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13화 (213/653)

제213화

“천검대주님.”

버렌이 눈썹을 살짝 내린 채 셰릴에게 다가갔다.

“라온이 너무 안 오는데 찾으러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좀 늦긴 하네.”

마르타도 나무에서 등을 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는 건가?”

셰릴은 평온한 눈으로 버렌과 마르타를 돌아보았다.

“거, 걱정은 무슨! 절대 아니에요!”

마르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머리를 빠르게 흔들었다.

“맞습니다. 그냥 출발이 늦어지니까….”

버렌은 눈동자를 아래로 내린 채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가.”

셰릴은 크게 손을 흔드는 두 사람을 보며 가벼운 미소를 흘렸다.

“음….”

루난은 라온의 지시대로 마차 근처를 벗어나지 않은 채 맹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난님은 안 불안하신가요?”

엔시아가 마차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루난을 불렀다.

“불안?”

“라온 님이 혼자 나가셨는데, 아직도 안 오셨잖아요.”

그녀도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걱정되는 듯 손을 떨었다.

“걱정 안 해도 돼요.”

루난이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라온은 안 져요.”

평온한 표정과 짧은 한마디로 그녀가 라온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가 그대로 드러났다.

“광풍단은 만들어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신뢰 관계가 멋지네요.”

엔시아가 광풍단원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럴 수밖에요. 수련생 때부터 함께 한 지 6년이 다 되었으니까.”

“아! 수련생에서 다 같이 검대에 들어간 거예요?”

“그렇죠. 근데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늦… 어! 부단주님!”

도리안이 주변을 돌아볼 때 오른쪽 숲길에서 라온이 나왔다. 어깨에는 누군지 모를 사람을 얹고 있었다.

“라온!”

“왜 이리 늦게 와!”

“괜히 걱정했네.”

루난이 달려왔고, 마르타는 인상을 찡그렸으며, 버렌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조금 멀리 있어서.”

라온은 세 사람의 다른 반응에 미소를 지어주고서 셰릴에게 다가갔다.

“다 끝난 것이냐?”

셰릴이 테머스의 시체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예. 그런데 조금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라온이 어깨에 메고 있던 테머스의 시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문제라….”

셰릴은 시체가 테머스라는 걸 보고도 평온했다. 기척을 감추던 진법이 깨진 순간 테머스가 주동자였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자, 잠깐만!”

“저거 그 의원이잖아!”

“테, 테머스 님?”

“어어? 그 의원이 우릴 노렸다고? 대체 왜!”

“미친….”

천검대나 광풍단 모두는 테머스의 시체를 보고서 경악하며 입을 쩍 벌렸다.

“아아….”

엔시아는 테머스가 진맥을 했던 손목을 감싸 쥐며 입술을 떨었다.

“이 자가 습격을 지시한 증거가 있나?”

“일단 이 진명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라온은 진명적에 대해 설명하며 테머스가 독공을 익혔고, 그를 심문하다가 갑자기 심장이 멈췄다는 것까지 말해주었다.

“레이지 웜이로군.”

셰릴은 핏줄이 터져나간 테머스의 시체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테머스의 뒤에 누군가가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순식간에 레이지 웜의 정체를 파악하고, 배후가 있다는 것까지 알아차렸다. 역시나 보통 식견이 아니었다.

“그게 누구인지는 듣지 못했나?”

“예. 듣지 못했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데루스 로베르트가 참여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여기서 놈의 이름을 꺼내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명분이 약하기 때문에 지그하르트와 로베르트 가문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 죄 없는 사람들이 끝없이 죽어 나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놈은 내 거니까.’

데루스에게 쉬운 죽음을 선사해줄 생각은 없다. 놈이 소중하게 여기는 세력들을 차례로 무너뜨려 절망을 선사해 준 뒤, 마지막 순간에 목을 베어버릴 것이다.

“그런가.”

셰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

“예?”

“이번 일은 전부 내가 해결한 것으로 하겠다.”

그녀는 말릴 새도 없이 테머스의 시체에 검흔을 새겼다.

“대, 대주님?”

“갑자기 왜….”

천검대주가 모든 일을 해결한 명성을 가져가겠다고 하자, 사람들이 눈을 부릅떴다.

“서, 설마 명성을 챙기시려고…흡!”

라온은 헛소리를 하는 크레인의 입을 막고, 셰릴을 보았다.

“이유를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테머스는 대륙 전역에 선한 영향력을 떨친 의원이다. 피에 어린 혈독과 이빨의 구멍 그리고 진명적이 있다고 해도 믿지 않으려고 하거나, 널 습격하려는 자가 나타날 수도 있다.”

셰릴은 평소와 같은 담백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즉, 이 자를 죽여서 얻을 수 있는 건 좋은 명성이 아니야. 거기다 테머스 뒤에 있는 배후가 너와 광풍단에게 복수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이번 일은 나 혼자 했다고 퍼지는 게 나아.”

‘역시 보호해주시려는 거였군.’

셰릴은 테머스의 뒤에 있을 배후에게서 자신과 광풍단을 보호하기 위해 이번 일을 해결한 실적을 가져가겠다고 말한 것이다.

‘좋은 사람이야.’

냉정해 보이고, 깐깐해 보이는 것과 달리 셰릴은 많은 것을 배려해주는 따스함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안 되겠습니다.”

라온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를 봐서는 안 되니까.’

이대로 정보가 퍼진다면 데루스가 천검대주를 노릴지도 모른다. 복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는 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지?”

“테머스의 뒤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천검대주님께 일을 떠넘길 수는 없습니다. 테머스에게 모욕을 주고, 엔시아 아가씨를 데리고 간 건 저니까. 제가….”

말을 하고 있을 때 셰릴의 오른손이 다가왔다. 엄지로 중지를 말아쥐고서 그대로 이마를 튕겼다.

“윽!”

갑작스러운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건방지게 누굴 걱정하는 거냐.”

셰릴이 이마를 찡그렸다.

“이번 임무의 책임자는 나다. 결과도, 과정도 내가 결정한다.”

“음….”

“난 분명 너에게 알아서 하라고 했고, 넌 그 지시를 충분히 따랐어. 이런 결과를 만든 게 나니까. 책임도 내가 진다.”

“천검대주님….”

“거기다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녀의 전신으로 살이 떨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난 가주님을 지키는 첫 번째 검이다. 그분만 아니라면 상대가 육황오마의 수장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셰릴은 무언가를 아는 것처럼 육황오마의 수장이라는 말을 하고 뒤를 돌았다. 그녀는 주변을 돌며 테머스에게 남긴 것처럼 숲 전체에 오러를 퍼뜨렸다.

“크으….”

“역시 우리 대주님!”

“대주님이 그런 명성 따위를 신경 쓸 리 없지!”

“당당한 모습에 또 반했습니다!”

천검대 검사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와, 저게 책임감이구나.”

“달라. 완전 달라.”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라온에게 떠넘겼을 텐데….”

광풍대 검사들은 셰릴과 반대 선상에 있는 붉은 머리 엘프를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음….”

라온은 셰릴의 뒷모습을 보며 옅은 숨을 뱉었다.

‘아무래도 기회를 만들어야겠는데.’

나중에라도 셰릴에게 이 일을 저지른 놈이 데루스라는 걸 알릴 기회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되어도 그녀는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 같지만.

‘어쨌든 잠깐의 시간은 벌었군.’

셰릴 덕분에 데루스에게 이름이 노출되는 시간을 꽤 늦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놈의 계획들을 차례로 부수면 될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숲 이곳저곳에 전투의 흔적을 남기는 셰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부단주님!”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도리안이 붉어진 얼굴로 달려왔다.

“오늘 전 보급의 신을 보았습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뭐?”

“상황에 맞는 아티팩트로 위험한 상황을 아예 차단하는 건 놀라움을 넘어 감동적이었습니다! 스승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녀석이 넙죽 엎드렸다. 적절한 도구를 꺼내 적의 습격을 완벽하게 막아낸 상황에 감탄했는지 눈빛이 영롱할 정도로 번쩍였다.

“이건 우연이야.”

이번 일은 보급을 잘 준비한 게 아니라, 전생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단주님 정도라면 보급의 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절 시험하신 거였군요! 제게 가르쳐 주십시오!”

도리안은 절대 아니라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가르침을 달라고 외쳤다.

“라온 님!”

엔시아가 멍한 눈으로 마차에서 내려서 다가왔다.

“잘 생겼는데, 강하시고, 잘생겼는데 준비도 완벽하시고, 잘생겼는데, 머리도 좋으시네요. 그리고 존나 잘생겼어요!”

그녀의 눈빛도 무슨 보석을 보는 듯 박아놓은 듯 빛났다.

“라온. 잘 생겼어. 준비 잘 해. 돈도 많아!”

루난이 도리안의 옆에 붙으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다른 사람과 달리 눈빛이 맹해서 그나마 나았다.

“으!”

라온은 세 사람의 시선에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

‘추종자가 점점 늘고 있어….’

*     *      *

라온은 시각을 이미지화해서 저장하는 아티팩트로 암살자들과 숲 주변의 상황을 기록한 뒤에 레트란으로 떠났다.

다른 습격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쉬지 않고 이동하여 다음날 저녁이 되었을 때 크른 숲의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네요.”

“아우, 이제 좀 쉴 수 있겠다.”

도리안이 둥글게 열린 숲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크레인도 밝은 빛이 뿜어지는 숲의 출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엔시아 님을 치료하고, 다시 복귀할 때까지 우리의 임무는 끝나지 않는다. 정신 차려.”

버렌이 두 사람을 돌아보며 눈매를 좁혔다.

“여기 전쟁 중이라는 말 못 들었어? 정신 안 차리면 목 날아간다.”

마르타도 도리안과 크레인의 어깨를 치며 인상을 찡그렸다.

“죄, 죄송합니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선두에 있던 에컨이 뒤를 돌아보고 빙긋 웃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심각한 상황은 나오지 않아. 자존심 때문에 버티고 있을 뿐이니까. 별문제 없이 치료할 수 있을… 어?”

미소를 유지하던 그는 숲을 나간 순간 끈 떨어진 인형처럼 굳어버렸다.

“무슨….”

라온도 에컨의 뒤를 따라 나갔다가 멈춰섰다. 저녁임에도 태양이 다시 떠오른 듯 시야가 환했다.

“아!”

달빛이 아니다. 레트란에서 타오르는 화마의 그림자였다.

“문제가 생겼군.”

셰릴이 불길에 휩싸인 레트란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광풍단은 나와 함께 가고, 천검대는 마차를 이끌고 오도록.”

“예!”

그녀는 에컨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튀어나갔다.

“가자!”

“예!”

라온도 광풍단에게 손짓을 하고서 셰릴의 뒤를 쫓았다.

‘대체 무슨 일이….’

레트란을 양분하는 두 가문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 정도 규모로 싸울 리가 없다. 분명 전쟁과는 다른 일이 터졌을 것이다.

타악!

라온은 셰릴을 따라 레트란의 성문을 뛰어넘어 성벽 위에 섰다. 불길은 외곽에서부터 피어났고, 도시 내부에는 시체와 피가 가득했다.

챠아앙!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에 좌측을 보았다.

녹색 후드와 적색 후드를 뒤집어쓴 괴인들이 무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칼과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에덴….”

“녹귀와 적귀!”

뒤에서 버렌과 마르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부 마을에서 부딪쳤기에 광풍단의 모두는 단숨에 에덴의 귀신들을 알아보았다.

적귀와 녹귀가 다가 아니다. 몬스터의 갑주를 입은 간부들도 곳곳에 보였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지시를 내리겠다. 마을에 있는 적귀와 녹귀를 모조리 베어라. 심문 따위는 필요 없다.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해!”

셰릴은 지시를 내리자마자 중앙 대로로 내달렸다. 도시 중심에서 무인들을 학살하는 에덴의 간부들을 노리는 것 같았다.

“천검대주님의 지시대로 적귀와 녹귀를 처리한 뒤에 도시 중앙으로 모이도록.”

“알겠습니다!”

라온은 추가 명령을 내리고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적귀와 녹귀의 기운이 가장 많이 느껴지는 좌측으로 달려갔다.

‘지독한 놈들….’

언덕에서 굳지 않은 피가 흘러내리고, 열기가 식지 않은 시체가 핏줄 터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적귀와 녹귀는 자신이 왔다는 것도 모른 채 몬스터나 다를 바 없는 괴성을 흘리며 민간인들을 향해 검과 도끼를 내리쳤다.

콰아아앙!

라온은 땅이 터질 정도의 진각을 밟아 모두를 멈춰 세웠다.

적귀와 녹귀는 피로 범벅이 된 무기를 든 채 뒤를 돌았다.

“지그하르트?”

“지그하르트가 왜?”

대답하지 않고 태화보를 밟았다. 땅이 접히는 듯한 현상을 일으키며 나아가 제천검을 내쳤다. 은빛 칼날이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녹귀와 적귀를 스쳐 지나갔다.

화아아아!

놈들이 반응하기 전에 우측으로 선회하여 두 번째 검격을 밀어냈다. 검날에 어린 불꽃이 나선으로 갈라지며 남아 있던 녹귀와 적귀마저 베어버렸다.

두두둑.

눈 깜짝할 사이에 적귀와 녹귀 열 명의 목이 바닥으로 굴렀다.

“어….”

“허억!”

녹귀에게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거친 숨을 뱉으며 주저앉았다.

“다, 당신은 누구….”

“지그하르트에서 왔습니다. 마을 중앙으로 가세요. 그곳이 생로입니다.”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학살을 일으키는 에덴의 귀신들을 최대한 빨리 베어야 했다.

고오오오!

글래시아의 감각을 열었다. 살기를 따라 이동하며 학살을 벌이는 귀신들을 모조리 베어버렸다.

‘이 미친놈들….’

이곳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30명이 넘는 녹귀와 적귀를 베었다. 에덴 놈들은 이곳을 통째로 지우려고 했던 것 같다.

‘마지막은 저긴가.’

라온은 매끄러운 곡선으로 세워진 건물로 달려갔다.

“꺄아아악!”

풍요의 신을 모시는 신전이었는데, 문은 이미 부서져 있었고 안에서는 다급한 비명이 들려왔다.

콰아아앙!

들어가니, 오크 투사의 갑주를 입은 에덴의 귀신이 갈색 무복을 입은 검사들을 향해 살기 짙은 검격을 내리치고 있었다.

양옆으로는 시체가 가득했고, 검사들 뒤에는 민간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눈을 감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녹전귀? 아니야 달라.’

세부 마을에서 베었던 놈보다 강했고 기질이 달랐다. 마석도 안의 사람도 다른 존재인 것 같았다.

“넌 뭐냐?”

녹전귀가 검을 내리치다 말고 뒤를 돌았다.

“난 식사시간을 방해하는 걸…커헉!”

라온은 놈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태화이보를 밟아 단숨에 안으로 뛰어들었다.

촤아아악!

부서진 창살에서 퍼진 달빛을 담아낸 푸른 칼날이 사선으로 그어졌다.

“끄르르륵….”

녹전귀는 피가 뿜어지는 목을 부여잡은 채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굼벵이도 성장하긴 하는군.

라스가 녹전귀의 시체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저 요상한 갑옷. 4년 전쯤에도 싸웠던 놈과 같은 기운을 가졌지 않느냐. 당시에는 간신히 이겼는데, 이젠 일검으로도 베어버리는군.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그때 이후로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호구를 잡았으니, 차이가 나는 건 당연했다.

“아아….”

“노, 녹전귀를 일검에….”

“당신은 대체….”

갈색 무복을 입은 검사들은 살아남은 것보다 녹전귀가 일검에 베인 게 더 놀라운 듯 눈을 부릅떴다.

“괜찮으십니까?”

라온은 검을 아래로 내리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라온은 모두를 보호하는 듯한 위치에 있던 검사에게 다가갔다. 외부에 있던 에덴의 귀신들을 대부분 처리했기에 이제 이야기를 들을 차례였다.

“그, 그게….”

“그러고 보니 성자께선 어디 가셨습니까? 그분이 계셨다면 이런 상황까지는 안 왔을 텐데.”

넝마의 성자 페드릭도 마스터에 오른 무인이다. 의술과 비교하면 많이 달리지만 어디 가서 밀리지 않은 무력을 가졌다.

“제,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 신관이 손을 들었다.

“당신은….”

“전 이곳에서 성자님을 보조했던 신관 로지입니다.”

로지가 한숨을 내쉬고서 라온의 앞에 섰다. 아직 무서운지 다리가 떨렸다.

“오늘 낮쯤 성자님과 함께 두 가문의 환자들을 살피고 있을 때 갑자기 암살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암살자….”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아무래도 테머스가 자신만이 아니라, 페드릭도 노렸던 것 같다.

“성자님께 많은 도움을 받은 바신 가문과 트리안 가문은 잠시 휴전을 하고 합심해서 암살자들을 몰아냈습니다. 같은 적을 상대로 검을 휘두른 덕분인지 두 가문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어요.”

그럴 것이다. 바신 가문과 트리안 가문도 이 지지부진한 전쟁을 끝내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임시 휴전을 조금 더 이어가기로 하면서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도시 외곽에서 불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라온은 불이라는 소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이제 어떻게 돌아간 건지 대충 예상이 되었다.

“두 가문의 무인들이 불을 끄기 위해 흩어졌고, 그 틈을 노려서 에덴의 귀신들이 습격을 해왔어요. 에덴의 귀신들도 많이 죽었지만, 떨어져 있던 가문 검사들의 피해가 훨씬 컸죠.”

로지는 참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성자님께서 나서진 않으신 겁니까?”

“물론 나와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셨죠.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어요.”

“그게 무슨….”

그녀의 말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에덴의 목적은 성자님이었으니까요.”

“예?”

“성자님이 나오시자마자 에덴은 기다렸다는 듯 마스터급 귀신 넷을 투입했어요. 둘은 도시 중앙에서 학살을 벌여서 시선을 끌었고, 다른 둘은 성자님을 공격했어요. 즉, 성자님이 목표였던 거죠.”

로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자께서는 에덴의 목적이 본인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율리우스를 데리고 레트란을 벗어나셨습니다. 덕분에 저희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죠.”

페드릭은 이 도시를 구하기 위해 에덴의 시선을 끌며 도망친 것 같다. 다만 그 중에 처음 듣는 이름이 있었다.

“율리우스?”

“이 도시에 있던 두 가문의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입니다.”

누군지 알았다. 가문의 전쟁을 일으키게 만든 천재적인 재능의 아이인 것 같았다.

“설마 에덴이….”

“예. 놈들은 성자님과 그 아이를 모두 노리고 있었습니다.”

“놈들이 성자님은 왜 노리는 거죠?”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에덴은 항상 갑옷을 입힐 사람을 찾아다니니, 아이를 노리는 건 이해했지만, 이렇게까지 해서 페드릭을 노린 이유는 생각나지 않았다.

“성자님이 가지고 계신 꽃 때문입니다.”

“무슨 꽃이길래….”

“레이신.”

“아!”

“약으로 만들면 만 명을 살리고, 독으로 만들면 십만 명을 죽일 수 있다는 보물입니다.”

로지가 가슴을 움켜쥔 손을 떨었다.

“에덴은 아이와 성자님의 목숨 그리고 레이신을 모두 노리고 있습니다.”

*     *      *

라온은 로지와 사람들을 안전한 곳에 보낸 후 셰릴이 갔던 중앙으로 향했다.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에덴의 간부들은 모조리 목이 떨어졌고, 광풍단과 마차도 도착해 있었다.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에덴은 성자님의 목숨과 아이를 모두 노리고 있다. 성자님께선 마을의 멸망을 막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셨지. 지금도 쫓기고 있을 거다.”

그녀 역시 사정을 들었는지 성자가 율리우스를 데리고 간 건 알고 있었다. 다만 레이신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라온이 손을 들어 올렸다.

“에덴은 성자님께서 가지고 레이신을 노리고 있습니다.”

“레이신….”

그 이름을 알고 있었는지 검사들의 인상이 한층 더 찌그러졌다.

“아이에 성자님 그리고 레이신까지 노린다는 건가? 귀신들 주제에 욕심이 과하군.”

셰릴이 차게 웃으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에컨, 라온. 너희는 검사들과 함게 엔시아님과 레트란의 시민들을 보호해라.”

“알겠습니다!”

“…….”

에컨은 바로 대답했지만, 라온은 말 없이 셰릴에게 다가갔다.

“저도 가겠습니다.”

“이건 장난이 아니야.”

셰릴이 인상을 찡그린 채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들은대로라면 마스터급 귀신만 넷이다. 실제로 성자님을 쫓는 놈들은 더 많겠지. 네가 감당할 수 없다.”

“그분께는 구명의 은을 입었습니다.”

라온이 한 발 더 다가왔다.

“갚지 않는다면 금수나 다름없습니다.”

“너….”

“기회를 주십시오.”

라온의 진중한 기세에 셰릴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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