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21화 (221/653)
  • 제221화

    [<분노>가 가진 특성 중 하나가 임의로 생성됩니다.]

    라온은 메시지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특성이었군.’

    보지도 않고 내기를 받아들여서 몰랐지만, 라스는 내기 보상에 특성을 걸었던 모양이다.

    ‘이럴 때는 마계의 군주답다니까.’

    라스는 마왕답게 이런 내기에 있어서 절대 거짓말이나, 사기를 치지 않았다. 싫어해도 챙길 건 챙겨주는 글렌과 비슷한 성향이었다.

    ‘특성 괜찮지.’

    라스의 특성이었던 <설화의 감각> 덕분에 위기를 벗어나고, 기회를 잡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좋은 특성이 나오길 바라며 침을 꼴깍 삼켰다.

    [<분노의 마안>이 선택되었습니다.]

    [<분노의 마안(1성)>이 특성에 생성됩니다.]

    선택된 건 마안이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특성이었다. 이름만으로는 어떤 특성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흐읍!

    라스가 메시지를 보며 짧은 신음을 터트렸다.

    ‘좋은 거 같은데.’

    설화의 감각을 받았을 때보다 반응이 격한 걸 보면 꽤 괜찮은 특성인 것 같았다.

    ‘어디.’

    메시지를 눌러서 특성의 능력을 살펴보았다.

    <분노의 마안(1성)>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라온은 메시지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나….’

    어떤 능력인지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설명이 간단했다. 예전 <설화의 감각> 때는 아무 내용도 없어서 라스에게 물어보았던 기억이 났다.

    ‘이거 무슨 특성이야?’

    -흥! 본왕이 그걸 왜 알려주겠느냐!

    라스는 어림없다는 듯 콧방귀를 끼었다.

    -본왕의 힘과 능력을 야금야금 훔쳐가는 사기꾼 놈에게 알려줄 것은 아무것도 없느니라!

    녀석은 내기에서 패한 것에 화가 도진 듯 냉기를 줄줄이 피워냈다.

    ‘내가 왜 사기꾼이지?’

    -네놈이 다급한 상황을 노리고 본왕에게 사기를….

    ‘거래를 제안한 건 나야. 하지만 내기 제안은 누가 했지?’

    -보, 본왕이 했다….

    ‘내기 조건 설정은 누가 했지?’

    -그, 그것도 본왕이….

    ‘근데 어떻게 내가 사기를 쳐. 난 그냥 네가 만든 내기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이잖아.’

    -끄윽….

    라온이 빙긋 웃어주자, 라스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거기다 내가 훔쳐가는 것도 아니지. 난 가만히 있는데 능력치가 알아서 굴러 들어오잖아. 그걸 버려? 너라면 버릴 거야?’

    -제기랄! 망할 놈의 마생!

    라스는 인상을 구기고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래서 이건 뭐에 쓰는 능력인데.’

    -…….

    삐졌는지 아예 반응조차 안 해준다.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해볼까.’

    라온은 라스의 맨질맨질한 뒤통수를 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특선 요리 하나 추가.’

    -…….

    라스의 둥그스름한 꼬리가 아주 살짝 흔들렸다.

    ‘특선 요리 두 개 추가.’

    -…?

    녀석의 고개가 슬쩍 돌아갈랑 말랑했다.

    ‘원하는 디저트 2개 추가 주문!’

    -…!

    라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를 돌았다.

    -저, 정말이냐?

    조금 전까지 푸른 눈동자에 어려 있던 짜증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남은 건 음식에 대한 욕구뿐이었다.

    ‘진짜 너무 쉬운데….’

    얘 정말 마왕 맞아?

    *     *      *

    -간단히 말해서 볼 수 없는 걸 보게 해주는 능력이니라.

    라스는 <분노의 마안>을 가리키며 살짝 눈을 흘겼다.

    ‘볼 수 없는 걸 볼 수 있게?’

    -1성에서는 가볍게 시력이 좋아지거나 투시 정도겠지. 성장할 때마다 그 효과가 좋아지며 점차 다른 것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투시와 시력 강화라….’

    라온이 입맛을 다셨다. 요즘 기감으로 오감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지만, 시력이 좋아지거나 투시가 된다고 해서 나쁠 건 없다. 무슨 능력이든 쓰는 사람이 중요한 법이니까.

    ‘나쁘지 않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투시나, 시력 강화보다 성장할수록 다른 걸 볼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다만 네놈이 쓰기는 힘들 것이니라.

    ‘왜?’

    -특성의 이름을 보아라. <분노의 마안>이다. 네놈은 마족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니라.

    ‘아니지.’

    라온이 <분노의 마안>을 지그시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뭐가 아니라는 거냐.

    ‘마안이랑은 관계없지만, 분노랑은 연관되어 있잖아.’

    -무슨 소리냐. 네놈이 왜 분노와…어?

    ‘너한테 분노를 받았잖아.’

    자신은 마족이 아니지만, 라스에게 받은 분노가 자그마치 45가 남아 있었다.

    -이, 이런 미친….

    라스는 아차 싶었던지 입을 떡 벌렸다.

    ‘이거 어떻게 사용하지?’

    라스가 분노를 일으킬 때처럼 하면 되려나.

    라온이 눈을 감았다.

    ‘대상은 그놈이면 충분하지.’

    데루스 로베르트를 생각하며 라스가 조금 전 난동을 부릴 때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스며든 분노의 감정을 끌어 올렸다.

    고오오오!

    분노의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제대로 움직이질 않아.’

    분노는 만화공이나 글래시아의 기운처럼 통제를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였다. 자신의 영혼에 깃들어 있지만, 본래 라스의 것이라 그런 것 같았다.

    -머, 멍청한 놈! 본왕의 기운이 그리 쉽게 움직일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라스는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는 방법이 있지.’

    라온이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고리가 세차게 공명하며 분노가 깃들어 있는 영혼의 격이 상승한다.

    쿠구구구구!

    영혼의 격이 한 차원 높게 치솟자, 길들이지 않은 짐승처럼 뛰놀던 분노가 조금씩 통제를 따르기 시작했다. 분노가 일으키는 압박을 참으며 두 눈에 분노의 기운을 담아냈다.

    우우우웅!

    눈동자에 분노의 기운이 깃들며 두터운 문이 뚫리고, 붉은색으로 칠해진 화려한 복도가 보였다. 복도의 끝에서 흑발의 여성이 대야와 수건을 가진 채 다가오고 있었다.

    ‘마르타.’

    흑발의 여성은 마르타였다. 감각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문을 뚫고 그녀의 모습을 그대로 보였다.

    ‘이렇게 쓰는 건가.’

    손잡이까지 예리한 칼날로 되어 있어 주인도 다칠 수 있는 기괴한 검을 사용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거 무지하게 피곤하네.’

    라스의 말대로 몸과 안 맞기 때문인지 심한 피로감이 전신을 적셨다. 눈에 힘을 준 것으로 이 정도라면 아직 실전에서 쓰기는 힘들 것 같았다. 몸 상태가 좋지 않기에 바로 풀어버렸다.

    -이, 이게. 이거…. 어어?

    라스는 넋이 나간 것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떡 벌린 입에서 푸른 냉기가 무수히 빠져나갔다.

    -뭐,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네가 어떻게 분노를 사용하는 것이냐!

    ‘지그하르트에서 3년을 살면 개도 검기를 쓴다고 하잖아. 네가 하는 걸 6년 동안 봐왔는데, 못하는 게 이상한 거지.’

    라온이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너 대체 뭐야! 너 처음부터 날 노린 거지! 어디의 세작이냐!

    라스는 평소 사용하는 왕의 어투조차 잃어버리고, 아이처럼 악을 질렀다.

    “뭐 하는 놈이냐고!”

    언젠가 라온의 몸을 차지하기 위해서 공격적으로 넣어둔 분노마저 이용하다니,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싶다. 두려움이나, 포기라는 단어는 저놈의 대가리에 없는 것 같았다.

    ‘이런 괴물은 마계에도 없어….’

    마왕의 기운을 이겨내다 못해 직접 사용한다?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 할 일이다. 긴 세월을 살아오며 처음 보는 별종이었다.

    -네놈 인간은 맞는 것이냐? 드래곤과 혼혈이라던가….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버지가 누군지도 몰….’

    라온이 대답을 하기 전에 문이 열리고, 마르타가 들어왔다.

    “교대야. 넌 돌아가서… 헉!”

    마르타는 깨어나 있는 라온을 보고 가져온 대야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너! 너 왜 일어나 있어!”

    “깼으니까 일어났지.”

    “일주일이나 기절해 있었다고! 이 멍청아!”

    “일주일? 좀 오래 잤네.”

    라온이 옅게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이 미친놈! 너 정말 죽다가 살아났다고! 당장 누워!”

    마르타는 빨리 누우라는 듯 달려와 어깨를 잡았다.

    “으응?”

    큰 소리에 루난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눈을 꿈뻑였다.

    “라온!”

    그녀는 평소보다 두 톤은 높아진 목소리로 라온을 불렀다.

    “이제 괜찮은 거야?”

    “괜찮아.”

    라온은 인상을 찌푸린 마르타와 눈을 동그랗게 뜬 루난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기는 무슨!”

    마르타가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던져주고, 뒤를 돌았다.

    “성자님을 모시고 올 테니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여기 레트란이지?”

    “응. 정리 다 끝났어.”

    루난은 자신이 일어난 것만으로 기쁜지 안색이 밝아졌다. 자다 일어나서 그런지 눈은 평소보다 맹하다.

    “에덴의 귀신들이 또 왔었는데, 전부 해치웠어.”

    예상대로 에덴의 귀신들이 더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광혈귀 놈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한 준비였겠지.’

    “다친 사람은?”

    “라온 말고는 없어.”

    “그거 다행이네.”

    라온이 피식 웃었다. 실전을 겪어서 그런지 루난도, 조금 전에 나간 마르타도 조금씩 성장한 상태였다.

    “그러면 엔시아 님은….”

    엔시아에 대해 물어 보려고 할 때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마르타와 페드릭이 들어왔다.

    “라온!”

    페드릭은 보법까지 밟으며 달려와 라온의 앞에 섰다.

    “어떻게 일어난 게냐!”

    그는 일주일 만에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지 입을 떡 벌렸다.

    “그냥 눈이 떠져서….”

    “자, 잠시 손을 줘보겠느냐.”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페드릭에게 손목을 주었다. 따스하면서도 순수한 기운이 들어와 전신에 퍼져나갔다.

    “허….”

    잠시 후 손을 뗀 페드릭은 질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셰릴이 시현초를 먹였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시현초….’

    시현초는 오러나 육체를 강화해주지는 못하는 대신 몸보신에서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약초다. 누워 있는 동안 셰릴이 그 약초를 구해와 먹였던 것 같다.

    “너 자는 동안 용의 심장이라도 주워 먹은 게냐? 어떻게 이렇게 빨리 회복한 거지?”

    페드릭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를 떨었다.

    “제가 익힌 무학 때문일 겁니다.”

    라온이 눈동자를 가라앉히며 고개를 저었다.

    ‘<나태>와 불의 고리, 시현초가 조화된 덕분이겠지.’

    나태의 수면 능력과 불의 고리가 시현초의 회복 효과를 극대화 시킨 덕분에 치유가 빨리 된 것 같았다. 페드릭이 성자라고 해도 신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평생 수많은 환자를 봐왔지만 너 같은 놈은 정말이지 처음이다.”

    페드릭은 라스와 비슷한 말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엔시아 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 그건….”

    페드릭이 말을 멈추고, 마르타와 루난을 바라보았다.

    “…가자. 너랑 난 할 일이 있잖아.”

    “난 없는데?”

    “있어!”

    마르타는 멍하니 선 루난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아이로구나.”

    “그렇죠.”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라온. 너 왜 내 제자라는 거짓말까지 해서 테머스를 밀어낸 거냐.”

    페드릭이 눈매를 좁혔다.

    “처음에 듣고 당황해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어.”

    “죄송합니다.”

    라온이 고개를 숙였다. 상황이 급했다고 해도 페드릭의 이름을 판 건 확실한 잘못이었다.

    ‘문제였긴 하지.’

    -너 맨날 그 귀때기 이름도 팔잖느냐.

    ‘…….’

    못 들은 척 대답하지 않았다.

    “죄송할 건 없다. 네 덕분에 목숨을 구했으니, 네가 내 스승이라고 해도 가만히 있어야겠지.”

    페드릭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손을 저었다.

    “내가 궁금한 건 테머스의 무엇을 보고 그를 의심했는지다.”

    “카멜룬 지하 경매장에 갔을 때 우연히 테머스가 치료를 해주었던 가문들의 분위기가 변해간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적은 없었다. 카멜룬 지하 경매장은 세상의 모든 소문이 흘러가는 곳이니, 그럴듯하게 이야기했을 뿐이다.

    “요난 가문에서 그의 눈빛을 보았는데, 외관이나, 차기 성자라는 소문과 어울리지 않게 눈동자에 아주 옅은 탁기가 깃들어 있더군요.”

    이건 진짜다. 엔시아를 진단할 때 그의 눈동자에서 작은 탁기가 흘러나왔다.

    “혹시나 해서 시험해봤는데, 계속 말이 바뀌는 걸 보고 듣던 대로의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라온은 요난 가문에서 테머스와 대치했던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잘 했다.”

    페드릭은 의외로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테머스는 예전부터 우연인 것처럼 돈과 힘이 있는 가문과 연을 맺어왔다. 네 말대로 그가 다녀간 가문은 좋지 않은 쪽으로 조금씩 변해갔지. 조만간 그를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네가 잘해주었다.”

    그도 테머스의 정체에 대해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를 벤 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 테머스가 너희를 습격했다는 증거를 내가 확인해주었으니, 해코지가 올 일은 없을 게야.”

    페드릭은 이미 셰릴이 걱정했던 부분까지 해결해 놓은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페드릭은 테머스와 비교할 수도 없는 업적을 세운 사람이니, 그의 말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엔시아 님은 괜찮으십니까?”

    “네가 날 찾아온 이유 대로 몸 상태는 끌어 올려놓았다. 다만 문제가 생겼어.”

    “문제라면….”

    “그녀의 몸 상태가 회복되면서 머릿속에 있는 열기도 함께 강해졌다. 영물 수준으로 강해져서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아.”

    그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 열기는 살아 있는 것 같다. 벌레나, 식물일지도 모르겠어.”

    “허….”

    라온이 헛바람을 흘렸다. 페드릭은 고작 일주일 만에 엔시아의 머리에 있는 헬 웜의 정체까지 다가간 것 같았다. 괜히 성자라 불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미안하다. 네가 날 믿고 와줬지만 치료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다. 조금 더 조사와 연구가 필요해.”

    “몸 상태는 올려놓으셨다고 하셨죠?”

    “그래. 막상 환자는 더 힘들어하는 중이지만.”

    “그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온이 옅게 웃으며 일어섰다.

    “제가 처리할 수 있으니까요.”

    *     *      *

    라온은 하루만 더 쉬고 움직이라는 페드릭의 만류를 거절하고 엔시아가 누워 있는 방으로 향했다.

    “으으….”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죽을 듯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너가 왜 와!”

    엔시아를 지키고 있던 셰릴이 눈을 부릅뜬 채 다가왔다.

    “환자 녀석이 왜 돌아다니냐고!”

    “할 일을 마치고 쉬려구요.”

    걱정이 가득 담겨 있는 셰릴의 눈동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할 일?”

    “저희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해결해야죠.”

    라온이 열기로 살이 땡땡하게 부운 엔시아를 가리켰다.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았잖아요.”

    “그건 맞지만, 지금은 네 걱정부터….”

    “많이 나았어요.”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편 뒤 손을 저었다.

    “무리하지 않고 치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 얼마 앓지도 않았는데 죽겠더군요. 엔시아 님은 몇 년 동안 저런 고통을 겪으셨으니, 최대한 빨리 치료해드리고 싶습니다.”

    “하….”

    셰릴이 헛바람을 흘렸다. 그녀가 저리 벙찐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았다. 방금의 말로 또 한 번 크게 놀란 것 같았다.

    “성자님!”

    “일단 지켜보세.”

    “후우, 너란 놈은 진짜….”

    페드릭까지 고개를 끄덕이자, 셰릴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물러섰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셰릴에게 고개를 꾸벅이고 엔시아에게 다가갔다.

    “와아….”

    엔시아가 힘겹게 눈을 뜨고, 가는 미소를 지었다.

    “이, 일주일 만에 일어나셨는데도 오지게 잘생기셨어요.”

    그녀는 열 때문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도 평소 같은 웃음을 지었다. 강한 사람이었다.

    “이제 괜찮을 거예요.”

    라온이 엔시아의 미소에 화답하듯 웃어주고, 침대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빨갛게 달아오른 엔시아의 손목을 잡고, 그녀의 마나 회로에 글래시아의 냉기를 흘려 넣었다.

    치이이익!

    용암이 흐르는 듯 마나 회로 전체가 열기로 가득 찼다. 회로 자체는 넓어졌지만 독한 열기가 그 안을 꽉 메우고 있었다.

    ‘성자님의 말씀대로야.’

    엔시아의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먹인 약과 치료가 그녀의 머리에 자리 잡은 헬 웜까지 강화시킨 상태였다.

    ‘참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겠군.’

    몸 상태가 좋아진 것과 반대로 고통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지금까지 정신을 잃지 않고 견딘 게 용했다.

    ‘일단 열기부터 식혀야겠어.’

    글래시아의 냉기로 마나 회로의 열기를 식히며 엔시아의 육체가 받을 부담을 줄였다.

    “아….”

    엔시아가 가라앉는 열기에 탁한 숨을 뱉으며 눈꺼풀을 떨었다. 평소라면 지금도 잘 생겼다고 할 텐데, 저리 가만히 있는 걸 보면 정말 힘든 것 같다.

    ‘빨리 제거해야겠군.’

    손목에서부터 시작된 냉기의 흐름이 하체를 지나 그녀의 어깨에 이르자, 머리에 숨어 있던 헬 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놈을 겁주기 위해서 머리 주변의 마나 회로 전체에 냉기를 움직이는데, 헬 웜은 도망치거나 숨지 않고 오히려 더 짙어진 열기를 뿜어냈다.

    그 이상 다가오면 엔시아를 공격하겠다는 협박을 하는 것 같았다.

    ‘이놈이….’

    엔시아의 몸 상태를 끌어 올리자마자 제거했어야 했는데, 놈에게 겁을 줘놓고 시간을 끌었던 게 독이 된 것 같았다.

    쯧.

    라온이 짧게 혀를 찼다.

    ‘저 열기를 어떻게 해야 하지….’

    페드릭의 치료가 잘 먹혔는지 헬 웜의 열기는 어린 영물 수준으로 강해져 있었다. 뇌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건드리기 쉽지 않았다.

    ‘저 열기를 줄일 수만…음?’

    글래시아의 냉기로 길목을 막고 있을 때 단전에 가라앉아 있던 만화공의 기운이 저절로 일어났다.

    우우우웅!

    라온이 5성이 되어 더 깊어진 만화공의 기운을 느끼며 입맛을 다셨다.

    ‘이거 잘 하면….’

    헬 웜의 기운을 내가 가질 수도 있겠는데?

    스태인 트리안이 돌아와 이곳을 공격하는 적귀와 녹귀를 무찔러서 영웅이 되어, 도시 장악까지 하는 게 에덴의 계획이었을 것이다. 검사들을 놔두고 가는 게 역시 정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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