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9화
라온이 부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이런 힘이라니.’
악양귀가 내리친 검격은 하늘 그 자체가 쏟아지는 듯한 어마어마한 힘을 담고 있었다. 만화공 백화를 극성으로 운용하고, 육체의 힘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음에도 발이 땅에 박히기 시작했다.
“크으!”
흑색 대검에서 뿜어지는 압력에 피부가 뜯겨나가고, 뼈가 으깨지는 것 같았다. 복부에서 느껴지는 내상의 열감도 심해졌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이젠 어디가 아픈지도 모를 정도였다.
쿠구구구구!
‘
악양귀가 쏟아내는 검력이 점차 강해진다. 양쪽 손목과 어깨가 분질러질 것처럼 흔들렸다.
‘젠장….’
부상이 없는 정상적인 몸 상태였다면, 만화공 백화를 완벽하게 운용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밀리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아니야. 그렇게 생각해선 안 돼.’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항상 만전의 상태이길 바라면 가문에서 나와선 안 되지.’
매번 정상적인 몸 상태로 싸울 수는 없다. 두 마스터를 쓰러뜨리고도 살아 있는 지금에 감사하고, 이 상황에서 최대한 힘을 쏟아내야 했다.
-잘하고 있느니라! 이대로 짓눌러버려라! 깨부수라고!
팔목에서 튀어나온 라스가 응원하듯 손을 마구 흔들었다.
-그래야 요놈이 본왕에게 몸을 넘기겠지! 양 대가리 네놈은 살려주겠노라!
누구의 편인지 알 수 없는 식욕의 마왕을 무시하고,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뿌드드득!
쏟아지는 압력에 발목을 넘어 정강이까지 땅에 박히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라스 놈의 말대로 짓눌려 죽게 될 것이다.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위를 보았다. 악양귀의 시선이 차갑다. 가벼운 일합승부가 아니라, 죽이기 위한 일합인 것 같았다.
‘집중. 집중해라.’
여기서 살아남을 방법은 놈의 검을 분석하는 것뿐이다. 심장 통증 때문에 가라앉혔던 불의 고리를 다시 공명시켰다.
우우우웅!
억지로 눈을 뜨며 흑검에 담겨 있는 기운과 기질을 살폈다.
‘중검 그리고 강검인가.’
양약귀의 흑색 대검에 깃든 묘리는 무거움과 강함이다. 말 그대로 힘. 오직 힘으로만 내친 위압적인 검격이었다.
‘그래서 어려워.’
변화나 환상, 부드러움이었다면 다른 검술 묘리로 깰 수 있지만, 힘으로 누르고 있기에 벗어나기 어려웠다.
“으으….”
하단전과 중단전이 깨질 것처럼 아려왔다. 마나 회로도 터질 것처럼 지독한 통증이 일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아직 할 일이 많다. 저질러 놓은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더 집중해.’
심장을 휘도는 불의 고리를 극성으로 운용했다. 마스터에 올랐기 때문일까. 세상이 멈춘 것처럼 느려진다. 그 상승의 세계에서 흑색 대검을 노려보았다.
‘중검을 밀어낼 방법….’
힘으로 부딪쳐서는 무리다. 오러의 양도, 질도 달린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영민하게 돌아간다. 과거의 검부터, 새로 익힌 중천포까지. 모든 검을 떠올리며 살아남을 방법을 찾았다.
‘잠깐! 중천포?’
라온이 마른침을 삼키며 흔들리는 제천검을 보았다.
‘중천포의 인력을 반대로 이용한다면….’
중천포는 막대한 위력과 달리 발동이 느리다.
그 단점을 끌어들이는 인력으로 보충하는데, 그 능력을 반대로 밀어낸다면 저 강대한 검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불가능은 아니야.’
더럽게 아프겠지만.
본래 가야 하는 마나 회로의 흐름을 바꿔서 운용해야 하기에 죽을 정도로 아프고 힘들겠지만 분명 가능할 것이다.
‘단숨에 가야 해.’
어설프게 운용했다간 몸이 망가져 이 균형조차 무너진다. 악양귀가 힘을 주는 순간 한 번에 발동시켜야 했다.
고오오오!
정말 바닥을 드러내는 오러를 끌어모으며 악양귀의 눈을 보았다.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에는 기이한 열기가 어려 있었다.
“생각보다 힘이 약하네.”
라온은 억지로 입을 열며 미소를 지었다.
“지친 나 정도는 일격에 베어버릴 줄 알았는데.”
“도발이 어설프군.”
악양귀가 턱을 치켜들며 피식 웃었다.
“크윽….”
어설픈 걸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버티는 것만으로 모든 힘을 써버릴 것 같았다.
“다만 준비한 게 무엇인지 궁금하니, 그 도발에 어울려주도록 하지.”
바포메트의 투구에서 강렬한 안광이 번쩍이며 대검에 담긴 기운이 폭발할 것처럼 치솟았다.
‘뭐든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군. 하지만 이건 다를 거야.’
막는 게 아니라, 밀어내는 거니까.
라온의 눈동자에 붉은 벼락이 스쳤다. 악양귀의 검격이 최대의 힘을 발휘한 순간 응집시킨 오러를 중천포와 반대로 운용했다.
뿌드드득!
마나 회로가 터져버릴 듯 부풀며 지독한 고통을 일으켰다. 내상이나, 뼈가 부러진 통증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죽을 듯한 아픔을 견디며 남은 모든 기운을 일으켰다.
라온 지그하르트 류 검식.
제2형 중천포 역(逆).
제천검의 검극에 모여든 강기의 구체가 응집되지 않고, 사위로 퍼져가며 강대한 충격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아!
세상이 무너져버릴 듯한 막대한 폭음이 터지고, 오러와 오러가 서로를 밀어내며 악양귀가 흑색 대검과 함께 두 걸음을 물러섰다.
콰아앙!
그의 발에 담긴 힘이 너무나도 강해 대지가 쪼개질 듯 흔들렸다.
쿠구구구구!
라온은 공처럼 튕겨 나가 바닥을 굴렀다. 무식할 정도로 맹렬한 힘의 충돌에 손과 발을 쓰지도 못한 채 수십 미터를 밀려 나가서 큼지막한 나무에 박혔다.
“커헉!”
라온이 가슴을 부여잡은 채 피를 토했다.
“크으으….”
내상이 심했기에 피조차 검은색이었다. 균형을 잃고 쓰러지려고 할 때 검을 땅에 박아넣고 버텼다.
“라온!”
“아아….”
당장 달려오려는 페드릭과 아이에게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
“오, 오지 마세요.”
말라붙은 입술을 억지로 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은 홀로 서야 할 때였다.
“후욱.”
숨만 쉬어도 머리가 아찔한 통증이 밀려온다. 전생에서 고문을 당하지 않았다면 당장 쓰러져서 울부짖었을 정도였다.
‘놈은 건재하군.’
악양귀는 자그마한 상처도 없이 멀쩡했다. 다만 이런 방법으로 벗어날 줄은 몰랐는지 보라색 눈동자에는 경악이 깃들어 있었다.
으득.
어금니를 부러질 정도로 깨물며 땅에 박힌 제천검을 뽑았다. 휘청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고 서서 제천검을 들어 올렸다.
“일합승부. 난 쓰러지지 않았다.”
라온이 입안에 고인 죽은 핏물을 뱉어내고 아직도 번쩍이는 은빛 칼날로 악양귀를 겨누었다.
“인정하는가!”
“허….”
악양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층 더 놀란 듯 입을 벌린 채 이쪽을 바라만 보았다. 놈의 눈동자 속에서 갈등과 고민 그리고 욕망 같은 것이 비쳤다.
“큭, 크흐!”
지루할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악양귀가 바포메트의 투구를 움켜쥔 채 턱을 떨었다.
“크하하하하하!”
놈은 나무들이 흔들릴 정도의 광소를 터트렸다.
“힘으로 못 이기니, 밀어내는 방식인가? 머리를 잘 썼어. 왜 네가 그곳에 서 있는 건지 이해가 간다.”
악양귀가 손에 든 검은 대검을 허공에 던졌다. 대검은 녹아내리는 것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인정한다.”
놈은 고개를 끄덕이며 처음 보았을 때처럼 팔짱을 꼈다.
“오늘 일합은 무승부로 해두지.”
“하아….”
라온이 탁한 숨을 내뱉었다. 호흡하고 있음에도 숨이 달린다. 풀리려는 긴장을 억지로 다잡았다.
“네놈을 살려두길 잘 한 것 같군.”
“뭐?”
“후후.”
악양귀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내리감았다.
“다음에 보았을 때는 오늘 무승부의 결착을 내도록 하지.”
그는 손을 휘젓고 본인이 막고 있던 길목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야. 야! 양 대가리! 어딜 가는 것이냐!
라스가 냉기로 가득 찬 주먹을 휘둘렀다.
-다 안 끝내고 어딜 가냐고! 이 머저리 같은 놈아!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뒈질 놈인데, 무엇이 무승부냔 말이다!
녀석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빽 소리를 질렀다.
-왜 매번 본왕에게만 이런 개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냐!
“허억!”
라온은 라스의 절규를 들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말 더 버틸 힘이 없었다.
‘이, 이러다 진짜 죽을지도….”
전신에서 참기 힘든 통증이 일어난다. 폐가 고장 났는지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 통증을 참으며 불의 고리를 회전시켰다.
“라온!”
페드릭이 넘어질 것처럼 달려와 라온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괘, 괜찮으냐.”
“성자님은 괜찮으시죠….”
역으로 무사를 묻는 라온의 말에 페드릭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너, 너 이 녀석….”
페드릭은 억지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상황 파악도 못 하고,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예전에 뵈었을 때랑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입 열지 말고 누워!”
라온의 손목을 잡고 간신히 회복한 기운을 넣었다.
“흐읍!”
페드릭이 입을 막아서 터지려는 비명을 막았다.
‘이, 이 상태에서 끝까지 싸웠다고?’
라온의 몸 상태는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곳곳의 뼈가 부러졌고, 근육과 마나 회로는 파열되었으며, 제 상태를 유지하는 장기도 거의 없었다.
온몸이 박살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자신이 만약 라온의 몸 상태였다면 당장 쓰러져서 비명을 지르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을 것이다.
“크으….”
이리 담담하게 버티는 모습을 보자 참던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지, 지금 당장 치료해주마. 진즉에 나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정말….”
“괜찮아요. 그리고 지금은 치료할 때가 아닙니다.”
라온이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숲 밖을 올려보며 입가에 흘러내린 핏물을 닦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 * *
“쯧.”
셰릴이 코웃음을 치며 양옆에서 쏟아지는 냉기와 열기의 기둥을 베어버렸다.
콰아아아아!
뒤를 이어 하늘에서 쏟아지는 황갈색 파도마저 백검으로 갈랐다.
쩌저저적!
찢어지는 마나의 파동 사이로 짜증이 가득 어린 멀린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 망할 년! 왜 매번 방해를!”
“내 임무에 네가 방해를 하는 거지.”
“너도 지금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잖아! 비켜!”
“난 한 번 한 말은 지키는 타입이라서.”
셰릴이 차게 웃으며 백검을 휘돌렸다. 좌수 흑검은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게 몬스터들을 겨눴다.
얼마든지 오라는 듯 평온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은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라온. 살아 있는 거 맞지?’
숲 자체에 펼쳐진 결계와 끝없이 폭발하고, 운용되는 멀린의 마나 때문에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았다.
큰 부딪침이 끝없이 일어났지만 누가 이겼고, 누가 밀렸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젠장.’
라온을 인정하고 보낸 건 사실이지만, 그 이후에 몇 번이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이게 맞는 건지, 다른 방법은 없는지 수없이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라온을 믿는 것뿐이었다.
‘이미 기호지세야.’
할 수 있는 건 멀린과 몬스터들을 막으며 저 숲에서 나올 사람이 라온이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비켜! 쌍년아!”
“그래. 그렇게 추해져야 배신의 마녀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멀린.”
셰릴은 하늘의 신장이라도 되는 듯 멀린과 에덴의 공세를 홀로 막아섰다. 자그마한 벌레 한 마리조차 그녀의 뒤로 지나가지 못했다.
“이익! 이대로 짓이겨주마!”
멀린이 기도하듯 합장을 하며 처음으로 영창을 읊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자연의 마나가 한순간 응집되며 하늘과 대지에서 푸르고, 붉은 구체가 쏟아져 내렸다. 순간 감각 자체가 사라졌다고 느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기운이었다.
“흐읍.”
셰릴이 오러를 끌어 올리며 백검을 아래로, 흑검을 위로 세웠다. 그대로 마나를 베어버리려고 할 때 숲의 입구에서 흔들림이 일었다.
“아?”
“음?”
마법을 내리치려는 멀린과 검을 그으려는 셰릴의 시선이 동시에 숲 입구로 향했다.
바스슥.
말라붙은 잎이 바스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라온이 걸어 나온다. 지쳐 보였지만 눈빛은 너무나도 맑았다. 그의 뒤에는 넝마의 성자 페드릭과 아이도 함께였다.
“라온? 라온!”
셰릴이 비명처럼 라온의 이름을 외쳤다.
‘사, 살아 있는 거로 모자라 전부 구해오다니!’
홀로 살아오거나, 아이만 구해와도 기적이라 할 텐데, 라온은 사지 멀쩡하게 모두를 구해서 돌아왔다. 심장이 요동칠 정도로 감정이 격해졌다. 전장에서 수십 년을 보냈지만, 이런 감격을 처음이었다.
‘마스터에 올랐어. 그것도 바로 하급이라니! 저 녀석은 진짜!”
어떻게 저 숲에서 살아남았나 했는데 라온은 부쉈던 마스터의 벽을 넘고, 그 앞을 걸었다. 글렌의 말대로 그에게는 마스터가 되었을 때의 정체기조차 없었다.
“라온….”
멀린의 눈동자가 탁하게 풀렸다.
“살아 있었구나! 살아서 나왔어!”
그녀는 이전보다 더한 열기로 찬 눈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계획이 깨진 것조차 염두에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역시 너는 나와 함께 해야 해. 네가 있을 곳은 지그하르트가 아니라, 내 옆이야!”
멀린의 미소가 짙어진다. 가면을 뚫고 진짜 표정이 나올 정도였다.
“그곳에 가면 무얼 해줄 수 있지? 정말 내 투구도 있는 건가?”
라온은 그 말에 동한 듯 멀린을 올려보았다.
“뭐? 지금 너 뭐라고….”
“투구를 쓰면 확연히 강해지는 것 같더군. 나도 쓸 수 있나?”
“물론이지! 물론이고 말고!”
멀린이 황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준비한 투구를 쓴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랜드 마스터에도 오를 수 있을 거야. 저년도 네 상대가 아닐 거라고!”
그녀는 셰릴을 가리키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몇 년이라….”
“라온! 네, 네가 왜!”
셰릴이 라온을 노려보며 눈을 부릅떴다.
“한 놈을 제대로 못 잡았습니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강하더군요. 그놈을 꺾을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라온은 고민을 하는 것처럼 검병을 쥔 손을 까딱였다. 오른쪽 새끼손가락이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건….’
셰릴이 눈매를 좁혔다.
‘사인인가.’
라온이 멀린을 처리할 틈을 주려는 게 분명했다.
“그럼 당장 가지. 지쳐서 쓰러질 것 같으니까.”
“알겠어! 얼마든지!”
멀린은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왼손을 뻗었다. 바닥에 푸른 마법진이 생겨난 순간 그녀가 유지하던 마나의 구체에 흔들림이 일었다.
‘지금!’
셰릴이 진각을 밟았다. 오러를 극성으로 끌어 올려 멀린의 허점을 그었다. 색이 다른 두 자루 칼날에서 아롱진 회색 빛무리가 하늘과 땅을 갈랐다.
콰아아아아!
회색 궤적은 거대한 마법만이 아니라, 멀린마저 베어버릴 듯 무시무시한 힘을 일으켰다.
“끄으으윽! 라온! 라온!”
멀린은 죽을 듯이 피를 흘리면서도 바닥의 마법진을 유지 시켰다. 어떻게 해서든 라온을 데리고 가려는 광적인 집착이었다.
라온은 그 마법진 앞으로 다가가 발을 들었다.
“라온?”
셰릴이 당황하여 입술을 떨 때 라온은 마법진이 아니라 그 바로 앞을 내리찍었다.
콰아앙!
바닥이 터지며 멀린이 억지로 유지하던 마법진이 찢겨 졌다.
“그딴 투구를 쓰고 살 바에는 죽고 말지.”
“라오오오오온!”
마지막 마법이 뭉개지자, 멀린은 소름이 돋는 비명을 지르며 회색빛 속으로 녹아내렸다.
“허어억.”
라온은 그대로 주저앉아서 피를 토했다.
“라온!”
“라온!”
셰릴과 페드릭이 기겁하며 다가와 라온을 붙잡았다.
“아, 진짜 눈치 없으시네. 빨리 끝내셨어야죠.”
라온이 셰릴을 흘겨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셰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상태에서 멀린의 빈틈을 만들 줄 누가 상상했겠는가.
“전 이제 좀 쉬어야겠습니다. 진짜 이대로 죽을 거 같아요.”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서 있기는커녕 정신을 차리고 있을 기운도 없었다.
[마스터의 경지에….]
[혹한의 저주….]
[대륙 최초의….]
[만화공이….]
[글래시아가….]
지금까지 쌓은 공적 메시지들이 한 번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뭐, 뭐가 이리 많은 것이냐!
라스가 튀어나오는 것 보며 눈을 감았다.
저 분노에 찬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