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끄응.”
셰릴이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떼어놓을 생각이었던지 눈빛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건 네 일방적인 제안이었다.”
“거절하려면 진즉에 하셨어야죠. 한 번 겪어보시지 않았습니까.”
라온이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였다.
“윽!”
셰릴이 인상을 찌푸렸다. 에컨과 팔씨름을 할 때 말리지 않았다가 설거지를 하게 된 일을 떠올린 것 같았다.
“예상을 벗어나는 것도 어느 정도야 이해를 하지. 넌 너무 파격적이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 돌아가라는 말은 하지 않으마. 대신 내 지시는 무조건 따르도록. 이것에 관해 양보는 없다.”
“물론입니다.”
라온은 찡그린 셰릴과 반대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중검의 압축은 어디서 배웠지?”
셰릴이 제천검의 검극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중검의 압축?”
“조금 전에 황잔귀의 도끼를 깨부쉈던 검격 말이다.”
그녀는 잘게 조각난 황잔귀의 도끼날을 가리켰다.
“검신 전체가 아니라, 한 부위에 중검의 기세를 응집시켰지 않느냐.”
“저 녀석을 따라 했습니다.”
라온은 별거 아니라는 듯 뒤로 넘어간 황잔귀에게 손가락을 겨눴다.
“도끼의 한 부분에만 중검의 기운을 모으길래. 따라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해봤습니다.”
“그래서 해봤더니, 그게 됐다?”
“예.”
“정신 나간 재능이군….”
셰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있을 수 없는 것을 본 듯한 표정이었다.
-그게 뭐 별거라고. 본왕이라면 한 번 본 걸 따라 하는 정도가 아니라 훨씬 뛰어난 성취를 보일 수도 있느니라.
라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냐.’
기분 좋게 웃었다. 녀석이 이리 말한다는 것 자체가 꽤 대단하다는 뜻이었으니까.
‘사실 내가 가진 재능은 아니지만.’
적의 무학을 분석하는 건 불의 고리의 효용이었고, 중검의 압축을 펼쳐낼 수 있던 건 최근 중검을 계속 익혀왔기 때문이다. 운과 노력이 합쳐진 결과였으니, 정신 나간 재능 덕분은 아니었다.
“어디 가서 그런 식으로 무학을 익힌다는 소리는 하지 말도록.”
“천검대주님이라서 말씀드린 겁니다.”
“흥. 아부는.”
셰릴이 코웃음을 치며 뒤를 돌았다. 말과는 달리 입가에 작은 미소가 지어져 있는 것 같았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다시 떠날 준비를 할 때 황잔귀의 도끼에서 살아남은 무인들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백색과 갈색 무복을 입은 걸 보니 레트란에 있던 바신과 트리안 가문의 무인들인 것 같았다.
“로지 신관님이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레트란으로 돌아가세요.”
“아, 알겠습니다.”
“저기….”
백색 무복을 입은 무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황색 무복을 입은 무인은 입술을 깨물며 한 걸음 다가왔다.
“저희 가주님께서 성자님을 쫓아가셨는데 아직도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혹시 찾을 수 있다면….”
“저, 저희 가주님도 함께 가셨습니다!”
두 사람 다 다른 가주의 이름을 말했다.
“설마 바신 가문과 트리안 가문의 가주도 나왔다는 겁니까?”
“예. 부가주님들께 도시를 맡기고 성자님을 돕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흩어지게 되어서….”
무인들은 바신과 트리안 가문의 가주 둘 다 페드릭을 돕기 위해 움직였지만, 흩어진 이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가주들이 안 보였던 거군.’
두 가문의 가주가 보이지 않아서 마을을 지키다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성자를 쫓아갔던 것 같았다.
‘대단하군.’
가주들은 성자가 죽고, 레이신이 에덴의 손에 들어가면 대륙 전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을 알고 에덴을 쫓는다는 모험적인 결정을 내린 것 같다.
쉽게 할 수 있는 판단이 아니기에 감탄이 새어 나왔다.
“저희도 성자님을 쫓는 중이니, 만난다면 돌아가라고 말해주겠습니다.”
라온은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감사합니다!”
“시간이 꽤 지체됐어. 그만 출발하자.”
셰릴은 대답을 듣지 않고 시위를 튕긴 화살처럼 내달렸다.
“좋게 끝났으면 좋겠는데….”
라온은 작은 바람을 입에 담고서 그녀의 뒤를 따라 보법을 밟았다.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 곳곳에 쓰러진 시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 보았던 무인들과 같은 복장. 바신 가문과 트리안 가문의 무인들이었다.
“저들이 진짜 무인이다.”
앞서가던 셰릴이 시체들을 보며 눈을 내리감았다.
“죽을 길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성자님을 돕기 위해 나아간 거다. 누군가는 멍청하다고 하겠지만, 나는 그들의 신념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똑같으니까.’
암살자 라온으로 살 때 누군가가 남을 위해 목숨을 건다고 한다면 코웃음을 쳤을 거다. 멍청하다고 비웃었을 거다.
하지만 라온 지그하르트로 살며 정말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감정과 인연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라온은 쓰러진 무인들에게 묵념하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 * *
라온과 셰릴은 시체와 전투의 흔적을 따라 페드릭을 추격했다. 살아 있는 에덴의 귀신들이 길을 막았지만, 단숨에 베어버리고 계속 나아갔다.
“이곳에서 마스터 간의 전투가 있었다. 그리 멀리 가진 못했어.”
셰릴은 거미줄이 그어진 듯한 바닥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흔적대로라면 저 숲에 있을 것 같다.”
그녀가 북쪽에 있는 먼 숲을 가리켰다. 달빛조차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나무와 수풀이 꽉꽉 들이찬 숲이었다.
“조금 더 속도를 높이죠.”
“그래.”
보법에 전력을 다하며 이동할 때 큼지막한 바위 쪽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곧 죽을 것처럼 가느다란 소리였다.
라온은 방향을 돌려 바위 쪽으로 뛰었다. 바위 뒤편에 하얀 무복이 피로 점철된 중년인이 쓰러져 있었는데, 오른팔과 왼쪽 다리는 짐승에서 먹힌 것처럼 뜯겨나간 상태였다.
‘살릴 수 없어.’
화려한 백색 무복과 고급스러운 검을 보니, 아까 구해준 사람들이 말했던 바신 가문의 가주인 것 같았지만 출혈이 너무 심해 살 가망이 없었다.
“바신 가문의 가주 뎀트 바신이 맞습니까?”
“마, 맞습니다.”
그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다. 시간을 써도 구할 수 없어.”
셰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말대로 뎀트의 생은 얼마 남지 않았다.
“자, 잠깐….”
뎀트가 턱을 떨며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사, 살려주실 필요 없습니다. 제, 제발 제 말만 들어주십시오.”
입술을 깨물고, 다시 움직이려고 할 때 그가 하나 남은 팔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레, 레트란에 세작이 있었습니다.”
“세작? 그게 누구지?”
셰릴이 눈썹을 내린 채 뎀트에게 다가갔다.
“트, 트리안의 가주. 스태인 트리안. 그놈이 에덴의 세, 세작이었습니다….”
뎀트가 스태린 트리안의 이름을 씹어 내듯 뱉었다. 힘이 빠져 있음에도 분노가 그대로 느껴지는 울림이었다.
“트리안 가문의 가주가 에덴의 세작이라고? 언제부터!”
“저도 자, 잘 모르겠습니다. 이곳까지 그와 함께 에덴을 추적했는데, 갑자기 오, 오우거의 투구를 쓰고 저를 이렇게….”
뒷말은 그의 상태를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오우거의 투구를 써서 능력을 강화한 뒤에 뎀트를 이 꼴로 만들었을 것이다.
“오우거라면….”
라온이 이를 꽉 깨물었다. 에덴 놈들은 녹전귀에 이어 광혈귀의 후계도 찾아낸 것 같았다.
“추, 추적에 부가주들을 보내고, 도시부터 정리하자고 했는데, 스태인은 성자님을 구하지 못하면 도시를 구해도 대륙이 위험하다며 대의를 위해 무조건 쫓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처, 처음으로 놈의 진심을 보았다고 생각해서 감격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
주먹을 쥐고 있던 뎀트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스탠인은 저만이 아니라, 자신의 가문과 도시 전체를 속였습니다. 그, 그놈이 레트란의 문을 열고 에덴을 끌어들인 게 부, 분명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시 전체에서 불이 동시에 타오르고, 에덴이 나타나는 건 말이 안 됐습니다.”
뎀트는 말라붙은 입술을 억지로 떼며 말을 이었다.
“크흐, 노, 놈은 저를 죽이고, 레트란을 통째로 먹을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저, 절대로 그리되어서는 안 돼….”
그는 마지막 말을 맺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억울하고 분했는지 핏발 선 눈을 감지도 못했다.
“가자.”
셰릴은 서늘한 눈빛으로 숲을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그대로였지만 그녀의 기세에는 폭발할 것 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
“예.”
라온은 뎀트 바신의 눈을 감겨주고 일어섰다.
터어엉!
두 사람은 어떤 신호도 없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내가 숲으로 들어가서 성자님을 모시고 오겠다. 너는 에덴 놈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입구를 막고 있어.”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부로 들어가서 싸우고 싶지만, 방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외부에서 길목을 차단하는 게 최선이었다.
페드릭이 들어간 숲으로 다가갈수록 인간과 몬스터의 기척이 늘어난다. 에덴 놈들이 이 숲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정도라니….’
라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놈들은 어떻게 해서든 율리우스라는 아이와 레이신을 얻으려는 것 같았다.
‘아이도 아이지만, 레이신만큼은 절대 넘겨줘선 안 돼.’
레이신은 독으로 사용하면 10만 명을 죽일 극독이 된다. 과장이 있다고 해도 최소 수만 명 이상의 대량 학살이 가능할 테니,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길목 차단이라….’
라온이 제천검의 검병을 꽉 움켜쥐었다. 숫자는 많지만, 마스터의 기척은 없다. 셰릴이 페드릭을 구해오는 동안 충분히 버틸 수 있다.
-흐음.
하급 간부와 적귀, 녹귀의 움직임을 읽으며 숲으로 달리고 있을 때 라스가 입맛을 다셨다.
-네놈들 실수한 듯싶구나.
‘뭐?’
라스는 대답하지 않고, 재밌게 되었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또 뭔가가 있는 모양인데.’
이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마왕이 저런 소리를 괜히 할 리 없었다. 아무래도 이곳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뭐가 있어도 상관없어.’
난 내 할 일만 하면 되니까.
셰릴이라면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페드릭을 데리고 와줄 것이다. 자신은 이곳에서 벽이 되어 버티면 그만이다.
라온이 다시 한번 다짐하고 발을 굴렀다. 이제 숲도 가시거리 안에 들어왔다. 보법 몇 번만 밟는다면 입구에 도착할 수 있다.
“그만.”
조금 더 빨리 움직이려고 할 때 셰릴이 멈춰 서며 어깨를 잡았다.
“예? 안 들어가십니까?”
라온이 숲을 가리켰다. 저 안에서 강대한 전투가 일어나고 있다. 성자가 살아 있을 때 구해야 했다.
“계획 변경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후우!”
셰릴이 이를 악문 채로 몸을 돌렸다. 조금 전 지나온 길을 바라보며 거친 숨을 뱉어냈다.
쿠구구구!
주변에 퍼져 있던 적귀와 녹귀 그리고 몬스터들이 파도가 되어 몰려온다.
‘나 혼자서도 이 정도는…음?’
몰려오는 에덴의 귀신들을 보고 있을 때 허공이 포도 덩굴처럼 꼬이며 시꺼먼 거품이 일어났다. 검은빛 거품이 둥글게 모이더니, 인간의 얼굴 형상이 되었다.
우우웅!
챙이 긴 모자에 당근처럼 길쭉한 코, 주름이 가득한 이마, 노파의 얼굴이 새겨진 가면이었다.
라온은 그 가면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멀린!’
하분 성에서 도플갱어를 죽였을 때 보았던 배신의 마녀 멀린이다. 다만 이전과 달리 머리만이 아니라, 로브를 뒤집어쓴 육체도 함께 튀어나왔다.
“멀린….”
셰릴이 멀린을 알아보고 아미를 찡그렸다.
“와아, 셰릴이잖아.”
멀린은 들떠 있는 웃음을 흘리며 손뼉을 쳤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셰릴은 라온의 앞에 서서 멀린의 시선을 막았다.
“내가 준비한 계획이니까.”
멀린은 거리낌 없이 입을 열었다.
“전에 실수를 좀 해서 이번에는 확실한 결과를 내야 했거든. 열심히 준비했지.”
그 실수는 하분 성에서 유아를 데리고 가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래서 아이와 성자님을 동시에 노린 건가?”
셰릴도 그걸 알아차린 듯 입매를 비틀었다.
“성자는 죽든 말든 상관없어. 그가 가진 물건만 회수하면 그만이야.”
“레이신으로 뭘 하려는 거지?”
“뻔하잖아. 내가 설마 약으로 사용할까 봐?”
멀린이 키득거렸다. 예상대로 독으로 이용하려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대량 학살을 할 생각은 없어. 압축시키고, 압축시켜서 그랜드 마스터라도 단숨에 죽일 독을 만들려는 것뿐이니까.”
그녀는 긴 손가락을 들어 올려 빙글 돌렸다.
“미친….”
“그런데 셰릴. 네 뒤에 있는 아이 라온 맞지?”
가면을 뚫고 나오는 멀린의 목소리에 열기가 담기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야. 라온.”
“너와 내가 인사할 사이였나?”
라온은 차가운 눈으로 멀린을 노려보았다.
“눈빛이 더 좋아졌네. 네 이야기는 전부 챙겨 듣고 있어. 이제 나와 함께 할 마음이 들었어?”
“너와 함께 하느니 이 자리에서 죽고 말지.”
“그런 냉정함도 마음에 든다니까.”
멀린이 쓰고 있는 노파의 가면이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또 만났다는 건 너와 내가 인연으로 묶여 있다는 뜻이겠지.”
“인연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다.”
“대답도 멋지고, 눈빛도 멋지고. 아아….”
엔시아와 비슷한 말을 했지만, 멀린의 말은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한 불쾌감을 주었다.
“너도 데려갈 수 있다니, 정말 잘 되었어.”
가면 속 멀린의 눈동자가 새하얗게 번쩍였다.
“네 투구도 준비되었거든. 세상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오직 너만의 투구가.”
누나가 동생에게 말하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다.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나와 함께 가자. 마스터를 뛰어넘어 그랜드 마스터에도 올라갈 수 있게 해줄 게.”
“미친년.”
셰릴이 한 발 앞으로 나갔다. 강대한 기세가 타오르며 멀린이 일으키던 마나의 흐름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라온. 계획을 바꾼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서 길목을 차단한다. 넌 숲 안에 들어가서 성자님과 아이의 상태를 확인해. 만약 마스터 셋 이상에게 묶여 있다면 아이만 데리고 빠져나오도록.”
“천검대주님?”
“구출 작전에서 최악의 상황이 뭔지 아나?”
셰릴이 등에 멘 검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구출을 위해 투입된 사람들까지 죽는 거다. 이번에는 이놈들의 준비가 철저했어. 본래라면 바로 물러나는 게 옳다.”
“정확해. 역시 노련하다니까.”
멀린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 주제에 어떻게 저리 표정을 잘 표현하는 건지 모르겠다.
“다만 난 누구도 놓아줄 생각이 없거든. 다 놓쳐도 라온. 너만큼 꼭 데리고 갈 거야.”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숲의 어둠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쿠웅!
수풀로 가득한 입구가 장막처럼 갈라지며 붉은빛 갑주를 두르고, 외뿔이 달린 오우거의 투구를 착용한 거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광혈귀. 그 아이를 생포해.”
“죽이면 안 되는 겁니까?”
전에 보았던 광혈귀와는 달랐다. 나지막하게 뱉는 목소리에서 살육의 욕망이 물씬 풍겼다. 이놈이 트리안 가문의 가주라는 스태인 트리안이 분명했다.
“그 갑옷째로 찢어줄까?”
멀린의 눈동자가 사납게 비틀어졌다. 진심인지 대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흥.”
광혈귀가 차게 웃으며 앞으로 다가왔다. 큰 키와 막대한 투기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전신을 짓눌러왔다.
“저분의 사랑을 받다니, 좋겠구나.”
“그딴 거 필요 없어.”
“강해질 기회를 준다는데도 거절하다니, 네 재능을 믿는 것인가.”
놈의 눈동자가 시뻘건 광기로 번들거렸다.
“하긴 그 나이에 익스퍼트 최상급에 오르고, 7사도를 쓰러뜨린 재능을 지녔으니 당연하겠지.”
“말에 열등감이 넘쳐흐르는군. 그 열등감에 가문과 널 믿던 사람들을 배신하고 에덴의 뒷구멍에 붙은 거냐? 스태인 트리안.”
“너….”
라온의 서늘한 음성에 광혈귀의 가죽을 뒤집어쓴 스태인 트리안이 우뚝 멈췄다.
“일부러 천천히 죽게 놔뒀는데, 그놈이 입을 놀린 모양이군.”
뎀트 바신이 이야기해준 걸 알아차린 듯 광혈귀가 노골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맞다. 내가 했다. 에덴에 붙은 게 다가 아니야. 에덴의 귀신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미리 성문을 열고, 불을 지를 준비도 도와주었지.”
“대체….”
“네 말대로다. 열등감! 그 열등감을 이기지 못하고 에덴의 유혹을 받아들였지. 하지만 지금은 후회한다….”
“후회?”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지금 상황과 너무 맞지 않는 말이었다.
“그래. 너무 늦게 받아들인 걸 후회한다! 진즉에 그들의 손을 잡았어야 했는데!”
광혈귀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닭살이 돋아오를 정도로 섬뜩한 눈빛으로 광소를 터트렸다.
“이 힘! 이 무력! 모든 것이 만족스러워! 전이라면 절대로 이룰 수 없었던 강기조차 자유재로 만들 수 있어!”
광혈귀의 주먹 위로 시뻘건 투기가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그 나이에 익스퍼트 최상급이 된 네놈은 모를 것이다. 평생을 단련해도 내 한계를 넘을 수 없는 괴로움을! 나보다 어린 것들이 앞서나가는 절망을!”
놈이 절규하듯 비명을 질렀다.
“재능이 넘치는 네놈을 절대 모를 거야!”
“알고 있다.”
라온이 냉혹할 정도로 차가운 눈빛을 뿜어내며 광혈귀에게 다가갔다.
‘너무 잘 알고 있지.’
암살자로 살아가며 원하는 수련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모든 것이 사람을 죽이기 위한 훈련이었고, 데루스의 계획을 위한 부품으로서의 삶이었다.
강해지기 위해서 수련을 할 수 있는 스태인과는 차원이 다른 절망을 간직한 채 평생을 살았었다.
“헛소리하지 마라! 네놈이….”
“강해져서 좋나? 쓸 수 없던 강기를 얻게 되어 즐거운가?”
“물론이다! 평생의 라이벌이라 불리던 뎀트 놈이 내 한 수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힘이다!”
광혈귀의 어깨 위로 붉은 투기가 줄줄이 피어났다.
‘강해?’
물론 그는 강하다. 느껴지는 기파는 세부 마을의 광혈귀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의 절망 따위는 없다. 노력과 깨달음이 수반되지 않은 그저 강하기만 한 힘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사람들이 널 구해와 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는지 알고 있나? 널 걱정하며 소식이라도 전해달라고 했지.”
“그래서?”
광혈귀는 이미 인간의 감정을 버린 듯 살기 짙은 눈동자만 굴렸다.
“마음에 드는군.”
“뭐?”
“죽여도 거리낄 게 없겠어.”
“이 건방진 놈이….”
“오라.”
라온의 제천검을 뽑았다. 정대한 기세 위로 달빛조차 태워버릴 불꽃이 피어났다.
“사술로 얻은 힘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알려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