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3화
“어렸을 적?”
라온은 페드릭의 어색한 눈빛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전혀 예측되질 않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설명해주마. 언제까지 숨겨야 하나 고민했는데, 차라리 잘 되었어.”
페드릭이 일단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라온이 그 손을 보며 맞은 편에 앉았다.
“네가 날 기억하는 건 4살이나 5살 때겠지만, 실제로 내가 널 찾아간 건 6번이다.”
“음….”
라온이 짧게 입맛을 다셨다.
‘그거 전부 기억하고 있습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사고를 했기에 페드릭을 만난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100일 때 처음 본 이후 5살이 될 때까지 매년 찾아와 영약을 주고, 치료도 해주었다.
“1살 때부터 5살 때까지는 내 의지로 지그하르트에 찾아가서 네 상태를 확인했지만, 첫 번째는 내 의지가 아니었다. 당연히 우연도 아니지.”
“예?”
첫 번째라면 글렌에게 이름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실비아에게는 널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지나가다가 들렀다고 말했지만….”
페드릭이 낮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아직 고민이 되는 듯 눈빛을 가라앉힌 채 한숨을 내쉬었다.
“성자님.”
“그래. 이미 시작한 거 끝은 내야겠지. 난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별관을 찾아갔다.”
“부탁이요?”
“당장 지그하르트에 와서 네 상태를 확인하고, 그에 맞는 치료법을 알아내라는 명령 같은 부탁이었다.”
그는 그런 어이없는 부탁은 처음이었다며 피식거렸다.
“그게 누구입니까?”
“정체를 밝힐 거라면 내가 누군가라고 말하지도 않았겠지.”
페드릭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너라면 누군지 알 것 아니냐는 듯한 웃음이었다.
“네게 혹한의 저주가 걸렸고, 확실한 치료법은 없으며 영약으로 몸을 데워야 한다고 하자, ‘그자’는 화속성 영약을 꺼내며 실비아에게 건네주라고 했다.”
“아….”
라온이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그때의 영약도?’
실비아가 대접에 데워서 주던 영약도 성자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나왔다는 말에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에서야 말해서 미안하구나. 꼭 비밀로 해달라고 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
“…아닙니다.”
비밀로 해달란 일을 말해주어서 고마울 뿐이다.
“그래서 네게는 미안할 뿐이다. 날 구하느라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정작 널 도운 건 다른 녀석이니까.”
“그런 말씀은 마세요.”
라온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성자는 모시고 싶어도 모실 수 없는 기인이다. 처음은 부탁을 받았다고 해도 생면부지의 아이를 위해 다섯 번이나 지그하르트에 찾아와 치료하고 영약을 주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페드릭에게 진실을 들었어도, 그를 구한 건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나. 이젠 내가 네게 빚이 생긴 기분이야.”
페드릭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허허롭게 웃었다.
“그 빚을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네 부탁들을 연구해보마.”
“빚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담 갖지 마세요.”
“그 말이 더 부담스럽다! 이 녀석아!”
라온과 페드릭은 정이 깃든 시선을 마주하며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날 부른 게 누구인지 알겠느냐?”
“예.”
라온이 눈을 내리감았다.
“모를 수가 없죠.”
넝마의 성자 페드릭을 부르고, 상급의 영약 세 개를 바로 내어주며, 자신의 좋지 않은 증상을 확인한 인물. 이렇게 힌트를 줬는데 모른다면 혀 깨물고 죽어야 한다.
-누구인가? 네게 영약을 낭비한 게 대체 누구였어?
라스는 전혀 생각이 안 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렌 지그하르트.’
-그건….
‘가주님이 성자님을 부른 거야.’
상상도 못 했지만, 성자를 부른 건 가주인 글렌 지그하르트가 분명했다.
‘역시 그때부터 알고 있었군.’
글렌은 자신의 이름을 지어줄 때부터 혹한의 냉기를 앓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관심 없는 척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싫어하는 게 아니었던가.’
직계만이 아니라, 방계에게도 망신과 모욕을 당하게 놔둔 점과 자신을 위해 성자를 부른 건 정말 조화되지 않는 일이었다.
“흐음.”
페드릭은 눈썹이 내려간 라온을 보며 입가를 씰룩거렸다.
‘글렌이라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군.’
라온은 무력만이 아니라, 두뇌 회전도 빠른 녀석이다. 힌트를 다 듣기 전에도 글렌이라는 걸 떠올렸을 것이다.
‘철가면 녀석아. 미안하다.’
페드릭은 이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을 글렌에게 마음속으로 사과를 보냈다.
‘그래도 네가 매일 라온을 찾아가 오러를 주입한 것과 패를 쓴 건 말하지 않았어.’
글렌은 누구보다 라온을 아끼고 있다. 매일 같이 찾아가 냉기를 밀어내 주었으며, 자신을 부를 때 사용한 건 평생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신패였으니까.
‘이제 멍청한 짓은 그만하고 잘 좀 지내봐라.’
페드릭은 겉으로는 소 닭 보듯이 지내는 어색한 조손이 친해지길 바라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성자님.”
라온이 의문이 가득 깃든 얼굴로 페드릭을 불렀다.
“처음 말고 두 번째부터는 그분이 지시를 내린 게 아니었습니까?”
“그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하나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페드릭은 얼마든지 하라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은 부탁을 받았다고 해도 5년 동안 매년 와주신 건 어째서입니까? 대륙 전체를 돌며 치료행을 하시는 성자님이 지그하르트에 오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페드릭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을 치료하며 꾸준히 대륙을 돌아다닌다. 그런 그가 매년 찾아와 자신을 살피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네 눈 때문이다.”
“예?”
“뭐랄까….”
그는 할 말을 고르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넌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주제에 낯선 사람을 보고서 울지도, 웃지도 않더구나. 어른처럼 냉정하고 침착한 눈이었지. 미친 소리 같지만, 세월의 풍파를 맞은 듯 내 일은 내가 하겠다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아….”
라온이 시선을 돌리며 입술을 씹었다.
‘그 말대로야.’
전생에 배신을 당했던 자신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지그하르트에서 성장한 뒤에 떠나려고 했었다.
하지만 실비아와 헬렌을 시작으로 많은 사람과 얽히며 그 생각이 변했다.
“그 눈빛을 바꿔주고 싶었다. 세상에는 대가 없이 누군가를 돕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려준 뒤 네 웃음을 보고 싶었다. 물론 네가 알 나이가 아니긴 했지만.”
페드릭은 민망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음….”
라온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페드릭의 진심이 깃든 말에 가슴이 크게 울렸다.
“네가 하나의 질문을 했으니, 나도 부탁 하나만 하자.”
“말씀하십시오.”
“들어줄 테냐?”
“예.”
방금 페드릭의 진심을 보았기에 거절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럼 한 번 웃어 보거라.”
“예에?”
생각지도 못한 말에 라온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말했지 않느냐. 네 웃음을 보고 싶었다고. 어렸을 적에 한 번도 못 봤으니, 지금이라도 웃어 보거라.”
“아니….”
“방금 뭐든 해준다고 하지 않았더냐.”
“아우.”
라온이 손으로 볼을 감싸며 인상을 찡그렸다.
“난 찡그리라고 하지 않았다. 웃어달라고 했지.”
“다, 다른 건 안 되겠습니까.”
차라리 다시 에덴과 싸우라면 싸우겠지만, 갑자기 웃으라고 하니 민망해서 볼에 열이 올라왔다.
“크흠!”
페드릭은 빨리하라는 듯 크게 헛기침했다.
“후우….”
라온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생각해보면 페드릭에게 치료받으면서도 웃었던 기억이 없긴 했다.
“그럼 잠시만.”
라온은 볼을 꼬집어 쭉쭉 늘린 뒤에 고개를 돌렸다. 기대하는 페드릭을 보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굉장히 쑥스러웠지만, 그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끝까지 미소를 유지했다.
“후후.”
페드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연한 미소를 지었다.
“엔시아의 말대로 참 오지게 잘 생겼구나.”
* * *
“하아….”
라온은 방에 홀로 남아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가 안 돼.’
글렌이 페드릭을 부른 건 이해할 수 있다. 손주가 아프니, 뛰어난 치료사를 불러 상태를 확인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근데 그걸 왜 숨기냐고.’
성자라는 최고의 치료사를 부르고, 상급 영약을 세 개나 내어주고서 그걸 왜 감췄던 건지 이해되질 않았다.
‘직계와 방계의 견제를 피하려는 건가?’
그것도 가능성이 높지는 않았다. 글렌은 지그하르트의 절대자. 그의 영향력은 지그하르트 전체를 덮고 있다. 아무리 전주들의 기세가 강해도 글렌의 말 한마디면 절대 별관을 건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아꼈다고 보기엔 애매해.’
글렌은 무언가를 먼저 주지 않았다. 12살이 될 때까지 글렌을 만난 건 판별식 때뿐이었고, 따로 선물을 받은 적도 없었다. 보상도 항상 실적에 합당한 것만 주었기에 그가 자신을 생각한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냐. 태화보는 조금 달랐어.’
글렌은 태화보의 구결을 알려주거나, 서책으로 주지 않고 직접 시범을 보여주었다. 생각해보니 그때만큼은 그가 다르게 보였었다.
‘모르겠어.’
라온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쯧, 그거야 뻔하지 않느냐.
라스가 팔찌 위로 올라오며 혀를 찼다.
‘뻔하다고?’
-그래. 네놈을 이용하려는 것이니라.
‘그건….’
-네놈은 본왕의 그릇답게 태어나면서부터 남달랐을 것이니라. 그 노인네는 네 재능을 알아보고, 널 이용해서 가문의 이름값을 높이려는 게 분명하느니라.
녀석은 인간계나, 마계나 똑같다고 중얼거렸다.
‘시끄러워.’
라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쪽의 가능성도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라스에게 들으니까 짜증이 일었다.
‘가문으로 돌아가서 가주님의 반응을 좀 봐야겠어.’
그걸 확인해야 그가 정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 같았다. 전생에 톡톡히 당한 경험이 있기에 정말 이용하려는 거라면 충분히 알 수 있다.
똑똑.
라온이 생각을 정리했을 때 문에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 온 뒤 익숙해진 소리였다.
“들어와.”
대답하기 무섭게 문이 열리고, 조금 건방져 보이는 외모지만 눈빛은 담담하게 가라앉은 아이가 들어왔다. 성자와 함께 도망쳤던 율리우스였다.
“안녕하세요.”
율리우스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아픈 곳은 없지?”
라온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우스는 자신이 깨어난 뒤로 거의 매일 찾아와서 예의 바르게 안부 인사를 해왔다. 외모와 행동이 너무 다른 녀석이었다.
“그만 와도 돼. 구해줬다고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으니까.”
페드릭이 어린 자신에게 선행을 베풀었듯 자신 역시 율리우스에게 바라는 건 없었다. 그저 충격받지 않고 잘 성장하기를 바랐다.
“아, 저….”
율리우스는 머뭇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의 똑부러진 녀석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괜찮으니, 할 말 있으면 해.”
“저도 함께 가면 안 되겠습니까?”
“뭐?”
“저도 검사님과 함께 가고 싶습니다.”
입을 뗀 율리우스의 눈동자는 곧았다. 흔들림이 없는 걸 보니, 의지가 확고한 것 같았다.
“갑자기 왜?”
“갑자기가 아닙니다. 저와 성자님을 구해주신 그날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모레 떠난다고 하시기에 지금이 아니면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어린 녀석이 어조에 중심이 잡혀 있다. 예절 교육을 제대로 받은 듯싶었다.
“가족은 어떻게 하고?”
“없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혼자 지냈습니다.”
“음….”
목소리가 너무 평온해서 이쪽이 놀랄 정도였다.
‘그랬군.’
상황을 보니, 율리우스를 데리고 가겠다고서 전쟁이 일어났던 건 그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였던 것 같다.
라온은 율리우스의 단단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보며 기감을 끌어 올렸다.
‘육체가 유연하면서도 굳건해. 마나 회로는… 어?’
율리우스의 육체 조건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내부를 살피다가 입을 떡 벌렸다.
‘무슨 어린애의 마나 회로가….’
녀석의 마나 회로는 웬만한 소드 유저급 검사보다도 두껍고 넓었다. 마나 회로 내부도 깨끗했고, 단전 역시 다른 사람보다 크고 단단했다. 이 아이가 연공법을 익힌다면 누구보다 빨리 오러를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다.
‘이래서 다들 난리였군.’
육체 조건도 나쁘지 않지만, 진짜는 내부다. 율리우스는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굉장한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정말 마음에 드는 건 그런 조건이 아니다.
저 나잇대 아이가 가지기 힘든 침착함과 단단히 여문 정신이 마음에 들었다.
“널 데리고 가는 건 어렵지 않지만 여긴 네 고향이잖아. 정말 떠나도 되겠어?”
“돌아올 수 없는 것도 아니고, 고향은 마음에 담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율리우스는 이번에도 아이답지 않은 말을 하며 두 눈을 빛냈다.
“알겠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천검대주님께 말씀드리지.”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나한테 왔지? 처음부터 천검대주님에게 갔으면 편했을 텐데.”
“제가 지그하르트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검사님 때문이니까요.”
“아….”
대충 이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자신을 위기에서 구하러 온 영웅이라 생각한 게 분명했다.
“그럼 생각을 달리하는 게 좋겠다. 날 보고 지그하르트에 가는 건 그리 좋지 않은….”
“아뇨.”
율리우스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간단하게 생각한 건 절대 아닙니다. 전 검사님을 보고 영웅이 아닌, 사람의 향기를 느꼈습니다.”
“사람의 향기?”
“강하지 않더라도 의지가 강한 검사가. 자신의 뜻을 관철할 수 있는 검사가 되고 싶습니다. 정말 깊게 생각했으니, 받아주십시오.”
사람의 향기와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검사라는 말이 가슴에 깊게 박혔다.
‘내가 그렇게 보인 건가….’
율리우스가 자신의 무얼 보고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알겠다. 출발은 이틀 뒤 아침이니까. 늦지 말도록.”
“감사합니다!”
율리우스는 고개를 크게 숙이고서 방을 나섰다.
-흠.
라스는 율리우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왜 이놈에게만 저런….
‘음?
라온이 라스를 내려보았다.
“저 아이에게 더 특별한 게 있는 건가?”
-모르느니라!
라스는 말해줄 생각이 없는 듯 다시 팔찌로 쏙 들어갔다.
‘확인 좀 해봐야겠는데….’
* * *
이틀 뒤.
라온은 레트란을 떠나기 위해서 머물던 저택에서 나왔다. 다들 미리 준비를 끝내고, 엔시아의 마차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주인공이라고 너무 늦게 오는군.”
마차에 등을 기대고 있던 셰릴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직 출발시간이 안 됐습니다만.”
“한 마디도 안 진다니까.”
라온이 하늘을 가리키자, 셰릴이 픽 웃고서 마차 앞으로 갔다.
“라온 님?”
마차의 창문이 열리고, 엔시아가 튀어나왔다. 붓기가 사라진 시원한 인상이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였다.
“라온 님!”
그녀는 단순히 얼굴만이 아니라, 상체 전체를 창문으로 빼내며 손을 흔들었다.
“우와악! 오늘도 존나 잘생기셨어요! 지금까지 중 최고야! 눈을 크게 뜨니까 더 잘생겨 보여요!”
“아가씨!”
“제발 좀!”
시녀들이 붙잡은 덕분에 엔시아는 창문으로 떨어지는 꼴을 간신히 면하고 있었다.
‘더 격해졌네.’
라온이 뺨을 긁적였다. 엔시아는 고통이 사라진 덕분에 평소보다 더 난리를 치며 잘생겼다고 외치고 있었다.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허리가 조금 아팠는데, 이제 괜찮아요! 라온 님 얼굴이 약이고, 얼굴이 밥이니까요!”
“으음….”
부담스럽긴 하지만 고통에 질려 있던 사람이 저렇게 밝아진 걸 보니 마음은 편했다.
“아픈 게 사라지면 콩깍지도 사라질 줄 알았는데 아니야! 그냥 존잘이잖아! 잘생겼는데 선하고, 잘생겼는데 똑똑하고, 잘생겼는데 마스터야!”
엔시아는 시녀들에 의해 마차에 끌어 당겨진 이후에도 잘생겼다고 거의 찬양을 했다.
“하어, 더 심해졌어….”
“이거 못생긴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죽고 싶다….”
“아직은 안 돼. 강물 춥다.”
“난 못 생긴데다 머리도 나쁘고, 익스퍼트라고!”
마차 주변에 서 있던 천검대와 광풍단이 머리를 부여잡은 채 악을 질렀다.
“허허!”
“와….”
페드릭은 그 모습을 보며 키득거렸고, 율리우스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음, 존잘, 오지게 잘생김. 잘생겼는데 마스터….”
루난은 엔시아의 말을 몇 번 따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기억해두려는 것 같았다.
“다 놀았으면 준비해라!”
“예!”
셰릴의 지시에 라온이 말에 올라탔다. 다른 검사들도 말과 마차 앞쪽에 자리를 잡고, 출발 명령을 기다렸다.
“목적지는 요난 가문! 아직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절대 방심하지 마라!”
“예!”
“출발!”
셰릴은 이전과 같이 가장 앞에서 말을 몰았고, 모두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천천히 말을 몰아 대로로 내려가는데 양옆으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와아아아아!”
“지그하르트 검사님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손을 흔들며 검사들 모두에게 환호를 보냈다. 슬픔을 이겨내고 고마움을 전하는 듯 눈동자들이 맑았다.
“구명의 은을 꼭 갚겠습니다!”
“언제라도 불러주십시오!”
“어디라도 찾아가겠습니다!”
살아남은 바신 가문과 트리안 가문의 검사들은 검을 역으로 세워 검례를 취했다. 큰 빚을 졌고, 그것을 꼭 갚겠다는 의미였다.
“되었으니, 돌아가서 수련들이나 해라.”
셰릴은 옅게 웃으며 검사들에게 손을 저었다.
“우와아아아아!
“라온 님!”
“설화검협!”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설화검협!”
라온이 지나갈 때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귀가 아플 정도의 소리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화검협?”
라온이 처음 듣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를 말하는 거잖아.”
버렌이 옆으로 다가와서 턱짓했다.
“나?”
“어린 시절의 은을 갚기 위해 거리낌 없이 에덴의 덫으로 들어가 광혈귀와 적랑귀, 흑익귀를 베어버린 의협의 검사. 라온 지그하르트의 새로운 이명이다.”
그는 본인의 일처럼 즐거워하며 미소를 지었다.
“백미는 악양귀와의 일합대결이죠. 성자님과 아이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검을 내리지 않은 일에 대륙 전체가 감동했다구요!”
도리안은 본인이 직접 못 봐서 아쉽다며 인상을 찡그렸다.
“근데 왜 설화검협이지….”
“불과 얼음을 동시에 사용하는 검협이라는 뜻이겠죠. 중의적으로 꽃을 뜻하기도 하고. 어쨌든 칭호가 정말 멋있어요!”
“나도 그런 이명 좀 얻고 싶네….”
크레인도 부럽다는 듯 다가와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은 자신의 이름과 이명을 부르며 활짝 웃는 사람들을 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더 큰 환호에 귀가 먹먹해지고, 심장이 크게 뛰었다.
하분 성에서도 느꼈지만, 자신의 이름을 환호하고, 이명이 만들어진다는 건 묘한 전율을 가져다주었다.
성문 앞에 서 있던 로지와 다른 신관들이 나와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손이 하늘을 향하자 새하얀 빛이 쏟아지며 일행 모두의 몸을 휘감았다.
“영웅분들께 축복이 깃들기를.”
로지와 신관들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대들에게도 축복이 함께하길.”
라온은 셰릴의 인사를 따라 신관들에게 고개를 숙이고서 레트란을 빠져나갔다. 마을을 벗어났음에도 사람들의 함성은 계속 들려왔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죽는 줄 알았네.”
“그러게. 아직도 심장이 뛰어.”
도리안과 크레인은 붉어진 얼굴로 얼떨떨한 미소를 지었다.
“쯧, 고작 그 정도 가지고.”
“정신 차려!”
마르타와 버렌 역시 말과 달리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
가장 침착한 건 말과 비슷할 정도로 맹한 눈을 한 루난뿐이었다.
라온은 그들을 보며 옅게 웃다가 하늘을 보았다. 무사히 일을 끝냈으니,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다.
‘임무 완료 후의 보상.’
그건 정해져 있지.
요난 가문에 원하는 건 아티팩트 따위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