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화
“정말 할 수 있겠느냐?”
페드릭이 걱정된다는 듯 눈썹을 축 내리며 다가왔다.
“조금 예상과 달라지긴 했지만 가능할 거 같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엔시아의 팔목에서 손을 뗐다. 글래시아의 냉기가 빠지자, 그녀가 다시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천검대주님.”
“음?”
“죄송하지만, 투명하고 뚜껑이 있는 유리병 하나만 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겠다.”
셰릴은 이유조차 묻지 않고서 밖으로 나갔다. 이번 일로 신뢰가 꽤 쌓인 것 같다.
“성자님은 엔시아 님의 상태를 봐주십시오. 저는 잠시 오러를 모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정도야 얼마든지.”
라온은 페드릭이 엔시아의 손목을 잡는 걸 보고서 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만화공과 글래시아 모두 사용해야 해.’
헬 웜의 기운을 흡수하고 놈을 산채로 빼내기 위해서는 불의 고리, 만화공, 글래시아 모두가 필요했다. 사용하기 힘들지만 <분노의 마안>을 이용한다면 헬 웜이 숨어 있는 곳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라온은 눈을 감은 채 머릿속으로 헬 웜을 제거하는 심상을 떠올리며 만화공을 휘돌렸다. 모든 기운이 중요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5성에 오른 만화공이었으니까.
고오오오!
굳어 있던 만화공을 활성화하고 눈을 뜨자, 셰릴이 돌아와 있었고 탁자 위에 유리병이 놓여있었다.
“이, 이제 시작인가요?”
“네. 잠시 주무셨다가 일어나시면 끝나 있을 겁니다.”
라온은 미소를 지으며 엔시아의 뒷목 아랫부분을 가볍게 눌렀다. 그녀는 짧은 신음을 흘리고서 눈을 감고 목을 늘어뜨렸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성자님께서는 엔시아 님의 생기를 끌어 올려주세요.”
“치료의 보조라니,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페드릭은 한 번 믿기로 했으면 끝까지 믿으려는지 맞은편에 서서 엔시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오오오!
라온은 바로 아이를 대하듯 글래시아의 냉기를 부드럽게 운용하여 엔시아의 마나 회로에 밀어 넣었다.
아래에서부터 그녀의 몸을 식히는 건 같았지만, 냉기로 마나 회로를 꽉 채우지 않고, 일부분을 비워두었다. 이 공간은 헬 웜의 기운을 흡수할 통로가 되어 줄 것이다.
치이이이익!
글래시아의 순수한 냉기가 마나 회로의 열기를 차례로 식힌 후 엔시아의 목 부근으로 향하는 순간 숨어 있던 헬 웜이 튀어나와 열기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으으….”
잠에 빠지게 했음에도 엔시아의 몸이 파르르 떨린다. 손목만 잡고 있음에도 헬 웜의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부터야.’
라온이 불의 고리를 공명시켜 집중력을 높인 뒤 만화공을 운용했다. 5성에 이른 만화공이 글래시아로 채운 마나회로의 빈 공간을 통해 부드럽게 스며 들어갔다.
고오오오!
라온은 만화공을 헬 웜이 만들어낸 열기인 척하며 엔시아의 머리에 있는 마나회로로 보냈다. 헬 웜은 만화공의 순수한 열기를 본인의 것이라 생각하고 냉기에만 경계를 보냈다.
‘역시!’
여기까지 예상대로였다. 이젠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고오오오!
라온은 만화공 5성이 되어 사용할 수 있게 된 흡자결을 운용했다.
‘이거라면 저놈의 열기도 먹어치울 수 있지.’
만화공 흡자결은 열기를 흡수할 수 있는 기예다. 한 번에 대량의 기운을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헬 웜처럼 천천히 열기를 뿜어내는 놈에게는 안성맞춤인 능력이었다.
고오오오!
흡자결을 아주 천천히 일으켜 헬 웜이 뿜어내는 열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마스터가 되며 넉넉해진 하단전에 헬 웜의 열기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하며 육체의 회복 속도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화아아아!
헬웜은 본인의 열기가 이쪽으로 빠져나간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냉기에 저항하기 위해 계속해서 열기를 뿜어냈다.
‘끓는 물 속의 개구리와 다를 바가 없지.’
끓는 물에 개구리를 넣으면 바로 뛰쳐나오지만, 점점 뜨거워지는 물에선 개구리가 위험하다는 생각을 못 하다가 그대로 익어 죽게 된다.
헬 웜도 개구리와 마찬가지다. 이렇게 조금씩 열기를 뿜어내게 한다면 놈은 모든 힘을 소모하다가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
‘난 그걸 흡수만 하면 되고.’
그렇게 헬 웜이 낭비한 열기는 할 톨의 낭비도 없이 자신의 육체에 쌓여 오러와 체력이 되어주고, 만화공의 성취마저 올려주었다. 저절로 흡수되는 영약과 다를 바가 없었다.
라온은 육체의 상처가 회복되고, 만화공의 오러가 쌓이는 희열을 느끼며 헬 웜의 열기를 여유롭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세 시간이 지났을 때 헬 웜이 뿜어내는 열기는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었고, 라온의 단전은 만화공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전보다 더 늘었어.’
헛웃음이 나왔다. 부상 중임에도 마스터들과 싸우기 전보다 훨씬 많은 오러가 단전에 차오른 상태였다.
‘알면 열 좀 받겠네.’
데루스 로베르트가 몇십 년을 연구해서 개발한 헬 웜은 아주 맛 좋은 영약이 되어주었다. 놈의 계획을 통째로 깬 즐거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라스가 팔찌 위로 튀어나와 이를 갈았다.
-어떻게 벌레한테서까지 힘을 얻는 거냐고! 세상이 왜 이놈에게 퍼주지 못해서 안달인 것이냐!
녀석은 억울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본왕 좀 챙겨라!
‘나중에 챙길 테니까 가만히 좀 있어.’
라온은 한쪽에만 글래시아의 냉기를 놔둔 채, 만화공 흡자결을 멈췄다.
‘이제 끝내야겠군.’
라온은 한쪽에만 글래시아의 냉기를 놔둔 채, 만화공 흡자결을 멈췄다.
‘후우….’
속으로 숨을 고르고서 분노를 끌어 올려 눈에 담았다.
찌지지직!
엔시아의 머릿속에 있는 헬 웜을 보겠다고 생각하자 그녀의 머리 안쪽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두개골 안쪽 무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막 위에 아주 작은 붉은색의 벌레가 다리를 뻗고 있었다.
‘예전에 본 것보다 더 기괴해졌군,’
헬 웜은 주둥이에 네 개의 이빨이 돋아났고, 가시처럼 날카로운 다리 열 개가 달린 징그러운 모습이었다. 지쳤는지 사람이 헥헥거리듯 몸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기운이 크게 줄었으니, 배가 고프겠지.’
헬 웜은 가지고 있던 열기의 대부분을 소모한 상태다. 그 허탈감을 견디지 못할 테니, 분명 열기에 이끌릴 것이다.
라온은 더 순도가 높아진 만화공의 열기를 엔시아의 머리 부근의 마나회로까지 끌어 올렸다. <분노의 마안>으로 헬 웜의 상태를 살피며 오러의 움직임을 조절했다.
‘움직인다.’
만화공의 열기를 느낀 헬 웜이 경계하는 듯 살짝 다리를 뗐다. 녀석은 반대편 마나 회로에 있는 글래시아를 경계하며 만화공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미리 빼길 잘했어.’
헬 웜은 몇 년 동안 뿌리를 박고 있던 곳에서 다리를 떼고, 만화공의 기운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라온은 낚싯대로 물고기를 유혹하듯 만화공의 기운을 운용하여 놈을 아주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분노의 마안> 덕분에 헬 웜을 나갈 길로 이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으음….’
분노의 마안과 몸이 맞지 않은 지 머리가 굉장히 아팠지만, 꾹 참으며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해 헬 웜을 엔시아의 비강 쪽으로 이끌었다.
‘거의 다 왔어.’
라온이 눈을 뜨고, 엔시아의 코를 보았다. 그녀의 콧방울이 짧게 떨리는 순간 손가락을 넣어 그 안에 있던 헬 웜을 잡았다.
“천검대주님!”
“알겠어!”
셰릴은 바로 눈치를 채고 가져왔던 유리병을 던졌다. 바로 받아서 파닥거리는 헬 웜을 넣은 뒤 뚜껑을 덮었다.
티티딕!
헬 웜은 이제야 속은 걸 알아차린 듯 열 개의 다리로 유리병을 사정없이 긁어댔다. 열 개의 다리가 동시에 까딱이는 모습을 보니, 소름이 돋아올랐다.
‘재워둬서 다행이네.’
라온이 엔시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엔시아가 시원시원한 성격이라고 해도 저 벌레가 코에서 나온 건 견디지 못할 것이다. 미리 재우고 시작하길 잘 했다.
“이, 이게 엔시아의 몸에 들어 있던 거냐?”
페드릭은 눈을 부릅뜬 채 다가와 헬 웜을 살폈다.
“예. 엔시아 님의 머리에서 열기를 뿜어내던 놈이 바로 이 벌레입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페드릭과 셰릴에게 벌레를 내밀었다.
“허어….”
“힉!”
어처구니없어하는 페드릭과 달리 셰릴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 벌레. 성자님이 가져가서 연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연구?”
“테머스가 엔시아 님을 노린 걸 생각해보면 분명 더 있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넣었을지 모르니, 지금 같은 방법 말고, 확실하게 제거할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걸 연구하기 위해서 헬 웜을 뽑아낸 것이다.
“음, 미안하지만 확답은 못 하겠다. 나도 처음 보는 놈이야.”
“괜찮습니다. 그리고 레이지 웜의 해결법도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요?”
“레이지 웜. 이것도 테머스 때문이군.”
페드릭도 사정을 모두 들었기에 테머스가 레이지 웜 때문에 죽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보마.”
그는 어렵다는 듯한 표정과 달리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하나만 더.”
“또. 또 있느냐?”
이제 정말 부담스러운 듯 페드릭은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엔시아 님에게 그 벌레를 넣은 시녀는 세뇌에 당해 있었을 겁니다.”
“세뇌?”
“그 세뇌도 풀 방법을 찾고 싶습니다.”
라온의 눈동자에 붉은 열기가 타올랐다.
‘데루스의 계획을 부수기 위해선 가장 필요한 일이지.’
데루스 로베르트를 깨부수기 위해서는 놈이 부리는 사람들부터 처리해야 한다. 헬 웜과 레이지 웜 그리고 세뇌를 깨부순다면 놈의 전력의 3분지 1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 일을 이뤄줄 수 있는 최고의 전문가는 바로 눈앞에 있는 넝마의 성자 페드릭이었다.
“너는 이번 일을 만들어낸 배후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거로군.”
“맞습니다.”
“알겠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알아보마.”
페드릭이 진중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뇌 쪽에는 내가 아는 전문가가 있으니, 그 녀석이랑 말을 해보면 되겠지.”
그는 벌써 몇 가지 계획을 세운 듯 병 속에 든 헬 웜을 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그도 꽤 흥미로운 것 같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라온이 다시 엔시아의 손목을 잡았다. 내부에 남은 헬 웜의 열기를 모조리 흡수한 뒤 글래시아로 마나회로 전체를 정화해주었다.
페드릭의 추가 치료까지 끝내자, 풍선처럼 부풀고 빨개졌던, 엔시아의 피부가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엔시아 님.”
라온이 엔시아 옆에 서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으음….”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린 엔시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와아, 라온 님은 옆으로 누워서 봐도 존나 잘 생기셨네요. 어떻게 이러지?”
그녀는 라온의 얼굴만을 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예술 작품이라고 해도…어?”
손을 들어 올려 표현을 하려던 그녀가 우뚝 멈췄다.
“이, 이게….”
엔시아는 얇아지고, 하얘진 본인의 팔과 손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뭐가 어떻게….”
그녀는 손을 든 채 라온과 페드릭, 셰릴을 차례로 돌아보며 입술을 떨었다.
“아, 아프지도 않아요. 통증이 하나도 없고! 몸이 시원해요!”
엔시아의 큼지막한 눈매에서 방울진 눈물이 떨어져내렸다.
“저 나은 거예요? 이, 이제 안 아파도 되는 건가요?”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다시. 다시 일을 할 수 있는 거죠! 꿈을 쫓아도 되는 거죠!”
“이제 괜찮습니다.”
라온은 엔시아의 눈에 쏟아지는 파도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가, 감사해요. 감사…흐으윽!”
엔시아가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울음을 터트렸다. 지금까지 참고 참던 감정이 폭발한 듯 여러 감정이 휘몰아치는 울음 소리였다.
라온과 페드릭, 셰릴은 옅게 웃으며 통곡을 하듯 울부짖는 엔시아를 조용히 지켜봐주었다.
* * *
“가주님! 가주니이이이님!”
리메르가 알현실의 문을 연무장처럼 걷어차며 들어와 소리쳤다.
“그, 그 소식 진짜랍니다!”
“뭐!”
옥좌에 앉아 있던 글렌이 벌떡 일어섰다. 굉장히 드문 반응이었지만 리메르나, 로엔이나 그것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라온이 마스터에 올라서 광혈귀, 적랑귀, 흑익귀를 베고 성자님을 구한 거 사실이랍니다! 비연회의 확인이 끝났어요!”
리메르가 손에 든 편지를 마구 휘둘렀다. 처음에 너무 놀라운 이야기라 거짓이나, 과장이 섞여 있을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라온은 정말로 마스터에 올라 에덴의 마스터 셋을 베고, 성자를 구해내는 무지막지한 일을 벌였다. 지그하트르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에 그녀석의 이름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으음!”
글렌이 눈매를 좁히자, 리메르의 손에 들려있던 편지가 저절로 떠올라 옥좌로 날아왔다. 그는 편지를 열어 내용을 살폈다. 리메르의 말대로 라온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였고, 비연회주의 확인 인장이 찍혀 있었다.
“조만간 마스터에 오를 줄은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될 줄은 몰랐고, 또 되자마자 마스터 셋을 벨 줄은 몰랐습니다!”
리메르는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말하다 말고 뒤로 자빠졌다.
“솔직히 미쳤다는 말밖엔 나오지 않는군요.”
항시 미소를 짓고 있는 로엔도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18살! 우리 라온이 대륙 역사상 최연소 마스터라구요!”
리메르는 본인의 일처럼 기뻐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좀 가만히 좀 있어라.”
글렌이 눈매를 좁히며 손을 저었지만, 천장까지 올라간 입꼬리를 숨기지는 못 했다.
“미소나 지우고 그런 말씀하시지요.”
라메르가 히히 웃으며 글렌의 입매를 가리켰다.
“크흠!”
글렌은 헛기침을 하며 억지로 인상을 썼지만 본인도 모르게 다시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부상은 없다더냐?”
“그 내용도 봤는데, 심하게 다치긴 했는데, 휴유증은 없을 거랍니다! 옆에 성자님이 있으니, 당연하겠지만요.”
리메르는 그것도 알아보고 왔는지 바로 입을 뗐다.
“솔직히 우리 다 라온이 마스터에 오를 거라는 건 알고 있었잖아요.”
“그렇습니다.”
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스터에 오르기도 전에 광혈귀를 베고, 마스터가 된 이후 적랑귀와 흑익귀를 동시에 베어버릴 줄은 아무도 상상 못했을 겁니다. 걔는 상식이 아니라, 상상조차 뛰어넘는 놈이에요!”
리메르는 도박에서 큰 돈을 땄을 때처럼 흥분하여 방방 뛰었다.
“가주님. 돌아오면 아주 크게 반겨주시죠! 에덴의 마스터 셋을 벤 최연소 마스터에다가 친우이신 성자님까지 구했잖아요!”
“물론. 충분한 보상을….”
“아, 그거 말고! 가주로서 말고요!”
리메르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할아버지로서 손자에게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라고요! 대체 언제까지 보기만 할 겁니까! 그렇게 좋아하면서 왜 말을 안 하냐고요!”
“으음….”
글렌은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감았다. 잠시 후 생각을 정리했는지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가 내 손자이고, 대단한 업적을 이룬 건 분명하다. 그 업적에 따른 보상은 충분히 내릴 것이다. 다만 그건 가주로서다. 난 아들이든, 딸이든 특별 대우를 한 적이 없다.”
“아오! 진짜!”
리메르가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나도 이제 모르겠다! 속터져서 오늘은 도박이나 할렵니다!”
그는 손을 휘휘 젓고서 가주전의 문을 빠져나갔다.
“음, 저도 이번만큼은 리메르님과 의견이 같습니다. 다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표현해주시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로엔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리메르를 따라 가주전을 나섰다.
“음.”
글렌은 두 사람이 나간 문을 잠시 지켜보다가 옥좌에 몸을 기댔다. 긴 상흔이 남아 있는 오른손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라고 왜 모르겠느냐. 하지만….”
실비아가 가문에서 외톨이로 지내며 힘들어 할 때도, 포기하고 가문을 떠날 때도 무엇하나 해준 게 없다. 막내딸의 존재를 머리에 지운 채 무력을 높이고, 적의 피를 보는데만 집중했다.
훗날 심마에서 벗어나 실비아를 찾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때는 얼굴도 보지 못한 손녀와 사위를 잃은 후였으니까.
그런 자신이 이제와서 라온과 실비아를 살갑게 대하는 건 무리였다.
“후우….”
글렌은 무감정한 무신의 눈빛이 아니라, 고뇌하는 인간의 얼굴로 눈을 내리 감았다.
* * *
라온의 방에 루난과 광풍단원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 모두는 평소와 달리 차분하게 라온의 입만을 바라보았다.
“일단 마스터가 되면 중단전이 열려. 몸에 있는 작은 벽 같은 게 깨지는 감각과 함께 오러가 한층 단단하게 여물지.”
라온은 명치에 있는 중단전을 가리켰다.
“중단전이 열렸을 때 기분은 어때요? 시원해요?”
도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시원하다기보다는 전율이 오지.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벼락을 맞은 느낌이랄까.”
“그럼 그 중단전이 열리면 바로 강기를 쓸 수 있게 되는 거냐? 머릿속에 강기에 대한 지식이 들어오는 거야?”
버렌이 긴장한 눈빛으로 머리를 들이 밀었다.
“지식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중단전을 운용할 수 있게 돼.”
“중단전을 거치면 운용속도가 느려지는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중단이 열리는 순간 전신의 마나 회로가 한층 더 활성화 되서 운용속도가 오히려 더 빨라져.”
“오러 운용속도가 얼마나 빨라지는데?”
관심없는 척하던 마르타도 한 걸음 다가오며 질문했다.
“2배 이상으로 빨라지고, 오러의 양과 질은 오히려 늘어나. 벽 하나 차이로 아예 다른 인간이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라온도 익스퍼트일 때 마스터가 어떤 것인지 궁금했기에 그들의 질문을 하나하나 받아주었다.
“아이스크림은 뭐가 좋아?”
루난은 마스터에 관한 건 충분히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요상한 질문을 내놓았다.
-민트초코!
라스의 말을 무시하고 루난을 보았는데, 표정이 진지하다. 아무래도 진심으로 물어본 것 같다.
“음, 나는 쿠키앤크림이….”
대답을 하려고 할 때 방문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페드릭이 들어왔다.
“성자님?”
“모레 떠난다고 하더구나.”
페드릭은 안으로 걸어오며 옅게 웃었다.
“네. 엔시아 님의 치료도 끝났으니, 요난으로 돌아가야죠.”
“이곳의 전쟁도 끝났으니, 나도 함께 가마. 엔시아의 상태도 좀 더 봐야하고, 그곳에 있다는 시녀도 확인해야겠지.”
“감사합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리고 네게 좀 할 말이 있는데….”
페드릭이 헛기침을 하며 눈길을 돌렸다.
“들을 거 다 들었으니, 가자.”
마르타가 이번에도 그 눈빛을 먼저 알아차리고 일어섰다.
“난 아직 들을 거 안 들었는데? 아이스크림….”
“나중에 들어!”
그녀는 맹한 루난을 데리고 먼저 방을 나섰고, 버렌과 도리안, 크레인이 그 뒤를 따라갔다.
탁.
페드릭은 문이 완전히 닫힌 걸 보고서 구부정한 허리를 펴고 라온의 앞으로 다가왔다.
“생각해보니 정식으로 말한 적은 없어서 말이야.”
“예?”
“네 덕분에 이 늙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율리우스도 살릴 수 있었어. 정말 고맙구나.”
그는 본인의 지위와 입장조차 생각 못하고 정중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이러지 마십시오!”
라온이 당황하여 벌떡 일어났다. 성자가 이렇게 나올 줄은 정말 생각지 못 했다.
“저는 어릴 적의 은혜를 갚았을 뿐입니다. 아니, 다 갚은 것도 아니죠.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겸손을 떠는 게 아니다. 그가 매년 찾아와서 육체를 활성화시켜주고, 영약을 준 덕분에 이 나이에 마스터에 오를 수 있었다. 이번 일은 약간의 빚을 갚은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 그것도 이야기해야지.”
페드릭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네 어린 시절에 대해 할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