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24화 (224/653)

제224화

라온은 크른 숲을 쭉 둘러보고서 검병을 움켜쥐었다.

‘시체가 전부 사라졌군.’

레트란에 도착하기 전 마차를 습격했던 암살자들의 시체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인외의 발자국이 가득한 걸 보면 몬스터나 짐승들이 물어간 것 같았다.

‘데루스 로베르트가 치웠을 수도 있고.’

그 미친놈이라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암살자들의 시체를 처리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어쨌든 한 방 먹인 것 같아서 시원하긴 하네.’

화나서 주체 못 하고 있겠지.

데루스는 지독할 정도의 완벽주의자다. 행동하기 전에 계획을 짜고 100% 확실할 때만 움직인다.

10년을 넘게 준비한 요난 가문 지배 계획이 모조리 박살 났으니 미치고 팔짝 뛰고 싶을 것이다.

‘내 소문도 들었겠지.’

이번 일을 통해 지그하르트는 대륙 역사상 최연소 마스터를 보유하게 되었고, 요난 가문과도 더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되었으니, 데루스는 배알이 꼬여 이를 악물고 있을 게 뻔했다.

‘그 얼굴 좀 보고 싶네.’

라온은 데루스 로베르트의 일그러진 표정을 떠올리며 씩 웃었다.

“와아아, 혼자 웃는 것도 잘생겼어. 태양이 필요 없네.”

엔시아는 아예 팔을 창문에 걸친 채 멍하니 라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녀들이 막아도 소용이 없었다.

“도리안. 그쪽으로 가면 안 돼.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악마가 있다.”

크레인이 라온의 옆으로 붙으려는 도리안을 말렸다.

“나도 알고 있는데, 왜 혼자 웃으시나 해서.”

도리안이 라온의 옆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봐라. 18살인데 소드 마스터에 오르고, 성자님을 구해서 설화검협이라는 이명도 얻은 데다가, 잘 생기기까지 했는데 웃음이 안 나겠냐?”

크레인이 구겨진 종이처럼 인상을 찡그렸다.

“나라면 하루 종일 헤죽거릴 수도 있어!”

“윽…….”

도리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음?”

우측에 엔시아와 비슷할 정도로 라온만 바라보는 꼬마가 있었다.

‘율리우스라고 했었지.’

아직 대화해보진 못했지만, 저 아이가 무에 큰 재능이 있고, 라온을 따라 지그하르트로 간다는 건 알고 있었다.

“숲이 좀 어둡지?”

도리안은 가볍게 말이라도 걸어볼 생각으로 율리우스 옆으로 다가갔다.

“그래. 애들한테는 좀 무서울 수 있겠네.”

크레인은 겁을 주듯 목소리를 깔았다.

“사실 여기에는 귀신이 나온다는…….”

“죄송합니다만.”

율리우스는 도리안과 크레인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였다.

“라온 님이 보이질 않으니,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그는 두 사람에게 빨리 나오라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어?”

“어어?”

도리안과 크레인은 예상치 못한 율리우스의 반응에 입을 떡 벌렸다.

“바, 방금 뭐라고…….”

“전 지금 라온 님을 보며 제 미래를 그리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나와주십시오.”

율리우스의 어조는 참으로 정중했지만, 하는 말은 ‘니들 따위 보고 싶지 않으니 비켜.’였다.

“으음, 부단주님을 보며 무슨 미래를 그린다는 건데?”

도리안이 억지로 표정 관리를 하며 율리우스를 보았다.

“할아버지께서 강한 무인은 존재만으로 공부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라온 님이 어떻게 세상을 살피고, 어떻게 말을 타는지 보며 배워야 할 점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리우스는 정중한 말투로 대답을 해주었지만, 빨리 비키라는 듯 눈빛이 살벌했다.

“아, 그거라면 나를 봐도 돼.”

크레인이 엄지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나도 검 좀 쓰고, 말은 정말 잘 타거든. 솔직히 승마는 내가 부단주님보다 나아! 특별히 날 살피는 걸 허락하지.”

그는 다섯 살 때부터 말을 타왔다며 자랑하듯 중얼거렸다.

“음…….”

하지만 율리우스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죄송하지만 저는 제가 인정한 사람에게만 배울 생각입니다.”

아이는 너 따윈 관심 없으니, 나오라는 듯 손을 저었다.

“그, 그럼 나는?”

도리안은 답을 알면서도 묻는 실수를 범했다.

“후우…….”

율리우스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

“어억!”

새로운 충격에 도리안과 크레인의 눈동자가 탁 풀렸다.

“모, 못생겼는데, 꼬마한테도 무시당해…….”

“죽고 싶다. 강물만 따스해지면 당장에…….”

두 사람은 기절한 사람처럼 말에 넙죽 엎드렸다.

“훗.”

버렌이 피식 웃으며 율리우스에게 다가갔다.

“잘 생각했다. 저 녀석들에게 배울 건 그리 많지 않아.”

그는 검집을 툭 치며 율리우스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귀족스러운 예법이 마음에 드는구나. 잘 배웠어.”

“할아버지께서 예절이 없는 사람은 금수와 같다 하셨습니다.”

“좋은 할아버지셨구나. 좋다. 지그하르트에 온다면 내가 네 자질을 봐주마.”

버렌은 날카로운 눈매로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율리우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검사님은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버렌. 버렌 지그하르트다.”

“버렌 님의 몸가짐도 훌륭하십니다. 승마 자세까지 귀족스러움이 묻어나옵니다.”

“크흠!”

율리우스의 칭찬에 버렌의 콧대가 1인치 상승했다.

“다만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전 제가 인정한 사람에게만 배우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어억!”

버렌의 턱이 땅에 닿을 정도로 벌어졌다.

“나, 나도 아니야? 대체 네가 인정한 게 누군데!”

“라온 님, 셰릴 님, 성자님, 그리고 에컨 님입니다.”

율리우스는 당연하다는 듯 네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전부 마스터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마, 마스터가 되어야 인정받는 거야?”

“요즘 꼬마들 무섭네…….”

“으흑! 저기서는 외모, 여기서는 능력!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은 어디서 살라고!”

버렌과 크레인, 도리안은 말투는 예의는 바르지만,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 율리우스의 눈빛을 보며 턱을 떨었다.

“흥. 멍청이들.”

마르타는 한심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물론 율리우스에게 다가가진 않았다.

“전부 좀 비켜주세요. 전 라온 님을 봐두어야 합니다.”

율리우스는 빨리 나오라는 듯 세 사람 사이로 파고들어 라온을 살폈다.

라온은 모두의 대화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가는 길이 심심하진 않겠네.’

-입도 심심하지 않으면 좋을 듯 한데, 육포 하나 씹어보거라.

‘…….’

*     *      *

“드디어 도착했네요.”

도리안이 요난 가문의 정문을 올려보며 배 주머니를 쓱쓱 문질렀다.

“너무 일이 안 터져서 좀 지루했어.”

크레인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랜드 마스터 하나에 마스터 셋인 일행을 습격하는 미친놈이 어디 있겠냐.”

버렌이 혀를 차며 정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렇긴 하지.’

라온이 정문 앞에 선 마차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버렌의 말대로 요난 가문으로 복귀하는 동안 습격은커녕 짐승이나 몬스터조차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알아보고 감동했다며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을 떼어놓는 게 일이었다.

“오, 오셨다! 아가씨가 돌아오셨어!”

“허억!”

요난 가문의 정문을 지키던 문지기가 마차를 보고서 노란색 종을 세차게 두드렸다. 우측에 있던 문지기는 종소리가 퍼지기도 전에 정문을 열기 시작했다.

“와아!”

엔시아는 마차 창문으로 뛰어내린 뒤에 문지기들에게 달려갔다.

“시한, 카핀! 나 왔어!”

그녀는 문지기들의 이름을 부르며 두 사람을 껴안았다.

“아, 아가씨!”

“진짜 다 나으셨군요!”

요난 가문의 문지기들은 회복된 엔시아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허억!”

“아가씨!

“엔시아 아가씨!”

종소리를 듣고 내려온 요난 가문의 장인들과 사용인들도 엔시아를 향해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

“키치, 터엔, 이스티린, 예델라, 피스칼, 테레이, 도얀!”

엔시아는 다가온 모든 사람의 이름을 말하며 햇살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 어울리는 밝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으허헝!”

“이제야 돌아오셨군요!”

“아가씨! 다행이에요! 정말로…….”

“축하드려요!”

요난 가문의 사람들은 엔시아를 둘러싼 채 정이 듬뿍 깃든 눈물을 흘리고, 미소를 지었다.

“음.”

라온은 엔시아와 요난 가문의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신기하네.’

가문 모두의 이름을 외우고 있는 엔시아도, 자그마한 구김도 없이 진심을 담아 축하하는 사람들도 모두 신기했다.

‘파벌이 아예 없는 건가.’

보통 큰 가문에는 파벌이 있는 법이다. 만약 버렌이 불치병을 치료하여 돌아왔다고 해도 지그하르트의 모두가 기뻐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문지기부터 총관까지 모두가 기뻐하며 환호를 질렀다.

실비아와 헬렌이 있는 별관을 보는 듯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모두 인사드려! 지그하르트 검사님들과 성자님 덕분에 이렇게 나은 거니까!”

가문 사람들과 해후를 즐기던 엔시아가 뒤를 돌아 검사들을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은인분들 환영합니다!”

요난 가문의 사람들은 땅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라온과 검사들이 됐다고 손을 저으려 할 때 엔시아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분이 바로 대륙 제일의 존잘! 라온 님이야! 태양처럼 얼굴에서 빛이 나는 분이라고!”

그녀는 갑자기 라온을 가리키며 존잘이라고 외쳤다.

“오오! 이분이 바로!”

“전에도 봤지만 이렇게 보니까 장난 아니군요!”

“이목구비의 비율이 황금이로군!”

“본을 떠서 내 작품에 담아내고 싶어.”

“저게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라고?”

요난 가문의 장인들이 라온에게 달려와 눈동자를 시퍼렇게 빛냈다.

“으윽…….”

라온이 물러서며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도와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다들 한참 물러난 상태였다.

‘엔시아 하나가 아니었어?’

전에는 엔시아가 아파서 참고 있었는지, 장인들 모두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쯧, 본왕의 절대적인 미모를 보이지 못하는 게 아쉽군. 저들 모두를 노예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짜아악!

라스의 말을 무시하고 뒷걸음질을 칠 때 큰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진정해! 손님들이다!”

“어윽.”

“죄, 죄송합니다.”

“직업병이라…….”

요난 가문의 가주이자, 엔시아의 어머니인 미셀 요난이 뒤에서 빙긋 웃었다. 살점을 본 좀비처럼 달려들던 장인들이 일제히 물러섰다.

“엄마!”

“엔시아!”

엔시아가 하늘을 나는 듯 달려 미셀의 품에 안겼고, 미셀은 그런 딸의 무게를 받아들이며 등을 두드렸다.

“정말 고생 많았어.”

“응.”

두 모녀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한참 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도 두 사람의 표정을 알 것 같았다.

“저 두 사람을 보니까 피로가 싹 풀리네요.”

도리안이 엔시아와 미셀을 보며 눈가를 훔쳤다.

-으음, 저게 뭐 별거라고.

라스는 고개를 돌리며 코를 훌쩍였다.

라온 역시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말대로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 가슴이 따스해졌다.

“그러네.”

*     *      *

감동적인 해후가 끝나고 라온은 셰릴, 페드릭과 함께 미셀의 집무실로 안내받았다.

방은 아직도 난장판이었지만, 예전보다는 좀 깔끔해졌다. 손님이 온다고 나름 치운 것 같았다.

“먼저 인사를 드려야겠죠. 제 딸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미셀이 소파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 일은 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진심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셰릴도 기분이 좋은지 평소보다 미소가 깊었다.

“그리고 이번 임무의 대부분은 저 녀석이 처리했습니다. 인사는 저 녀석에게 해주세요.”

“나 역시 마찬가지네. 그런 인사를 받기엔 부담스러워.”

페드릭과 셰릴은 동시에 라온을 가리켰다.

“감사드립니다. 라온 검사님.”

미셀은 가주의 위치로 이 자리에 있음에도 한참 어린 라온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저 임무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 말이 참 믿음직스럽게 들리네요.”

그녀는 시원해 보이는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난 가문의 가주로서 지그하르트에 요구한 의뢰가 끝났음을 정식으로 선언하겠습니다.”

미셀이 테이블 위에 글렌의 이름이 새겨진 패를 꺼냈다. 중앙에 박힌 붉은색 검 문양이 반짝거렸다.

“글렌 지그하르트의 대행자로서 의뢰가 끝났음을 확인했습니다.”

셰릴은 고개를 숙이고서 글렌의 패를 챙겨 품에 넣었다. 이것으로 글렌이 요난 가문에 남겼던 빚이 지워진 것이다.

“그럼 빌렸던 물건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라온은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난 뒤 아래에 두었던 검은 보자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일회용이라 쓰고 사라진 물건을 제외한 아티팩트들이었다.

“아…….”

미셀은 깔끔하게 관리되어 새것 같은 아티팩트를 살피며 입술을 깨물었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눈빛에 경악이 깃들었다.

‘이걸 전부 돌려준다고?’

라온은 엔시아를 구하기 위해 테머스와 다투고, 수많은 암살자를 쓰러뜨렸으며, 목숨을 걸고 싸워 에덴에게서 성자를 구해냈다.

딸을 구해준 라온은 자신에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보다 더한 사람이다. 저 물건들을 모조리 가져가고 전설급 아티팩트를 요구해도 할 말이 없는데 전부 돌려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역시나 범상치 않아.’

미셀이 고개를 들어 라온을 바라보았다.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에 정심함이 엿보인다. 왜 그의 이명에 협이 들어가는지 알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저 담대한 붉은 눈을 보니, 자신의 것을 돌려받음에도 고맙다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라온 님. 그거 다 가지셔도 돼요! 저희가 쌓아두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요!”

지금까지 조용히 라온의 얼굴만 바라보던 엔시아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가만히 좀 있어! 이것아!”

“악!”

미셀이 엔시아의 등을 쳤다. 비명에 잠시 걱정 어린 눈빛을 했지만, 엔시아가 나았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출발하실 때 분명히 말씀드렸을 겁니다.”

미셀이 테이블 위의 아티팩트들을 그대로 바닥에 흩뿌렸다. 저 모습을 보니, 왜 이 방이 지저분한지가 드러났다.

“엔시아를 치료한 뒤에 안전하게 돌아오면 원하시는 걸 들어드리겠다고 말했는데, 기억하시겠죠?”

“물론입니다.”

셰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씀해주세요. 이 자리에서 나오는 요구는 최대한 들어드리겠습니다.”

진심인지 그녀는 먼저 그 말을 꺼내놓았다.

“라온.”

“예.”

“이번 일은 네가 처리했으니, 네가 말해.”

셰릴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 엄청난 기회를 라온에게 양보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셰릴에게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감았다.

‘역시 그게 좋겠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개인이 아니라, 가문에 공을 세워야 한다. 지금은 단순히 성능 좋은 아티팩트가 아니라 그 이상을 바라보아야 할 때였다.

“저는…….”

천천히 눈을 뜬 뒤 미셀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요난 가문 아티팩트의 선독점권을 원합니다.”

“선독점?”

“예. 앞으로 요난 가문에서 생산되는 유일급 이상의 아티팩트들은 지그하르트에 먼저 판매해주셨으면 합니다. 값은 충분히 매겨드리겠습니다.”

“허…….”

“그건…….”

좋은 아티팩트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가문과 가문의 거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던지 미셀과 셰릴이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하나만 더. 수련과 관련된 아티팩트일 경우에는 지그하르트 내부에서도 광풍단에 먼저 팔아주십시오.”

라온은 요구를 하나 더 추가했다. 광풍단의 성장은 무엇보다도 최우선 과제였으니까.

“라온. 그건 이 자리에서 결정할 만한 제안이 아니다.”

셰릴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가주님이라고 해도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이야. 부담 드리지 마라.”

“음, 내 생각도 마찬가지다. 요난 가문의 아티팩트를 원하는 사람은 무수히 많아. 선독점이라고 해도 지금 이야기하기엔 과해.”

셰릴과 페드릭은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엄마! 뭘 고민하시는 거예요! 당연히 받아들이셔야죠!”

반면 엔시아가 미셀의 어깨를 마사지하듯 주무르며 왜 고민하냐고 인상을 찌푸렸다.

“잘생긴 라온 님이 진리에요! 잘생겼는데 똑똑하시고, 잘생겼는데 강하시고, 잘생겼는데 다정하시다구요! 거기다 물건을 보여드릴 때마다 라온 님을 볼 수 있잖아요!”

그녀는 마지막에서야 본심을 말했다.

“으이그!”

미셀은 엔시아를 옆으로 밀어내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신 건 알고 있습니다. 충분히 시간을 드릴 테니…….”

라온이 담담한 눈으로 미셀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말대로 쉬운 결정이 아니니,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뇨.”

“음…….”

잠시 눈빛을 가라앉히고 잇던 미셀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빠른 반응에 라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바로 거절인가?’

결정이 너무 빨라서 한 번만 다시 생각해보라고 하려 할 때 미셀의 말이 이어졌다.

“값은 정말 섭섭하지 않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예?”

그녀는 예상과 달리 바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제안한 라온이 당황할 정도였다.

“어…….”

“허어…….”

셰릴과 페드릭도 놀라 눈을 부릅떴다.

“정말이십니까?”

“좀 상세한 조정이 필요하겠지만 선독점이라는 제안 자체는 받아들이겠습니다.”

미셀은 장난이 아니라는 듯 진중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죠?”

셰릴이 먼저 다가와 질문했다.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전 기본적으로 장인이지만, 가문을 책임지는 수장이자 상인이기도 합니다. 상재에 밝지 않은 저도 투자할 때는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미셀은 깍지 낀 손을 앞에 놓은 채 셰릴과 페드릭 그리고 라온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지금이 바로 지그하르트 가문에 아니,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투자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투자?”

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지그하르트가 아니라, 자신에게 투자한다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음.”

“과연.”

셰릴과 페드릭은 그 대답을 예상한 듯 평온한 표정이었다.

“요난 가문의 가주로 있으면서 수많은 사람을 봐왔지만 라온처럼 눈으로 믿음을 주는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루비로도 표현 할 수 없는 그 붉은 눈에 테머스가 아니라, 라온 님을 선택했죠. 이번에도 그 눈을 한 번 믿어보도록 하죠.”

미셀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시원한 웃음을 흘렸다.

“라온 님만큼 잘생긴 사람도 처음이에요!”

“그래. 그렇지.”

미셀이 엔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테이블 위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선독점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음…….”

라온은 앞으로 나온 손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바라던 일이지만 그 안에 자신의 이름이 걸리니 너무도 무겁게 느껴졌다.

“라온.”

셰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생각보다 빠르지만, 대륙 전체로 나아가는 길이다. 축하한다.”

“18살에 저 위치라면 그 녀석보다도 크게 되겠어.”

두 사람은 어서 손을 잡으라는 듯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세상은 계획대로 움직이지는 않는군.’

라온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미셀의 손을 잡았다.

“거래 성립이네요.”

미셀이 빙긋 웃었다.

“부럽다…….”

엔시아는 라온과 손을 잡은 미셀을 보며 쩝 입맛을 다셨다.

“그럼 네가 가주 하던가.”

“응! 해야겠어! 꼭 할게요!”

그녀는 무조건 하겠다는 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미셀은 쾌활한 딸의 다짐을 웃으며 지켜보다가 바닥에 손을 뻗었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용이 교차하는 문양이 새겨진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요난과 지그하르트의 선독점 계약을 위한 축하선물로 받아주세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상자를 앞으로 밀었다.

“전설급 아티팩트입니다. 라온 님께 잘 맞았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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