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8화
셰릴은 꺼멓게 그을린 채 자빠진 리메르를 구석으로 던져넣고 글렌의 앞으로 다가갔다.
“가주님. 아까 그 표정은 정말 웃음을 참느라 그러셨던 겁니까?”
글렌은 대답 없이 인상을 찡그린 채 손을 뻗었다.
쿠르르릉!
천장에서 한 줄기 벼락이 돋아나 누워있는 리메르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끄어어억!”
반쯤 기절해 있던 리메르가 악을 지르며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왜, 날 왜…….”
그는 제대로 따지지도 못하고 다시 땅에 머리를 박았다.
“네놈이 시작하지 않았더냐.”
글렌은 더 못 쳐서 아쉽다는 듯 주먹을 말아쥐었다.
“가주님.”
셰릴이 눈을 내리감으며 한 발 앞으로 걸어갔다.
“가주님께서 왜 라온을 데리고 임무에 다녀오라고 하셨는지 알았습니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떴다.
“처음엔 하늘의 재능을 받은 운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더군요. 그 아이는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시간만 나면 수련에 빠져들었습니다. 지그하르트 검사 중 훈련에 게으른 사람은 없지만, 라온 정도로 노력하는 녀석은 처음이었습니다.”
라온은 자투리 시간만 나면 검을 휘두르던가 명상에 빠져들었다. 수많은 검사를 봐왔지만, 저 정도로 수련에 빠진 녀석은 처음 보았다.
“외모에서 보이는 대로 냉정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저 표현이 옅은 것뿐 모두를 세세하게 잘 보고 있더군요. 짧은 시간에 정이 들어 저도 모르게 이것저것 챙겨주게 되었습니다.”
셰릴의 음성에는 라온에 대한 호감이 가득 스며들어 있었다.
“저 멍청이가 왜 가주 감이라고 했는지, 가주님이 왜 라온을 특별히 생각하시는지 이해합니다. 지켜보는 맛이 있는 녀석이더군요.”
“크흠. 그런가.”
글렌이 헛기침을 하며 턱을 살짝 올렸다. 억지로 통제하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 아이는 검사로서도, 수장으로서도 크게 될 자질이 있습니다. 앞으로 저도 주의 깊게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그거야 자네 마음이겠지.”
그는 별로 상관없다는 듯 턱을 괴었지만, 입가의 미소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아, 그러고 보니.”
셰릴이 인상을 찡그리며 글렌을 올려보았다.
“라온이 도괴를 만나려는 것 같더군요.”
“도괴? 갑자기 왜?”
“저 멍청이가 어디서 돈을 잃었는지 알고 찾아가려는 듯했습니다.”
그녀는 구석에 처박혀서 숨을 헐떡이는 리메르를 가리켰다.
“왜 거지꼴인가 했더니, 또 도박장에 간 것이냐.”
“이, 이번에는 진짜 아까웠어요.”
리메르가 눈치를 보며 일어나서 머리를 긁적였다.
“마지막 한 끗만 붙었으면 제가 다 빠는 건데 그 한 끗이 모자라서….”
“멍청이.”
셰릴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글렌이 눈썹을 찡그렸다. 평소 혼낼 때와 분위기가 달랐다.
“모두가 네게 바란 건 그런 것이 아닐 거다.”
“전 이런 방법밖에는 모릅니다.”
리메르는 어딘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후우.”
글렌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저 멍청이는 놔두고, 왜 라온이 도괴를 찾아간다는 거지?”
“삼약에 대해 말하고 웃은 걸 보면 저 도박쟁이가 잃은 돈을 따오려는 게 분명합니다.”
셰릴은 조금 전 라온의 대화를 그대로 말해주었다.
“도괴는 지그하르트 소속이지만, 지그하르트가 아니게 된 인물이니, 어느 정도 주의가 필요할 겁니다. 막을까요?”
“그럴 필요 없다.”
글렌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도 한 번쯤은 실수하고, 패배하는 경험도 필요하겠지. 놔두도록.”
“알겠습니다.”
셰릴은 반박하지 않고 그대로 물러섰다.
“그리고…….”
“어? 어어?”
글렌이 손을 뻗자 조용히 알현실을 나가려던 리메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갑자기 절 왜….”
“라온에게 쓰잘데기없는 도박을 가르친 게 네놈이잖느냐.”
“예전에도 말했지만, 전 그런 적 없어요! 진짜 아니라고!”
“네놈 말고 그 아이에게 누가 도박을 가르쳐!”
“아니, 안 한 걸 안 했다고 했을…끄아아악!”
리메르의 억울한 목소리는 천둥소리에 묻혀 땅으로 꺼졌다.
“로엔.”
글렌은 찡그린 인상을 풀고서 미소를 짓고 있던 로엔에게 손짓했다.
“예. 가주님.”
“아까 했던 말 있잖은가.”
“어떤….”
“라온이 손주였다면 동네방네 소문을 냈을 거라는 거 말일세.”
“아, 예.”
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라온의 활약상을 조금 더 퍼뜨리는 건 어떤가. 아니, 라온 때문이라기보다 최연소 마스터를 배출한 가문의 이름값이 올라가는 거니까. 음. 그래. 가문을 위해서 말이야.”
글렌은 평소처럼 냉정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그의 목소리엔 친한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작은 떨림이 있었다.
“가문 홍보라. 나쁘지 않네요.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로엔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셰릴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 아니. 그거 말고….”
리메르가 헉헉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홍보 따위 때려치우고, 라온을 아껴주는 티를 내라고요! 아니, 홍보가 다 무슨 소용이야. 그냥 할아버지로서 손자를 한 번 꼭 안아주고 수고했다. 내 사랑스러운 손자 라온아! 하면 다 되는데 그게 어렵…… 꺄욱!”
그는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뿜어진 붉은 벼락에 연속으로 얻어맞고 바닥을 뒹굴었다.
치이이이익!
리메르의 몸과 의복에서 검은 연기가 살근살근 피어났다.
“그런 건 천천히 제안해야지.”
셰릴은 벼락 네 번을 맞고도 살아 있는 리메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멍청이.”
* * *
라온은 율리우스를 데리고 별관의 정원을 넘었다. 별관이 가까워지자 율리우스의 손이 조금 떨리기 시작했다.
‘긴장되겠지.’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살게 되었으니, 율리우스가 긴장에 떠는 것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예전에 유아를 데리고 올 때도 비슷했던 기억이 났다.
“너무 긴장하지 마. 전부 좋은 사람들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율리우스는 심호흡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 안에 너랑 동갑인 아이도 있어.”
“동갑이라고 하셨습니까?”
동갑이라는 말에 율리우스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아무래도 라이벌 의식을 느낀 것 같았다.
“그래. 잘 지냈으면 좋겠네.”
라온이 피식 웃으며 별관의 문을 열었다.
“어!”
하얀 빵모자를 쓴 채 쟁반을 들고 있던 유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련님!”
유아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파이가 놓여 있는 쟁반을 들고 앞으로 달려왔다.
“이제 오셨군요!”
모자 밑으로 늘어진 양 갈래머리가 나비처럼 펄럭였다.
“잘 지냈지?”
“물론이죠!”
유아는 예전보다 훨씬 생기 넘치는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복귀하셨다고 들어서 모두 함께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거의 다 됐으니 빨리 씻고 오세요.”
“알겠어.”
“근데 저어….”
고개를 끄덕이고 세면장으로 가려 할 때 유아가 율리우스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앞으로 함께 지낼 아이야. 너와 동갑이니까. 잘 지내도록 해.”
“동갑이요? 와! 난 유아야. 반가워!”
유아는 활기찬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틀었다. 쟁반을 들고 있음에도 최대한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
“율리우스 포르잔이라고 합니다.”
율리우스는 동갑이라고 했음에도 존댓말을 하며 고개를 꾸벅였다.
“너도 씻고 빨리 와!”
유아는 빙긋 웃고서 식당 쪽으로 달려갔다.
“동갑이라는 사람이 저분입니까?”
“그래.”
“아, 저는 무인인 줄 알았습니다.”
율리우스의 진지한 표정에 안도감이 피어났다.
“무인이야.”
“예?”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무인의 길을 걷는 아이지. 너처럼 에덴이 노릴 정도의 재능이고.”
“허억!”
그 말에 율리우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가라앉았던 호승심이 다시 튀어나온 듯 눈에 열기가 타올랐다.
“라온!”
“도련님!”
유아가 말을 전했는지 주방과 식당에서 실비아와 시녀들이 우르르 뛰어나왔다.
“우, 우리 아들 얼굴이 반쪽이 됐네! 다친 곳은 다 나은 거야? 응?”
“또 밥도 제대로 안 먹고 다니신 거죠! 얘들아!”
“네! 바로 준비할게요!”
실비아는 얼굴을 만지며 코를 훌쩍였고, 헬렌도 손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시녀들도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식당으로 달려갔다.
라온은 모두의 반응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여전하네.’
실비아와 헬렌은 자신이 마스터에 오른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에덴의 귀신들을 잡은 것보다도 자신이 잘 지냈는지, 다친 곳은 다 나았는지만 걱정해주었다. 마음이 편해졌다.
“다 나았어. 이제 괜찮아.”
라온이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가 큰 거지 마른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정말이지?”
“응.”
“정말 맞지?”
“그래.”
실비아는 3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그녀는 우측에 선 율리우스를 보며 고개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앞으로 함께 살 아이야. 레트란에서…….”
라온은 간단하게 율리우스의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 악마 같은 것들이 또….”
실비아가 입술을 깨문 채 허리를 숙여 율리우스와 눈을 마주쳤다.
“잘 왔단다. 앞으로 널 건드리는 괴물들은 없을 거야.”
“아닙니다. 저는 무인이 될 몸. 언제 어디서라도 싸울 대비를 해야…….”
“걱정 마렴.”
실비아는 고개를 젓는 율리우스를 폭 끌어 안아주었다.
‘또 그 생각이 든 건가.’
남편과 딸을 에덴의 귀신들에게 잃었기에 실비아는 에덴을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평소보다 감정이 격했다.
“으윽, 가, 갑자기 왜…….”
율리우스는 당황했지만, 그녀의 진심이 담긴 따스함이 싫지 않았는지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참고 있지만, 이 녀석도 아직 어리다. 지금까지 힘들었을 것이다.
라온은 어쩔 줄을 몰라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율리우스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잘 왔다. 지그하르트의 별관에.”
* * *
라온은 세면장에서 씻은 뒤 식당으로 들어갔다.
길쭉한 사각 식탁 위에 다양한 음식들이 가득했고, 시녀들은 의자 뒤에 서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잠시 후 헬렌과 유아, 실비아가 하얀색 스튜가 가득 담긴 냄비를 가져와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모두 앉아.”
실비아의 손짓에 라온과 시녀들이 각기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라온의 복귀 기념이자! 라온의 마스터 기념이자! 라온이 영웅이 된 기념이자! 라온이 금색의 패를 받은 기념이자! 라온이 설화검협이라는….”
“엄마….”
라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젓고 나서야 끝나지 않을 듯한 실비아의 말이 멈췄다.
“아, 그래. 여기까지.”
실비아가 빙그레 웃고서 손뼉을 쳤다.
“모두 배가 고플 테니, 밥을 먹기 전에! 마지막으로 최연소 마스터가 된 라온에게 박수!”
“꺄아아아아아!”
“축하드려요!”
“라온 님이 해내실 줄 알고 있었어요!”
“맞아요! 그렇게 노력하셨잖아요!”
헬렌과 시녀들은 모두 축하한다고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보냈다.
라온이 모두와 시선을 마주하며 빙긋 웃었다.
‘역시 이게 좋네.’
손으로는 박수를 보내면서 입으로는 비난을 중얼거리는 협잡꾼들을 상대하다가 진심이 담긴 말들을 들으니 속이 편하고 따스해졌다.
“그럼 식기 전에 먹자!”
실비아는 본인의 음식을 먹기 전에 스튜를 떠다가 라온의 앞에 놓아주었다.
“새로운 레시피로 만든 스튜야. 소고기와 채소 그리고 과일이 듬뿍 들어갔지!”
-오오! 듣기만 해도 침이 고이느니라!
라스가 잉어처럼 팔찌 위로 펄떡 뛰어올랐다.
-어서 먹어라! 본왕을 새로운 맛의 세계로 인도해라!
라온은 전쟁 선언이라도 하는 듯한 위엄을 뿜어내는 라스를 밀어내고 스튜가 담긴 그릇을 잡았다.
“고마워요.”
실비아에게 고개를 꾸벅이고 스튜를 한입 떠먹었다.
첫맛은 소고기의 농축된 풍미가 잘 느껴졌고, 중간에는 스튜 본연의 짭짤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끝에서는 과일의 달달함이 은은하게 돋아나는 신기한 음식이었다.
-하아아, 세 가지 맛이 아주 조화롭게 혀를 휘젓는구나. 감탄스러운 작품이니라.
‘그러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일이 들어갔다고 해서 별로라 생각했는데, 짜 맞춘 것처럼 잘 어울렸다.
-그렇다고 기본에서 벗어나지도 않아. 정성이 가득 담기면서도 새로운 맛이 잘 스며들어 있다. 마음에 드느니라.
라스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밥은 집밥이 제일이지.
‘…….’
라온이 어처구니가 없는 눈으로 라스를 보았다.
너희 집 마계잖아.
* * *
-좋구나.
라온은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내고 배를 두드리는 라스와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 노크가 세 번 들려왔다.
“들어와.”
대답 없이 문이 열리고 주디엘이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별일 없었지?”
“조금 전까지는 없었는데….”
주디엘이 짧게 입맛을 다시고 말을 이었다.
“중무전에서 라온 님이 특별히 부상을 입은 곳이 없는지, 후유증이 생긴 곳은 없는지 알아보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후유증이라….”
라온이 피식 웃었다. 카룬은 참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은 놔둬. 바로 이야기하면 의심을 사게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주디엘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부탁이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도괴에 대해서 조사해줄 수 있어?”
“도괴삼약의 그 도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라온이 짐을 빼낸 배낭을 옆에 놔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박장에서 단장님의 돈을 따가던 게 평범한 도박꾼이 아니라, 도괴였던 모양이야. 내 돈은 되찾아야지.”
-그거 네 돈 아니라니까.
라스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옛 인물이다 보니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최대한 최신 정보로 찾아보겠습니다.”
주디엘은 믿음직스러운 말과 함께 방을 나갔다.
-아까부터 말한 도괴가 무엇이냐?
‘도박과 술, 싸움을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한 명 있어.’
라온이 옅게 웃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라스. 기분 좋지?”
-음, 나름 괜찮으니라. 이제 푹 쉬면 좀 더 좋아지겠지.
“아이스크림 안 땡겨?”
-땡기느니라! 식후라 그런지 단게 무지하게 당기고 있느니라!
라스는 혀를 살짝 빼낸 채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은 그런 라스의 반응을 즐기며 씩 웃었다.
“그럼 우리 일 하나 할까?”
* * *
다음날.
라온은 유아와 율리우스를 데리고 로엔이 관리하는 정원으로 향했다.
“로엔 님!”
그동안 많이 가까워졌는지, 유아는 로엔에게 손을 흔들며 달려갔고, 율리우스는 어색한 걸음으로 라온의 뒤를 따랐다.
“부단주님도 함께 오셨군요.”
유아의 손을 잡아준 로엔이 라온을 보며 빙긋 웃었다.
“얼마나 배웠나 한번 보고 싶어서요. 그리고….”
라온이 율리우스의 등을 살짝 밀어서 앞으로 보냈다.
“이곳에 오는 동안 기초 자세를 잡아주기는 했는데 잘 봐줄 사람이 필요해서 이 녀석도 부탁 좀 드리려고 합니다.”
“후후, 비슷한 나이이니 함께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요.”
로엔은 유아와 율리우스를 번갈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눈치가 빠르시네.’
그 역시 유아와 율리우스에게 라이벌 의식을 만드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럼 몸부터 풀고 시작하죠.”
로엔은 시범을 보이듯 손목과 발목을 돌렸다. 작은 동작에서 점차 크게 움직여 몸 전체를 풀어주는 준비 운동이었다.
“율리우스 님은 라온 님께 무얼 배웠나요?”
“무학의 기본자세를 배웠습니다. 대기 자세와 삼대 기본 자세, 그리고 마보 같은 훈련법도 익혔습니다.”
율리우스는 이곳에 오는 동안 배웠던 기초들을 하나씩 읊었다.
“그렇군요.”
로엔은 율리우스를 차분히 살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달리는 게 좋겠습니다.”
“예?”
“이 정원은 바닥이 부드러워서 달리기 좋은 곳이죠. 일단 10바퀴만 돌아볼까요?”
“어….”
율리우스는 로엔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는 자세를 잡은 뒤 정원을 뛰기 시작했다.
“흐음, 예상외로 거부하지 않는군요.”
로엔은 의외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인정하는 거죠.”
라온이 달려가는 율리우스의 등을 보며 옅게 웃었다.
“인정?”
“저 녀석은 본인이 인정한 사람의 말만 듣는다고 하더군요. 로엔 님을 인정해서 따르고 있는 겁니다.”
“그건 재밌군요.”
로엔은 율리우스가 정원 수풀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럼 우리도 시작하죠.”
“네!”
유아는 로엔을 따라 정원 중심에 섰다.
“소리라는 건 세상 만물 어디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머리를 스치는 바람에도, 이 아름답고 생생한 꽃잎에서도 혹은 쇠를 두드려 만든 검에서도 소리가 나죠.”
“네! 알고 있어요.”
유아의 양 갈래머리가 토끼 귀처럼 쫑긋 흔들렸다.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즐기는 것도 좋지만, 저희 같은 사람은 그 소리를 조금 더 듣기 좋게 만들 수 있습니다.”
로엔이 왼손과 오른손을 동시에 들어 가볍게 손뼉을 쳤다.
파아앙!
청아한 박수 소리가 정원에 울려 퍼진 순간 시원한 바람을 쐰 듯 머리가 맑아지고 여정의 피로와 나른함이 순식간에 가셨다.
“와아, 시원해요!”
유아도 그걸 느꼈는지 폴짝 뛰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의 소리는 대기 중의 마나에 여러분들의 정신을 맑게 해주는 특별한 방법을 섞은 겁니다.”
로엔이 빙긋 웃었다.
“허….”
라온이 입을 떡 벌렸다. 소리를 이용한 무학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고작 박수 한 번에 명상을 한 듯한 기분을 느낄 줄은 몰랐다.
“로엔 님.”
라온이 손을 들어 올렸다.
“방금 소리와 반대로 박수만으로 적을 죽… 아니, 공격할 수도 있습니까.”
죽인다는 말을 하려다가 유아를 보고 말을 바꿨다.
“그야 물론이죠.”
로엔이 서늘한 미소를 그리며 몸을 돌렸다.
“한 번 느껴보시겠습니까?”
“예.”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며 로엔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그럼….”
로엔이 손을 조금 더 크게 벌린 뒤 손뼉을 쳤다. 그의 단전에 있던 오러가 대기를 휘감으며 살기가 담긴 파동을 일으켰다.
삐이이익!
제대로 느껴보고 싶어서 대비하지 않았기에 귓가에 큰 이명이 들리며 일순간 몸이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고 속이 울렁거렸다.
‘박수 소리를 매개로 대기 중에 오러를 퍼뜨리는 거였어.’
정신을 깨우기도, 멍들게 하기도 하는 이 소리의 무학은 검술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본인이 일으킨 소리에 오러를 담아 상대를 공격하거나, 힘을 북돋아 주는 방식이었다.
‘구결 자체는 모르겠지만 대충 따라 할 수는 있겠어.’
불의 고리를 공명시켰고, 로엔이 너무도 잘 보여줬기 때문에 박수에 살기를 담는 방식은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수 대신 검명을 이용하면 돼.’
발검할 때의 마찰 소리와 검의 울음소리인 검명의 진동을 이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방식이었다.
“역시 도련님은 배우는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군요.”
로엔은 오러를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받을 줄 몰랐다는 듯 기꺼운 미소를 지었다.
“저도 한 번 해봐도 되겠습니까?”
“방금 그거 말인가요?”
“예.”
“물론입니다.”
로엔은 기대가 된다는 듯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아야. 내 뒤로 와.”
“아, 네.”
유아를 뒤로 보내고, 율리우스의 위치를 확인했다. 두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걸 확인하고 제천검의 검병을 쥐었다.
‘핵심은 그리 다르지 않아.’
검술과 소리의 무학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요한 건 소리에 오러를 얼마나 빨리 제대로 담아내느냐의 문제였다.
“그럼 가겠습니다.”
라온의 눈동자에 붉은 섬광이 깃든 순간 제천검이 은빛 송곳니를 드러내며 용음을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