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7화
리메르가 차분히 일어서서 옷의 먼지를 툭툭 털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주먹으로 땅을 찍으며 고개를 숙였다.
“광풍단주. 가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낮은 목소리에서부터 퍼져나온 진중한 기세가 그의 어깨 위로 타오른다. 장난을 치다가 얻어맞았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강대한 기파가 동심원을 그리며 알현실을 뒤덮었다.
항상 장난기만 어려있던 녹색 눈동자에 진지함이 깃들었지만, 글렌과 도괴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본래 그런 사람인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아직 임무가 확정된 건 아니다.”
“에휴, 그런 건 빨리 말씀하셨어야죠! 눈에 힘주는 거 귀찮은데!”
리메르가 한숨을 푹 내쉬고 일어섰다. 김샜다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으음….”
글렌이 인상을 찌푸리며 팔걸이를 쥔 손가락을 까딱였다. 벼락을 칠지말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무슨 임무길래 시작하기도 전에 말씀하신 건가요?”
“레이블 강과 붙어 있는 가젤 강을 알고 있나?”
“당연히 알죠. 청루족이 사는 곳이잖아요.”
리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젤 강은 지그하르트 영역 끝자리에 위치한 곳으로 아인족 중 하나인 청루족의 거주지였다.
“강 옆에 붙은 도란 마을에서 잠시 머물렀었죠. 숲처럼 조용하고 편안한 곳이었는데.”
사람들은 정이 넘쳤고, 고향 숲처럼 잔잔하며 조용한 분위기에서 휴식을 취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괜찮은 곳이지요. 맑은 강에서 노니는 청루족을 보는 것만으로도 묘한 운치가 있습니다.”
도괴도 가 본 곳인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맞아. 청루족은 뭔가 고양이 같아서 보는 맛이 있다니까.”
리메르가 도괴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청루족이 사람들을 공격했다고 하더군.”
“예에?”
리메르가 웃음을 지우고 입을 떡 벌렸다.
“그,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청루족은 물속과 물가 근처에서만 거주하고, 사람이나 배를 보면 숨어버리는 겁 많은 종족이다. 강한 무력을 지녔음에도 그 힘을 드러내지 않는 신선 같은 자들이 사람을 공격했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누굴 공격한 거죠?”
“도란 마을에 사는 어부들이라더군.”
“허어….”
리메르가 턱을 긁었다. 청루족과 유일하게 공생관계를 가진 게 도란 마을인데 그들을 공격했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혹시 청루족의 아이를 건드린 거 아닙니까? 그들이 선공을 했다는 건 처음 들어보는군요.”
도괴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연회가 정보를 수집하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는 없다. 평소와 같이 가젤 강을 지나는데 갑자기 공격해서 배를 반파시켰다고 한다.”
글렌이 느릿하게 손을 저었다.
“나도 청루족은 본 적 있다. 나를 보자마자 도망쳤고, 공격성은 아예 없고 약간의 호기심만 보였지.”
“그러니까요! 굉장히 순수한….”
“그건 모르는 일이다. 청루족은 물을 벗어나지 않기에 밝혀진 정보가 많지 않아. 그들이 정말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건 그렇죠….”
리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글렌 말대로 청루족에 대해 알려진 건 그리 많지 않았다. 자신이 본 건 그들의 일면밖에 되지 않았다.
“비연회가 충분히 정보를 모은 뒤 임무를 하달할 테니 약간의 여유가 있을 거다. 그 시간동안 출발 준비를 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런데….”
리메르가 입맛을 다시며 글렌의 눈을 마주했다.
“임무 내용이 정확히 뭡니까? 청루족을 자제시키는 건지, 몰아내는 건지 아니면….”
그는 끝맺지 않고, 말을 줄였다.
“기본적으로는 청루족이 난폭해진 원인을 찾고, 자제시키는 임무지만 그게 안 된다면 처리해야겠지.”
“전부 말입니까?”
“그래.”
글렌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냉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리메르는 청루족에게 나름 괜찮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글렌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그 지시를 받아들였다. 다만 그의 눈빛은 평소보다 훨씬 깊게 가라앉았다.
“리메르.”
글렌은 조금 환기된 음성으로 리메르를 불렀다.
“이제 도박은 그만둘 것이냐?”
“…….”
리메르는 대답을 하지 않고, 눈을 내리감았다.
“네가 하진 못했지만, 네 제자가 이뤘으니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겠느냐.”
“흐음.”
그는 도괴를 돌아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가주님 말씀도 맞긴 하네요. 그 녀석이 원했던 건 저 영감탱이에게 처음으로 삼약을 이루는 사람을 보는 거였으니까.”
그 말을 들은 도괴의 붉은 눈동자가 바람 부는 호수처럼 잔잔하게 떨렸다.
“도박은 이제 재미로만 해도 될 듯합니다. 그래도 돈을 모으긴 해야 하지만.”
리메르는 헤헤 웃으며 어깨를 돌렸다.
“리메르. 미련이라는 건 그대로 흘러가게 놔두는 게 옳다. 특히 타인의 미련을 대신 붙잡는 건 힘들면서도 어리석은 짓이지.”
글렌의 음성은 평소보다 더 공허하게 붕 떠 있었다.
“그건 제 생각과 다르네요.”
리메르가 고개를 저었다.
“전 미련은 잡는 게 옳다고 봅니다. 죽은 자의 미련도 그렇지만 산 자라면 꼭.”
그는 조금 전까지 드러내던 씁쓸함을 말끔하게 지우고 다시 능글맞게 웃었다.
“가주님의 미련은 꼭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난 미련 따위 없다.”
“에헤이! 있잖습니까. 라온을 그리 좋아하… 허억!”
리메르는 다급하게 보법을 밟아 글렌의 손에서 번쩍이는 벼락을 피했다.
“또 주둥아리를 놀리는 걸 보니 살만한가 보군. 제대로 시작해볼까?”
“저, 전 임무를 준비해야 하니까 이만 가 볼게요!”
그는 알현실 문을 걷어차고, 도망치듯 뛰어나갔다.
“방금 라온이 어쨌다는 겁니까?”
“알 거 없다. 헛소리니까.”
글렌은 생각도 말라는 듯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으음.”
도괴는 글렌을 보며 눈매를 좁히다가 자세를 바로했다.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서 몸을 돌렸다.
“해리안.”
글렌은 도괴가 알현실 문을 열고 나가려 할 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감사합니다.”
도괴는 고개를 꾸벅이며 옅게 웃었다. 잠시 글렌을 바라보다가 알현실을 떠났다.
“후우.”
글렌은 리메르와 도괴가 나간 문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멍청한 녀석들. 편히 살아도 원망할 사람 없거늘….”
* * *
라온은 유아, 율리우스와 함깨 번화가로 향했다. 수련도 하지 않고 번화가로 향하는 이유는 팔찌에 붙은 세입자 때문이었다.
-네놈은 말을 안 꺼내면 약속 지킬 생각을 안 하느니라!
라스가 팔짱을 낀 채로 오른쪽 어깨에 앉아 콧방귀를 뀌었다.
-일 시킬 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말하다가 끝나면 입을 싹 닦지 않느냐!
‘알아서 다 사주려고 했지.’
-웃기고 자빠졌느니라! 본왕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새벽부터 환검 수련하겠다고 귀신처럼 거울 앞에나 서 있었겠지.
‘윽….’
정곡을 찔린 라온이 신음을 흘렸다. 도괴에게 조언을 들은 이후로 거울 앞에서만 검술 수련을 했기에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나왔잖아.’
뿔난 라스를 풀어주기 위해서 점심시간에 맞춰 번화가로 나왔다. 마침 유아와 율리우스도 수업이 없었기에 기분을 풀어줄 겸 함께 데려왔다.
“여긴 처음오지? 내가 알려줄게.”
유아는 경쾌하게 뛰면서 번화가를 돌아다녔다.
“유아야!”
“유아 왔구나! 방금 들어온 사과인데, 하나 먹어보렴!”
“유아야! 오늘은 돼지 고기가 좋다! 구이로 쓰면 맛있을 게다!”
번화가 양쪽에 길게 늘어진 상인들이 유아에게 손짓했다. 시녀들과 함께 장을 보러오기 때문인지 모두가 유아를 알아보고 활짝 웃고 있었다.
“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율리우스는 모르는 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처음 와보고서 다 아는 듯 허세를 부렸다.
“정말 그럼 저 가게는 뭔데?”
“어? 오, 옷을 파는….”
“땡! 빵집이거든!”
“윽….”
유아의 웃음에 율리우스의 얼굴이 빨개졌다.
‘정반대라니까.’
라온이 둘을 보며 피식 웃었다. 유아는 여전히 율리우스를 친구로만 생각했고, 율리우스는 유아를 라이벌로 여겼다.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에 저 관계는 재미있기만 했다.
-나름 보는 맛이 있는 아이들이로구나.
라스도 두 사람을 보며 픽 웃었다.
‘네가 애들을 좋아했던가?’
-본왕은 본래 인재를 챙긴다. 거기다 파인애플 소녀는 본왕의 세 번째 시녀가 아니더냐. 재능을 떠나서 당연히 챙겨주어야지.
녀석은 여전히 유아를 시녀라고 불렀다. 챙겨주고, 아껴준다는 건 진심인 듯 싶었다. 물론 해주는 건 아무 것도 없지만.
‘근데 나한텐 왜 그래?’
-네.놈.은! 본왕의 것들을 모조리 빼앗지 않았더냐!
라스는 당장 폭발할 것처럼 분노와 냉기를 끌어 올렸다. 마나 회로를 통해 녀석의 기운이 물 밀듯이 파고들었다.
-지금 도발을 한 것이렷다? 이런 건 절대 참지 못하지!
“라온 님! 다왔어요!”
유아가 구슬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손을 흔들었다.
“음?”
라온은 라스의 공격을 막기위해 움직이지 않았지만, 녀석이 일으킨 분노와 냉기는 썰물처럼 순식간에 몸을 빠져나갔다.
-무엇을 하는 게냐! 빨리 들어가라!
라스는 본인이 화가 났다는 것조차 잊고 빨리 아이스크림을 먹자며 강아지처럼 혀를 내밀었다.
‘아주 대단한 마왕님이셔….’
라온은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서 아이스크림 가게로 들어갔다.
“둘 다 먹고 싶은 거 골라.”
“네!”
“정말 저도 먹어도 되는 겁니까? 이미 많은 은혜를 얻고 있는….”
“괜찮아. 별관 사람들 것도 함께 고르고.”
라온은 율리우스의 꽉꽉 누른 말을 끊으며 웃었다.
‘그럼 넌… 음?’
라스에게도 아이스크림을 고르라고 말하려 할 때 진열 창에서 굉장히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루난?”
“응?”
진열창에 아주 얼굴을 대고 있던 은발의 여인이 홱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루난이었다.
“네가 왜 여기에… 아.”
아니 이건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고양이가 생선 가게 앞을 지나는 것과 같은 수준의 이야기였으니까.
“구경하고 있었어.”
루난의 맹한 눈동자에 아쉬움이 가득 차 있었다.
“구경?”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음만 먹으면 이 매장도 살 수 있는 녀석이 왜 고민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하루에 하나만 먹으라고 하셨어.”
그 말을 하며 고개를 푹 숙인다. 보라색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음, 너도 하나 골라볼래?”
“안 돼. 엄마랑 약속해서….”
루난이 고개를 저었다. 아쉬음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약속은 지키다니 루난다웠다.
“그럼 나중에 먹자.”
“응….”
라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루난을 뒤로 하고 진열대로 갔다.
‘넌 뭘로 할래?’
-으음, 전에도 느꼈지만 이곳의 아이스크림 가게의 종류는 너무 적다.
‘어쩔 수 없잖아.’
지그하르트는 일년내내 추운 곳이다. 주민 대부분이 무학을 익혀서 냉기에 강하다고 해도 아이스크림보다는 따스한 음식을 찾다 보니, 가게의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민트초코로 한 박스를 채우겠느니라.
‘민초 한 박스….’
라온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걸 한 박스 먹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려왔다.
-아니 두 박스로 할까? 생각을 좀… 음?
라스는 벽에 붙은 전단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저게 무엇이냐?
녀석은 샌드위치처럼 빵 사이에 아이스크림이 그려진 전단을 가리켰다.
‘나도 모르겠는데?’
라온이 고개를 돌려 점장을 불렀다.
“저건 뭐죠?”
“제가 만든 신제품입니다.”
카운터 앞에 서 있던 콧수염을 기른 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드셨다구요?”
“요즘 장사가 안 되다 보니 임기응변으로 한번 만들어봤죠.”
그는 민망하다는 듯 볼을 긁적였다.
“우유를 많이 넣어서 부드럽게 만든 카스테라 사이에 아이스크림을 넣은 겁니다. 구슬 아이스크림 샌드라고 부르죠.”
“아이스크림 샌드라….”
라온은 입맛을 다셨다. 빵과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는다니 획기적이라면 획기적이었다.
-어이! 뭐해! 당장 주문해라! 당장!
라스는 먹이를 본 강아지처럼 눈에 불을 태우며 솜방망이 같은 주먹으로 팔목을 두드렸다.
“이거 하나만 주시겠어요?”
“맛은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쿠키앤크림으로 해주세요.”
“저도요!”
“제, 제 것도 라온 님과 같은 걸로 부탁드립니다.”
유아와 율리우스도 샌드를 먹겠다며 손을 들었다.
“어….”
라온이 뒤에서 멍하니 선 루난을 돌아보고 손가락 네 개를 들었다.
“네 개 주세요.”
“옙! 쿠앤크 샌드 네 개 주문받았습니다!”
점장은 웃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 자식! 민트초코로 해야지!
‘아, 그렇네. 지금이라도 바꿀까?’
-됐다. 민트초코도 주문하면 되니까.
라스는 다 먹어볼 생각인지 아이스크림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나왔습니다.”
미리 준비했기 때문인지 만드는 시간은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자, 루난.”
라온은 먼저 루난에게 샌드를 주었다.
“응? 나는….”
“이건 구슬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샌드잖아. 괜찮지 않을까?”
“아!”
루난이 입매가 느슨하게 풀어지며 미소를 그려냈다. 이렇게 웃는 건 또 처음 보았다.
“응! 고마워.”
그녀는 고개를 꾸벅이고 아이스크림 샌드를 가져갔다. 모양을 감상하듯 이리저리 돌려보며 아주 작은 웃음을 흘렸다.
라온은 유아와 율리우스에게도 샌드를 나눠준 뒤 마지막 아이스크림을 챙겼다.
“이게 샌드….”
솜처럼 폭신하고 얇은 카스테라 빵 사이에 쿠키앤크림이 끼어 있는 모습을 보니, 군침이 돌았다. 모양도 구슬 아이스크림처럼 동그래서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뻤다.
-감상 따윈 할 시간 없느니라! 빨리 먹어라!
‘아무리 봐도 미식가는 아니라니까.’
미식가라면 보통 음식의 외형을 보고 즐기던데, 라스에겐 그런 꼴을 보지 못했다. 역시 이 녀석은 양만 따지는 탐식가였다.
라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샌드를 입에 넣었다.
“허!”
탄성이 저절로 터진다. 아이스크림을 위아래를 감싼 카스테라가 물 먹인 종이처럼 부드럽게 풀어지며 폭신한 식감을 만들고, 아이스크림이 그 사이에 파고들어 달달함과 바삭함으로 혀를 휘감았다. 생각지도 못한 조화로운 맛에 웃음이 나왔다.
-와, 왔다….
라스가 눈을 치켜떴다.
-이런 맛을 모르고 수천 년을 살았다니, 인생이 손해였느니라!
녀석은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고서 마신이라 중얼거렸다. 영락없는 미친놈이었다.
-두 재료의 맛도 맛이지만 단점이 사라졌느니라. 완벽한 음식이니라!
라스는 기절하기 직전의 상태처럼 몸을 떨었다.
‘단점?’
-카스테라의 퍽퍽함을 아이스크림이 잡아주고, 아이스크림의 너무 차갑고 딱딱한 식감을 카스테라의 부드러움이 보조해주잖느냐. 이건 완벽한 음식이니라!
‘조화와 보조….’
라온이 반만 남은 샌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든 식재료엔 장점과 단점이 있지. 이건 그 장점으로 단점을 죽인 최고의 음식이니라. 평생 이것만 먹고 싶구나!
‘서로가 가진 장점으로 단점을 상쇄시킬 수 있다는 거로군.’
-알아들었으면 그만 중얼거리고 남은 것을 먹어라! 참을 수가 없도다.
라스가 춤을 추며 몸을 흔들었다.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남은 아이스크림 샌드를 입에 넣었다. 라스의 설명을 들으니 확실히 두 재료의 장점이 단점을 죽이고 있었다.
-끄으으으! 죽이는구나! 이제 민트초코로 샌드를 시켜라! 기대되어 손이 떨리는구나!
라스는 정말 기대에 젖어 온몸을 떨고 있었다.
‘조화라….’
하지만 라온은 라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이스크림 샌드 전단을 보며 조화라는 말만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검술의 조화를 만들 수 있을지도….’
-뭐하냐?
‘음검으로 일으킨 충격으로 환검의 느린 발동을 메꾼다면….’
-라온 지그하르트?
-야! 야 인마!
라스가 라온의 팔뚝과 어깨를 쳐도 라온은 반응하지 않았다.
-이 맛난 걸 하나만 먹고, 무아에 빠지는 건 또 무슨 고문이냐!
라스가 악을 질렀지만 라온의 동공을 점점 더 연하게 풀렸다.
-이 악마 같은 자식아!
* * *
“여긴….”
라온이 눈을 깜빡였다.
“뭐지?”
별관의 방이다. 분명 매장에서 아이스크림 샌드를 먹었는데 어느새 방에 돌아와 있었다.
-뭐긴 뭐야. 미친 거지!
어깨 위에서 라스의 분노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
“응?”
-네놈 아이스크림 샌드를 처먹다가 무아에 빠졌다! 대가리에 칼 맞은 놈아!
“아!”
라온이 피식 웃었다. 그 말을 들으니 샌드를 먹다가 두 검술 묘리를 조화시키는 생각에 빠졌던 게 기억났다.
-웃어? 웃음이 나와?
라스가 이를 바득 갈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동그란 눈매가 끓는 물처럼 보글거렸다.
-다 사준다고 가놓고, 본왕은 고작 샌드 하나만 먹었느니라! 그것도 민트초코가 아니라 쿠키앤크림을! 쿠키앤크림!
“그래도 맛있었지?”
-그건… 그런데!
라스가 눈동자를 홱 돌렸다.
-어쨌든 네놈은 아이스크림 세트를 사준다는 약속을 아직 지키지 않았느니라! 나중에 딴 소리하지 말고, 확실히 기억해둬라!
“네. 네.”
라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계산은 했나?”
-그 상태에서도 아이스크림 소녀와 아이들 것들은 물론이고, 시녀들의 샌드까지 전부 사서 돌아왔다! 네놈이 챙기지 않은 건 본왕 밖에 없느니라! 끄으!
라스는 분통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쳤다.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다 하나도 없느니라! 민트초코 샌드를 꼭 먹어보고 싶었거늘!
“미안. 내일 또 갈게.”
라온이 옅게 웃으며 라스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본왕을 바보로 아는 것이냐! 네놈의 달콤한 말에는 절대 속지 않느니라!
라스는 정말 안 믿겠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이번에는 진짜야.”
-으음….
라스는 1초 전에 한 말을 까먹은 듯 동그란 눈동자를 슬며시 굴렸다. 음식 앞에서 이리 순수한 마왕이라니 이젠 신기할 정도다.
-안 믿기느니라.
“네가 힌트를 준 덕분에 시간을 많이 아꼈거든.”
라온이 검집을 툭 치고서 미소를 지었다.
-힌트? 본왕은 네놈 욕밖에 안 했는데? 미친놈, 돌대가리, 칼 맞고 죽을 놈….
라스는 그동안 했던 욕을 되뇌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전에 한 말이 도움이 됐어. 서로의 단점을 상쇄해준다는 말이.”
라온이 수련을 위해 가져다 둔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이채를 발하는 붉은 눈을 마주하며 씩 웃었다.
“덕분에 새로운 검술이 떠올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