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0화
전선의 등장과 동시에 청루족에게 공격받던 상선의 용골이 부러진다. 배 자체가 반으로 갈라져 물속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사, 살려줘!”
“제발! 저 괴물 놈들 좀!”
침몰하는 상선에 매달린 선원들이 악을 질렀다.
치이이익!
라온이 글래시아를 운용하며 다시 강물에 손을 넣었을 때 남북맹의 전선에서 적색 물체들이 쏟아졌다.
길고, 동그란 물체들은 눈이 달린 듯 물에 빠진 선원들 앞에 정확히 떨어졌다.
“허억! 허억!”
“사, 살았다.”
특별한 재료로 만든 물건들인지 선원들의 체중에 눌리고 있음에도 물이 가라앉지 않았다.
“얘들아!”
전선의 갑판 위에서 오러를 가득 머금은 웅대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조리 쓸어버려!”
그 말과 함께 목소리의 주인이 강물 위로 뛰어내린다. 등 뒤까지 내려오는 보라색 머리칼에, 이목구비는 부드러우면서 뚜렷했고, 피부는 백지처럼 맑았다. 귀공자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낸 듯한 젊은 무인이었다.
“우와아아아!”
“틸러 님이다!”
“우린 살았어!”
선원들은 물에서 간신히 떠오른 상태임에도 남자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를 질렀다.
“흐읍!”
틸러라 불린 남자는 물 위를 땅처럼 밟으며 내달렸다. 강물에서 일렁이는 마나의 흐름을 보니 수면에서 달릴 수 있게 만들어진 보법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굉장하군.’
라온은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며 남자의 보법이 이뤄내는 신기를 자세히 관찰했다.
치이잉!
단숨에 청루족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한 남자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창으로 강물의 중앙을 찔렀다.
퍼어어어엉!
창극에 어린 푸른 강기가 나선으로 회전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끼이이이익!”
“키에에에에!”
청루족들은 그 거대한 파동을 견디지 못하고 폭풍에 휩싸인 나뭇잎처럼 휘청거렸다.
“우와아아아!”
“몬스터와 다를 거 없는 짐승들이다!”
“전부 죽여버려!”
갑판 위에 있던 무인들이 청루족을 향해 검기와 창기를 날리고, 투창과 작살을 쏘아냈다.
“키이이!”
“캬아아!”
청루족은 남북맹 무인들의 강대한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허겁지겁 뒤로 물러섰다. 검기와 창기에 얻어맞은 피부에서 녹색 핏물이 흘러내렸다.
“크어어어!”
청루족 중 가장 큰 덩치를 가진 자가 두 손을 모은 채 기이한 울음을 터트리자, 강물이 거꾸로 된 폭포처럼 치솟아 앞을 가리고, 푸른색 운무가 피어났다.
“캬아악!”
청루족들은 그 혼란스러운 틈을 놓치지 않고, 강물 속으로 잠수하여 사라졌다.
“어딜!”
틸러가 코웃음을 치며 요동치는 물을 박찼다. 창을 역수로 잡고 물고기를 잡듯 강물 아래로 내려찍었다.
퍼어어엉!
강물이 반원 형태로 깎이며 그 아래에 있던 어리고 작은 청루족이 걸레짝이 되어 창에 박혔다.
“전부 보내줄 수는 없지.”
그는 창을 휘돌려 어린 청루족의 몸을 반으로 갈라버리고서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우와아아아아!”
“역시 우리 대장이라니까!”
“더러운 괴물 새끼들!”
전선 위에 있던 남북맹 무인들은 절명한 채 녹색 핏물을 쏟아내는 청루족을 보며 낄낄거렸다.
“으허헉!”
“사, 살았어.”
“가, 감사합니다!”
“틸러 님!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살아남은 선원들은 물에 잠긴 채로 틸러에게 고개를 숙였다.
“별것도 아닌데 뭘.”
틸러는 빙긋 웃고서 창을 거꾸로 돌려 노를 젓듯 휘둘렀다.
화아아아아!
파도가 부드럽게 일어서며 선원들이 강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아, 들어본 적 있어.”
리메르가 틸러라 불린 남자를 보며 턱을 긁적였다.
“틸러 세이튼. 남북맹주의 다섯 번째 제자로 한참 전에 마스터에 오른 무인이지. 용모도 뛰어나고, 많은 협행을 해서 파랑협이라 불린다고 하더군.”
“저도 들어봤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메르의 말대로 틸러는 남북맹에 속해있으면서도 영웅적인 면모를 많이 보여 육황에서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협객이었다.
“파랑협?”
마르타가 틸러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리 봐도 느끼하고 재수 없는 배신자 상인데?”
“헛소리.”
버렌이 마르타 옆으로 붙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은 남북맹에 속해있지만 많은 협행과 선행을 쌓은 무인이다. 그저 그런 도적과는 결이 달라.”
“오, 이제 도적놈도 옹호하셔?”
“옹호가 아니라 사실을 말할 뿐이다.”
두 사람은 여느 때처럼 서로 으르렁거렸다.
“존잘은 아냐.”
루난은 라온과 틸러를 본 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칠 거죠?]
라온은 파도를 타고 다가오는 틸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리메르에게 오러 메시지를 보냈다.
[사람을 구해오는데 칼을 날릴 순 없잖아. 지금 치면 전쟁 나지.]
리메르가 답을 해주며 피식 웃었다.
틸러는 물에 빠진 선원을 먼저 꺼내주고, 그들의 부상까지 확인한 뒤에 이쪽으로 다가왔다.
“오?”
그는 광풍단 제복에 박힌 불타는 검 문양을 보고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지그하르트 분들이시군요!”
틸러는 한눈에 지그하르트를 알아봤음에도 경계 따위는 없다는 듯 창을 거꾸로 돌렸다.
그의 눈동자가 언덕 위에서 떨어지는 구슬처럼 빠르게 구른다. 루난과 마르타, 그리고 라온과 리메르에게서만 아주 잠깐 멈췄다.
“서, 설마 지그하르트의 광검이십니까?”
“맞는데.”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틸러는 화색을 띤 채 고개를 숙였다.
“영광?”
“예! 주군을 지키는 진정한 호위이자, 협사라는 말을 귀에 못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정말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정말?”
“예! 저는 리메르 님의 활약 중 검은산 대첩을……”
만나고 싶었다는 게 정말인지 틸러는 리메르의 활약상을 줄줄이 읊었다.
“크으! 뭘 좀 아는 친구네!”
리메르는 기분이 좋아진 듯 활짝 웃으며 틸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이쪽은 설화검협이시군요.”
틸러가 주먹으로 창대를 쳤다.
“저도 알고 있는 겁니까?”
“어릴 적 은인을 구하기 위해 사지로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젊은 영웅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가 벤 건 남북맹의 동맹인 에덴인데, 그런 말을 해도 괜찮으신 겁니까?”
라온은 차분한 눈빛으로 틸러의 푸른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동맹이라…. 사실 동맹이라는 말도 우습죠. 각자 가진 뜻이 다른데.”
틸러가 은은한 미소를 피워냈다.
“같은 곳에 살아도 사람이 사는 방식은 모두가 다르지 않습니까. 오마에서도 그리고 남북맹에서도 모두 생각이 같지는 않습니다.”
“음! 맞는 말이야.”
리메르는 본인을 띄워준 틸러가 마음에 들었는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라온이 틸러가 타고 온 전선을 보며 물었다.
“도란 마을에 지원 요청을 받아서 하루에 한 번씩 순찰하고 있습니다.”
틸러는 선원들을 챙기는 도란 마을 사람들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광풍단 분들은 어떻게 오신 거죠? 지나가다가 들릴 만한 곳은 아닐 텐데요.”
“저희도 도란 마을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왔습니다.”
“호오….”
유수처럼 흐르던 틸러의 말이 잠시 끊겼다.
“누가. 아, 하긴 조금만 더 가면 지그하르트 영역이니 그럴 만하네요. 다만 이번엔 저희가 좀 빨랐던 모양입니다.”
그는 기분이 나쁘지 않게 농담조로 말을 건네며 도란 마을 사람들을 보았다.
선원이나, 도란 마을의 구조대 모두가 틸러와 남북맹 무인들에게 선망의 눈빛을 보냈다. 영웅을 마주한 듯한 모습이었다.
“한동안은 자주 뵙겠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이쪽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틸러는 작게 고개를 숙이고서 다시 강물을 밟았다.
“어? 이대로 가시는 겁니까?”
“아직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는데….”
“틸러 님!”
“별일도 아니니,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선원들이 손을 들었지만 틸러는 부드럽게 웃으며 물러섰다. 수상 보법을 운용하여 날아가듯 전선에 복귀했다.
“돌아가자! 이것들아!”
“예!”
그들은 어떠한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미련 없이 가젤 강을 떠났다.
“꽤 괜찮은 녀석인데?”
리메르는 떠나는 전함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듣던 대로의 사람이군요.”
버렌도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난 영 별론데. 얼굴에 마요네즈를 칠한 것 같잖아. 저런 놈들은 뱃속에 구렁이를 키우고 있다고.”
“맞아. 반질거려.”
마르타와 루난은 거의 처음으로 마음이 맞았다.
‘청루족은 다 가긴 한 건가.’
라온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분노의 마안>을 운용했다. 다 도망쳤는지 더 이상 청루족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런 공격을 당했으니……음?’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할 때 가젤 강 깊은 곳에 홀로 있는 청루족이 보였다. 조금 전에 본 청루족보다 갈퀴와 지느러미가 작아 좀 더 인간처럼 생겼고, 눈빛은 예전 가젤 강을 보는 듯 맑았다. 그는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더 깊은 물 속으로 사라졌다.
‘신기하군.’
방금 본 청루족은 예전에 본 순수한 느낌과도, 조금 전에 본 몬스터 같은 청루족과도 달랐다. 뭐랄까. 사람과 눈을 마주친 듯한 기분이었다.
“정말 매일 와주시는군.”
“봐봐. 마을은 틸러 님에게 맡겨야 한다니까.”
“그러니까! 대가도 없이 구해주시잖아. 남북맹은 몰라도 틸러님은 믿을 수 있어.”
마을 사람들은 틸러가 사라진 지 한참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의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라온은 들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단단히 빠졌군.’
선원과 마을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이곳은 이미 남북맹. 아니, 틸러의 영역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쉽지 않겠는데.’
마을에 지그하르트 깃발을 세우긴 그리 꽤 험난할 것 같았다.
‘그래도 여기 온 이득은 있지만.’
라온은 조금 전 틸러가 보여준 수상 보법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좋은 걸 배웠어.
* * *
라온과 광풍단은 복귀한 뒤 촌장을 찾아갔다. 촌장은 나이가 지긋함에도 체구가 건장했다. 손을 보니, 지금도 힘쓰는 일을 하는 것 같았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촌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였지만,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떨떠름함이 어려 있었다.
“일단 상황부터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라온이 마주 인사하고서 물었다. 리메르는 이런 일을 귀찮아하는 사람이다 보니 직접 움직여야 했다.
“음, 몇 달 전부터 청루족이 거주지를 벗어나 가젤 강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피해를 주진 않아서 별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일이 터진 건 두 달 전부터였습니다.”
촌장이 한숨을 내쉬고서 말을 이었다.
“평소라면 뱃소리만 들어도 숨어버리는 청루족이 갑자기 어선을 공격했습니다. 청루족을 아는 사람이라면 믿기 힘든 일이지만 제 눈으로 직접 봤죠.”
“음……”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메르가 임무 이야기를 할 때 들었던 내용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격성이 짙어지던 청루족은 배를 침몰시키고, 사람까지 노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아까 보신 큰 상선까지 노리고 있죠.”
“그들이 배와 사람을 공격하는 이유가 뭐죠?”
“전혀 모르겠습니다.”
촌장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청루족은 다른 아인종과 달리 인간의 언어를 못 합니다. 저희와 오랜 시간 봐왔음에도 거의 친교가 없어서 여러모로 골치 아픈 상황이었죠.”
그가 말아쥔 주먹을 떨었다.
“청루족의 습격이 계속되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우연히 수로를 지나던 남북맹 무인분들이 나서주셨습니다. 그분들은 물에서는 무적이라는 청루족을 단숨에 무찌르고 물에 빠진 사람들까지 구해주셨죠.”
촌장은 남북맹이라는 단어를 꺼내자마자 미소를 피워냈다.
“틸러님은 가끔 순찰이라도 해달라는 저희의 부탁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시고, 매일매일 가젤 강을 돌아보고 가십니다. 오늘 역시 청루족이 공격을 해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찾아와서 선원을 구해주셨죠. 그래서 말인데….”
그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느릿하게 입을 뗐다.
“이곳까지 와주신 지그하르트 검사님들께는 저, 정말 죄송하지만, 저희는 마을의 보호를 남북맹에게 맡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촌장은 입술을 떨면서도 할 말을 끝까지 마쳤다.
“그렇군요.”
예상했던 바였기에 라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의 모두는 남북맹의 틸러에게 빠져 있는 상태였다.
‘더 가깝기도 하고.’
이 마을에서 가까운 건 지그하르트가 아니라, 남북맹이다. 더 가깝고 자주 찾아와줄 곳을 찾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저, 저도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얼마 전에 온 지그하르트 조사원분들도 그렇고, 누구에게 요청을 받아서 이곳에 오신 건지….”
“그건….”
“제가 요청 드렸습니다.”
라온이 대답을 하려 할 때 문밖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활짝 열리고, 청년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한 명은 체격이 장수처럼 건장했고, 다른 쪽은 말랐지만, 눈빛이 깨끗했다.
“벨가! 모린! 너희가 왜!”
촌장이 인상을 찡그렸지만, 청년들은 신경 쓰지 않고 라온과 리메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이 저희를 불렀다고 하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벨가라 불린 덩치 큰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북맹과 좋은 관계가 되어가는 듯한데 우릴 왜 불렀지?”
리메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베, 벨가! 이 녀석!”
“지금은 친절한 이웃인 척하고 있지만 그들의 근본은 도적입니다. 가진 것을 빼앗고, 생명을 우습게 여기지요.”
벨가는 촌장의 만류를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라온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소리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이 공간에 기막을 설치했다.
“산적은 길이라도 닦아놓지, 수적은 있는 물길에 배를 띄워 돈만 받아갑니다. 틸러라고 해도 다를 건 없죠. 영웅인 척하지만, 수적의 행동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전 그들을 믿을 수 없어요.”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분은 우리를 수없이 구해주시고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다!”
“이 마을 전체를 먹어 치우면 그들의 영역에 가젤 강까지 들어갑니다. 손해보다 이득이 훨씬 큰데, 그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을 겁니다!”
“이 녀석이 진짜!”
“거기다 청루족이 변모하자마자 남북맹이 움직인 게 이상……”
“벨가! 모린!”
촌장이 방이 흔들릴 정도로 악을 지르자, 벨가와 모린이 움찔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말조심해라. 네 말 한마디에 이 마을이 모조리 타버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애들이 낄 일이 아니다! 청루족도 물러갔으니, 예정대로 출항이나 해라! 모린 너도 가서 도와주고!”
“윽….”
벨가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잠시 라온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허허허! 아직 젊어서 그렇습니다.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촌장은 어색하게 웃고서 관자놀이로 떨어지는 땀을 쓸어내렸다.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원래 젊은 녀석들은 까부는 법이니까.”
리메르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여기에 유명한 술이 있지 않습니까.”
“술이라면 백홍주 말씀이십니까?”
“아, 그거! 그것 좀 맛볼 수 있겠습니까? 멀리서 왔더니, 술이 좀 고파서.”
“어, 얼마든지요.”
그는 임무 따윈 관심 없는 척하며 술을 부탁했다. 동시에 손을 까딱인다. 나가서 그 청년들과 이야기를 해보라는 뜻 같았다.
라온은 조용히 일어나서 촌장의 방을 나갔다. 마을 외곽 쪽으로 조금 전에 본 두 청년이 걸어가고 있었다. 체구가 작은 쪽이 다리를 절고 있어서 그리 멀리 가지 못했다.
“조금 전에 뵈었죠.”
라온은 단숨에 그들을 따라가 앞을 막아섰다.
“허억!”
“서, 설화검협!”
두 사람은 라온을 알고 있었는지 방에서와 달리 놀란 티를 숨기지 않았다.
“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벨가라고 합니다!”
“모린입니다.”
벨가는 힘 있게 모린은 침착하게 고개를 꾸벅였다.
“궁금한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예?”
“조금 전에 남북맹과 청루족이 이상하다고 말한 건 무슨 뜻이죠?”
“잠시 이쪽으로.”
벨가는 주변 눈치를 보다가 좁은 골목으로 안내했다. 나무 벽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래 남북맹은 이쪽 수로로 다니지 않습니다. 그런데 청루족의 공격성이 극에 달해서 사람을 공격했을 때 짜 맞춘 듯 나타나서 영웅이 되었죠.”
벨가가 인상을 찌푸렸다.
“우연치고는 말이 안 될 정도로 타이밍이 좋아요.”
“맞습니다. 사람이 산 건 다행이지만 시기가 너무 공교롭습니다.”
모린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남북맹이 물길을 잘 알아도, 사람이 죽을 순간을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음….”
라온이 입맛을 다셨다. 맞는 말이지만, 그건 증거가 될 수 없었다.
“하나 더. 지금까지 저희 마을은 남북맹의 힘이 미치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그 도적놈을 너무 좋게만 보고 있습니다.”
벨가가 한숨을 내쉬었다.
“몇 년 전 남북맹 산하가 된 마을에 저희 친구가 있습니다. 처음엔 안전해졌다며 행복하다고 했는데, 몇 년 지난 사이에 사람 자체가 바뀌었습니다. 오직 돈만 쫓고 여유가 없어졌어요.”
“이유는 말하지 않지만 남북맹 이야기가 나오면 기겁하는 걸 보면 분명 놈들이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합니다.”
모린도 남북맹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른들은 지그하르트 영역이 바로 옆이라 남북맹이 저희 마을을 건드리지 못했다는 걸 잊은 채 그 도적들을 긍정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설득시킬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두 사람은 제발 부탁드린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저는….”
라온이 대답을 할 때 마을 정문 쪽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었다.
“벨가!”
“빨리 좀 와라!”
벨가와 같이 어업을 나가는 동료들인 것 같았다.
“가세요. 이야기는 나중에 계속하죠.”
“예! 생각을 정리한 뒤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두 사람은 다시 고개를 꾸벅이고 마을 밖으로 달려갔다.
“남북맹의 틸러라.”
틸러 같은 놈들은 뱃속에 뱀을 숨기고 있다는 마르타의 말이 생각났다. 의외로 그녀의 관상학은 나름 잘 맞는 구석이 있었다.
‘그게 정말일지도 모르겠군.’
벨가와 모린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틸러의 반응이 조금 이상한 것도 사실이다.
청루족만이 아니라, 남북맹과의 전투를 대비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라온은 틸러가 보여주었던 보법의 파동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물 위를 한 번 걸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