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0화
북망산 중턱에 선 로엔은 별관을 떠나는 라온을 바라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결국 익히셨군.’
라온은 한 달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향음공을 습득하고, 그 안에 본인만의 무학까지 섞었다.
‘아니, 그게 다가 아니지.’
그는 기존의 무학으로 향음공을 발전시킨 것만이 아니라, 향음공을 통해 검술 성취까지 끌어 올렸다. 부족함은 분명하지만, 저 정도 경지를 한 달 만에 이룬 것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가주님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로엔이 뒤를 돌아 뒷짐을 지고 있는 글렌을 불렀다.
“향음공에서 충검의 묘리를 뽑아낸 듯하군.”
글렌의 목소리는 별 느낌 없다는 듯 담담했지만, 그의 입매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쳐 있었다.
“그저 잘 닦인 도로를 따라가는 아이가 아니다. 주어진 도구를 이용하여 기존보다 더 나은 길을 만드는 욕심 많은 녀석이지.”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로엔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글렌의 말대로 라온은 끝없는 노력과 뛰어난 재능으로 무학의 격 자체를 발전시키는 괴물이었다.
“발검 소리와 검명으로 소리를 만든다는 게 참신합니다. 소리가 두 종류다 보니, 적이 파악하기 쉽지 않고, 응용성도 좋더군요. 좋은 검술이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뭐, 그렇긴 하지….”
라온을 칭찬하자 글렌의 미소가 더 진해지고, 움직임이 커졌다.
‘하여튼.’
로엔은 글렌의 반응을 보며 옅은 웃음을 흘렸다.
‘솔직하지 못하시다니까.’
손자의 칭찬에 어쩔 줄 모르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팔불출 할아버지였다.
‘조금만 솔직해지셨으면 좋겠는데.’
글렌이 왜 라온과 실비아를 멀리하는지 알고 있지만, 이번만큼은 리메르와 의견이 같다. 더 늦기 전에 솔직한 마음을 밝히고 관계가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발전 속도로 볼 때 반년 정도 꾸준하게 수련한다면 저 녀석만의 무학이 탄생할 거 같구나.”
손자가 성장하는 모습이 기대되는지 글렌의 눈빛이 반짝였다.
“반년 만에 새로운 무학을 익히는 것도 아니고, 만든다니 무서울 정도군요.”
로엔이 잔잔해진 호수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다만 저런 라온 님도 해리안 님에게는 어쩔 수 없겠지요.”
도괴의 본명은 해리안 지그하르트다. 한참 전이지만 글렌에게도 인정받은 실력자이기에 라온이 그를 상대로 이긴다는 건 불가능했다.
“무학까지 갈 일도 없을 거다.”
글렌이 짧게 혀를 찼다.
“술은커녕 도박도 넘지 못할 테니까.”
도괴의 도박 실력은 그 이명답게 대륙 전체를 울릴 정도다. 리메르에게 어설프게 배운 라온이 그를 상대로 이긴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리고….”
글렌이 라온이 사라진 모습을 보고서 등을 돌렸다.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 하는 법이지. 크흠!”
그는 짧게 헛기침하고서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후후.”
로엔은 글렌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할아버지에게 배우는 게 가장 좋겠지요.”
* * *
라온은 불안에 떠는 도리안과 함께 리메르가 알려주었던 도박장 앞에 섰다.
“지, 진짜 가실 거예요?”
도리안은 도박장 입구를 보며 벌벌 떨었다.
“도괴! 대륙 전체에 도박으로 이름을 떨친 그 도괴라구요! 지금까지 당했던 호구들과는 달라요!”
그는 이건 정말 안 된다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걔들도 호구가 아니었어.”
라온이 빙긋 웃었다. 전에 깨부숴버렸던 도박꾼들은 전문가 중의 전문가다. 라스 덕분에 이긴 거지 자신 혼자였다면 그렇게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마음 놓고 따라와.”
라온은 도리안의 어깨를 치고서 도박장 안으로 들어갔다. 대낮임에도 도박장 내부는 사람으로 북적였고, 어둑하고 음습한 활기로 가득 찼다.
‘중앙이라고 했었지.’
주디엘이 가져온 정보에 의하면 도괴는 항상 도박장의 중심에서 판을 연다고 한다고 했었다. 가운데를 살펴보니 사람들이 모여 있는 큼지막한 테이블이 있었다.
“아!”
그 테이블을 살핀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도괴를 봤기 때문이 아니다. 테이블 바깥쪽에 앉은 붉은 머리의 엘프가 너무 익숙했기 때문이다.
“끄아아아악! 젠장!”
붉은 머리 엘프. 리메르가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어디서 돈을 구해왔는지 또 돈을 걸었다가 망한 것 같았다.
“또 한 끗이야! 이런 제기랄!”
“좀비처럼 지치지도 않고 찾아오는구나.”
쇳소리가 섞인 듯한 비웃음에 리메르의 맞은편을 보았다. 어깨가 떡 벌어진 흑발의 거한이 손가락에 카드를 끼워 넣은 채 히죽 웃고 있었다.
‘저자가 도괴인가….’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 몬스터 못지않은 거대한 체구와 그 피부를 뒤덮은 흉악한 문신은 주디엘이 알려준 인상착의와 같았다. 짐승 같은 웃음을 짓는 저 남자가 바로 도괴 해리안 지그하르트였다.
‘예상보다 더 강한데.’
라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도박과 술을 좋아한다고 하기에 실력이 떨어졌으리라 예상했는데 전혀 아니다. 그저 앉아서 웃고 있음에도 믿기 힘들 정도의 기파를 뿜어내고 있었다.
“돈 떨어졌으면 다 벗어놓고 꺼져.”
도괴는 가볍게 손을 젓고서 테이블 위에 있는 금화를 끌어모았다.
리메르 말고 다른 사람들의 돈도 땄는지 그 앞에 산더미 같은 금화가 쌓였다. 저것 역시 도괴의 특이한 점이다. 그는 도박을 칩이 아니라, 금화로만 진행했다.
“제엔장! 다시 올 거야! 무조건 다시 올 거라고!”
리메르는 삼류 악당이나 할 법한 대사를 날리고 몸을 일으켰다.
“다, 단주님 또 털린 모양인데요? 진짜 가실 거예요? 단주, 부단주가 다 털리는 건 보고 싶지 않아요!”
“난 단주님과 달라.”
라온을 짧게 입맛을 다시고서 앞으로 걸어갔다. 빈자리가 된 도괴의 맞은편에 앉았다.
“저와도 한판 하시죠.”
라온은 미소를 지으며 도괴의 붉은 눈을 마주 보았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딜. 여긴 너 같은 꼬마가 올 곳이 아니다.”
“어! 설화검협이다!”
“라온 지그하르트?”
“대륙 최연소 마스터가 왜 여기에!”
“설마 단주의 복수를 위해서 온 건가?”
자기소개할 필요도 없이 다른 사람들이 먼저 이름을 밝혀주었다.
“라, 라온?”
옷을 내던지고, 신발마저 벗던 리메르가 눈을 부릅떴다.
“너 진짜 온 거야?”
“그럼 가짜로 오겠습니까.”
“아니! 얌마!”
리메르가 달려와 어깨를 잡았다.
“저 인간은 진짜 독종이야! 돈 빨 구석이 있으면 절대 안 놓친다고! 빨리 일어나!”
“괜찮습니다. 저도 비슷하니까요.”
“어? 그, 그건 그러네….”
그는 정말 둘이 비슷하다고 중얼거렸다.
“걱정 마세요. 도박은 시작점일 뿐이니까.”
“너 그럼 정말….”
“네. 해야죠. 삼약.”
라온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은 기회니까.’
리메르가 잃은 돈은 당연히 되찾는 것이고, 삼약을 이뤄 도괴에게 소원을 말하는 게 진짜 목적이었다.
“네가 대륙 역사상 최연소 마스터라는 라온 지그하르트인가.”
도괴는 지그하르트를 떠난 사람답게 자신의 얼굴도 모르고 소문만 들었던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라온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값은 괜찮군. 하지만 도박판에서는 명성이 아니라 돈이 있어야….”
“도리안.”
도괴의 말을 끊고 지갑을. 아니, 도리안을 불렀다.
“에휴.”
도리안이 한숨을 내쉬고, 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다시 나오는 손아귀에 묵직한 보자기 다섯 개가 들려 있었다.
콰르르르!
라온이 보자기를 열어 테이블 위에 쏟아부었다.
“일단 금화 500개.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이거 말이 통하는 친구였군.”
도괴는 테이블 위에 쌓인 금화 더미를 보고 길게 입맛을 다셨다. 다만 그의 눈동자에 비치는 감정은 욕망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삼약을 신청한다고 했지?”
“예.”
“그럼 패한다면 가진 걸 모두 벗어둔 채 쫓겨나는 것도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잃고 쫓겨나기에 리메르가 매번 거지꼴이 되는 것이다.
“좋아. 네 삼약을 받아들이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테이블 위에 손을 얹었다. 손가락 사이에 낀 카드가 팔랑였다.
“오오!”
“최연소 도전자 아니야?”
“맞지! 누가 18살에 삼약에 도전해!”
“미쳤다! 설화검협 대 도괴라니!”
“우리도 판을 좀 열어볼까?”
“근데 이거 대련이 아니라 도박부터 시작이잖아. 술까지 못 가고 도박에서 끝날 거 같은데….”
“하긴 18살에 도박을 해봐야 얼마나 했겠어.”
“아, 둘이 싸우는 거 보고 싶은데….”
상상조차 못 한 대결에 좋아하던 사람들은 라온이 도박과 술을 넘어서지 못하리라 판단하고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어떤 도박을 좋아하지? 카드? 주사위? 룰렛?”
“뭐든 괜찮습니다.”
라온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감 좋군. 그럼 포커부터 시작하지.”
도괴가 비슷한 웃음을 흘리고서 카드를 잡았다.
“처음이니 조언을 하나 해주지. 이곳의 규칙은 밖과 달라. 속임수를 써도 상관이 없네. 발견하지 못한 쪽이 나쁘고 멍청한 거야. 이해되나?”
그는 이번에도 손가락에 카드를 낀 채 흔들었다. 도박할 때의 버릇인 것 같았는데 굉장히 거슬렸다.
“즉, 이 판에서는 들키지만 않는다면 속임수도, 사기도 정의라는 거지.”
“그 속임수를 찾으면 어떻게 됩니까?”
“불가능한 일은 입에 담을 필요 없네.”
“그럼 제가 당신의 속임수를 찾아낸다면 순수 실력만으로 붙어보시겠습니까?”
“하아, 이런 답답한 친구들이 꼭 있다니까.”
도괴가 끌끌 비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좋아. 한 번 해봐.”
그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라스.’
라온은 카드를 섞는 도괴를 보며 라스를 불렀다. 팔찌 위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네 차례야. 도괴의 몸에서 속임수에 쓰일 법한 요소를 전부 찾아줘.’
-싫다.
‘어?’
-전부 찾으라니, 본왕에게 손해이니라.
라스는 거부하겠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갑자기 왜?”
잘 들어줄 것처럼 해놓고 갑자기 저러니, 당황스러웠다. 도괴에게 들키지 않도록 표정 관리를 하며 다시 라스를 불렀다.
‘도와줄 테니까. 빨리 가자고 했잖아.’
-너무 늦었느니라!
‘준비가 필요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
-한 달이나 기다리게 만들고, 저런 은밀한 기운을 전부 찾으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본왕의 손해이니라. 그러니까….
라스는 다른 걸 원한다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몸을 달라는 말이 나올 거라는 생각에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지금은 안 되는데.’
불가능한 요구였기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라스의 입에서 나온 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구슬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추가하겠노라. 본왕은 구슬 아이스크림 박스 3개를 원하느니라!
라스는 흡사 세계를 노리는 듯한 진중한 어조로 아이스크림이라고 외쳤다.
‘아….’
라온은 빠르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 아이스크림?’
-그렇다! 전부 본왕이 원하는 맛으로 고를 것이니라!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저거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다.
‘받고 한 박스 더!’
-최선을 다하겠노라!
라스가 펄쩍 뛰고서 도괴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의 감각은 인간의 격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리메르를 속였다고 해도 라스의 시선은 벗어나지 못한다.
-일단 이 반지. 소리를 죽이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목걸이에는 시선 교란의 능력이 있느니라.
‘어떻게 쓸지 보이네.’
소리를 죽이는 효과는 밑장 뺄 때 사용할 테고, 목걸이는 속임수를 사용하는 순간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용도일 거다.
마나의 흐름이 너무 옅어서 느낌조차 없는 걸 보면 도박 맞춤형으로 만든 최상급 아티팩트가 분명했다.
-이놈 손등에 있는 문신도 이상하다. 이 카드와 연결된 듯하구나. 마나가 굉장히 희미해서 냄새로만 파악된다.
‘알겠어.’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턱을 치켜들었다.
“도괴 님. 일단 반지와 목걸이부터 벗으시죠.”
“어?”
카드를 던져주려던 도괴의 손이 우뚝 멈췄다.
“방금 뭐라고 했지?”
“반지와 목걸이를 벗으라고 말했습니다.”
라온은 능력을 가진 반지와 목걸이를 딱 꼬집었다.
“이건 멋으로 끼고 있는….”
“오른손 검지에 낀 반지는 원할 때 소리를 줄이는 효과가 있고, 목걸이에는 시선 분산 효과가 있잖습니까. 어설픈 핑계는 그만두시죠.”
“…어떻게 알았지?”
도괴의 웃음이 처음으로 멎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턱을 떨며 눈동자를 굴렸다.
“제가 감이 좀 좋아서요.”
라온은 옅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감은 얼어 죽을! 본왕의 힘이지 않느냐!
라스가 헛소릴 말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지, 진짜야?”
“도괴의 속임수를 바로 알아차렸다고?”
“미친….”
“아, 아직 게임 시작도 안 했는데 속임수를 찾아내는 게 가능해?
구경꾼들은 단번에 도괴의 비밀을 파악한 라온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하, 좋다. 들키면 그만둔다고 했으니 약속은 지켜야겠지.”
도괴가 목걸이와 반지를 벗어서 테이블 끝에 내려놓았다.
“속임수를 그만두시려면 그것도 지우셔야죠.”
라온이 도괴의 손등에 그려진 문신을 가리켰다.
“그걸로 이쪽의 패를 살필 수 있잖습니까.”
“정말이지….”
도괴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손등을 문질렀다. 평생 그 자리에 있던 것 같았던 문신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제 됐겠지?”
속임수가 들켰음에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다. 약간 귀찮아졌다는 듯한 말투로 새로운 카드를 흔드는 걸 보면 괜히 대륙 전체에 이름을 알린 게 아니었다.
“그럼 제대로 시작해 보지.”
도괴가 키득거리고서 카드를 돌렸다.
라온은 도괴의 손가락에 끼인 카드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들키지만 않으면 속임수가 정의라….’
그럼 오늘은 내가 정의겠네.
* * *
“흐음.”
도괴는 카드를 쥔 라온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손가락을 비볐다.
‘속임수만 없다면 날 이길 거라 생각한 건가?’
가끔 자신이 속임수만 이 자리에 올랐다고 착각하는 멍청이들이 있다.
하지만 속임수는 그저 호구들의 돈을 편하게 빨려고 쓸 뿐이고, 진짜 고수끼리의 도박에서는 상대의 심리를 먼저 파악하는 사람이 승리한다.
저 어린 녀석의 감은 분명 놀라울 정도지만, 자신을 이길 수는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표정과 행동을 모조리 파악 당한 채 쫓겨나게 될 것이다.
“시작은 간단하게 금화 100개부터 해볼까?”
도괴는 패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테이블 위에 금화 100개를 밀어 넣었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고 어떤 반응을 하는지 살피는 탐색전이었다.
“좋습니다.”
라온은 평온한 표정으로 패를 확인한 뒤 금화 100개를 테이블 중앙에 쏟아부었다.
“그럼 까보지.”
도괴가 카드를 열었다. 같은 숫자가 연달아 나오는 트리플이었다.
“백스트레이트. 제가 이겼네요.”
라온의 카드는 1부터 5까지 나온 백스트레이트. 그는 옅은 미소를 짓고서 금화 200개를 챙겨갔다.
도괴는 금화 100개가 날아갔음에도 태연했다.
‘얼마든지 잃어도 상관없지.’
결국 이기는 건 나니까.
괜히 도박 괴물이라는 이명을 얻은 게 아니다. 무학이든, 도박이든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 하나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이번엔 제가 돌리겠습니다.”
라온은 카드를 섞은 뒤 차례로 돌렸다.
도괴는 이번에도 패를 보지 않고 라온의 표정을 관찰했다.
‘얼굴은 언어 없는 표현이지.’
사람은 말보다 많은 것을 표정으로 보여주고, 그 표현이 가장 잘 드러나는 건 인생의 희노애락이 모두 깃든 이 도박판이다. 저런 어린 녀석의 심리를 파악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금화 200개.”
도괴가 처음의 2배나 되는 돈을 밀어 넣었다.
“좋습니다.”
라온도 거부하지 않은 채 딴 돈까지 모두 테이블 중앙에 쏟아부었다.
도괴가 패를 뒤집었다. 이번에는 원페어였고, 앞을 보니 라온은 투페어였다.
“이번에도 제가 이겼네요.”
라온은 작은 미소를 짓고서 다시 카드를 쥐었다.
“좋네. 계속해보자고.”
도괴가 빙긋 웃었다. 돈이란 무엇보다도 무서운 무기. 테이블에 쌓이는 금화가 많아질수록 저 녀석의 얼굴에 파탄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열 판이 지났을 때 도괴의 자신감은 안개처럼 희미해진 상태였다.
‘음….’
도괴가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저놈 뭐지?’
라온은 패가 좋아도, 패가 나빠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가면을 씌워놓은 듯 심리가 전혀 읽히지 않았다.
‘이게 18살짜리의 표정이라고?’
너무 감정이 옅어서 18살이 아니라, 산전수전 다 겪은 도박꾼이나, 첩자, 암살자를 상대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거기다 잃고 있는 건 나야.’
열 판을 진행하며 승패는 5:5로 반반이었지만 결국 돈을 잃은 건 자신이다. 라온은 이쪽의 패가 강할 때는 귀신같이 콜을 부르지 않거나, 낮은 금액만 배팅해서 절대 손해를 보지 않았다.
도괴가 당황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패를 확인했다.
‘원페어.’
같은 숫자가 2장이 모인 원페어는 낮은 패다. 모양도 하트여서 순위 역시 별로였다. 하지만 저 담백한 얼굴을 한 번 무너뜨려 보고 싶었다.
“금화 1500개.”
도괴는 라온이 가진 금화와 같은 양을 배팅해서 테이블 위에 쏟아부었다. 찬란한 금빛이 깃든 라온의 눈을 훑어내렸다.
‘어?’
불안함이 없다고?
라온의 붉은 눈동자는 산처럼 쌓인 금화를 보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까지처럼 평온함만 가득했다.
“콜입니다.”
라온은 차라도 마시는 듯 담담한 눈빛으로 가지고 있던 금화를 모조리 쏟아냈다.
‘대체 뭘 가지고 있는 거지? 스티플?’
금화 1,500개 이상을 지르려면 아무리 못해도 포카드나 스트레이트 플러쉬는 있을 게 분명했다.
볼 안쪽을 씹으면서 라온이 패를 까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녀석의 패는 그것과 거리가 한참 멀었다.
“워, 원페어?”
라온의 패는 자신과 같은 원페어. 다만 하트보다 높은 스페이드였다.
“제가 이겼네요.”
라온은 스페이드 2장을 테이블에 던지고서 싱긋 웃었다.
“뭐, 뭐야!”
“원페어에 금화 3,000개를 태워?”
“미, 미쳤어! 둘 다 미쳤다고!”
“그런데 지금 계속 설화검협이 따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도괴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어!”
구경꾼들은 라온 쪽에 가득 솟구친 금화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초, 초심자의 행운이지. 곧 끝날 거야.”
“그래. 곧 상황이 역전될 테니까. 기다려봐!”
“도괴는 슬로우스타터야! 이제 시작이라고!”
도괴를 믿는 사람들이 한참 남았다고 떠들어댔지만 5판을 더 진행한 뒤에 모조리 입을 다물었다.
“이 무슨….”
도괴가 참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5판 중 3판을 이기고, 2판을 졌는데 이번에도 돈을 딴 건 라온이다. 이제 테이블에 남은 금화는 50개조차 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런 적은 처음이다. 아무리 초심자에게 행운이 깃든다고 해도 좋은 패가 나왔을 때만 골라서 피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잠깐만… 설마!’
도괴가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파악 당했다고?’
승패가 거의 5:5인데 이쪽만 돈을 잃고, 저쪽은 크게 땄다면 이유는 하나다. 자신의 표정과 반응이 노출되었다는 뜻이다.
“윽.”
억지로 표정을 관리하며 고개를 들었다. 라온의 가라앉은 눈동자가 이쪽을 직시한다. 선명한 홍안에 등골에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확실해.’
저놈 내가 무슨 패를 들었는지 아는 거야.
그것 말고는 이렇게 돈을 잃고 패할 수가 없었다.
“너 무슨 짓을 했지?”
“무슨 짓?”
라온은 카드를 받았을 때처럼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거짓말 마라. 승패가 같은데 난 잃고만 있잖느냐! 셀 수 없이 많은 도박판에 섰지만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아뇨. 아무것도 안 한 게 맞습니다.”
“무슨!”
“도괴 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들키지만 않으면 사기가 아니라 정의라고.”
라온이 옆에 쌓인 금화를 쓸어내리며 씩 웃었다.
“속는 놈이 멍청한 거죠.”
“너….”
도괴는 본인도 모르게 손에 쥔 카드 뭉치를 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