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9화
라온이 턱을 치켜올린 리메르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지금 여기서 검술을 펼쳐보란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그는 당장 오라는 듯 네 손가락을 모아 까딱였다.
“도움을 주신다니, 일단 감사합니다. 하지만….”
라온이 손에 든 제천검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말씀드렸듯 이 검술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힘 조절이 안 됩니다.”
조금 전 사용한 음검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뒤에 있는 광풍단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첫 번째 검술은 두 번째보다 운용하기 어려워 위험할 수도 있었다.
“어? 지금 내 걱정을 해주는 거야?”
리메르가 눈썹을 찡그리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 몰라? 나 모르세요? 나 리메르에요! 나라고 나! 나예요!”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1초도 되지 않는 순간에 나라는 말을 여섯 번 뱉었다.
“음….”
라온이 입맛을 다셨다.
‘강한 거야 당연히 알지. 그런데….’
믿음이 안 간다고.
아직 리메르를 따라잡으려면 멀었다. 검계현신을 사용한 그를 어떻게 꺾어야 할지 지금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다만 평소 행실이 워낙 거렁뱅이처럼 보이다 보니 신뢰가 잘 가지 않았다.
“내가 원래 보는 눈이 있잖아. 걱정하지 말고 덤벼. 뭘 살리고, 뭘 죽여야 할지 말해줄 테니까.”
리메르가 부드럽게 목을 돌리고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너희들도 잘 봐둬. 이렇게 가까이에서 라온의 검을 보는 건 행운이니까. 하나하나 다 분석하고 뽑아먹을 생각해.”
그는 뒤에 있는 광풍단원에게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라며 씩 웃었다.
“예!”
“알겠습니다!”
광풍단원들은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우르르 앉아 시선을 집중했다. 당황하다가 흥분으로 눈빛이 반짝이는 걸 보니, 역시 검사들이었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가는 숨을 뱉어낸 후 제천검을 검집에 넣었다.
‘할 거면 제대로 해야겠지.’
지금 운용하는 검술은 속도로 적을 제압하는 기존의 발검술과 다르다. 소리와 환상을 조화시켜 적의 숨통을 갈라버리는 새로운 형식의 발검술이기에 적의 행동방식을 잘 파악해야 했다.
“후우.”
생각을 정리한 라온이 눈을 감았다가 뜨며 호흡을 골랐다. 붉은 달이 비추는 호수처럼 잔잔한 눈빛으로 검병을 쥐었다.
“갑니다.”
* * *
리메르는 검을 쥔 라온을 보며 옅은 미소를 흘렸다.
‘대충 예상이 가네.’
라온은 환검과 음검을 이용한 발검술을 만든다고 했다. 그 전에 보여준 검술과 지금까지의 수련 방식을 생각해보면 어떤 검술일지는 뻔히 보였다.
‘소리로 전정기관에 장애를 일으킨 뒤 환검으로 급소를 노리겠지.’
고수는 소리가 신경계에 파고들기 전에 차단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라온은 조금 전처럼 신경을 끊는 방식이 아니라, 소리로 전정기관을 자극한 뒤에 환검으로 몇 곳의 급소를 동시에 노릴 것이다.
‘걱정해줄 필요 없으니 제대로 와라.’
리메르가 천천히 오러를 운용하며 입맛을 다셨다.
‘눈빛 좋고.’
라온의 눈빛은 적을 노리는 듯 섬뜩했다. 할 때는 제대로 하는 성격이라 참으로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다.
집중을 끝냈는지 라온의 손이 움직인다. 제천검을 가볍게 쥐고 뻗어낸다. 제대로 듣기 위해서 귀를 기울였다. 크게 터질 검명을 예상했지만, 극히 작고 어린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검명이 일렁였다.
카드드득!
그 기괴한 소리가 귓가에 닿은 순간 전신의 털이 곤두섰다. 가라앉은 심장이 마구잡이로 고동쳤다.
‘빨라.’
소리에 담긴 오러가 귓속을 파고든다. 마스터 수준이 아니라면 방비하기 어려울 정도로 속도. 이전에 들었던 검명보다 소리를 작았지만, 빠르기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건….’
리메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전정기관이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다. 청각이 줄어들었다. 소리 자체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적의 청각을 줄이고, 후속타를 날리는 건가?’
놀라운 방식의 음검이었지만, 이 정도로는 고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리메르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쏘아진 라온의 환검을 굽어보았다.
치이이잉!
제천검의 은빛 칼날이 목을 노리고 들어온다. 환검이 아니라, 쾌검을 담은 듯 조금의 변화나 환상도 없이 그대로 쏘아져 왔다.
‘실수한… 아!’
리메르가 눈을 부릅떴다. 목을 노리는 제천검의 그림자 속에 심장을 노리는 진짜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
치이이잉!
심장을 그대로 뚫어버릴 듯한 예리한 검격에 등골 사이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크으!”
리메르가 운용하던 오러를 단숨에 폭발시켜 검을 내쳤다.
쩌어어어엉!
강대한 충격파가 터지고, 라온이 종잇장처럼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으음….”
라온이 검을 땅에 박아넣은 인상을 찡그렸다.
“좀 과하셨는데요.”
“너무 놀라서.”
헛바람을 흘리는 리메르의 나른한 표정에는 확연한 경악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다치진 않았잖아.”
“그건 그렇습니다.”
라온이 가뿐하게 몸을 일으켰다.
“나도 속았어.”
리메르가 감탄한 눈동자로 입맛을 다셨다.
“검명이 죽인 게 청각만이 아니었다니.”
라온이 검을 뽑으면서 일으킨 검명은 단순히 청각만 죽인 게 아니라, 시각과 후각, 촉감 그리고 기감마저 가라앉혔다.
‘그래서 반응이 늦은 거야.’
라온의 환검이 뛰어난 것도 있었지만, 찰나의 순간 감각을 모두 죽여서 환검을 진짜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고수라고 해도 반응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내 상상을 넘었어.”
리메르가 히죽 웃으며 박수를 쳤다.
“정말 미친 검술을 만들어냈구나.”
이런 정신 나간 검술을 만든 게 18살짜리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라온은 단순한 천재가 아니라, 대종사의 기질을 가진 검의 괴물이었다.
다만 이런 무지막지한 검술을 펼친 라온의 눈빛은 담담했다.
“단주님.”
그는 제천검을 납검한 뒤 리메르에게 다가왔다.
“이 검을 어떻게 완성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까?”
“흐음….”
리메르는 검을 휘둘리며 생각을 정리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첫 번째는 소리.”
“소리?”
“네가 검을 뽑을 때 터진 짐승 소리에서 위화감을 느꼈어. 마스터 중급. 아니, 하급만 되어도 그 소리를 경계할 거야.”
라온의 검을 제대로 보기 위해 일부러 그 소리를 들었지만, 고수라면 그 이질적인 소리를 경계할 게 분명했다.
“진짜 발검술의 고수는 소리 없이 검을 뽑지.”
리메르가 찰나의 순간 검을 뽑았다. 자그마한 울림도 없이 뽑힌 칼날이 라온의 목 앞에 서 있었다.
“이런 식으로 소리를 아예 죽이면 상대도 정말 발검술이라 생각하여 속도에만 집중할 거야.”
“하지만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하피는 마나를 이용한 초음파로 사람의 움직임을 막지.”
그는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며 말을 이었다.
“소리를 죽인 채 상대의 감각을 죽이는 음검을 사용한다는 건 굉장히 어렵겠지만, 하피처럼 마나의 힘을 빌린다면 분명 가능할 거다.”
“소리라….”
라온은 무언가가 떠오른 듯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는 환검.”
리메르가 검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쾌검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빠르고, 환검의 그림자에 진짜 칼날을 숨기는 건 좋아.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시험을 보여주듯 검격을 쏘아냈다. 바람을 담은 칼날이 빛살이 되어 뻗어 나갔다.
“속도를 더 높여야 하고, 환검에서 진짜 검이 분리되는 시간도 늦춰야 해.”
“환검에서 진검이 분리되는 시간을 더 늘리라는 거군요.”
“그래. 환검의 분리를 조금만 더 늦추면 알아도 피하기 힘든 검술이 될 거다.”
“알겠습니다.”
라온은 그 말을 기억하려는 듯 제천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발검술이 혁신적인 건 맞지만 무조건 통하지는 않아. 하수는 어렵지 않게 죽이겠지만 동급만 되어도 피할 수 있을 거다.”
“그렇겠죠.”
“다만 소리, 속도 그리고 환검의 지연까지 모두 완벽해진다면….”
리메르는 진중한 눈빛으로 경쾌한 미소를 지었다.
“네 동급은 물론이고, 마스터 중급도 일검에 벨 수 있을 거다.”
* * *
“이해 안 된 사람?”
조언을 끝낸 리메르는 광풍단원을 쭉 돌아보았다. 버렌이나 마르타, 루난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전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럼 오랜만에 본업으로 돌아가서 이 리메르 님이 설명해주도록 하지.”
그는 키득거리며 광풍단원 앞에 다가가 라온이 어떤 방식으로 검을 운용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라온은 검사들에게 검의 묘리를 설명해주는 리메르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소리와 속도 그리고 지연이라….’
보여주길 잘했군.
리메르는 한 번 봐놓고 이전부터 다 알고 있던 것처럼 단점을 꼭 집었다. 역시나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다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아.’
그의 조언 중 가장 어려운 건 소리지만, 그건 해결할 방법이 있었다.
‘전생의 기억.’
암살자로 평생을 살았기에 소리를 죽이는 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연구와 연습이 많이 필요하겠지만, 그림자 무학의 구결을 섞으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재밌겠어.”
바닥을 다지고 토대를 다졌으니, 이제 그대로 쌓아 올리기만 하면 된다. 두 검술이 발전할 모습이 기대되어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흐음.
라스가 입맛을 다시며 팔찌 위로 올라왔다.
-귀때기가 일을 할 때가 다 있다니, 신기하구나.
녀석은 리메르의 등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게.’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리메르가 평소엔 거렁뱅이지만, 가끔 이런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기에 미워할 수가 없었다.
“라온!”
발검 수련을 하려고 할 때 리메르가 다가왔다. 설명이 끝났는지 검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토론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말 안 한 게 하나 있더라고.”
“어떤 거죠?”
이번에는 어떤 조언일지를 기대하며 귀를 기울였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건 상상을 벗어난 단어였다.
“수업료.”
“예?”
“이런 굉장한 조언을 들었으면 그에 합당한 수업료가 있어야지.”
“수업료가 있다는 말은 안 하셨는데요.”
“없다는 말도 안 했잖아.”
그는 손을 내밀며 히죽 웃었다.
“너한테는 이렇게라도 빼 먹어야지. 수업료 주십쇼.”
“하아….”
라온은 입매를 길게 빼고,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 거렁뱅이 엘프는….’
* * *
짧은 수업 이후 리메르가 광풍단을 이끌었다.
본래 그의 일이지만, 워낙에 농땡이만 부려서 그런지 고맙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런 게 좋지 않은 학습효과인 것 같았다.
어쨌든 리메르가 나름 일을 해준 덕분에 검술 수련을 할 시간을 벌었다.
이동할 때는 가장 뒤에서 발검술의 소리를 줄이거나, 늘리는 방법을 연구했고, 휴식 시간에는 직접 검을 뽑아 쾌검을 단련했으며, 밤에는 불침번을 서며 상상 속에서 환검을 더 완벽하게 펼칠 궁리를 했다.
하루 종일. 아니, 이 여정 자체가 검술 수련의 일환인 듯 음검과 환검, 쾌검을 꾸준히 단련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인 가젤 강 인근에 도착하게 되었다.
“응?”
“여기 가젤 강 맞아?”
“듣던 것과는 조금 다른데요?”
“마셔도 될 정도로 맑다고 들었는데….”
광풍단원들은 짙은 청록색 강물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라온이 안이 보이지 않는 어둑한 가젤 강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색이 변했어.’
예전 이 근처에 들렸을 때 강물은 밑의 물고기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맑았는데 지금 코앞조차 비치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다.
“청루족만이 아니라, 강물에도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
리메르가 인상을 찌푸리고 말고삐를 쥐었다.
“빨리 움직이자. 저 앞이 도란 마을이니까.”
그의 뒤를 따라 도란 마을의 입구가 보이는 곳에 도착했을 때였다.
“빨리!”
“빨리 움직여!”
“무기는 충분하지?”
“일단 몰아내야 하니까 아무거나 다 들어!”
마을 안쪽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다. 손에는 창이나, 작살, 활 같은 무기를 쥔 채 강 쪽으로 뛰어갔다.
“예정변경.”
리메르가 뒤를 돌았다. 경쾌한 바람이 깃든 눈빛에 진지함이 비쳤다.
“저들을 쫓는다.”
“예!”
마을 사람들은 무인이 아니었기에 금세 따라잡을 수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리메르는 가장 앞에서 달리는 건장한 중년인에게 다가갔다.
“누구시오?”
중년인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리메르의 위아래를 훑어내렸다.
“지그하르트에서 왔소.”
리메르는 로브를 걷고 제복에 새겨진 불타는 검 문양을 드러냈다.
“아! 지그하르트!”
중년인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다만 표정이 밝지 않은 걸 보면 무조건 반기는 느낌은 아니었다.
“지금 상류 쪽에서 청루족이 어선을 공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든 구해주려고 일단 달려가는 중이었습니다.”
“위치는?”
“이 방향으로 쭉 가면 됩니다.”
그가 북서쪽 방향으로 손짓했다.
“다 들었지?”
리메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전력으로 달려!”
“예!”
광풍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노인이 알려준 방향으로 달려갈 때 수면이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 움직이자, 조금 전에 본 곳보다 폭이 두 배는 넓은 강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중앙에 상선이 한 척 떠 있었다.
“으아아악!”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물러나!”
상선에 탄 선원들은 기겁하며 강물을 향해 긴 창을 찌르고, 화살을 쏴냈다.
“이건….”
라온은 배와 선원이 아니라 강물을 보았다. 더 짙어진 강물 속에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퍼어어엉!
강물 속에서 마법이 터진 듯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상선이 가라앉을 듯 요동쳤다.
쿠구구구!
이어서 푸른 용오름이 치솟으며 강물 아래에 있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의 외형과 비슷하면서도 큰 차이가 있다. 연청색 피부에 귀가 손바닥 정도로 컸고, 팔뚝과 등에는 파도 같은 지느러미가 달려 있었으며, 손가락에는 물갈퀴가 박혀 있었다.
“청루족.”
예전에 본 그들과 외모는 같았지만 다른 부분이 하나 있었다. 눈빛. 전생의 자신을 보고 겁에 질렸던 순수한 눈빛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비치는 건 살의와 분노를 담은 시뻘건 안광뿐이다.
“키이이이!”
“캬아아아!”
청루족은 선원을 익사시키려는 듯 물벼락을 일으키고, 배의 중심인 용골을 후려쳤다.
쩌저저적!
나무가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굉음이 울리고 배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루난!”
라온이 강으로 달려가며 루난을 불렀다. 루난과 함께 물을 얼리면 저 배가 있는 곳까지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응!”
루난은 단숨에 그 뜻을 이해하고 옆으로 붙었다.
우우우웅!
손에 물을 담그고 냉기를 운용하기 위해 루난과 눈을 맞췄을 때 웅장한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상선 뒤편으로 거대한 전선 하나가 들어오고 있었다.
강대한 기파로 물살을 헤치는 전선의 깃발에 푸른 글씨로 새겨진 맹이라는 글자가 펄럭였다.
라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주먹을 쥐었다.
“남북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