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화
라온은 경악한 테머스를 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눈동자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테머스는 이 장소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기 위해 태어난 이후 가장 빨리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어떤 핑계를 주절거릴지 벌써 기대가 되었다.
“이, 이 미친놈!”
테머스가 생각을 끝냈는지 입술을 깨물며 삿대질을 해왔다.
“이게 무슨 짓이냐! 대체 왜 내 제자를 죽인 것이야!”
그는 이곳의 일과 상관없다는 듯 역으로 습격받은 척하며 소리를 질렀다.
“아, 그렇게 나오시겠다?”
라온은 피가 흐르는 제천검을 휘돌리며 피식 웃었다.
“핑계가 너무 일차원적이야. 머리 굴릴 시간을 줬는데도 그 수준이라니, 실망인데?”
“무, 무슨 소리냐!”
“네가 우리를 습격해놓고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고.”
“내가 왜 널 습격한단 말이냐! 우린 이곳에서 대기하다가 환자가 생기면….”
“이 피리가 있는데도 그런 추한 변명을 지꺼리는 거야?”
테머스의 제자가 떨어뜨린 은색 피리를 주웠다.
“그, 그게 어쨌다고! 그건 풀피리와 비슷한 소리가 나는….”
“날 너무 물로 보네.”
라온이 피리 안쪽에 새겨진 기이한 문양을 가리키며 피식 웃었다.
“이거 진명적이잖아.”
“아….”
“진법을 발동시키는 최상급 아티팩트.”
진명적은 미리 설치한 진법을 멀리서 발동시킬 수 있는 특별한 피리였다. 진법에 맞게 진명적 내부 문양을 고쳐야 하기 때문에 발뺌할 수 없었다.
“이걸로 우리를 진법에 가둬놓고, 그런 어설픈 변명을 주절거리다니, 들킬 거라는 생각은 아예 안 했나 봐?”
“너, 너 대체 뭐야….”
테머스의 턱이 바들바들 떨렸다. 반쯤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대체 뭔데! 뒈지지 않고 내 계획을 모조리 부수냔 말이다!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왔어!”
“감각이 좋은 친구가 하나 있어서.”
라온은 테머스의 경악을 즐기며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이다. 본왕의 감각은 인간과는 격이 다르… 무슨 소리냐! 본왕이 왜 네놈의 친구냔 말이야!
‘그냥 하는 말이잖아.’
인간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라스를 밀어내고, 테머스에게 한 발 더 다가갔다.
“선의로 이름 높은 테머스 님이 뒤에서 암살자와 독을 부려왔다는 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본인이 치료하려다가 퇴짜 당한 환자를.”
테머스는 본인의 명성과 소문에 굉장히 민감한 놈이다. 이름값이 바닥을 뚫고 지하로 들어갈 거란 생각에 얼굴 전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여기서 죽더라도 대륙 최악의 치료사로 이름이 남겠지?”
“끄으으윽!”
테머스는 뒤로 물러서며 이를 딱딱 부딪쳤다.
‘다, 다 망했어! 다 끝났다고!’
저 피리가 있는 이상. 이 자리에서 진법을 치고 있었다는 걸 들킨 이상 도망칠 방법은 없다. 설사 살아남는다고 해도 데루스 로베르트는 자신을 모른 척할 것이다.
‘이놈 대체 누구야! 이게 무슨 17살이냐고!’
모든 계획을 깨는 것으로 모자라, 이곳을 찾아내고, 증거까지 파악하다니, 어이가 없어서 기절할 정도로 머리가 아찔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으니, 빨리 끝내자.”
라온이 검을 세운 채 앞으로 다가왔다.
“자, 잠시만 내 말을 들어라. 나는…음?”
오지 말라고 손을 젓던 테머스가 눈매를 좁혔다. 은신용 진법이 깨진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라온 외에 다른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너 설마 혼자 온 거냐?”
“그럼 너 하나 잡는데 둘이나 올까?”
라온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아아….”
테머스가 가슴을 움켜쥔 채 깊은숨을 내쉬었다.
‘하늘이 날 버리지 않으셨어!’
저 어린놈은 아직 자신이 의원인 줄만 알고 있었다. 독공을 운용하여 단숨에 녹여 버리면 천검대주가 오기 전에 도망칠 수 있었다.
고오오오.
테머스는 왼손을 뒤로 감춘 채 천천히 독을 끌어모았다. 라온이 방심하고 있을 때 독으로 심장이나 목을 녹여야 했다.
‘이곳은 내 무덤이 아니라, 네 무덤이 될 것이다.’
속마음을 숨긴 채 겁에 질린 얼굴로 라온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흥.”
라온은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테머스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속셈이 있다고 아주 광고를 하는군.’
테머스는 절망한 듯 혹은 겁먹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눈빛 깊은 곳에 살의를 담고 있었다. 숨겨둔 왼손에 독을 가지고 있을 게 뻔했다.
“끝내자.”
라온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검을 아래로 내린 채 테머스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다섯 걸음으로 줄어든 순간 테머스의 눈빛이 살벌하게 번쩍였다.
“뒈져라!”
테머스의 왼손이 벼락처럼 튀어나왔다. 손아귀에 어려 있던 보라색 기운이 창처럼 늘어지며 심장을 향해 쏘아져 왔다.
“그럼 그렇지.”
라온은 그대로 진각을 밟으며 제천검의 칼날에 쾌검의 구결을 담아냈다.
쩌어억!
만화공의 불꽃이 섬전처럼 튀어나가 독을 뿜어내는 테머스의 왼팔을 통째로 갈라냈다.
“끄아아아악!”
테머스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설 때 따라붙으며 남은 오른쪽 어깨에 제천검을 찌르며 땅에 처박았다.
“끄어어어억!”
한순간에 양팔을 모두 못 쓰게 된 테머스가 피를 토하며 전신을 떨었다. 라온은 바로 그의 입에 손을 넣어 어금니에 숨겨둔 독단을 빼냈다.
“끄으윽….”
“네 부하들은 비명 한 번 안 지르던데, 엄살이 심하네.”
“어, 어떻게 독단까지. 너, 넌 대체 누구야….”
테머스는 새파래진 안색으로 턱을 떨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 이름 말고. 정체가 뭐냔 말이다! 어떻게 약관도 지나지 않은 애송이가 이런!”
“네 궁금증을 풀어줄 이유는 없지.”
라온이 오른손을 테머스의 명치 부근에 올린 채 충격을 일으켰다.
“꺼흑!”
심장에 강한 충격이 일어나며 테머스의 목이 뒤로 넘어갔다. 죽인 게 아니라, 심장에 있을지도 모르는 레이지 웜을 멈추기 위한 임시 조치였다.
“일어나라.”
라온은 바로 뺨을 후려쳐서 테머스를 깨웠다.
“끄으윽….”
테머스가 마른침을 삼키며 라온을 올려보았다.
“방금 뭘….”
“네 주인이 심장에 벌레를 박아넣었을지도 모르니까.”
“허억!”
공포에 몸이 잠식당한 것처럼 테머스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너 설마 그림자도….”
“그게 다가 아니지. 네 주인이 남쪽의 지배자라는 것도 알고 있거든.”
“아….”
테머스의 입이 찢어질 정도로 벌어졌다. 팔이 떨어질 때보다 더 경악한 표정이다.
“레이지 웜도 기절했을 테니,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도록.”
“머, 멍청한 놈. 내게 레이지 웜 따위는 없다.”
“그거 잘 됐군. 편하게 심문할 수 있겠어.”
라온이 차게 웃으며 테머스의 멱살을 쥐며 그의 몸을 눌렀다.
“커흑… 음? 크하하하!”
질겁하던 놈은 자신의 손을 내려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지?”
“이곳에서 죽는 건 내가 아니라, 네놈이니까.”
“뭐?”
“내 피는 지독한 독이다. 네놈 역시 죽게 될 거야.”
테머스가 손에 묻은 빨간 피를 눈짓했다. 조금 전 놈의 팔을 베었을 때 뿜어진 피였다.
“이거?”
라온은 피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내가 설마 이걸 모르고 있었을까 봐?”
테머스의 피에는 혈독이라 부를 정도로 강한 독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피독 아티팩트와 불의 고리가 장기와 마나 회로를 보호하고, 만화공이 들어온 독을 모조리 태워서 속이 조금 울렁거리는 거 말고는 아무런 해도 입히지 못했다.
“내 독은 네놈 따위가 버틸 수 없는….”
“그래서 난 언제 죽는데? 한참 전에 묻었잖아.”
“어…?”
여유롭게 웃어주자 테머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도, 독도 안 통한다고?”
“할 거 다 했으면 이제 내가 질문 할 차례네.”
라온이 테머스를 짓누르며 턱을 살짝 내렸다.
“네, 네놈이 날 어떻게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입은 절대 열리지 않는다! 죽여라!”
“아, 입이 무거우시다?”
“그래. 고문 따위로는 내 입을 열지 못….”
“괜찮아. 내가 그럴 때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배웠거든.”
라온이 턱을 들어 올리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바로 너한테.
* * *
“이, 이전의 공장은 그대로 운용하고 있고, 발카르 근처에 있는 마을에도 그림자를 키우는 공장을 하나 만들었다. 처에 도시와 마, 마을이 많아서 아이들의 공급도 쉽게 할 수 있지….”
테머스의 눈동자는 고통과 공포에 짓눌려 고철처럼 찌그러져 있었다. 본인이 알려준 고문법을 이겨내지 못하고, 로베르트의 비밀을 술술 불어댔다.
‘다른 공장은 그대로고, 그 사이에 4곳이나 추가되었군.’
공장은 그림자와 세작을 키우는 곳이다. 로베르트는 20년 동안 더 지독한 죄를 짓고 있었다.
“네 주인의 목적은 뭐지?”
“나, 나도 모른다. 그저 하, 할 일이 있다고만 말씀하셨을 뿐이다.”
테머스는 퍼래진 입술을 떨며 말했다.
“여전히 가문 지하에 숨어서 훗날이 어쩌고, 미래가 어쩌고 하는 모양이네.”
“너, 넌 대체 그분과 무슨 관계를!”
“글쎄.”
라온이 빙긋 웃었다. 환생 이야기라도 꺼내주고 싶었지만, 라스가 너무 흥미롭게 보고 있어서 말할 수가 없었다.
-이런 고문 방식이라니, 본왕도 배우고 싶구나. 역시 네놈은 인간보다 마족에 가까운….
녀석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다시 테머스를 보았다.
“지금 네 주인의 무력 경지는 어디지?”
“나, 나도 모른다. 절대에 오른 건 확실한데,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이 상황에서 대답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모른다는 뜻이었다.
‘하긴 그놈이 본인의 정보를 밝힐 리가 없지.’
데루스 로베르트는 지독할 정도로 냉정한 놈이다. 심복이라고 해도 무력 수준이나 무슨 무학을 익혔는지 말해줬을 리가 없었다.
“여기에 온 건 네 주인의 지시인가?”
“아, 아니다. 내가 혼자….”
“얼굴로 굴욕당한 것 때문에?”
“으윽….”
예상대로 테머스는 데루스의 지시가 아니라, 의술과 명성이 얼굴에 밀린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달려든 모양이다.
“대충 필요한 정보는 모두 들었으니.”
라온이 테머스의 어깨에 박힌 제천검을 뽑았다.
“크헉!”
“지금부터 넌 포로다. 지그하르트에 돌아가는 대로….”
“끅!”
테머스를 잡아 올리려고 할 때 그가 피를 토하며 발작을 일으켰다.
“끄아아아악!”
놈의 얼굴 전체에 핏줄이 돋아나며 고문을 할 때보다 더 고통스러운 비명을 터트렸다. 그 핏줄이 동시에 터지며 놈의 숨이 끊어졌다.
“역시.”
라온은 숨이 끊어진 테머스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테머스의 말과 달리 놈의 심장에는 레이지 웜이 박혀 있었다.
‘안 넣었을 리가 없지.’
데루스는 본인 말고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아무리 심복이라고 해도 레이지 웜이 있는 건 당연했다.
놈은 테머스의 감정 상태를 느끼고 정보를 뱉기 전에 죽인 게 분명했다.
‘고리를 끊겠다는 거네.’
테머스는 실제로 로베르트 소속이지만, 대외적으로는 어느 세력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다. 그를 가문에 넣지 않고, 써먹은 것도 오늘 같은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지독한 놈이라니까’
라온이 제천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고개를 틀었다.
‘그래도 열은 받겠지.’
아주 많이.
테머스를 본인 손으로 죽였지만, 왜 죽을 위기에 처했고,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는 하나도 모를 테니, 굉장히 답답한 상태일 것이다.
‘놀라긴 일러.’
이제 시작이니까.
이건 데루스 로베르트. 그 악귀를 향한 복수의 첫걸음이었다.
‘그만 돌아가…음?’
테머스의 시체를 어깨에 걸치고 돌아가려 할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하나 떠올랐다.
[혈독을 스스로 이겨내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합니다.]
[<특성> 독 저항력이 생성됩니다.]
테머스의 피에 담겨 있던 독을 견뎌서 능력치가 오르고, 독 저항력이 생겼다는 메시지였다.
-어? 어어?
라스가 메시지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고, 고작 그 정도 독 좀 견뎠다고 능력치를 올려주는 게 말이 되느냐!
녀석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두 손으로 땅을 내리쳤다.
-그런 허접한 독은 마계에서 풀이나, 물에도 들어있느니라!
‘여긴 인간계에요.’
-아오옥!
라온은 절규하는 라스를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고맙다고 해야겠지?’
데루스의 최신 정보를 듣고, 놈들의 계획을 망쳤으며, 약점이 될 수도 있는 독 저항력도 생겼으니, 일석삼조나 다름없었다.
-누구한테 고맙다는 것이냐! 나한테 고맙다고 해야지!
* * *
“테머스가 언제부터 그 습격 계획을 짠 거지?”
데루스 로베르트는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그의 집사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본인이 아끼던 심복 하나를 원격으로 죽였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표정과 분위기였다.
“그, 그게….”
“괜찮다. 말해.”
“요난 가문에서 엔시아 요난의 담당의가 되는 계획이 실패한 이후 같습니다. 연결책들을 막고, 대륙 위쪽에 있던 그림자들을 불러 페드릭에게 가는 엔시아 요난을 습격한 듯합니다.”
집사는 빠르게 조사했던 내용을 모두 읊었다.
“그니까 실패한 계획을 어떻게든 만회하려고 움직이다가 당했다는 거로군?”
“그, 그렇습니다.”
“뭐, 좋아. 다 좋은데, 그 정보가 왜 이제야 내게 들어온 거지?”
데루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공기가 점차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연결책, 지부, 공장. 모든 곳의 정보는 가장 먼저 내게 들어와야 했을 텐데?”
“테, 테머스가 주인님의 지시라고 거짓말하며 정보가 빠져나가는 걸 막았습니다.”
집사는 데루스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바닥만 보며 말을 이어갔다.
“거기다 그, 근처에 있는 지부와 공장만 움직여서 정보가 이쪽으로 오는데 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래서 감투를 씌워주면 안 되는 거야.”
데루스가 원목 책상을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모자 좀 썼다고 본인이 벌레의 삶을 벗어났다고 생각하잖아.”
“으음….”
“할 거라면 제대로 하던가. 주제도 모르고, 천검대주가 호위하는 마차를 습격하려고 해?”
테머스의 레이지 웜에서 전해진 감정은 공포와 경악, 고통 그리고 포기였다. 살아남을 수 없는 감정의 표현이었기에 정보가 빠져나가기 전에 레이지 웜을 자극해 놈을 죽였다.
“멍청한 놈.”
보지 않아도 뻔하다. 자존심이 상한 걸 참지 못하고, 들이댔다가 천검대주에게 목줄이 잡힌 게 분명했다.
“테머스와 우리 쪽 연결고리를 모조리 끊어.”
테머스는 공식적으로 무소속이다. 연결고리만 확실히 끊는다면 정체를 들킬 일은 없었다.
“진행 중입니다.”
집사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데루스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정보를 알게 되자마자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도구는 도구답게 살아야지. 스스로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거야.”
“아, 네….”
“그리고 도구가 주인의 명령 없이 움직여도 안 되겠지. 지부와 공장, 연결책의 수장도 모조리 갈아.”
“이, 이번 일과 관련이 없는 곳도 바꾸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저, 전부 갈면 100명 이상이….”
집사가 마른침을 삼켰다. 데루스가 갈라는 말은 단순히 새 인물을 등용시키라는 말이 아니라, 전부 죽이라는 뜻이었으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나?”
본인의 부하. 그것도 그중 대부분 죄가 없는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놓고도 데루스의 눈동자는 잔잔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아, 아닙니다!”
“앞으로는 사소한 정보라도 가장 먼저 내게 정보가 들어오도록 시스템을 바꿔.”
“알겠습니다!”
“하나 더.”
데루스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이번 일에 관련된 자를 모조리 조사해. 천검대주와 누가 움직였는지, 어떤 놈이 세작을 찾아낸 건지. 전부.”
“그건 전부 천검대주가 한 게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에컨이나, 같이 갔다는 광풍단의 어린 것들이 했을 수도 있으니까.”
데루스는 까다로운 성격답게 이번 일도 완벽하게 조사한 뒤 이후를 대비하려는 것 같았다.
“가보도록.”
“예! 빠르게 처리해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겁에 질려 있던 집사는 냉큼 고개를 숙이고, 데루스의 집무실을 나섰다.
고오오오!
집사가 사라진 순간부터 집무실의 공기가 달라진다. 북해의 파도가 쏟아진 듯 견디기 힘들 정도의 냉기가 공간 전체를 뒤덮었다.
“후후.”
데루스의 입매가 가늘게 말려 올라간다.
“20년을 준비한 계획이 무너졌다는 거지?”
요난 가문을 먹어치우기 위한 계획은 무려 20년 전부터 시작한 일이다.
지그하르트와 벌레 새끼 하나 때문에 완벽했던 계획이 무너진 것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이 일을 복구하려면 시간과 자금이 얼마나 들어갈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뚝.
오랜만에 드러낸 분노 때문일까. 손등의 상처에서 시뻘건 핏물이 떨어져 책상을 적셨다.
“죽여주지.”
데루스가 섬뜩할 정도로 화사한 미소를 흘리며 손등의 상처를 입술로 핥았다.
“이 일에 관련된 놈은 모조리 모가지를 뜯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