸러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강을 짓밟으며 청루족을 몰아내고, 사람들을 구해냈다. 물의 신 같은 위용을 보였으니, 마을의 모두가 그의 이름을 부르짖고, 환호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라온은 거친 강을 평지처럼 누비던 틸러의 보법을 떠올리며 옅게 웃었다.

“이쪽도 못 할 건 없지.”

묘리는 다 빼냈으니까.

천천히 눈을 감고 불의 고리를 극성으로 공명시켰다. 고리와 고리가 부딪치며 울리는 장대한 흐름에 정신을 집중했다.

기본은 방출.

틸러의 보법은 검에서 오러를 일으키듯 발의 중심인 용천의 마나 회로에서 오러를 뿜어내 물 위로 부상하는 방식이다.

묘리만 알고 있다면 그리 어려운 방법이 아니었기에 땅에서 여러 차례 연습을 한 뒤 강가로 다가갔다.

“후우.”

라온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틸러가 보여준 오러의 흐름대로 글래시아를 운용하며 강물을 밟았다.

찰박.

발바닥에서 뿜어진 오러가 동심원의 파동을 일으키며 몸이 물 위로 떠오른다. 얕은 진흙을 밟는 듯한 끈적함과 부드러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윽!”

라온은 손발을 허우적대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생각보다….”

땅에서 연습했을 때와 달리 균형 잡기가 굉장히 어렵다. 두 발에서 운용되는 오러의 차이로 몸이 좌우로 휘청거렸다.

“이런!’

라온은 바람에 팔랑이는 갈대처럼 팔을 휘젓다가 결국 물 위로 자빠졌다.

“크으….”

육지로 걸어 나오며 한숨을 내쉬었다. 육체의 균형 그리고 두 발에서 운용하는 마나가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두 발로 물 위에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글래시아를 조금 더 끌어 올린 채 물 위를 밟았다. 이번에는 서 있지 않고, 걸어보았다.

치이익!

글래시아 때문에 수면에 얇은 얼음이 생성되며 천천히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가만히 서 있는 것보다 걷는 게 균형 잡기 더 쉬웠다.

라온은 아이가 걸음마를 하듯 한 발씩 천천히 걸으며, 물 위에서 설 수 있는 감각을 몸과 머리에 새겨넣었다.

두 시간가량 강물 위를 걷다 보니 조금씩 감이 잡힌다. 걸음을 멈추고 가젤 강 중간에 섰다.

“됐군.”

라온이 발을 딛고 있는 잔잔한 표면을 보며 씩 웃었다. 물에서 걸으며 몸에 감각을 때려 박은 덕분에 가만히 서 있는데도 땅 위를 밟은 듯 안정적이었다.

-아까 그 느끼한 면상의 보법을 따라 했군.

라스가 팔찌 위로 슬그머니 나오며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이지 지랄 맞은 능력이로다.

녀석은 서서히 수면을 얼리는 라온의 발을 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지금 건 시작일 뿐이야.”

-시작?

“걷는 게 아니라, 물 위에서 보법을 밟을 정도는 되어야 완성이라고 할 수 있지.”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다. 남북맹에게 빠진 사람들의 머리를 깨우려면 틸러보다 더 뛰어난 보법을 보여주어야 한다.

‘생각해보니 신기하네.’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본래 지그하르트의 이름에는 별 느낌이 없었다. 무시당해도, 칭송받아도 자신과는 상관없다 여겼다. 중요한 건 오직 별관 사람들과 광풍단뿐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어.’

막상 도란 마을 사람들이 지그하르트가 아니라, 남북맹과 틸러만 외치자 자존심이 상했다. 그들에게 지그하르트가 어떤 곳인지 제대로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마음에 지그하르트라는 가문이 생각보다 크게 박혀 있는 것 같았다.

-네놈은 물 위를 걷는 보법 따위 모르잖느냐.

‘가람보법이 있잖아.’

라온이 씩 웃으며 발을 앞으로 뻗었다.

-가람? 그건 네놈이 처음에 배운 허접한 보법일 텐데?

‘가람보법은 강물의 흐름을 본떠서 만든 보법이야. 여기서 사용하기엔 딱이지.’

가람 보법은 강물의 도도한 흐름을 담아낸 보법이다. 가장 많이 수련했고, 강물의 움직임과도 비슷했기에 응용하기 좋을 것 같았다.

라온은 가람 보법을 물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수정한 뒤 첫 번째 걸음 유화를 밟았다.

파앙!

물에 떠오른 꽃잎처럼 발걸음이 물길을 따라 흐른다. 강물을 거스르지 않기에 빠르면서도 안정적으로 나아갔다.

터엉!

두 번째 걸음 개류는 강물을 역행한다. 물길과 반대로 걷고 있음에도 속도가 줄지 않고 오히려 더 빨라진다.

그 이유는 하체와 오러. 안정적으로 균형을 잡아주는 두 다리와 고요한 흐름을 퍼뜨리는 글래시아의 기운이 강물의 결을 가르고 경쾌한 움직임을 이뤄냈다.

라온은 수정한 가람보법을 차례로 펼치며 가젤 강을 자유자재로 누볐다. 이미 익힌 보법을 응용했기 때문에 그리 긴 시간을 보내지 않았음에도 평생을 펼쳐온 듯 보법이 자연스러워졌다.

조금만 더 연습한다면 틸러와 같은 수준의 보법을 보여주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리고….”

라온이 힘을 주어 진각을 밟았다.

쩌저저저정!

구두에 찍힌 곳을 중심으로 막대한 냉기가 폭발하며 찰나의 순간에 물 위로 수십 개의 얼음 칼날로 이루어진 서리 조각이 돋아났다.

얼음꽃 뭉치 같기도 하고, 서리의 왕이 착용한 듯한 왕관 같기도 한 고귀한 모양새였다.

“괜찮네.”

이건 가람 보법이 아니라, 틸러에게 뽑아낸 분출의 묘리를 이용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보법이다. 상대를 제압하고, 공격하는 방식의 보법이라 물 위에서는 꽤 도움이 될 것이다.

“이름은….”

-호오!

새로운 보법의 이름을 생각하려 할 때 라스가 입맛을 다셨다.

-꽤 우아하구나. 본왕이 만든 얼음꽃 화관과 비슷한 모양새니라.

녀석은 물 위로 왕관처럼 돋아난 얼음 조각을 보며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야만인치고 나름 괜찮은 형태를 갖췄어. 특별히 본왕이 보법의 이름을 지어주마.

‘웬일이래?’

한동안 맛난 요리와 디저트를 먹어줬기 때문인지 요즘 라스는 꽤 협조적이었다.

-수중화가 좋겠구나.

‘물에서 피어난 꽃이라.’

강물 위로 얼음꽃이 피어나는 듯한 모습이라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여전히 꽃을 좋아하네.’

-취향을 존중해라. 싫으면 말고!

라스는 네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냐. 마음에 들어.’

라온은 피식 웃으며 라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늘도 얻은 게 많네.’

-또 무언가가 있는 것이냐?

‘분출 덕분에 발검술의 속도도 높일 수 있을 것 같아.’

틸러를 보고 깨달은 분출의 묘리를 이용한다면 새로운 검술의 완성도도 높아질 것 같았다. 삶 자체가 무학의 공부라고 조언했던 글렌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흥. 그래 봤자 본왕의 기술에 비하면 벼룩의….

라스가 코웃음을 칠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최초로 <보법>을 창안해내셨습니다.]

[칭호<어린 대종사>의 효과로 수중화의 능력이 강화됩니다.]

[<분노>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합니다.]

수중화를 만든 대가로 얻은 보상들이었다.

-아니이이이이!

강물처럼 잔잔하던 라스가 분노를 터트리며 괴성을 질렀다.

-고작 저런 보법 하나 만들었다고 이런 보상을 주는 게 어디 있단 말이냐! 누가 허락했다고!

‘네가 인정했잖아.’

-언제!

‘나름 괜찮은 형태라며 네가 이름도 지어줬잖아.’

-그거야 기본적으로 하는 인사치레지 않느냐! 네놈이 요새 음식을 잘 챙겨주니 본왕도 모르게 나온 영혼 없는 말!

라스는 여러 종족의 언어로‘안녕하세요’를 외쳤다.

‘시스템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지.’

라온은 능력치가 오른 희열에 미소를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챙겨주다니, 역시 라스는 끝없이 차오르는 꿀단지였다.

“다음에도 또 부탁해.”

라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등을 돌렸다.

-보, 본왕이 본체를 찾는 순간 저 시스템부터 깨부숴버릴 것이니라!

라온이 떠난 가젤 강 중앙에서 누구도 듣지 못할 마왕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무조건!

*     *      *

도란 마을에 돌아왔을 때 광풍단은 임시로 머무는 숙소 앞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다.

“어때?”

라온은 땀을 쓸어내리는 버렌의 옆으로 다가가 벽에 등을 기댔다.

“이방인이 된 느낌이다. 젊은 사람들은 반기지만,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다들 남북맹만 찾아. 완전히 선수를 뺏겼어.”

버렌이 인상을 찌푸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남북맹. 특히 틸러에 대한 호감도가 굉장히 높습니다. 물을 걷느니, 물을 조종하느니 하면서 칭송만 해요.”

크레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주먹 쥐고 싸우는 게 낫지. 눈 마주칠 때마다 떨떠름한 미소 짓는 걸 보면 짜증 난다고!”

마르타가 팔짱을 낀 채로 콧잔등을 찌푸렸다.

“아이스크림 가게도 없어.”

루난은 이번에 챙겨온 아이스크림을 모두 먹었는지, 어깨를 축 내렸다.

-허억!

라스는 그녀의 말에 연계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떡 벌렸다.

“단주님이랑 도리안은 어디 갔어?”

라온은 딱 둘만 빠져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 다 친화성이 좋다 보니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던데, 단주님은 촌장이랑 술을 마시고, 도리안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놀고 있지.”

“그래?”

둘 다 광풍단에서 사람 잘 사귀는 걸론 유명했기에 피식 웃었다.

“어쩔 거야? 계속 머물 거야?”

“더 정보를 모아야겠지만, 이번 일은 단순히 청루족의 폭주만이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벨가나 모린의 정보를 떠나 남북맹은 이 마을 사람들의 생각처럼 선한 자들이 아니다. 분명 그들과 부딪칠 일이 있을 것이다.

“조만간 힘쓸 일이 필요할 테니, 계속 수련해.”

라온이 제천검의 검병을 쥐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앞에서 남북맹 따위의 이름이 다시는 불리지 않도록.”

*     *      *

다음 날 저녁.

낡았지만 큼지막한 어선 한 척이 가젤 강을 따라 흐른다. 달이 밝고, 이곳저곳 화등이 켜져 있어 어선은 거침없이 어둑한 강을 갈랐다.

“오랜만에 만선이네!”

갑판을 지키던 갈색 머리 청년이 빙긋 웃으며 뒤를 돌았다. 그는 키 앞에 서 있는 벨가 옆으로 다가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배가 고기로 꽉 찼는데 표정이 왜 그래?”

“마을 일을 생각하면 답답하잖아.”

벨가가 키를 잡은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북맹 때문에?”

“그래.”

“보기에는 다 괜찮아 보이는데. 활기 넘치잖아.”

갈색 머리 청년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거 다 연기라고.”

벨가가 고개를 저었다.

“남북맹이 우리를 보호해주는 건 사실이잖아. 돈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갈색 머리 청년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마을 바로 옆이 지그하르트 영역이잖아. 놈들도 지그하르트와 부딪치기엔 부담되니까 우리까지 안 건드린 거라고.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남북맹 밑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 거 같아?”

벨가가 스쳐 지나가는 어둑한 강물을 가리켰다.

“가젤 강을 건널 때마다 돈을 뜯고, 고기를 잡을 때마다 또 돈을 뜯을 거야. 대놓고 수탈이 시작되어 저 강물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미래만 기다릴 거라고.”

“서, 설마 그렇게나….”

“지금 배에 가득 찬 고기 중에서 우리 손에 남을 건 한 줌도 안 될걸?”

거짓이 아니다. 남북맹이 속한 마을들은 모두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더러운 정도로 썩어 있다. 전부 돈만 밝히고 남북맹에 대해선 싫은 소리 한마디도 못 하는 독재 왕국 그 자체다.

“너나 마을의 어르신들은 놈들에게 속고 있는 거야.”

이번에 출항을 나가서 만난 친구에게 돈을 주며 얻어온 정보들이었기에 거짓일 수가 없었다.

마을 어른들은 이 좁은 세계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기에 모르지만, 남북맹은 절대 좋은 인간들이 아니다. 틸러라고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으으, 그리 말하니까 좀 무섭네.”

배 뒤에 있던 파란 머리 청년도 턱을 바르르 떨었다.

“근데 청루족은 왜 그렇게 된 걸까?”

“그것도 남북맹과 관계가 있을 거 같아.”

벨가가 어두운 물을 바라보며 눈매를 좁혔다.

“그것도?”

“내가 지그하르트에 지원 요청을 보내려고 할 때 기다렸다는 듯 남북맹이 나타나서 영웅이 됐잖아. 거기다 틸러 정도 되는 사람이 우리를 지키려고 계속 온다는 것도 말이 좀 안 되는… 어?”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잔잔하던 강물에서 시꺼멓게 물든 파도가 일어서고, 열 쌍의 붉은 눈이 번들거렸다.

“저, 저건….”

“아….”

여유있게 앉아 있던 사람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일어섰다.

뿌득.

벨가가 부러질 정도로 키를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     *      *

라온은 도란 마을에서 묵는 두 번째 날에도 광풍단과 함께 수련한 뒤 마을로 복귀했다. 리메르가 남아 있었기에 별걱정 없이 저녁에 돌아왔는데 마을은 불이 난 듯 분주한 상태였다.

“라, 라온님!”

어제 벨가와 함께 찾아왔던 모린이 발을 쩔뚝이며 뛰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큰일?”

“처, 청루족이 다시 찾아와 벨가의 어선을 습격했습니다. 지금 배가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제발….”

그는 친구들을 살려달라며 무릎을 꿇었다.

“저희 단주님은….”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으십니다!”

“하아….”

하여튼 이 인간은.

라온은 깊은 한숨을 뱉고서 오러를 끌어 올렸다.

“위치는 어딥니까.”

“어제 청루족이 나타났던 곳보다 더 아래입니다. 이 방향으로 가시면….”

“아, 거긴 제가 알아요!”

위치가 애매했는데 도리안이 어제 가봤다며 손을 들어 올렸다. 친구를 사귄다며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더니 이런 때 도움이 되었다.

“3조는 대기. 1조와 2조는 나와 함께 간다.”

“알겠습니다!”

“도리안 출발해.”

“옙!”

라온은 전력으로 뛰기 시작한 도리안을 따라 달렸다. 마을과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었기에 얼마 걸리지 않아 마을 사람들의 횃불을 볼 수 있었다.

“키이이익!”

“캬아아아!”

가젤 강 중앙에 큼지막한 어선이 반파되어 있었고, 청루족이 그 주변을 돌며 물보라를 일으키고 배를 깨부쉈다.

“으아아악!”

“사, 살려주세요!”

선원들은 가라앉는 배의 난간을 잡고 버텼는데, 배가 커서 다행이지 작았다면 이미 침몰해서 모두 죽었을 것이다.

“위, 위험합니다!”

물 위로 뛰어들려고 할 때 이미 와있던 촌장이 앞을 막아섰다.

“청루족은 물이 깊을수록 큰 힘을 발휘하는 종족입니다! 지금 헤엄쳐서 가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이번 일은 남북맹에 맡기시지요. 호출했으니, 곧 와주실 겁니다.”

“맞습니다. 남북맹 같은 전선이 있지 않는 이상 물속의 청루족을 상대하긴 불가능합니다.”

“틸러님처럼 물 위를 걷지 못하는 이상 물속에 뛰어드는 건 자살 행위라구요!”

촌장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남북맹이 필요하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고오오오!

라온이 밟고 있는 물에 젖은 모래에서 푸른 냉기의 아지랑이가 타올랐다.

“아…!”

“이, 이게 무슨….”

그 서늘하면서도 웅대한 기파에 사람들이 저절로 갈라졌다.

“남북맹. 남북맹.”

그 이름을 말하며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남북맹 따위는 지그하르트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아, 아니….”

“저희는 그런 뜻이 아니라!”

“직접 보여드리죠.”

라온은 당당한 걸음으로 강물 위로 뛰어들었다.

처어엉!

두 발로 물을 내리찍었음에도 라온의 몸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풀잎처럼 잔잔하게 물 위에 떠 올랐다.

“허억!”

“무, 물에 떴어!”

“그럼 라온 님도 틸러 님 같은…”

“아냐! 달라! 라온 님은 물을 타는 느낌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물 위에 뜬 라온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거기서 지켜보시죠.”

라온은 강물 위에서 사람들을 굽어보며 차게 웃었다.

“지그하르트가 어떤 곳인지.”

그 말을 남기고 가람보법을 밟았다. 어제보다 더 매끄러워진 발걸음이 수면을 얼리며 빠르게 나아간다. 라온은 지금 이 순간에도 무학의 경지를 높이며 보법을 다듬었다.

파도를 탄 돌고래처럼 물결을 타고 나아가 순식간에 강물의 중심에 이르렀다.

터엉!

물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단전에서 일어난 글래시아의 냉기를 우측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끌어 내린 뒤 발에 응축된 막대한 힘을 뿜어냈다.

콰과과과과!

수중화가 수면 위로 폭발하며 강물의 중심에 거대한 왕관이 치솟았다.

“키아아악!”

“캬아아아!”

배와 사람을 공격하려던 청루족들은 수중화의 왕관에 손과 발이 묶여 비명만 질렀다.

“흐어억!”

“어헉!”

배의 난간을 잡고 있던 선원들은 중앙의 둥글게 돋아난 얼음 조각에 몸을 맡긴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셋?”

라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얼음에 선 사람은 셋이다. 어제 만났던 벨가가 보이지 않았다.

기감을 펼치자 우측에서 사람의 옅은 호흡과 청루족의 다급한 숨소리가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우측에서 벨가가 수영하며 물살을 헤치고 있었고, 그 뒤를 두 명의 청루족이 쫓고 있었다.

촤아아앙!

라온이 다시 보법을 밟았다. 더 완성도가 높아진 가람보법으로 청루족에게 짓쳐 들어 만화공을 일으켰다.

“키아악!”

장대한 열기의 폭풍에 청루족들은 피부가 녹아내린 채 물속으로 도망쳤다.

“벨가님! 이제 괜찮…어?”

벨가에게 손을 뻗으려고 했지만, 그는 기절한 듯 눈을 감고 있었고, 그 밑으로 물속에 몸을 숨긴 작은 청루족이 보였다.

“쯧!”

라온이 제천검을 뽑았다. 그대로 내리찍으려고 할 때 청루족이 벨가를 놓고 손을 마구 저었다.

“아니야! 난!”

어눌하지만 확실한 인간의 언어에 손아귀에 힘이 빠졌다.

“말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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