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27화 (227/653)

제227화

지그하르트로 출발하기 전 요난 가문.

“웃으라구요?”

라온은 실실 웃는 페드릭을 보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는 글렌의 진짜 얼굴을 보고 싶다면 활짝 웃으라는 요상한 조언을 해주었다.

“그래. 이틀 전 나한테 보여준 미소처럼 그놈 앞에서 환하게 웃어봐라.”

“웃는다고 뭐가 변할까요?”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다를 게 없을 거 같은데.’

이번에도 글렌은 무표정으로 임무에 대한 보수만 챙겨줄 것이다. 그의 철가면은 뭘 해도 벗겨질 것 같지 않았다.

“일단 해봐. 무조건 변화가 있을 테니까.”

페드릭은 확실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웃으라는 조언을 추가했다.

“가주님이 엔시아 님도 아니고….”

가진 외모의 특별함은 어느 정도 알게 되었지만 글렌에게 통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엔시아보다 그 철가면 놈에게 더 효과 있지.”

“예?”

“너와 그 녀석은 손주와 할아버지의 관계 아니더냐.”

페드릭은 이제 대놓고 글렌을 밝히고 있었다.

“가주님은 손주가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별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글렌은 실비아는 물론이고 다른 자식들에게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웃음에 반응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본래 할애비는 손주들이 뭘 해도 좋아하는 법이지만, 넌 18살에 마스터에 오르고, 의협으로 대륙에 이름을 떨친 기깔난 손자지 않느냐. 속으로 크게 기뻐하고 있을 테니, 네 미소로 한 방 먹인다면 그놈도 분명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야.”

“으음.”

“그리고 실비아와 너는… 아니다.”

페드릭은 말을 멈추고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해보면 후회할 일은 없을 게다.”

그는 무조건 웃으라고 말하며 떠나갔다.

*     *      *

라온은 미소를 유지한 채 글렌의 얼굴을 살폈다.

‘이게 무슨 표정이지?’

글렌의 표정은 오래된 나무껍질처럼 주름졌고, 힘을 준 종이처럼 구겨졌다. 간단히 말해서 기괴하리만큼 어색한 표정이었다.

‘전혀 안 웃는데?’

다만 페드릭의 장담과 달리 웃음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변화는 있느니라.

‘그건 맞아.’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글렌의 입매는 얼굴을 심하게 찡그린 것 이상으로 꿈틀거렸고, 깊게 가라앉은 눈빛 역시 돌을 떨어뜨린 듯 찰랑였다.

“푸후웁!”

밑에 있던 리메르의 웃음소리가 요상해진 분위기를 깨웠다.

슬쩍 뒤쪽에 눈길을 보냈다. 자신의 미소를 본 사람은 글렌과 로엔 두 명뿐이었기에 다른 대주들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너. 아니, 라온 지그하르트….”

글렌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이고 나서 그의 표정이 평소대로 아니, 얼음장을 두른 듯 전보다 더 싸늘해졌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그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를 흘리고서 로엔에게 손짓했다.

“예.”

얼떨떨하게 서 있던 로엔이 금색의 패가 들린 적색 판을 가지고 다가왔다.

“훌륭히 임무를 완수한 광풍 부단주에게 금색의 패와 적금보고 1회 출입권을 하사한다.”

글렌은 조금 전과 달리 직책을 말하며 금색의 패를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두 손으로 금색의 패를 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웃지는 않지만, 표정이 변하긴 했어.’

글렌의 웃음을 보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미소가 그에게 영향을 끼친 건 분명했다.

‘다만 그 의미를 모르겠군.’

전생이든, 현생이든 평범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글렌의 저 반응이 무얼 뜻하는 건지 정확하게 와닿지 않았다. 페드릭의 말대로 그가 자신을 싫어하지만은 않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와아아아아아!”

“라온 잘했다! 역시 우리 부단주!”

광풍단과 천검대가 환호를 터트리고, 리메르가 손을 마구 흔들었다. 셰릴도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보냈다.

라온이 뒤를 돈 후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게 편하지.’

깜깜한 글렌의 감정과 달리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는 시선들이 쏘아진다. 감탄, 대견, 호승심, 질투, 분노, 그리고 악의까지. 여러 감정이 섞인 눈빛들을 받아들이며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버렌 지그하르트 앞으로.”

글렌의 나지막한 부름에 버렌이 일어서서 단상 위로 올라갔다.

“단주와 부단주가 없는 상태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적절한 인원 배치와 판단으로 사람들을 보호하고,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토대를 쌓은 공을 높이 사 동색의 패를 수여한다.”

“감사합니다!”

버렌이 우렁차게 소리치며 고개를 숙였다.

“와아아아!”

“축하한다!”

이번에도 광풍단과 천검대가 환호 보냈다. 다만 무시하거나 짜증을 낼 거라 생각했던 카룬이 평범하게 박수를 쳤다.

‘꿍꿍이가 있나?’

라온은 카룬 지그하르트를 살피며 눈썹을 내렸다. 한 번 아들을 버린 저 냉혈한이 그냥 박수를 보낼 리 없다. 분명 어떤 속셈이 있을 것이다.

“으음….”

버렌도 놀랐는지 눈을 부릅뜬 채로 계단을 내려왔다.

“다음 마르타 지그하르트.”

글렌은 버렌만이 아니라, 함께 갔던 마트타, 루난, 도리안, 크레인에게도 각자 동색의 패를 하사했다.

라온은 상을 받는 모두를 축하해주며 금색의 패를 살폈다. 패 중앙에 새겨진 불타는 검 문양을 보며 주먹에 힘을 쥐었다.

‘이게 몇 개 있어야 어머니를 직계로 올릴 수 있을까.’

적금보고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반대를 해대는 인간들이 한가득이니, 절대 쉬운 일은 아닐 거다.

다만 이번처럼 모두의 입을 다물게 만들 실적을 몇 번만 더 세운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라온은 살벌한 눈빛을 보내는 직계들의 시선을 마주하며 씩 웃었다.

‘기다려.’

곧 너희와 같은 자리에서. 아니,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 봐줄 테니까.

*     *      *

대륙 남부 로베르트 세력 내의 낡은 주점.

아직 태양이 쨍쨍한 시간임에도 주점 내부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주점 중앙 무대에서는 강렬한 바이올린의 선율이 울려 퍼졌다.

무대 중앙에 선 모험가 차림의 남성은 선명한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누군가의 영웅담을 늘어놓았다.

“그는 광혈귀의 거대한 주먹을 피하며 기회를 엿봤습니다. 광혈귀의 동작이 커진 순간 질풍처럼 검을 뻗어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죠! 익스퍼트가 마스터를 숨통을 끊은 대륙 최초의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용맹은 그곳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남성이 주점의 끝으로 긴 손을 뻗으며 긴장감을 이어갔다.

“그는 거리낌 없이 깜깜한 숲으로 들어가 적랑귀와 흑익귀의 강기를 가르고, 죽음을 각오했던 성자와 아이를 구해냈습니다! 그 뒤로 피와 살이 튀기는 치열한 접전이….”

그는 격해진 바이올린 소리에 맞게 목소리를 높이고 발을 굴러가며 라온과 적랑귀, 흑익귀의 전투를 생동감 넘치게 표현했다.

“…마지막이야말로 이번 전투의 백미입니다. 악양귀와 라온 지그하르트는 일합대결로 승부를 가리기로 했고, 각자 전력을 다해 검을 맞부딪쳤습니다! 당연히 모든 힘을 쓰고, 부상을 당한 라온이 밀렸지만, 그는 끝까지 쓰러지지 않고 버텼습니다. 왜냐! 그 뒤에는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으니까! 그는 악양귀의 힘에 밀려 나무에 처박혔음에도 다시 일어서서 검을 들었습니다. 악양귀도 그 투지에 감명을 받았는지 무승부로 하자고 말하며 물러났습니다!”

남성이 주점 전체가 울리도록 손뼉을 쳤다.

“이 신화 같은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어린 시절 받았던 도움을 잊지 않고 목숨을 바쳐 은을 갚은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설화검협이라는 이명을 붙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설화검협의 영웅담은 대륙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그는 18살에 마스터에 오른 천재 검사의 소식이 대륙을 울리고 있다고 외쳤다.

“우오오오오!”

“그런 용맹한 자가 북쪽에도 있었다니!”

“지그하르트! 북방의 패자는 아직 죽지 않았군!”

“은을 알고, 신념을 지닌 검사가 로베르트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게 아쉽구만!”

“그런 검사가 이곳에 있었다면 더 좋았을 터인데!”

“18살에 마스터라. 최연소 나이를 대체 몇 년 앞당긴 건지 모르겠군.”

“데루스 가주님과 잘 맞을 듯한 영웅이야.”

주점에 있던 사람들은 환호를 지르며 라온의 이름을 외쳤다. 중간중간 거짓말이라던가, 과장이 됐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남성의 연기에 빠져들어 반론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봐! 더 말해보라고!”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됐는데!”

“정말 18살에 마스터를 찍은 거야?”

“대륙십이성에 들어간 우리 도련님보다도 훨씬 빠르잖아!”

사람들은 남성과 바이올린 악사에게 돈을 던지고, 음식과 술을 주문해주며 뒷이야기를 말해 달라고 소리쳤다.

“물론입니다! 당연히 더 있죠. 라온 검사의 치료 능력에 관한….”

음유시인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할 때 주점 끝자리에 앉아 있던 허름한 차림새의 청년이 일어섰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에 금화를 내려놓고 주점을 나갔다. 천천히 달리기 시작한 그가 향하는 곳은 로베르트 가문의 대저택이었다.

청년의 복장은 여행자만도 못했음에도 누구도 그의 길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로베르트 가문의 중심. 가주전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아버지!”

그는 가주전 안쪽으로 내달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데루스 로베르트의 집무실을 두드렸다.

“들어오거라.”

안에서 들려 온 다정한 목소리에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길래 그리 급한 것이냐. 레폰.”

데루스 로베르트는 어깨 위로 흘러내린 은발을 뒤로 넘기며 빙긋 웃었다.

“혹시 라온 지그하르트 검사님에 대한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데루스의 막내아들 레폰이 주먹을 움켜쥔 채 턱을 떨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데루스는 눈빛을 가라앉힌 채 그 이름을 되뇌었다.

“예! 18살에 마스터에 오르고, 에덴의 귀신 셋을 베어버린 무패의 검사! 설화검협 라온 지그하르트요! 지금 영지 전체에 소문이 파다해요!”

레폰은 흥분했는지 콧김을 길게 뿜어내며 두 눈을 빛냈다.

“저하고 고작 3살 차이인데, 그런 처절한 싸움을 이겨내고, 마스터에 오르다니, 존경스러울 정도입니다!”

“아, 나도 들었다. 대단한 아이더구나. 아니, 그 정도라면 검사라고 해야겠지.”

“전 다른 것보다 악양귀와 일합대결을 벌인 게 너무 가슴이 뜁니다. 절대 쓰러지지 않는 투혼! 저도 그런 영웅을 꿈꾸고 있으니까요!”

“그래. 그랬지.”

데루스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런 영웅이 되려면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않을까?”

“어….”

“수련을 빼먹고 주점에 가는 일도 없어야 하고.”

“으윽! 다, 당장 할게요!”

레폰이 어깨를 찔끔 떨고서 뒤로 물러섰다. 도로 나가려던 그는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열심히 수련하면 저도 라온 님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조금 늦을 수는 있겠지만 분명 가능할 게다.”

데루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레폰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밖으로 나갔다.

고오오오.

홀로 남은 데루스의 미소는 레폰에게 보여줄 때와 같았지만 집무실의 공기는 지독할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창살에서 쏟아지는 햇살조차 얼어버릴 지경이었다.

“마티오.”

그의 부름에 천장에서 검은 그림자가 떨어져 내렸다. 그림자가 바람 부는 웅덩이처럼 물결치며 검은 야행복에 얼굴도 복면으로 가린 남성의 모습으로 변했다.

“보고하라.”

“테머스가 만든 덫을 깨부수고, 놈을 벤 건 천검대주 셰릴이라고 합니다. 시체들의 흔적에도 셰릴의 기운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라온 지그하르트도 움직이긴 했지만, 보조적이었지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마티오라 불린 복면인은 기계라도 된 듯 똑같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요난 가문에서 테머스의 치료를 거절하게 만들고, 시녀의 정체를 파악한 것도 셰릴이라고 소문이 퍼졌지만, 처음에는 라온 지그하르트가 벌인 일이라는 이야기도 돌았습니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마스터라는 정보는?”

“사실입니다. 암시장에서 라온의 경지를 마스터로 확정 지었습니다.”

“18살에 마스터라….”

데루스가 빙긋 웃었다. 그 서늘한 미소와 함께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쿠구구구구!

집무실의 공기가 또 한 번 변한다. 책상도, 책장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지만, 이 공간 전체의 마나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끄으윽….”

마티오는 그 중압을 견디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재밌지 않아?”

데루스가 더 진한 미소를 그리며 턱을 모로 틀었다.

“테머스. 그 멍청한 새끼 하나 때문에 지그하르트에 18살짜리 마스터가 나왔다는 게?”

테머스가 일을 잘 처리했다면 라온이 마스터에 오를 일도, 요난 가문 지배 계획이 실패할 일도 없었다.

그 버러지 하나에 일이 이렇게까지 꼬였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거기다 라온이 마스터가 되기 전 최연소 마스터는 로베르트의 것이었다. 준비했던 계획들이 모조리 깨진 분노에 눈앞에 보이는 모든 걸 깨부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셰릴이 모든 일을 다 처리했다고 했지?”

“그, 그렇습니다.”

마티오는 입에서 검은 피를 흘리며 대답했다.

“내 생각은 달라.”

“예?

“평소 그년의 행동거지와는 차이가 있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어느 부분에서든 끼어든 게 분명해.”

데루스가 세상을 짓누를 듯 뿜어내던 기운을 가라앉혔다.

“흐윽!”

마티오의 몸이 쓰러질 듯 휘청였다.

“라온에 대해서 조사해. 어미와 아비는 누구인지, 친한 사람은 누구인지, 목적은 무엇인지. 익힌 무학과 약점은 무언인지까지.”

“그건 이미 최선을 다해서 진행 중인 일….”

“최선? 최선 따위는 필요 없다. 일을 제대로 확실히 해오란 말이다.”

“아….”

“다른 거 다 필요 없어. 그놈의 정보에 집중해.”

데루스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음에도 마티오는 괴수의 포효를 들은 것처럼 눈동자를 떨었다.

“18살에 마스터에 올랐다는 건 장래 대륙의 판도를 바꿀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글렌이 멈추기 전처럼 다시 지그하르트가 세력을 떨칠 수도 있다는 말이지.”

데루스의 얼음장 같은 눈동자에 지독한 살기가 흘러내렸다.

“그 전에 죽여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     *      *

천검대의 검사들의 수여식까지 끝난 뒤 글렌의 시선은 가장 끝에 있는 율리우스를 향했다.

“앞으로 오라.”

“아, 예!”

율리우스는 천천히 심호흡하고서 정중한 걸음걸이로 단상 앞에 섰다.

“이름이 뭐지?”

글렌은 냉정함이 잦아든 눈길로 율리우스를 내려보았다.

“유, 율리우스 포르잔이라고 합니다!”

“그 녀석이 추천한 이유가 있구나. 그 자질에 걸맞은 노력을 하도록 해라.”

‘성자님께서 미리 말하셨군.’

라온이 율리우스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글렌의 말을 들어보니 성자가 미리 율리우스에 대한 정보를 보낸 것 같다.

“예! 감사합니다!”

율리우스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귀족다운 예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으음….”

“저런 말씀을 하실 정도인가?”

“또 뭘 데리고 온 거지.”

이제야 율리우스를 본 대주들은 글렌의 인정을 받은 자질을 확인하기 위해 기감을 끌어 올렸다.

“무슨 마나 회로가 저리 넓게….”

“단전 역시 저 나잇대의 아이에 비해 2배 이상 커.”

“체격은 좀 모자라지만, 내부는 직계 이상의 재능이다.”

율리우스의 재능을 확인한 대주들은 욕심이 그득한 눈빛을 보냈다. 이 자리만 벗어나면 억지로라도 데리고 갈 기세였다.

“라온 지그하르트. 네가 데리고 왔으니, 저 아이는 네가 책임지도록 해라.

글렌은 그들의 생각을 알고 있는 듯 아예 소속을 확정시켜주었다.

“명을 받듭니다.”

라온이 고개를 숙였다. 처음부터 별관에 데리고 갈 생각이었기에 당연히 받아들였다.

“오늘은 이것으로 끝이다. 모두 돌아가도록.”

글렌은 귀찮으니 빨리 나가라는 듯 손짓했다.

대주와 단주들은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글렌에게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서 알현실을 떠났다.

물론 직계와 그들을 따르는 방계들은 끝까지 추한 눈빛을 감추지 않고 이쪽을 쏘아보았다.

“훗.”

라온은 코웃음을 치며 율리우스를 데리고 알현실 문으로 향했다. 나가기 전 뒤를 돌아보았는데 글렌의 표정은 처음 봤을 때처럼 공허하고, 지루해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문을 닫고 나갔다.

-빨리 가자! 별관의 밥이 그리웠느니라!

라스는 유아의 밥이 기대된다며 팔찌 위에서 어깨춤을 덩실거렸다.

“라온.”

“라온!”

피식 웃으며 가주전을 나가려고 할 때 리메르와 셰릴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축하한다.”

리메르가 엄지를 들어 올리며 히죽 웃었다.

“금패는 예상했는데, 적금보고까지 주실 줄은 몰랐어.”

“저 멍청이 말대로 적금보고 출입권은 특별해. 정말 좋은 기회가 될 거다.”

셰릴이 리메르를 밀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쓰는 게 좋을까요?”

“일단 지금은 아니다.”

“맞아. 좀 놔둬.”

리메르가 셰릴의 옆으로 붙으며 손바닥을 흔들었다.

“보고 안에는 무구, 아티팩트, 무학서, 영약 등 다양한 물건들이 있어. 가주님도 함부로 쓰지 않는 가문의 보물들이니까. 네가 무언가에 부족함을 느낄 때 들어가도록 해.”

“도박쟁이가 웬일로 제대로 된 조언을?”

“다만 내가 살아보니까 결국 돈이 최고다! 그 안에 한 뼘의 태양이라는 보석이 있는데 그것만 팔면 평생…커헉!”

셰릴이 리메르의 허리를 걷어차고서 인상을 찡그렸다.

“저놈 말은 듣지 마. 세상에는 돈보다 중요한 가치가 많아. 네게 모자란 부분을 보충할 기회로 삼도록 해.”

그녀도 지금은 가지 말라고 조언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미소를 지으며 나름 진심을 담아 조언한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그럼 이만… 아!”

돌아가려다가 생각난 게 있어서 다시 돌아와 허리를 잡고 일어나는 리메르에게 다가갔다.

“아까 말씀하신 삼약. 도괴의 삼약을 말씀하신 거죠?”

“어? 네가 그걸 알아?”

리메르가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시 그랬군.’

도괴라면 리메르가 돈을 잃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럼 정말 다 잃으셨겠네요.”

“뭐어….”

리메르는 제대로 대답도 못 하고 눈을 돌렸다.

“멍청이.”

셰릴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라온은 거지꼴이 된 리메르를 살피고서 눈썹을 찡그렸다. 도괴의 도박 실력은 인정하지만, 계속해서 자신의 돈을 빨아간 건 절대 놔둘 수 없었다.

‘도괴에게 날아간 내 돈을 찾아와야겠는데.’

-…그게 왜 네 돈이냐?

*     *      *

알현실이 텅 비었을 때 로엔이 단상 위로 올라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위험하셨습니다.”

“그래.”

글렌이 손으로 눈을 가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훅 들어오니, 정신을 못 차리겠더군.”

라온의 활약을 들은 모두가 입을 다무는 것만으로도 날아갈 듯 만족스러웠는데 그 녀석이 갑자기 환하게 웃으니까 한순간에 머리가 멍해졌다.

‘파괴력이 엄청나군.’

평소 표정을 드러내지 않던 손자 녀석이 발광석 수백 개를 켠 듯한 찬란한 미소를 짓자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몇십 년 만에 심장이 요동칠 정도의 충격이었지만 초월자의 정신력을 발휘하여 간신이 버텨낼 수 있었다.

‘오러마저 운용했지.’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막기 위해서 누구도 눈치챌 수 없게 찰나의 순간에 오러를 운용하여 표정을 관리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모두의 앞에서 풀린 얼굴을 보여줄 뻔했다.

“그런데 왜 웃은 건지 모르겠어.”

글렌이 눈썹을 찡그렸다. 라온의 웃음은 보상을 받은 기쁨의 미소가 아니라, 순수한 웃음이었기에 심장에 무리가 갈 정도로 충격이 컸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한테도 강렬하더군요.”

로엔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서부터 라온을 봐왔고 안쓰러워했기에 그에게도 라온의 미소는 칼날보다도 날카로운 무기였다.

“앞으로 조심해야겠군….”

글렌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어쩔 수 없다?”

“18살에 마스터에 올라 대륙 역사상 최연소 마스터가 되었으며, 협의마저 넘쳐서 검협이라는 이명마저 얻지 않았습니까. 외모마저 뛰어나니, 이뻐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합니다.”

로엔이 힘이 빠져 보이는 글렌을 보며 빙긋 웃었다.

“라온 도련님이 제 손자였다면 저는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손자 자랑을 하고 다녔을 겁니다.”

“으음….”

글렌이 눈을 내리감았다. 자신의 그런 모습을 생각하니 꼴불견이었다.

‘다만….’

왜 끌리는 것이지?

꼴불견이고, 못났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상하게 자랑하고 싶었다. 이곳저곳만이 아니라, 스케일을 키워서 대륙 전체에 라온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다.

“후우.”

글렌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쳤지.’

힘이 빠져서 헛생각이 떠올랐다고 여기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바보 같은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려고 할 때 노크도 없이 알현실 문이 열렸다.

“푸하하하하! 가주님! 라온이 웃는 거 보고 놀라신 거죠? 그런 바보 같은 표정은 나도 처음… 끄헉!”

글렌은 리메르가 입을 다 털기 전에 손을 뻗었다.

콰르르르릉!

찰나의 순간 땅에서 붉은 우레가 치솟아 리메르의 육체를 휘감았다.

“꺼어억….”

쇳덩이조차 녹여버릴 강렬한 벼락 줄기에 리메르는 까맣게 탄 채로 바닥에 뒹굴었다.

셰릴은 그런 리메르를 한심한 눈으로 보다가 또 한 번 혀를 찼다.

“멍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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