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17화 (217/653)

제217화

“후우….”

라온은 흩어지는 투기의 잔재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간신히 막았군.’

제천검으로 만화공, 진혼검으로 글래시아를 극성으로 운용한 덕분에 강기로 이루어진 벽을 갈라낼 수 있었다.

기습적으로 꺼내려고 했던 쌍검을 처음부터 사용했고, 속이 울렁거리는 내상도 입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살았으니까.’

페드릭과 아이가 살았기에 기습을 포기하고, 내상을 입었어도 아깝지가 않았다.

“자네는 대체….”

페드릭의 목소리는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가 등을 두드리며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을 때가 떠올라 작게 미소가 지어졌다.

“나중에 말씀드릴 테니. 물러나 계십시오.”

라온이 뒤편을 가리키고 앞을 보았다. 아쉽지만, 지금 페드릭에게 남은 기운은 없다. 라온 홀로 싸워야 했다.

‘가능할까.’

힘들어 보인다. 원래 계획은 페드릭과 함께 3명의 마스터를 상대하는 거였으니까. 솔직히 말해 최악의 상황이었다.

후우우우웅!

폭발한 모래 먼지가 가라앉으며 갑주를 두른 두 명의 귀신이 보인다.

‘적랑귀와 흑익귀인가.’

붉은색 갑주에 늑대 머리 투구를 쓴 무인과 한 쌍의 날개가 박힌 흑색 갑주를 두른 남자가 섬뜩한 눈빛을 발한다.

이쪽을 탐색하는 눈빛만으로도 느껴지는 강대한 기세. 둘 다 마스터에 오른 괴물들이었다.

‘그리고….’

라온이 마른침을 삼키며 그 뒤편을 보았다. 하체는 산양, 상체는 기사의 갑주를 입고, 염소의 투구를 쓴 남자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악양귀.’

하필 바포메트라니….

라이칸스로프와 가고일 로드도 강력한 보스급 몬스터지만 바포메트는 그 격 자체가 달랐다.

바포메트는 소드 마스터급의 대검술과 7서클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고, 뛰어난 지능으로 인간을 농락하는 최상급 몬스터였다.

악양귀는 그 바포메트의 힘을 이어받았으니, 저놈 역시 평범한 마스터 수준이 아닐 것이다.

솔직히 말해 적랑귀와 흑익귀보다 저 악양귀 하나가 더 위험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놈이 혼자라는 거.’

바포메트는 본래 한 쌍으로 다니며 제멋대로 행동하는 특징이 있다. 아직 혼자인 걸 보니 놈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강기를 베는 익스퍼트라. 네가 라온 지그하르트인가.”

적랑귀는 라온을 훑어내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라, 라온? 네가 라온이라고?”

뒤편에서 아이를 챙기던 페드릭이 눈을 부릅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라온은 페드릭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주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7사도를 쓰러뜨렸나 했더니, 화속성과 수속성을 모두 쓸 수 있었군.”

적랑귀는 라온을 알고 있었는지 진혼검과 제천검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저 새끼 죽여도 되지? 어? 생긴 거부터 마음에 안 들어!”

흑익귀가 꼬나쥔 단검에서 새빨간 투기가 솟구쳤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셋이 덤비면 아예 승산이 없는데….’

라온이 악양귀를 살폈다. 놈은 싸울 생각이 없는 것처럼 나무에서 등을 떼지 않았다.

“내 역할은 이 길목의 차단이거든. 이쪽으로 오지 않으면 나설 생각 없어.”

악양귀는 이쪽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빙긋 웃었다. 기이할 정도로 가벼운 말투. 어린아이가 말하는 것 같았다.

“정말 그러실 겁니까?”

적랑귀가 악양귀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너도 들었잖아. 길목만 막으라고. 각자 할 일을 하는 거지.”

악양귀는 뭐 어쩔 거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둘 다 에덴에 속해있지만, 뜻이 같은 것 같지는 않았다.

“저 말은 정말이다. 저놈 동료가 위험할 때도 나서지 않았어.”

페드릭이 본인이 싸울 때도 악양귀는 움직이지 않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지.’

바포메트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몬스터다.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 절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었다.

“못 참겠어! 지그하르트고 뭐고! 익스퍼트 주제에 건방지잖아!”

흑익귀가 날개를 펼쳤다. 풍선이라도 된 듯 부드럽게 떠오르더니, 벼락이 되어 떨어진다. 투기가 가득 어린 단검이 목을 향해 쇄도해왔다.

붉게 물든 단검이 목을 가르려는 순간 라온은 어깨를 비틀었다. 조금 전 광혈귀를 상대하며 투기의 결을 눈에 익혀둔 덕분에 반응이 빨랐다.

라온은 역으로 흑익귀의 목을 노리고 제천검을 뻗었다. 서리연의 빠름이 깃든 은빛 칼날이 흑색 갑주를 가르려는 순간 놈의 날개가 다른 각도로 꺾였다.

콰아아!

거친 바람이 일며 놈이 다시 하늘로 치솟았다.

후우웅!

흑익귀가 떠난 자리를 채우는 붉은 선이다. 적랑귀가 늑대처럼 달려와 손톱을 내리그었다.

‘빨라!’

속도만큼은 하늘을 나는 흑익귀보다 빠른 것 같았다. 알아차린 순간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화아아아!

투기로 이뤄낸 강기가 전신을 휩쓸어온다. 조법의 고수라더니, 피할 방위 자체를 막아버리는 상급의 무학이다.

하지만 이쪽은 그보다 더 뛰어난 보법이 있었다. 태화보의 첫 번째 걸음을 걸으며 적랑귀의 조법을 모조리 비껴냈다.

진각을 밟으며 적랑귀를 향해 만화공 화륜을 펼쳐냈다. 시뻘건 불꽃이 어린 화염의 톱날이 대기를 울렸다.

“흥!”

적랑귀는 오러의 파동을 느끼고 물러나듯 몸을 튕긴 뒤 재차 돌진해왔다.

콰아아앙!

화륜과 강기가 격돌하며 강대한 폭발이 터져 나왔다.

“크윽!”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쪽의 반응이 빨랐음에도 내부에서 심한 충격이 일어났다. 아무래도 적랑귀의 강기에는 오러를 뚫고 들어오는 관통력이 있는 것 같았다.

“뒈져!”

하지만 그걸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허공에서 기회를 엿보던 흑익귀가 투기로 타오르는 단검으로 심장을 노려왔으니까.

태화이보를 밟으며 붉은 먼지를 뚫어내고, 쾌검결을 펼쳐냈다. 태화보의 신묘한 힘이 깃든 푸른 칼날이 투기로 번들거리는 단검을 튕겨냈다.

쩌어어엉!

쇳덩이로 몸을 후려친 듯한 충격이다. 흑익귀의 오러는 쇠를 갈아 뭉친 듯 단단했다. 뚫어내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크르르!”

이번에는 적랑귀가 몸으로 들이닥친다. 호흡을 고를 틈도 없이 태화삼보를 밟아 물러나며 제천검에 유검의 묘리를 담아냈다.

캬갸갸갸걍!

바위가 갈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손목에 시퍼런 핏물이 번졌다. 놈의 돌진에 담긴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핏줄이 터진 것이다.

“젠장….”

라온이 거친 숨을 뱉어냈다.

‘이게 힘이 빠진 상태라니.’

페드릭과 격전을 벌이며 적랑귀와 흑익귀도 힘이 빠졌을 텐데, 버티기 버겁다. 멀미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린다. 점차 내상이 심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버틴다.’

불의 고리의 분석력과 회복력을 믿고 두 검을 세웠다. 광혈귀를 죽일 때처럼 놈들의 무학을 파악한 뒤 단숨에 끝을 내야 했다.

“이 건방진 새끼가!”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흑익귀가 날개를 쫙 펼친 채로 강하한다. 속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단검에 깃든 강기를 화살처럼 쏘아냈다.

라온이 이를 악물고 진혼검을 세웠다. 태화삼보의 부드러움이 담긴 검격으로 단검을 흘려낸 뒤 제천검으로 광아검을 펼쳐냈다.

쩌어어엉!

제천검의 칼날은 흑익귀의 허점을 노리고 들어갔지만, 검은 갑주는 베이지 않았고, 오히려 제천검이 튕겨냈다.

‘이런 강도라니….’

투기를 두르지 않았음에도 갑주의 강도가 투기를 두른 광혈귀보다 뛰어났다. 가고일 로드의 특성을 가진 놈답게 갑옷과 무기가 비정상일 정도로 단단했다.

치이이잉!

뒤로 밀려난 틈을 노리고 적랑귀가 달려든다. 섬뜩한 투기가 담긴 손톱으로 심장을 노려왔다.

‘흘려야 해.’

적랑귀의 투기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쩌어엉!

발목을 돌리며 진혼검에 전사경을 담았다. 나선의 회전이 깃든 칼날이 살기로 폭발하는 손톱을 쳐냈다.

“크으….”

라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부분의 힘을 흘려냈음에도 속에 내장을 칼로 찌르는 듯한 큰 충격이 일었다.

“아직 멀었다!”

두 귀신은 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하늘과 지상을 노니며 막대한 투기를 쏟아부었다.

강기를 막아야 했기에 전투가 길지 않았음에도 오러가 금세 바닥을 드러냈고, 뱃속에서 용광로를 피운 듯한 지독한 고통이 일었다.

“이제 후회가 되는 건가?”

“이제 돌아가기에도 늦었다. 네 무덤은 여기야.”

적랑귀가 서늘한 미소를 흘렸고, 흑익귀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둘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후회?”

라온은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핏물을 삼키며 미소를 지었다.

“그딴 건 한참 전에 버리고 왔어.”

설사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후회는 없다. 구명의 은은 목숨으로 갚는 법. 무슨 수를 써서라도 페드릭을 구할 것이다.

‘라스.’

-드디어 결정을 내렸군. 좋다. 본왕이 강림하여 모조리 쓸어 버리….

‘거래를 하자.’

-뭐라?

라스가 팔찌에서 튀어나오다 말고 멈춰 섰다.

‘네 분노를 받을 테니, 내상과 오러를 회복시켜 줘.’

-의미 없는 짓이다. 회복해도 두 놈을 이기는 건 무리다.

‘내가 죽을 것 같으면 바로 네게 몸을 넘겨주지.’

-이, 이 미친 것이….

‘쫄리면 말고.’

-좋다! 얼마든지!

얼음꽃 팔찌를 통해 청아한 기운이 스며들어온다. 달군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복부의 통증이 가라앉고, 텅 비었던 단전이 샘물처럼 차올랐다.

[<분노>와의 계약에 따라 분노가 20포인트 생성됩니다.]

[<분노>와의 내기가 생성되었습니다.]

라온은 메시지를 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길 수 있어.’

광혈귀의 강기를 가른 이후부터 머릿속에서 뭔지 모를 여러 개의 선이 떠오른다.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을 때처럼 시야에 번쩍이는 선들은 전투가 격해질수록 더 짙어졌다.

무수한 숫자의 선들이 하나로 이어진다면 새로운 곳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은 나아갈 때야.’

이건 죽음을 앞에 둔 시련이자, 한 발 더 나아갈 기회였다.

치이이잉!

라온이 제천검과 광아검을 들어 올려 적랑귀와 흑익귀를 겨누었다.

“오라!”

*     *      *

콰과과과광!

수십 줄기의 검격과 마법이 격돌하며 어둑한 밤하늘에 장대한 빛무리를 뿌렸다.

“비켜!”

멀린이 달보다 더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말했잖아. 여긴 아무도 못 지나간다고.”

셰릴은 백검으로 멀린을 겨눈 채 차게 웃었다.

“멍청한! 저 안에 있는 마스터만 세 명이야! 라온이라고 해도 이길 수 없다고!”

멀린은 진심으로 라온을 원하는 듯 눈동자에 짙은 열기를 뿜어냈다.

“죽이기 전에 말려야 해! 빨리 비켜!”

“그래놓고 라온을 에덴으로 데려가려 하겠지.”

셰릴은 다 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

“안 죽어. 라온은 본인의 입으로 했던 말을 어긴 적이 없거든. 거기다….”

그녀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녀석은 기적을 만들어내지. 죽지 않고 더 강해져서 돌아올 거야.”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구나.”

멀린이 입술을 깨물며 손을 펼쳤다. 그녀의 손목을 두른 팔찌가 검게 빛나며 마법진의 크기와 격을 높였다.

“널 죽이고, 라온을 맞이하러 가야겠어.”

“얼마든지 해봐. 할 수 있다면 말이지.”

셰릴이 차게 웃으며 백검을 들어 올렸다. 백검에서 솟구친 회색 기운이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콰아아아아아!

마법진에서 뿜어진 검은 해일과 백검에서 피어난 한 줄기 선이 맞부딪쳤다.

*     *      *

셰릴과 멀린의 웅장한 격돌과 달리 라온과 적랑귀, 흑익귀의 전투는 숨 쉴 틈 없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라온은 입매에서 흘러내린 핏줄기를 소매로 닦으며 땅을 박찼다.

쩌저저적!

이를 드러내고 달려와 수강을 쏟아내는 적랑귀에게 제천검을 뻗어내고, 뒤에서 목덜미를 노리는 흑익귀의 습격은 역수로 잡은 진혼검으로 밀어냈다.

쿠구구구구!

양각에서 발생한 막대한 폭발에 땅거죽이 뒤집히고, 숲에 무너질 듯 흔들렸다.

태화보를 밟아 충격을 벗어난 순간 흑익귀의 날개가 따라붙었다. 날개로 베어버리려는 듯 그대로 날아든다.

“후욱!”

거친 숨을 뱉어내며 광아검을 쳐냈다.

쩌어어엉!

놈은 날개에도 강기를 두를 줄 아는 고수였다. 충격이 뼈와 근육을 넘어 장기에 닿았다. 라스의 분노까지 받아 가며 회복한 내상이 다시 도졌다.

하지만 통증을 느낄 새는 없었다. 빈틈만 보이면 달려드는 붉은 늑대가 코앞에 이르러 있었다.

태화이보를 밟으며 염룡결을 펼쳐냈다. 위력은 줄었지만, 그 속도는 빛살과도 같았다.

콰아아앙!

파괴력이 줄었다고 해도 염룡결은 염룡결. 적랑귀의 강기를 상대로도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속은 뒤틀린다. 울대를 뚫고 나오려는 핏물을 다시 삼키고 광아검 섬창을 펼쳐냈다.

쩌어어엉!

목을 노리던 시꺼먼 단검을 비틀어냈다. 흑익귀가 혀를 차고, 다시 허공으로 떠올랐다.

“하아.”

내상이 산불처럼 번져간다. 복부 전체가 화상을 입은 듯한 지독한 열감으로 가득했지만, 정신은 점차 또렸해졌다.

콰아아아아!

적랑귀와 흑익귀가 동시에 쇄도해온다. 각자 절기를 운용했는지 손톱과 단검에 깃든 투기가 공기를 진동시키고, 대지를 깨부쉈다.

제천검을 좌측 어깨로, 진혼검을 우측 허리로 젖힌 뒤에 동시에 뻗어냈다. 회천과 서리연의 어우러짐에 붉고 푸른 광채가 폭발했다.

콰아아아아앙!

라온이 뒤로 다섯 걸음 밀려나며 참고 있던 피를 토했다. 복부가 타는 것처럼 열감이 심해졌다. 전보다 더 심각한 내상이었다.

‘괜찮아.’

입술을 씹으며 호흡을 골랐다. 놈들은 자신의 검격을 뚫지 못했고, 이쪽은 놈들의 무학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후우우우욱!

가라앉는 흙먼지 속에서 적랑귀와 흑익귀가 보인다.

“저놈은 대체….”

“이, 이게 가능해?”

둘은 믿지 못할 광경을 본 듯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놈들의 입에서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저놈… 사골조의 빈틈을 노리고 검을 내질렀다.”

“나도 마찬가지야! 형비검의 허점이 뚫렸다고!”

적랑귀의 안구에서 냉혹한 빛이 번쩍이고, 흑익귀의 투구 속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렸다.

콰앙!

두 괴물은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전력을 다해 보법을 밟았다.

‘우측!’

우측 사각에서 적랑귀가 밀어닥쳤다.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예리한 강기의 끝을 연성검술로 흘려내고, 제천검으로 화령을 그었다.

콰아아아아!

검극에서 솟구친 화염의 폭풍이 적랑귀를 밀어냈고, 역수로 잡은 진혼검의 냉기가 고드름처럼 세워져 흑익귀의 날개를 튕겨냈다.

두 귀신의 투기가 새빨간 노도가 되어 밀려왔지만, 라온의 검은 높다란 제방이 되어 그 모든 투기를 막아냈다.

“크으….”

입에서 핏덩이가 튀어나왔지만, 미소가 지어졌다. 불의 고리가 찾아낸 빈틈이 확실하게 먹혀들었으니까.

쩡! 쩌저정!

제천검이 적랑귀의 비틀린 강기를 완벽하게 쳐내고, 진혼검이 흑익귀의 날개를 단숨에 밀어냈다.

‘조금만 더….’

장인이 망치로 두들겨 검날을 세우듯 점차 정신이 고조된다. 심장을 휘도는 불의 고리가 그대로 느껴졌다.

“저 씨발 새끼가!”

“최대한 빨리 죽여라!”

흑익귀와 적랑귀가 각기 상체와 하체를 노려온다. 손과 검에 깃든 열화 같은 강기는 그대로였다.

‘후우우….’

집중력을 더 갈고 닦았다. 급하기 때문일까. 돌진해오는 적랑귀와 흑익귀의 운용하는 무학의 비틀림이 심해졌다.

‘저들도 지친 거야.’

레트란을 습격하고, 페드릭과 혈전을 벌이며 적랑귀와 흑익귀도 많은 기운을 소모한 상태다. 버티고, 버틴다면 이쪽에도 승기가 있었다.

‘참는 건 자신 있으니까.’

암살자로 살며 정말 많은 것을 견뎌왔기에 인내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만화공과 글래시아를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마나 회로가 끊어질 듯한 통증을 참으며 광아검을 뻗어냈다.

쩌어어어어엉!

붉고, 푸른 검격이 공간을 휩쓸며 적랑귀와 흑익귀의 투기의 틈을 갈랐다.

“계속 가!”

“크르륵!”

태화보를 밟아 적랑귀와 흑익귀에게서 떨어졌지만, 놈들은 거머리처럼 달라붙으며 강기를 쏟아냈다.

“흐읍!”

라온은 제천검과 진혼검을 고쳐잡고 적랑귀와 흑익귀가 펼치는 무학의 빈틈만을 노렸다.

쾅! 콰아앙!

막대한 충격파가 연속으로 터지며 울창했던 숲이 허허벌판처럼 무너졌다.

‘더 집중해야 해.’

내상이 이 정도로 도진 이상 버틸 방법은 적의 빈틈을 노리는 것뿐이다. 한계에 이르러 또 한 번 집중력을 높였다.

‘필요 없는 걸 지우는 거야.’

시야에서 하늘과 땅이 지워지고, 어둑한 숲이 사라지며, 적랑귀와 흑익귀조차 흩어진다.

남은 건 두 줄기의 선.

적랑귀와 흑익귀가 쏟아내는 투기의 흐름이었다.

여전히 어마어마한 힘을 싣고 있는 두 귀신들의 투기를 밀어내고, 쳐냈다.

오직 흐름만 보기 때문일까? 공격을 차단하고, 결을 보는 게 훨씬 편해졌다.

이젠 시간이 멈춘 것처럼 투기로 이루어진 강기의 선이 느릿하게 뻗어온다.

‘뭔가가 달라.’

그 선은 뇌리에서 그려지는 선과 비슷하면서 달랐다.

욕망 혹은 집착과도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 선이 눈앞에 다가올 때까지 그저 지켜만 보았다.

얇았던 선들이 불꽃처럼 번져가며 시야를 가득 메운다.

‘이건!’

이제야 알겠다. 머리에서 그려지고, 눈앞에서 떠올랐던 붉은 선은 남의 것이 아니었다.

나의 삶이자, 나의 검이었다.

지금까지 수십만, 수백만 번을 휘둘렀던 검들이 단숨에 떠오르며 뇌리에서 시작된 벼락이 정신과 육체를 관통했다.

번쩍!

붉은 벼락은 명치 부근에 박혀 있던 단단한 무언가를 잘게 부쉈다.

쿠구구구!

마나 회로에 뭉쳐있던 만화공의 기운들이 그 공간을 스쳐 지나가며 한층 강화되고 단단한 기운을 내뿜었다.

찌이이이잉!

제천검에 맺힌 만화공의 기운이 꼬이고, 응집되며 선명한 빛을 뿜어냈다.

화아아아아!

완벽하게 유형화된 불꽃. 그 무엇이라도 태울 듯한 열화의 강기가 천지에 찬란한 빛을 뿌렸다.

‘이게 강기인가….’

검기와 검사와는 감각 자체가 다르다. 모든 것을 베어버릴 듯한 극한의 예기가 새빨간 불꽃에 깃들어 있었다.

“강기라고?”

“주, 죽여! 당장 죽여!”

적랑귀와 흑익귀가 전력을 다해 투기를 끌어 올렸다. 다급했는지 아껴둔 힘을 모조리 운용하여 처음보다 더 맹렬한 강기를 일으켰다.

고오오오.

라온은 달려드는 적랑귀와 흑익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관조했다.

‘이게 전부가 아니야.’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어.

남들은 벽을 넘었지만, 난 벽을 부쉈다.

지금까지 쌓아 올린 무학을 연료 삼아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머릿속에 두 번째 뇌광이 번쩍인다. 순간적으로 영혼이 한 차원 높은 곳에 다다른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이해하지 못했던 무리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며 새로운 검의 궤적을 그려냈다.

눈앞에 비치는 한 줄기 선을 향해 제천검을 내질렀다.

새하얀 검신의 끝에 검붉은 강기가 응집된다. 압축된 기운에서 퍼져나간 뇌전이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이런 검격 따위!”

“느려!”

적랑귀와 흑익귀가 비웃음을 흘리며 피하려 했지만 상관없다. 놈들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니까.

우우우웅!

검극에 어린 구체에서 발생한 인력이 두 귀신의 움직임을 막고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이거 설마 중검의…?”

“끄, 끌려 들어가고 있어!”

두 귀신은 붉은 강기에서 일렁이는 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턱을 떨었다.

“막아!”

“가, 강막을 최대로….”

“소용없어.”

대지를 울리는 진각과 함께 응집된 기운이 폭발한다.

라온 지그하르트 류 검식.

제2형 중천포.

제천검에서 뻗어나간 장대한 서기가 시뻘건 투기를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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