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29화 (229/653)
  • 제229화

    로엔은 자세를 잡는 라온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이니 힘들겠지.’

    소리의 무학도 무학의 한 종류임은 분명하지만, 오러의 운용방식과 발동이 검술과는 상당히 다르다. 라온이 마스터에 오르고, 재능이 있다고 해도 한 번 보고 따라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자신감은 좋군.’

    젊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뤄낸 게 많기 때문일까. 라온의 눈빛은 단번에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저런 젊음과 자신감을 좋아하기에 로엔은 기꺼움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시작인가.’

    라온의 눈빛을 보니, 시작하려는 것 같았다. 조언을 해주기 위해 방비를 풀고 귀를 기울였다.

    끼이이익!

    은빛 칼날이 검집의 끝부분을 갈며 솟아오른다. 불협화음 같은 마찰음이 대기를 진동시키고, 청아한 검명이 그 뒤를 이어 거센 포효를 터트렸다.

    우우우우웅!

    열기가 깃든 오러가 그 소리를 타고 질주하여 로엔의 귓가에 강대한 울림을 일으켰다. 맑디맑은 소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들었다.

    “허어!”

    로엔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무슨 일이지….’

    당황하여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딱 하나 확실한 건 라온이 처음부터 소리에 오러를 담아내는 미친 짓을 했다는 것뿐이다.

    ‘정신 나가겠군.’

    라온의 천재성을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큰 착각이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상상한 것 이상의 괴물이었다.

    ‘소리를 만들어내는 과정, 그리고 그 소리에 오러를 담아내는 방법까지 완벽했어.’

    라온은 발검술의 마찰음과 검을 뽑고 난 뒤의 검명을 이용하여 소리를 만들어냈고, 그 소리에 오러를 담아내기까지 했다. 처음 해봤다고 하기엔 믿을 수 없는 성취였다.

    ‘만약 저 소리에 살의가 담겼다면 위험했겠지.’

    라온은 소리와 오러에 공격성을 담지 못했다. 그저 오러를 담은 소리를 내게 한다는 것에 집중한 것 같았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경악하여 주저앉고 싶을 정도였지만.

    “음…….”

    로엔은 살짝 인상을 찌푸린 라온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왜 안 됐는지를 생각하고 있는 건가?’

    라온은 왜 소리에 공격성이 들어가지 않았는지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건 당연하지.’

    소리로 공격을 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그게 되었다면 더 이상한 일이다. 저리 엄청난 일을 저질러놓고 바로 다음을 생각하는 성취욕이 놀라웠다.

    ‘혼자라도 분명히 할 수 있을 거야.’

    라온은 스스로 무학을 만들 수 있는 대종사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 그라면 소리에 살의를 담는 방법을 스스로 깨달을 테지만, 그 시간을 조금 더 앞당기고 더 나은 걸 만들 기회를 주고 싶었다.

    로엔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라온을 보며 무언가를 결정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     *      *

    “으음.”

    라온이 제천검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쉽군.’

    분명 공격할 생각으로 로엔에게 검명을 보냈지만, 그 의지는 소리에 전달되지 않았다. 그저 오러가 깃든 소리가 크게 터졌을 뿐이다.

    ‘검보다 훨씬 어려워.’

    확실한 매개체가 있는 검술과 달리 찰나의 순간에 나아가는 소리에 오러를 싣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그 안에 오러만이 아니라, 공격의 의지마저 담아야 하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래도 불가능한 건 아니야.’

    첫 시도에 소리에 오러를 담아내는 걸 성공했으니, 조금 시간이 걸려도 살기를 담아내서 귓속의 전정기관을 노리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내가 가진 구결을 이용해서 만든다면…….’

    만화공과 불의 고리 그리고 지금까지 익힌 무학의 구결들을 섞는다면 조금 시간이 걸려도 원하는 대로 소리를 담아낼 무학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부단주님.”

    라온이 목표를 정하고 움직이려고 할 때 로엔이 다가왔다. 당황했는지 목소리와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대단하십니다. 솔직히 말해 처음부터 성공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 봐야 반쪽짜리 성공이죠.”

    “공격 의지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예. 처음 중검을 익힐 때처럼 어렵네요.”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의 무학을 무시한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듯싶었다.

    “소리에 오러를 담아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물질 대신 매개체가 되어줄 구결이 필요할 겁니다. 유아 아가씨도 이쪽으로 오시죠.”

    로엔은 멍하니 서 있던 유아를 불러서 자신의 옆에 세웠다.

    “유아 님에게도 알려드리려고 했으니, 지금이 좋겠습니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빙긋 웃었다.

    “제가 알려드릴 건 향음공이라는 소리의 무학입니다. 제대로 익히신다면 향기처럼 자연스레 소리를 퍼뜨릴 수 있을 겁니다.”

    “저, 저도 알려주신다는 겁니까?”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로엔이 제자로 생각하는 유아에게 무학을 전수하는 건 이해되었지만, 자신에게도 알려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물론입니다.”

    “어째서…….”

    아무리 같은 가문이라고 해도 개인의 무학을 알려주는 건 제자나 피붙이가 아닌 이상 굉장히 희귀한 일이다. 그것도 암살자로 살아온 로엔이 이리 쉽게 무학을 알려줄 줄은 몰랐다.

    “흐음, 그리 물어보시면 대답하기 쉽지 않습니다. 저도 제 생각을 전부 말할 순 없으니까요.”

    로엔이 턱을 긁적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조금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라온 님은 지켜보는 맛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입니다.”

    “예?”

    생각지 못한 대답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조금 전 소리에 의지를 담아내지 못했을 때 라온 님은 본인 스스로 문제가 무엇인지,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셨죠?”

    “예.”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엔의 말대로 왜 소리에 의지가 담기지 않았는지 고민했었다.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그 방법을 스스로 찾기보다 제게 먼저 물어봤을 겁니다. 그런 상태에서 자기 스스로 답을 찾으려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죠. 그렇기에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로엔의 표정은 평온했다. 조금 전 같은 흔들림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저, 저도 들어도 되나요? 로엔님?”

    “물론이죠. 유아 아가씨께도 조만간 알려드리려고 했습니다.”

    유아도 로엔이 알려준 오러 연공법을 익히고 있기에 이번에 함께 전하려는 것 같았다.

    “향음공을 더 발전시켜 두 분만의 소리를 만드셨으면 합니다.”

    로엔은 미소를 짓고서 향음공의 구결을 불러주었다.

    “후욱!”

    율리우스는 정겹게 모여 있는 세 사람을 보고 거친 숨을 뱉어냈다.

    “다들 저 잊은 거 아니죠….”

    *     *      *

    루난은 점심이 다 되었을 때 방에서 나와 슬리온 가문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오, 루난!”

    연무장에서 검사들의 훈련을 보고 있던 로칸 슬리온이 루난을 보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왔다.

    “어제 복귀했는데, 바로 수련을 하려는 게냐? 오늘은 좀 쉬어도 된다.”

    로칸은 훈련을 빨리 끝내고 루난과 간식 시간을 즐길 생각이었기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길을 막았다.

    “안 돼.”

    루난이 담백하게 고개를 저었다. 눈빛은 맹했지만, 그 안에는 확고한 의지가 어려 있었다.

    “아이스크림도 준비했는데?”

    “윽….”

    아이스크림이라는 말에 루난의 단호한 표정에 작은 균열이 돋아났다.

    “그, 그래도 안 돼. 아이스크림은 나중에 먹을 거야.”

    잠시 고민하던 루난은 귀를 막은 채 등을 돌렸다.

    “허, 아이스크림마저 거부하다니….”

    로칸이 헛바람을 흘렸다. 루난이 아이스크림을 거부한다는 건 비상 상황이라는 뜻. 무언가 큰 문제가 있다는 의미였다.

    “무, 무슨 일이냐!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것이야?”

    “안 아파.”

    “그런데 대체 왜!”

    “강해져야 하니까.”

    루난이 허리에 찬 설화의 검병을 잡으며 입매를 꽉 조였다.

    “음….”

    로칸이 입술을 깨물었다. 루난이 왜 아이스크림조차 거부하고 수련을 하겠다는 건지 알 것 같았다.

    ‘그 망할 라온 때문이겠지.’

    루난은 라온의 경악스러운 성장을 따라잡기 위해서 강해지고 싶다고 말한 게 분명했다.

    “루난. 라온 놈. 아니, 라온을 따라잡는 건 솔직히 힘든 일이다. 그런 괴물 녀석을 놓아주고, 네 위치에서 네 길을 걷는 게 가장 좋은…….”

    “무슨 소리야?”

    루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 라온을 따라잡으려고 간식도 거부하고, 수련한다는 거 아니더냐?”

    “아냐.”

    “그럼 왜…….”

    생각하지 못한 상황에 로칸의 입이 벌어졌다.

    “아빠랑 엄마랑 사람들을 지키려고.”

    루난은 담담한 목소리로 가문의 모두를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지, 지킨다고?”

    “응. 내가 모두를 지킬 거야. 절대 손대지 못하도록.”

    그녀는 손을 꼭 끌어모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허억!”

    로칸이 가슴을 움켜쥔 채 주저앉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심장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크윽, 돌아왔어! 착했던 내 딸이 돌아왔다고!”

    라온에게 빼앗긴 딸의 관심이 다시 가족에게 돌아온 것 같아서 하늘을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들떴다.

    “라온! 이 녀석아! 우릴 딸은 결국 네가 아니라 날…….”

    “존잘 라온은 왜 자꾸 불러?”

    “으응? 조, 존잘?”

    처음 듣는 단어에 로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존잘이 무슨 뜻이니?”

    “존나 잘 생겼다는 뜻이야. 비슷한 말로 오지게 잘생겼다고 있어.”

    루난은 평온한 얼굴로 존잘과 오지게 잘생김을 설명해주었다. 엔시아의 주입식 교육이 바로 효과를 드러냈다.

    “그니까 라온이…….”

    “응. 라온은 오지게 잘생겼고, 존나 잘 생겼어.”

    “뭐, 그건 뭐…….”

    로칸이 입술을 깨물었다. 반박하고 싶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 본 라온은 남자가 보아도 잘생겼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을 정도였으니까.

    ‘아니다! 상관없어!’

    라온이 잘생겼든 말든 상관없다. 루난의 관심이 돌아온 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루난, 그런데 갑자기 왜 가족을 지키겠다고 생각한 거니?”

    로칸은 루난의 관심을 다시 자신에게 돌리기 위해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건 나와선 안 될 말이었다.

    “존잘 라온이 말했어. 가족은 자신의 손으로 지켜야 한다고. 아빠랑 엄마는 내가 꼭 지킬 거야.”

    루난은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연무장 구석으로 가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어….”

    로칸은 그런 루난의 뒤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그, 그럼 관심이 돌아온 게 아니라….”

    라온 그 망할 놈 때문에 저런 말을 한 거야?

    관심이 돌아와서 좋다고 생각했다. 이제 라온에게도 질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루난은 이제 라온의 말을 따르는 신도가 되어 있었다.

    “이런 제에에에엔장!”

    로칸은 하늘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나 죽을란다.”

    그는 다 포기한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검병을 움켜쥐었다.

    “그냥 뒈질 거라고!”

    “으아아아악!”

    “말려!”

    “당장 잡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슬리온 가문의 검사들이 재빠르게 달려가 로칸의 사지를 붙잡았다.

    “놔! 이렇게는 못 산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루난이 그런 양아치에게 물들어서!”

    분노가 담긴 로칸의 몸짓에 검사들이 우르르 휩쓸렸다.

    “마, 마님! 마님을 불러와!”

    “예!”

    이 일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이었기에 저택에 가장 가까이 있던 검사가 미친 듯이 뛰었다.

    “존잘.”

    루난은 그러거나 말거나 엔시아에게 배운 단어를 중얼거리며 검을 휘둘렀다.

    *     *      *

    라온이 향음공을 익힌 지 일주일이 지났다.

    향음공의 구결은 소리와 오러 그리고 살상력을 잇는 선이 되어주었고, 하급 검사라면 발검술의 소리만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멈출 수 있는 경지까지 도달했다.

    라온은 발검술의 자세를 취한 뒤 만화공의 기운을 운용했다. 검병을 움켜쥔 손목을 위로 살짝 들어 올리며 제천검을 뽑았다.

    우우우웅!

    검날과 검집 사이에서 일어나는 마찰과 동시에 천둥 같은 검명이 번진다.

    퍼어어엉!

    찰나의 순간에 뻗어 나가는 소리의 파동에 전방에 있던 호수에 커다란 울림이 일어났다. 마법이라도 폭발한 듯 호수 중앙이 깊게 파였다가 분수처럼 푸른 물길을 뿜어냈다.

    “흐음….”

    라온이 소나기가 되어 쏟아지는 물방울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부족해.’

    소리에 오러와 살상력을 담는 향음공은 어느 정도 손에 익었지만 그걸 발전시키는 건 지지부진했다.

    -후우, 충분하다! 대체 뭐가 부족하다는 것이냐!

    라스가 시끄럽다는 듯 귀를 막으며 튀어나왔다.

    -네놈 때문에 일주일째 잠을 못 자겠으니, 제발 좀 그만하란 말이다!

    ‘미안.’

    라온이 라스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아무리 세입자라고 해도 지킬 건 지켜줘야 했으니, 바로 사과했다.

    -본왕이 보기에 지금 네놈의 기술은 그 영감이 보여준 것과 결이 같다. 숙련도의 차이는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니, 그만 좀 하고, 잠 좀 자자!

    ‘아! 알겠어.’

    손뼉을 치고서 다시 검병을 쥐었다.

    -아니이이이! 알겠다며! 검은 왜 잡는 것이냐!

    ‘뭐가 부족한지 알겠다고.’

    -이 악마 같은 놈아!

    라스의 비명을 뒤로하고 제천검을 뽑았다. 마찰을 일으키면서 나아간 소리가 오러의 힘을 빌려 호수의 물결을 사선으로 갈랐다.

    ‘됐어!’

    향음공의 구결에 쾌검의 구결을 섞어서 소리와 오러를 더 빠르게 움직였다.

    처음으로 소리에 검술의 묘리를 담는 걸 성공했기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 미친!

    라스도 그걸 느끼고 입을 떡 벌렸다.

    -어, 어떻게 이리 빠르게……

    ‘네가 힌트를 줬잖아.’

    -어?

    ‘숙련도의 차이. 난 향음공보다 검술에 숙련도가 높으니까 소리 쪽이 아니라, 검술에 좀 더 비중을 줬지.’

    이번에는 쾌속의 검기를 쏘아내는 듯한 심상을 그리며 소리와 오러의 속도를 높였다. 라스가 준 숙련도라는 힌트와 이전에 심상을 잘 사용하면 다 된다는 말 덕분에 조금의 성공을 이룬 것이다.

    “고맙다.”

    라온이 히죽 웃으며 라스에게 손짓했다.

    -아, 본왕이…… 본왕의 주둥이가……

    라스는 스스로 본인의 입을 치며 바닥으로 침몰했다.

    ‘그럼 다음.’

    소리에 쾌검의 묘리를 담아내는 걸 성공했으니, 이번에는 무거움을 깃들게 하려고 다시 검병을 쥐었다.

    “도련님.”

    검을 뽑으려고 할 때 뒤편에서 주디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식을 가져왔습니다.”

    그 말과 함께 테이블 위에 쟁반을 올려놓았는데 조각 케이크가 담긴 접시 아래에 얇은 종이가 있었다.

    “고마워.”

    라온이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서 테이블에 앉았다. 차를 한잔 들이키고서 아래에 있던 책자를 펼쳤다.

    “도괴는 본래 지그하르트 직계이자 원로원 소속이지만 지금은 소속이 애매한 상태입니다.”

    주디엘이 눈빛을 가라앉혔다.

    “애매하다?”

    “예. 한참 전의 일이라 저도 몰랐는데, 가주님과 어떤 담판을 짓고 자유를 얻어냈다고 합니다. 지금 그는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지그하르트 소속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륙을 제 마음대로 돌아다녔군.”

    라온이 책자를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괴는 도박과 술, 무학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인물로 대륙 전체를 떠돌며 수많은 기행을 남겼다.

    ‘삼약이 그중 최고지.’

    가장 유명한 건 삼약인데, 도괴가 자신 있어 하는 도박과 술, 무학에서 인정을 받으면 어떠한 소원도 들어준다는 약속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도괴는 여전히 놀려줄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런 괴인이 지그하르트에 있을 줄은 몰랐어.”

    기껏 가문을 벗어난 자가 왜 다시 돌아왔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책자에도 그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도괴는 본인의 일을 잘 말하지 않는 성격이다 보니, 그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본래 방랑하는 성격인데, 이곳에 꽤 오래 머물고 있더군요.”

    “그 이유는 알아. 주기적으로 돈을 가져다 바치는 호구가 있는데, 어딜 가고 싶겠어.”

    라온이 피식 웃었다. 월급 때마다 아니, 돈이 생길 때마다 찾아가 판돈을 퍼주는 호구 엘프가 있으면 자신도 다른 곳에 갈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도련님은 도괴와 삼약을 하시려는 겁니까?”

    “그래. 좀 많이 뜯겨서 찾아와야겠어.”

    “도박도 도박이지만 도괴는 술이 굉장히 강합니다. 도련님은 술을 드셔본 적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오러로 취기를 가시게 하면 분명 눈치챌 겁니다.”

    주디엘은 걱정된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건 걱정하지 마. 난 술에 절대 안 취하니까.”

    라온이 손을 저었다. 이 자신감은 정말 술에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불의 고리가 있으니까.’

    불의 고리는 육체와 정신을 언제라도 최상의 상태로 만드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글렌조차 불의 고리를 익힌 것을 확인하지 못했으니, 도괴가 불의 고리를 눈치채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술은 문제가 안 돼.’

    불의 고리의 힘으로 계속 육체가 정화되는 자신과 조금씩이나마 취기가 쌓이는 도괴의 술 승부는 이미 결정 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도박 역시 옆의 호구. 아니, 마왕이 있으니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었다.

    ‘진짜 문제는…….’

    무학.

    세 번째 내기인 무학에서 그에게 인정을 받아야 도괴에게 소원을 말할 수 있다.

    ‘한참 부족해.’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도박은 라스가, 술은 불의 고리가 있지만, 무학은 방법이 없다. 수련을 통해 발전시키는 게 최선이다.

    라온은 다시 호수 앞으로 다가가 검을 뽑았다. 은빛 칼날에서 터져 나온 굉음이 호수의 중심을 짓눌렀다.

    주디엘은 그런 라온에게 고개를 꾸벅이고, 조용히 뒷걸음질 쳐서 물러났다.

    *     *      *

    삼 주 뒤.

    라온은 여전히 호수 앞에 서 있었다. 풍경을 감상하는 듯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고 호수를 굽어보았다.

    마음을 정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검병 위에 손을 얹는다. 라온의 눈동자에 이채가 깃든 순간 그의 손이 구름처럼 흘러갔다.

    스르릉.

    검이 뽑힌다. 전처럼 오싹한 마찰음이 아니라, 두부를 자르는 듯한 매끄러운 소리와 정제된 검명이 그와 함께 나아간다.

    예리한 칼날이 세상을 향해 청아한 소리를 펼쳐냈지만, 변화는 없었다. 잔잔한 바람을 탄 호수에는 작은 물결만 있을 뿐이었다.

    라온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제천검을 도로 검집에 담았다. 그 순간.

    퍼어어어엉!

    호수의 중심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구름에 닿을 정도로 물길이 솟구쳤다.

    “됐군.”

    라온이 검집을 툭 치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의 성공한 무학은 충의 묘리. 향음공의 응용편에 있던 소리의 응집을 이용하여 오러가 깃든 소리를 압축시켜서 크게 터트리는 새로운 기예였다.

    지난 3주 동안 잠을 버린 채 수련한 덕분에 소리의 무학에 검술의 묘리를 담아내는데 성공했고, 새로운 묘리도 익숙해졌다. 노력한 보람이 와닿아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정말이지 지겨워 죽겠구나.

    라스가 연기처럼 팔찌 위에서 스멀스멀 피어나왔다. 살짝 충혈된 눈동자로 위를 노려보았다.

    -매일 같은 짓거리만 반복하다니, 지겹지도 않느냐!

    ‘재밌는데.’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게 느껴지는데 지겨울 리가 있나. 그저 즐거울 뿐이다

    -이제 좀 가자! 도박이든, 술이든 빨리 끝내고 본왕에게 아이스크림이나 바치거라!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괴를 꺾지는 못하겠지만 그의 인정을 받을 자신감은 가득했다. 의자에 걸어둔 겉옷을 들고 별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네놈이 그동안 긁어모은 돈은 다 어디 갔느냐? 도박하려면 그 돈들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라스는 의문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갑에 넣어뒀지.’

    -지갑? 네놈 지갑 같은 거 안 들고 다니잖느냐.

    ‘불렀으니, 곧 올 거야?’

    -지, 지갑이 온다고? 무슨 미친 소리를….

    “아, 저기 오네.”

    라온은 손가락을 들어 정원 쪽을 가리켰다.

    “부단주님!”

    쉬는 동안 살이 살짝 오른 도리안이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저기 있잖아. 내 지갑이.”

    라온은 도리안의 배 주머니를 보며 씩 웃었다.

    -허….

    라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지갑으로 부르는 라온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놈 진짜 인간 맞아?

    아무리 봐도 마계가 어울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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