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14화 (214/653)
  • 제214화

    셰릴은 입술을 얇게 씹고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 돼.”

    “이유가 뭐죠?”

    라온이 인상을 찡그렸다. 눈빛이 흔들려서 허락할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생각을 바꾼 것 같았다.

    “위험하니까.”

    셰릴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전에 말했듯이 난 이번 일의 책임자다. 이제 막 날개를 펴는 녀석을 사지로 데려갈 수는 없어.”

    확실히 결정했는지 그녀의 목소리에서 단호함이 묻어났다.

    “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죽지 않을 겁니다.”

    “누군 자리를 펴고 죽나?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예고 따윈 없어.”

    셰릴의 말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그녀가 경험한 여러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물러날 수는 없지.’

    그분은 내가 5살이 될 때까지 매년 찾아와서 도움을 주었으니까.

    그것도 그냥 온 게 아니다. 올 때마다 새로운 치료법을 익혀와서 육체의 활력을 높여주고, 상급 영약까지 건네주었다.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그런 배려와 관심을 받은 건 처음이었기에 언젠가는 꼭 보답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게 지금이야.’

    라온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원수를 갚겠다고 은혜를 모른 척하는 짐승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큰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아주 잠깐의 시간만 벌더라도 꼭 돕고 싶었다.

    “으음….”

    라온의 눈빛에 담긴 의지를 읽었는지 셰릴이 침음성을 흘렸다.

    “이곳을 지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맞습니다. 하지만 여긴 에컨 님과 다른 검사들이 있지 않습니까.”

    “혹여나 에덴의 귀신들이 대량으로 온다면….”

    “에덴의 목적은 율리우스라는 아이와 레이신입니다. 이곳엔 그중 아무것도 없으니 강자가 올 가능성은 적습니다. 에컨 님과 검사들이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후우….”

    셰릴이 아미를 찌푸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을 보아라.”

    그녀가 반 이상 잿더미가 된 레트란을 가리켰다.

    “에덴은 지시를 받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칼을 휘두른다. 민간인 심지어 어린아이도 가리지 않아. 어찌 보면 백혈교보다 지독하고 일직선인 놈들이다.”

    “알고 있습니다.”

    “무인의 숫자는 백혈교가 많지만, 고수 층은 에덴이 더 두꺼워. 저 앞에 있는 마스터는 네 명이 다가 아닐 거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겠다고?”

    “예.”

    라온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이미 익스퍼트가 마스터를 이길 수 없다는 편견을 깼습니다.”

    “그건….”

    셰릴도 그 부분에 대해선 할 말이 없는지 반박하지 못했다.

    “제가 도움이 안 되거나, 못 따라간다고 생각하시면 중간에 떨어뜨리셔도 괜찮습니다.”

    “정말인가?”

    “예. 진심으로 그리 말씀하신다면 돌아가겠습니다.”

    이게 마지막 고집이다. 정말 도움이 안 된다고 한다면 방해보다는 물러나는 게 옳았다.

    다만 지금 자신의 감은 가는 게 옳다고 말하고 있었다. 구명의 은을 갚고, 강자들과 생사결을 벌일 기회였으니까.

    라온은 제천검의 검병을 꽉 쥔 채 이쪽을 지그시 보는 셰릴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쉽군.’

    마스터였다면 그녀가 고민 없이 데리고 갔겠지만, 한 발을 넘지 못해 선택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씁쓸했다.

    “쯧, 좋다. 5분을 줄 테니, 준비하도록.”

    셰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찼다.

    “대주님!”

    “저희도 데려….”

    “불가.”

    그녀는 버렌과 마르타를 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너희의 수준으로는 시간 벌이도 되지 않아.”

    셰릴의 목소리는 냉정할 정도로 단호했다. 라온을 상대할 때와 달리 맺고 끊는 게 단칼 같았다.

    “아….”

    “끄윽!”

    버렌과 마르타는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라온처럼 우길 실력이 아니라는 걸 아는 것이다.

    “분하면 강해져라. 너희들은 평생에 걸쳐 오마와 다투게 될 테니까.”

    그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몸을 돌렸다.

    ‘역시 차가운 사람이 아니야.’

    라온은 셰릴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도리안에게 갔다.

    “저,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냥 대주님께 맡기시는 게.”

    “괜찮으니, 지혈제랑 치료약, 붕대 같은 것들 좀 줘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약부터 챙겼다.

    “이거 비싼 거니까 꼭 돌려주셔야 해요.”

    도리안은 손을 파르르 떨며 물건들을 건네주었다.

    “라온, 다녀와서 다시 아이스크림 가게 가자.”

    조용히 있던 루난이 다가와 눈을 깜빡였다. 무사히 다녀오길 바라는 두 사람 나름의 인사였다.

    “그래.”

    라온은 도리안과 루난 그리고 이쪽을 바라보는 버렌과 마르타에게도 옅게 미소 지었다.

    “거, 검사님!”

    준비를 마치고 셰릴에게 다가가려 할 때 신전에 있던 로지가 달려왔다.

    “저기….”

    “말씀하십시오.”

    “성자님을 돕겠다며 뛰쳐나간 무인들도 많아요. 혹시라도 보신다면….”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부탁한다는 민망함과 사람들이 살아 있기를 바라는 기대감에 목소리를 떨었다.

    “살아 있다면 구해오겠습니다.”

    라온은 지금 그녀의 심정이 자신과 같음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되었으면 출발한다.”

    셰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건물들을 뛰어넘어 성벽에 이르렀다.

    “후우….”

    라온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만화공을 끌어 올렸다. 태화보를 밟아 셰릴의 뒤를 쫓으며 이를 꽉 깨물었다.

    ‘절대 떨어지지 않겠어.’

    *     *      *

    누더기 같은 의복을 입은 노인이 10살 내외의 아이를 업은 채 울창한 숲을 달렸다. 부상을 입었는지 낡아 빠진 의복 사이로 핏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으음….”

    노인은 준마도 쫓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불안함을 느끼는지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성자님.”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진중한 목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놈들은 저를 원한다고 들었습니다. 저를 놔두고, 성자님이라도 무사히 빠져나가시는 게….”

    “떽!”

    넝마의 성자. 페드릭이 아이를 보며 짧게 호통을 쳤다.

    “율리우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성자님….”

    “그놈들은 널 원하는 이유는 네게 괴물의 갑옷을 입히기 위해서다. 인성조차 버린 악마가 되고 싶은 게냐!”

    페드릭은 그런 소리를 하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절 업고 가시다가는 결국 놈들에게 잡힐 겁니다.”

    율리우스는 페드릭이 걱정되는지 눈썹을 축 내렸다.

    “걱정 마라. 내가 이리 늙었어도 발 하나는 빨라. 조금만 더 가면 내 친우가 있는 지역이니, 그놈들도 쫓아오지 못할 게다.”

    페드릭은 아이가 겁먹지 않도록 따스한 웃음을 흘렸다.

    “거기다 널 놓고 간다고 해도 그놈들은 나를 계속 쫓아올 게다.”

    “성자님께도 갑옷을 입히려는 건가요?”

    “아니. 내가 가진 꽃 때문이지.”

    “꽃?”

    율리우스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게 사용하면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고, 나쁘게 사용하면 더 많은 사람을 다치게 만드는 물건이지.”

    “그럼 그들은 나쁘게 사용하겠군요.”

    “후우, 잘 알고 있구나.”

    페드릭이 탁한 숨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은 너만이 아니라, 나도 쫓고 있다. 걱정하지 말고 눈이라도 붙이거라. 잘 시간이지 않느냐.”

    “성자님께서 고생하시는데, 자는 건 예의에 어긋납니다.”

    율리우스는 굳건한 입매로 똑 부러진 대답을 내놓았다.

    “저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희를 따라오던 아저씨들이 계셨는데, 무사할지 걱정됩니다.”

    “놈들은 우리만 노리고 있으니, 무사할 게다.”

    페드릭은 울리우스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서 바위 언덕을 단숨에 뛰어넘었다.

    ‘이 아이만큼은 구해야 하는데….’

    늙은 자신은 죽어도 상관없지만, 이렇게 선한 아이를 에덴의 귀신으로 만들게 놔둘 수는 없었다.

    “널 보니까 생각나는 녀석이 있구나.”

    “생각나는 녀석이요?”

    “그래. 어미 젖도 떼지 않은 주제에 울지도, 웃지도 않는 특이한 아이였지.”

    “전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그러냐.”

    페드릭이 옅게 웃고서 잠시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 그 누구보다 좋지 않은 체질을 앓고 있었다. 통증은 물론이고, 몸을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들었지. 나는 그 아이가 무인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페드릭은 율리우스의 붉은 눈동자를 보며 미소지었다.

    “그 아이는 내 진단을 깨뜨리고, 굉장히 훌륭한 무인이 되어 이름을 떨치고 있더구나. 자기 자신을 이겨낸 거지.”

    “저, 정말입니까?”

    “그래. 굉장하지?”

    “자기 자신을 이겼다는 말이 멋지게 들립니다.”

    율리우스가 조금 밝아진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와 같이 그 녀석을 보러 가자꾸나. 분명 좋은 자극이….”

    “거기에 나도 좀 데려 가주지?"

    페드릭이 웃을 때 앞쪽에서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비틀어진 수풀 사이로 쏟아진 달빛이 목소리의 주인을 비췄다.

    사자의 갈기 같은 형태의 붉은색 갑주로 전신을 두르고, 머리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번들거리는 늑대 투구를 쓴 남자였다.

    “적랑귀….”

    페드릭이 마른침을 삼켰다. 눈앞의 괴인은 라이칸스로프 족장의 힘을 이어받은 에덴의 간부이자, 마스터에 오른 투사였다.

    쿠구구구!

    문제는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역시 이곳으로 왔군.”

    날개가 달린 흑색 갑주로 전신을 휘감은 남자가 부드럽게 낙하했다. 두 개의 뿔이 달린 악마의 투구에서 섬뜩한 푸른 눈이 번쩍였다.

    “흑익귀.”

    저 날개 갑옷의 주인은 가고일 로드의 힘을 이어받은 에덴의 간부였다, 그 역시 마스터에 오른 강자였고, 비상 능력이 있었기에 적랑귀보다 더 까다로웠다.

    “아, 나도 있어요.”

    “악양귀까지.”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목소리에 우측을 보았다. 하체는 산양, 상체는 기사의 갑주를 입었고, 뿔이 아래로 내려간 염소의 투구를 쓴 남자가 경쾌하게 손을 흔들었다.

    “젠장….”

    페드릭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적랑귀와 흑익귀를 상대하는데에도 내상을 입었는데, 이중 가장 강한 악양귀까지 나선다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아, 걱정은 마시길. 오늘 제 임무는 길목 차단이라 이쪽으로 오지만 않으시면 건드릴 생각 없습니다.”

    정말인지, 거짓인지 악양귀는 팔짱을 낀 채 나무에 등을 기댔다.

    “이제 쫓는 것도 귀찮아졌어.”

    “늙은이 고기는 질기지만 성자는 다르겠지?”

    적랑귀의 손톱과 흑익귀의 단검 위로 시뻘건 강기의 물결이 치솟았다.

    “율리우스. 내 뒤에 있거라.”

    “서, 성자님….”

    “걱정할 필요 없다. 너와의 약속은 지킬 테니까.”

    페드릭은 호흡을 고르며 양손을 펼쳤다. 그는 펼친 손에 강기를 담아내며 발을 굴렀다.

    “네놈들 따위에겐 그 무엇도 넘겨줄 수 없다!”

    *     *      *

    라온은 앞서 달려가는 셰릴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떨어뜨릴 생각인가.’

    셰릴은 보법으로 따돌릴 생각인지 점차 이동속도를 높였다. 처음엔 10m에 불과했던 차이가 지금은 20m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쿠웅!

    태화보를 밟았다. 잠시 그녀와의 거리가 가까워졌지만, 결국 그녀를 따라잡지 못하고 또 멀어지기 시작했다.

    ‘태화보를 계속 쓸 수는 없어,’

    태화보는 오러 소모가 심하다. 마스터와 부딪칠 게 뻔한 상황에서 계속 태화보를 썼다가는 싸우기도 전에 지칠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라온이 다시 고개를 들어 셰릴을 보았다. 땅을 밟는 게 아니라, 땅이 와서 그녀에게 닿는 듯 쭉쭉 뻗어 나갔다.

    ‘단주님과는 조금 달라.’

    리메르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느낌이라면, 셰릴은 하체의 힘을 최대한 폭발시켜 화살처럼 쏘아지는 감각이었다.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며 그녀의 하체를 자세히 살폈다. 대지를 박차는 다리에 그녀가 설명해주었던 쾌검의 구결이 실려 있었다.

    ‘이제 알겠군.’

    셰릴이 기본 보법으로도 큰 차이를 내는 이유를 알았다. 그녀는 보법에 담긴 무학의 묘리를 모조리 쾌검의 구결로 바꿔 속도만을 높인 것이다.

    ‘지금의 난 저렇게 할 수 없어. 단주님처럼 저항을 줄이고 나아갈 수도 없지. 다만….’

    그 둘을 적절하게 조화시킬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찌지지직!

    셰릴이 알려주었던 구결과 서리연의 묘리를 담아 땅을 박차고, 만화공의 기운을 리메르의 바람처럼 운용하며 대기를 갈랐다.

    터엉!

    조금 전보다 약하게 땅을 찼음에도 더 빨리, 더 멀리 나아간다. 멀어지기만 하던 셰릴의 등이 점차 가까워졌다.

    “음….”

    셰릴이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두 배 가까이 커진 눈으로 인상을 찡그린다.

    ‘됐어!’

    아직 조잡하여 전투에서는 쓰기 힘들겠지만, 속도만큼은 셰릴에게 밀리지 않았다.

    “따라잡았습니다.”

    라온은 셰릴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떨구려 했는데.”

    셰릴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다만 놀라움을 담은 눈빛은 여전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방해되진 않을 거라고.”

    “나와 리메르의 움직임을 반반씩 섞은 건가?”

    “정확합니다.”

    “정말이지. 가르칠 맛이 안 나는 녀석이다.”

    그녀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만 이제 출발선에 선 것뿐이니 자만하지 마. 기대에 못 미친다면 바로 떨굴 테니까.”

    “알고 있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제대로 된 싸움은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치잉!

    셰릴을 따라 들판을 나아가고 있을 때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쪽이 완연하게 밀리는 듯 소리가 탁했다.

    “이쪽이다.”

    “예.”

    셰릴은 어느새 방향을 바꾸어 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했다. 새로 만들어낸 이동법을 운용하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캬갸갸강!

    시꺼멓게 그을린 들판의 끝에 하이에나 형태의 투구를 쓴 에덴의 귀신이 서 있었다. 학살을 벌였는지 자루가 길쭉한 도끼와 갑옷이 피로 범벅이었다.

    “황잔귀인가.”

    하이애나의 머리에 인간의 육체를 가진 몬스터 놀 워리어의 힘을 가진 에덴의 귀신이 바로 저 황잔귀였다.

    “키히히히!”

    황잔귀는 자그마한 상처도 없었지만, 살아남은 무인들은 전신에 상처와 피가 가득했다. 아무래도 죽이지 않고 가지고 놀고 있었던 것 같다.

    “저놈.”

    셰릴은 돕지 않고 멈춰서 황잔귀를 가리켰다.

    “너와 같은 익스퍼트 최상급이다. 십 합 안에 죽여라.”

    “십 합….”

    “못 한다면 돌아가라. 그 정도도 되지 않으면 싸움 자체가 안 되니까.”

    그녀는 양보해줄 생각이 없다는 듯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이게 마지막 시험인 것 같았다.

    “십 합이 아니라, 오 합 안에 끝내겠습니다. 대신 다시는 돌아가라는 말을 하지 마시길.”

    라온은 셰릴의 대답을 듣지 않고, 황잔귀에게 다가갔다.

    “십 합? 오 합?”

    황잔귀가 뒤를 돌았다. 그 이야기를 모두 들었는지 살벌한 눈빛을 쏘아낸다. 셰릴은 이것조차 예상했을 것이다.

    “여기 남았다고 내가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군.”

    황잔귀가 도끼를 휘돌리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좋다! 내가 십 합 안에 네놈들의 모가지를 따주마!”

    놈이 짐승처럼 허리를 숙인 채 땅을 박찼다.

    자세는 이상했지만, 속도는 비정상일 정로 빠르다. 순식간에 좌측으로 짓쳐 들어 도끼를 내리쳐왔다. 뼈와 살을 으깨버리겠다는 의지가 담긴 투기가 불길처럼 타올랐다.

    후우우웅!

    라온은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도끼가 쇄골에 다가올 때까지 지켜보았다.

    ‘무거움이 담겼군.’

    황잔귀의 도끼에 깃든 무리는 무거움. 다만 검신 전체가 아니라, 도끼날 끝부분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럼 비틀어내면 그만.’

    제천검에 어린 만화공의 불꽃이 도끼에서 뻗어오는 무거움을 가른다. 가늘게 창출된 빈틈을 노리고 두 번째 검격을 그어 내렸다.

    쩌어어엉!

    후발선제. 제천검이 뒤늦게 움직였음에도 튕겨 나오는 건 황잔귀의 도끼였다.

    “크윽!”

    황잔귀는 익스퍼트 최상급답게 빠르게 도끼를 회수하여 두 번째 참격을 날렸다. 직선으로 쏟아지는 강대한 기파에 여러 무리가 깃들어 힘과 속도를 더했다.

    ‘그걸 써볼까.’

    라온은 조금 전 황잔귀가 사용했던 참격을 떠올렸다. 한 부위에만 무거움을 집중하는 방식을 그리며 제천검의 검극에 오러를 응집시켰다.

    콰아아앙!

    진각을 밟아 힘을 증폭시키며 새로운 무리가 깃든 제천검을 뻗어냈다. 검사가 두껍게 압축된 제천검의 칼날이 황잔귀의 도끼와 정면에서 격돌했다.

    뿌드드득!

    병기의 무게 차이가 있음에도 밀려나는 건. 아니, 깨져나가는 건 황잔귀의 도끼였다. 섬뜩한 살기를 일으키던 도끼날이 얇은 유리창처럼 깨져나가며 황잔귀의 경악한 눈빛을 비췄다.

    “아, 아직 안 끝났어!”

    황잔귀는 많은 격전을 벌인 고수답게 당황한 와중에도 왼손으로 심장을 노려왔다. 칼날처럼 세운 수도에서 도끼에 못지않은 강맹한 기운이 느껴졌다.

    “미숙해.”

    라온이 태화삼보를 밟았다. 하늘을 부유하는 구름처럼 황잔귀의 수도를 흘려낸 뒤 제천검에 담아낸 쾌검의 무리를 어깨에서부터 쏟아냈다.

    촤아아아악!

    은빛 칼날이 벼락이 되어 떨어지고 황잔귀의 움직임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멈췄다.

    “이, 이….”

    황잔귀가 손을 허우적거렸지만, 떨어지는 목을 붙잡지는 못했다.

    쿠웅!

    라온은 목을 잃은 황잔귀의 시체를 뒤로하고 셰릴을 향해 다가갔다.

    “사 합.”

    제천검에 묻은 가는 피를 털어내며 그녀의 앞에 섰다.

    “이제 돌아가란 소리는 금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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