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6화
라온은 광혈귀에게 검을 겨눈 채 만화공을 끌어 올렸다.
‘최대한 다치지 않고 끝내야 해.’
로지의 말대로라면 마스터는 총 넷. 앞에 광혈귀가 있으니, 숲에 있는 마스터는 셋이다. 그들을 상대로 성자를 구해내려면 여기서 최대한 힘을 아껴야 했다.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나?
라스는 헛짓이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본왕에게 몸을 넘겨라. 본왕의 육체를 넘보는 계집도, 저 숲 안에서 발광 떠는 버러지들도 모조리 얼려주겠노라.
녀석은 동그란 손을 뻗어왔다.
-그것만이 네 은인을 구할 유일한 방법이다.
‘너 전에 내 몸에 들어오면 폭주 상태가 된다며.’
-그, 그건 그렇지만 금방 돌아온다! 제정신만 차리면….
‘헛소리 말고, 물러나 있어.’
슬로스와 만났을 때 라스는 너무 오랜 기간 육체와 영혼이 떨어져 있어서 자신의 몸에 들어온 순간 폭주 상태가 된다고 했었다.
지금 놈에게 몸을 넘겨줬다간 셰릴은 몰라도 저 숲 안에 있을 페드릭과 아이는 죽게 될 것이다.
“하아아….”
광혈귀의 입에서 담배 연기처럼 허연 숨이 뿜어졌다.
“자신감이 과하군.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재능이 넘치기 때문이겠지.”
놈의 눈동자가 질투와 살기로 붉게 번들거렸다.
“마스터에 올랐는데도, 그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은 건가. 불쌍하군.”
라온은 턱을 치켜들며 비웃음을 흘렸다.
“닥쳐라!”
광혈귀가 괴성을 지르며 주먹을 내뻗어왔다. 투기로 이루어진 강기가 타오르며 공기가 사정없이 터져나갔다.
후우우웅!
라온은 시야 전체를 가린 듯한 광혈귀의 주먹을 지켜보다가 마지막 순간에 왼발을 뒤로 뺐다. 스치지도 않았는데도, 권풍에 피부가 찢겨나갈 것 같았다.
‘위력 자체는 전에 본 광혈귀에 못지않아. 투로도 비슷하고.’
놈이 내지른 주먹은 세부 마을에서 싸웠던 전대 광혈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 다음 것도?’
라온은 가볍게 뒤로 물러나며 제천검을 아래로 내렸다. 광혈귀가 거머리처럼 달라붙으며 팔뚝을 통째로 휘둘러왔다. 놈의 팔 전체가 투기로 타오르고 있어 피할 공간이 극도로 적었다.
‘예상대로야.’
두 번째 공격 역시 전대 광혈귀에서 보았던 방식이다. 허리를 뒤로 젖히며 직선으로 쏟아진 공격을 완벽하게 피해냈다.
챠아아앙!
라온은 허리를 펴며 아래로 내린 제천검에 쾌검의 무리를 담아냈다. 빨갛게 달아오른 칼날이 빛살이 되어 광혈귀의 팔뚝을 훑고 지나갔다.
뚜욱.
갈라진 갑옷 사이에서 핏물이 떨어진다. 광혈귀가 고개를 숙인 채 본인의 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후우….”
라온이 숨을 고르며 손목을 돌렸다.
‘에덴은 내가 광혈귀와 싸워보았다는 걸 모르고 있어.’
그 정보의 차이를 이용한다면 이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아, 그걸 피하고 반격이라.”
멀린이 진한 감탄을 흘렸다.
“역시 내가 잘못 보지 않았어. 라온. 넌 나와 함께 가야 해.”
점잖은 듯한 목소리지만 그 안에는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이 흘러넘쳤다.
“재능의 축복을 받아서 좋겠구나.”
광혈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붉은 눈동자가 광기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 재능으로 명성을 떨치고 저분의 관심까지 받고 있으니, 아주 좋겠어!”
놈의 기세가 점차 강해진다. 주먹에서 타오른 투기가 전신으로 번져갔다.
“이제 네놈의 검은 내게 닿지 못한다!”
광혈귀가 오우거 같은 포효를 터트리고 돌진해왔다. 인간이 아니라, 산이 달려드는 듯한 어마어마한 기세였다.
‘이것도 같군.’
이 돌진을 잘못 막았다가 왼팔이 박살 났기 때문에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는 공격이었다.
터엉!
태화삼보를 밟았다. 부드러움이 깃든 발걸음이 바위 사이로 스며드는 빗방울처럼 광혈귀의 돌진을 흘려냈다.
“이놈!”
광혈귀가 순식간에 방향을 바꿔 다시 따라붙었다. 움켜잡아 으깨려는 듯 양팔을 뻗어왔다.
치이이잉!
라온은 가람보법을 연달아 밟아 광혈귀의 손아귀를 벗어난 뒤 만화공을 전력으로 일으켰다.
만화공 십화
화령.
은빛 대지에서 피어난 화염의 꽃잎들이 광혈귀를 덮쳤지만, 놈의 투기를 뚫지 못하고 안개처럼 사그라들었다.
“말했지 않느냐!”
광혈귀가 광기로 가득한 웃음을 흘리며 재차 달려들었다.
“네놈의 검은 통하지 않는다고!”
바위 같은 주먹을 연달아 내지른다. 막대한 기파에 허공과 대지가 끝없이 터져나갔다.
“후욱!”
라온은 광혈귀의 권격을 간신히 흘리거나 막아내며 계속 뒤로 물러섰다. 절체절명의 위기처럼 보였지만, 그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계획대로 되고 있어.’
전대 광혈귀의 투로를 모두 익힌 덕분에 완벽하게 피할 수 있었음에도 간발의 차로 피하는 듯한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 이유는 하나. 단 일격으로 광혈귀를 베기 위해서였다.
‘놈은 아직 미숙해.’
뎀트의 증언대로라면 스태인이 광혈귀의 힘을 받은 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는 않았을 거다.
투기로 만들어낸 권강 자체는 7사도 이상으로 막강하지만, 그 완성도는 확연히 부족했다. 충분히 찌를 수 있는 빈틈이었다.
“크으윽!”
라온은 만화공의 검술을 연달아 펼치며 광혈귀에게 공격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시켰다.
“난 네놈이 싸운 7사도와 달라! 네놈의 불꽃은 통하지 않는다!”
그 말 역시 전대 광혈귀와 똑같았다. 역시 놈들은 자신과 전대 광혈귀가 싸웠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이걸로 끝내자!”
광혈귀가 뒤로 젖혔던 오른 주먹을 내지른다. 주먹에 어린 투기가 용오름처럼 솟구치며 거대한 파동을 일으켰다.
“드디어.”
라온은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번져가는 투기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왔어!’
광혈귀가 일으킨 투기의 파도는 리메르가 바람의 칼날로 갈라버렸던 바로 그 권격이었다. 눈앞에서 깨져나가는 걸 보았기에 빈틈이 어딘지는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치이이잉!
자그마한 허점을 향해 제천검을 뻗어냈다. 파란 물감을 찍은 붓의 한 획처럼. 제천검의 칼날 위에 깃든 푸른빛이 허공을 질주했다.
푸카아악!
광혈귀의 갑주가 뜯겨나가고, 놈의 가슴에서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이노오오놈!”
광혈귀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당황한 와중에도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본능적으로 서리연의 두 번째 참격을 느낀 것 같았다.
‘그것도 예상했어.’
전력을 다해 진각을 밟았다. 우측에 다다른 제천검을 역수로 고쳐잡고 다시 좌측으로 그어 내렸다.
콰아아!
첫 번째 궤적을 따라 그어진 서리연의 얼음 줄기와 반대에서 치솟은 은빛 칼날이 교차하듯 맞물렸다.
뿌드드득!
동시에 뻗어나간 두 개의 검격이 광혈귀의 투기를 뚫고, 놈의 심장을 갈랐다.
“끄으윽, 너, 너….”
광혈귀가 분수처럼 피가 뿜어지는 가슴을 움켜쥔 채 무릎을 꿇었다.
“후우, 말했잖아.”
라온이 거친 숨을 고르며 광혈귀를 굽어보았다.
“사술로 얻은 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 나는. 나는 재능을….”
광혈구가 마지막까지 팔을 뻗었지만, 그 손은 라온에게 닿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쿠웅!
기묘하게도 마스터에 오르기 위해 가족도, 동료도, 평생의 라이벌도 져버렸던 남자는 마스터에 오르지 못한 검사에게 쓰려졌다.
“광혈귀…?”
멀린도 이 상황은 예측하지 못했는지 가면이 짓는 기괴한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져 있었다.
“라온! 너 이 자식 진짜!”
셰릴 역시 깜짝 놀라서 가는 눈매가 동그랗게 보일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천검대주님. 아까 말씀하신 임무대로 움직이면 되겠습니까?”
라온은 제천검을 말아 쥔 채 셰릴의 등을 보았다.
“그래! 가라!”
그녀는 바로 가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 어딜 가! 절대 못 가!”
정신을 차린 멀린이 두 손을 모았다. 그녀의 뒤로 태양과 달 같은 거대한 마법진이 피어났고, 그 마법진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마법들이 치솟았다.
“놈을 잡아!”
“절대 숲에 들어가지 못하게 해라!”
“크아아아아!”
그것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뒤에 물러나 있던 녹귀와 적귀, 몬스터들이 해일이 되어 밀려왔다.
“라온. 가라고 했는데 왜 거기 있지?”
셰릴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하지만….”
“넌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모르나?”
그녀가 옅게 웃으며 등에 멘 검을 뽑았다.
“나는 그분의 첫 번째 검이자, 최후의 방패.”
하나의 검집에서 두 자루의 검이 솟구친다. 백검과 흑검. 색이 극명하게 반대되는 검들이 어둠을 일그러뜨렸다.
“흑백교검! 그게 왜 너한테!”
멀린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 뒤로는 무엇도 지나가지 못한다!”
백검이 땅을 겨누고, 흑검이 하늘을 가리킨다.
콰아아아아아!
두 자루의 검 어린 회색 빛무리가 천지로 뻗어나간 순간 쏟아지던 멀린의 마법이 먼지처럼 녹아내리고, 달려들던 에덴의 귀신들이 파도에 휩쓸린 모래처럼 쓸려나갔다.
“다시 지시를 내리지.”
시야에 가득했던 마법과 몬스터를 모조리 지워낸 셰릴이 뒤를 가리켰다.
“라온 지그하르트. 성자님을 구해와라.”
* * *
콰아아앙!
거대한 충격파가 숲을 뒤흔든다.
“끄윽….”
넝마의 성자 페드릭이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밀려났다. 그가 항시 입고 다니던 거적때기는 마른 낙엽처럼 바스러져 형체조차 잃어버린 상태였다.
‘빌어먹을….’
페드릭이 덜덜 떨리는 손을 바라보았다. 양팔이 모조리 부러진 듯 아렸고, 전신을 지탱해주던 다리의 힘도 풀려갔다. 방심하면 이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
“다 늙은 몸으로 드럽게 잘 버티네.”
가고일 로드의 힘을 이어받은 에덴의 귀신, 흑익귀가 공중에 뜬 채 히죽였다.
“방심하지 마라. 성자는 지금도 육체를 회복시키고 있으니까.”
라이칸스로프의 갑주를 두른 적랑귀가 차가운 음성을 흘리며 손톱을 세웠다. 검은 손톱 위로 새빨간 투기가 넘실거렸다.
“흐으읍!”
페드릭은 흔들리는 손아귀에 억지로 오러를 밀어 넣으며 장법을 펼쳤다. 전사경의 회전을 담은 황색의 장강이 두 귀신의 빈틈을 향해 쏘아졌다.
콰아아아!
적랑귀의 손톱에 어린 투기가 막대한 풍압을 일으키며 장강을 터트려 버렸다. 완벽한 순간에 운용된 직선적인 투기. 더러운 수가 아니라, 제대로 된 무학을 익힌 자였다.
“고작 이거?”
흑익귀는 갑주에 달린 날개로 대기를 쓸어내리며 장강을 흘려냈다. 천공을 지배하는 가고일 로드의 위용이 그대로 드러나는 움직임이었다.
“후우….”
페드릭이 인상을 찡그린 채 숨을 골랐다. 실티아의 기운을 운용하여 내상과 외상을 회복하고 있었지만, 강기의 부딪침으로 인한 상처였기에 회복이 더디다. 싸울수록 손해가 막심했다.
“크르르!”
적랑귀가 늑대처럼 허리를 숙인 채 달려든다. 가공할 속도. 땅에서 솟구친 듯 다가와 투기를 뿜어냈다.
“이히히히!”
흑익귀는 적랑귀의 움직임과 반대로 공중을 선회하여 뒤를 노려왔다.
쿠아아아!
페드릭이 양손을 펼치며 벽천결장을 일으켰다. 손아귀에서 응축된 기운과 투기가 맞부딪치며 무시무시한 폭발을 일으켰다.
“크윽!”
페드릭은 폭발의 여파에서 율리우스를 보호하며 뒤로 물러섰다. 일대일이라면 충분히 꺾을 수 있지만, 둘을 동시에 상대하기엔 버거웠다.
특히 적랑귀에게 전방을 맡기고 공중에서 빈틈을 노리는 흑익귀가 너무도 거슬렸다.
‘거기다….’
상대해야 할 자는 하나 더 있었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는 악양귀. 지금은 남 일처럼 가만히 있지만, 저 둘이 당하거나 위험한 순간이 되면 바로 나설 것이다. 삼 대 일의 전투라는 걸 기억해야 했다.
“어딜 보는 거야!”
흑익귀가 수직으로 떨어지며 단검을 내질러왔다. 손목이 고무처럼 돌아가며 기묘한 투로로 목을 노려왔다.
“크르르륵!”
적랑귀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놈이 좌측으로 짓쳐들며 내지른 손톱에 깃든 투기는 막아내기 버거울 정도로 강력했다.
우우우웅!
페드릭이 실티아의 기운을 끌어 올리며 합장하듯 손을 모았다. 모은 손에서부터 시작된 오러의 파동이 사위로 번져가며 흑익귀와 적랑귀의 투기를 밀어냈다. 대운장의 절기 수천막이다.
“끄으윽!”
“으음….”
흑익귀와 적랑귀는 갑작스러운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고무공처럼 튕겨 나갔다.
페드릭의 노회한 눈동자가 한순간 번쩍인다. 흑익귀가 드러낸 빈틈을 놓치지 않고 땅을 박차며 장을 뻗어냈다.
콰아아앙!
장강에 허리를 스친 흑익귀가 날개를 펼치지 못한 채 땅에 처박혔다.
‘지금 끝을 내야 해!’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무리해서라도 여기서 숫자를 줄여야 했다. 강기를 가득 모은 장을 내리치려 할 때 등 뒤에서 무시무시한 투기가 일어났다. 어느새 뒤에 따라붙은 적랑귀의 기세였다.
‘젠장!’
여기서 나아가면 흑익귀를 죽일 수 있지만, 자신 역시 죽거나, 중상을 입게 될 것이다. 물러나야 할지, 계속 가야 할지 잠시 고민을 했지만, 그건 최악의 실수였다.
그 찰나의 순간이 고수들에게는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었으니까.
적랑귀는 페드릭의 느린 반응을 알아차리고 그 허점을 물어뜯었다.
촤아아악!
페드릭이 뒤를 돌아 방어 태세를 갖추기 전에 적랑귀의 손톱이 그의 우측 가슴을 베고 지나갔다.
“크윽!”
페드릭에겐 고통을 느낄 틈도 없었다. 흑익귀가 맹렬한 투기를 뿜어내며 날아들었으니까.
터어엉!
기습적으로 펼친 장법으로 목이 날아가는 건 피했지만, 육체의 균형은 심각할 정도로 무너진 상태다. 출혈을 막을 새도 없이 연달아 투기가 뻗어왔다.
쾅! 콰아아앙!
투기와 경합할 때마다 가슴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지독한 내상. 페드릭이 울대를 거슬러 올라오는 핏물을 다시 삼켰다.
“끄으윽….”
급해선 안 되는데, 상황이 상황이라 침착할 수가 없었다. 후회가 막심했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래도!’
뒤에서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입을 막고 있는 율리우스를 위해서라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쿠우웅! 쿠구구궁!
하지만 적랑귀와 흑익귀는 계속 충돌을 유도해 내상을 악화시키며 숨통을 조여나갔다. 놈들은 궁지에 몰린 쥐를 압박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러다간 정말 죽겠군.’
전투 중에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내상과 외상이 도졌다. 쓰러지기 전에 승부를 봐야 했다.
페드릭은 최대한 충돌을 피하며 보법을 펼쳐냈지만 적랑귀와 흑익귀는 부상을 입은 곳만을 집요하게 노렸다.
‘그래. 와라.’
바라는 바였다. 놈들이 방심한 상태로 접근했을 때 대운장의 최종 절기를 사용하여 한 번에 쓸어버릴 덫을 만드는 중이었으니까.
차아악!
적랑귀의 뒤에 숨어 있던 흑익귀의 돌진에 허리가 뜯겨나갔다.
“으윽!”
페드릭이 신음을 흘리며 휘청거리는 발을 멈췄다. 적랑귀가 바닥을 박차고 투기를 내질렀고, 흑익귀가 뻘겋게 타오르는 단검과 함께 돌진해오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바로 지금!’
단전을 개방하며 마나 회로에 응집시켜놓은 모든 기운을 한순간에 터트렸다. 주변의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는 대운장의 절기 멸화장이었다.
콰아아아아아!
어마어마한 폭발이 터지며 숲 전체가 뒤흔들렸다.
쿠구구구!
시야에 보이는 모든 것이 초토화되었지만, 페드릭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크윽….”
그는 이를 악문 채 허공을 올려보았다. 흑익귀가 적랑귀를 든 채 기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몇 군데의 상흔이 생긴 걸 제외하면 너무도 멀쩡한 상태였다.
“영감. 티가 너무 나잖아.”
“이런 상황에서는 성자도 어쩔 수 없는 건가.”
흑익귀는 비웃음을 흘렸고, 적랑귀는 아쉽다는 듯 차가운 눈빛을 발했다.
“젠장….”
페드릭이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저들 정도의 고수가 급하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덫에 걸린 건 저 귀신들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텅 비었군.’
단전과 마나 회로가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
목전까지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끝인가.’
뒤에서 율리우스의 시선이 느껴진다.
‘지금도 입술을 꼭 깨문 채 눈물을 참고 있겠지.’
전투에 방해가 될까 봐 끝까지 울음과 비명을 참고 있는 녀석이 너무도 대견했다.
‘미안하구나.’
라온을 보러 간다는 약속도, 이곳에서 함께 도망치자는 약속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싸워보고 싶었지만, 남은 게 없다. 율리우스에게는 미안할 뿐이다.
“이제 끝내지. 생각보다 잘 버텼어.”
“성자라는 이름값에 걸맞게 통증 없이 보내주마.”
“아, 싫어! 산 채로 뜯어먹을 거야!”
“몬스터의 거죽을 뒤집어썼다고 머리까지 짐승이 된 것이냐.”
흑익귀와 적랑귀가 천천히 다가온다. 저 둘 역시 많은 힘을 소모해 지쳐있었지만, 모든 힘을 다한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고오오오!
두 놈은 이 와중에도 방심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투기를 뿜어냈다. 눈앞에 시뻘건 강기로 가득 찼다.
‘신이여. 나는 죽어도 상관없소.’
이를 혀를 깨문 채 속으로 기도가 아닌 절규를 질렀다.
‘내 뒤에 있는 아이만큼은 구해주시오! 저 악귀들과 함께하기에는 너무도 순수한 녀석이오! 이 노구를 데려가 무엇을 해도 좋소! 제발 저 아이만은!”
성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살았지만, 신을 믿지 않았다. 그저 치료의 도구로만 여겼는데, 처음으로 기도했다.
하지만 변하는 것 없었다. 너무 늦은 모양이다.
콰아아아!
페드릭은 시야를 가득 메운 투기를 보며 뒤를 돌았다.
“율리우스. 약속은 못 지키겠구나.”
“서, 성자님….”
“굳게 살아가거라.”
그는 턱을 떠는 율리우스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뒤를 돌아 자신의 마지막을 기다렸다.
하지만 신은 이들을 저버렸어도, 인연의 실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
대지를 부수는 듯한 굉음과 함께 청아한 바람이 불어온다.
적색과 청색의 섬광이 사선으로 교차하며 적랑귀와 흑익귀의 투기를 찢어발겼다.
명멸하는 화광 사이로 한 남자가 섰다. 큰 키. 휘날리는 금발은 페드릭에게 친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다, 당신은….”
그가 뒤를 돌아본다. 정대한 붉은 눈. 언젠가 본 듯한 눈빛에 진한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심장이 크게 약동했다.
“은을 갚기 위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