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1화
크른 숲 초입이 그대로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드디어 왔군.”
테머스가 숲 안쪽으로 진입하는 마차와 지그하르트 검사들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그의 시선은 천검대주나, 부대주가 아니라, 마차에 바짝 붙어서 이동하는 금발의 검사에게 향해 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테머스가 라온의 이름을 씹어먹을 듯한 살기를 담아 내뱉었다. 아들뻘도 안 되는 꼬맹이에게 개망신을 당한 건 처음이라 지금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네놈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인다.’
라온만 죽일 수 있다면 다른 놈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주둥이를 아주 잘 놀리던데, 뒈질 때는 무슨 말을 하는지 똑똑히 지켜봐 주지.’
저놈에게 말로 조롱당한 게 떠올라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놈의 비명을 자장가 삼아서 오늘은 숙면을 취할 것이다.
“엔시아 요난….”
테머스가 마차의 창문을 열고 숲을 둘러보는 엔시아를 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얼굴이라니!’
의술 실력이나, 명성이 아니라, 얼굴 때문에 밀렸다는 게 너무 굴욕적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니 분노로 손이 떨려왔다.
‘여기서 죽이지는 않겠지만 네년도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다.’
엔시아는 목숨만 붙여두었다가 요난 가문을 먹어치우는 순간 지옥의 고통을 느끼게 해준 뒤 말려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유펜.”
“예.”
테머스가 손짓을 하자, 그의 제자 유펜이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준비는?”
“진법, 묵적탄, 독, 독충 모두 세 번씩 확인했습니다. 암살자들 역시 제 위치에서 대기 중입니다.”
유펜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스승님께 굴욕을 주었던 그 버러지 새끼는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지워질 겁니다.”
“수고했다.”
“다만 하나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
유펜은 뭔가 불안한 듯 눈동자를 살짝 떨었다.
“걱정?”
“천검대주가 저희의 위치를 알아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랜드 마스터라고 신은 아니다. 이 먼 거리에서 진법 2개로 기척을 차단하고 있으니, 글렌 지그하르트가 직접 오는 게 아닌 이상 찾을 수 없다.”
테머스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다행이네요.”
유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신호 보낼 준비나 해.”
테머스는 다시 엔시아가 탄 마차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는 점차 숲의 색이 조금 어둑해진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일단 진법에 갇히면 끝이야.’
저곳에 설치해 둔 진법은 감각에 장애를 일으키고, 강한 압력으로 몸을 짓누르는 혈뫼진이다. 고수일수록 감각의 변화에 민감하기에 천검대주와 천검대에게도 충분히 통할 것이다.
‘그 이후에는 시야를 막고 독을 뿌리지.’
진법이 발동된 이후에 바로 시야를 막고, 오러의 흐름을 방해하는 묵적탄과 독을 퍼뜨린 뒤 암살자들이 돌진할 것이다.
‘다만 진짜는 그게 아니야.’
테머스가 회색 흙이 뿌려진 바닥을 바라보았다. 저 아래에는 마스터도 가볍게 죽일 수 있는 독충 수십 마리가 묻혀 있다.
천검대주가 독 가루와 암살자에게서부터 마차를 보호하는 동안 저 독물들을 이용하여 라온을 암살하는 게 오늘의 계획이었다.
“거의 다 왔군. 준비해라.”
테머스는 숲 안쪽으로 진입하는 마차를 보며 손짓했다.
“예.”
유펜이 테머스의 옆에 붙은 채로 은색 피리를 입에 가져다 댔다. 그는 마차가 진법의 중심에 들어간 순간 힘차게 피리를 불었다.
치이이잉!
피리에서 풀벌레가 우는 듯한 미세한 소리가 울리자마자, 은빛 기운이 덫처럼 조여들며 마차와 검사들을 가둬버렸다.
“발동됐군.”
테머스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뼛조각조차 남기지 않고 죽여주마!”
* * *
쩌어어어엉!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리고, 숲이 나선으로 회전하며 처음 보는 경관이 나타났다. 산 정상. 안개 때문에 밑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발 디딜 곳도 많지 않은 높은 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뭐, 뭐야! 여긴!”
“갑자기 왜 산이 나와!”
“우와아아악!”
“조심해! 바로 떨어진다.”
갑작스러운 지형 변화에 광풍단 검사들이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진법이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
“경계를 단단히 갖춰!”
천검대 검사들은 놀라긴 했지만 바로 자세를 잡고 습격 대비를 마쳤다.
‘오랜만이네.’
라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바닥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혈뫼진.’
지금 이 기이한 현상은 이동 마법이 아니라, 로베르트의 그림자들이 사용하는 살상용 진법 혈뫼진이었다.
혈뫼진은 감각을 둔하게 만들고, 중압을 일으켜 움직임과 호흡을 제한하며, 실제 그 장소로 이동한 듯한 현실감까지 느끼게 만든다. 지금도 정말 산 정상에 올라온 것처럼 찬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혈뫼진의 가장 큰 장점은 단단함이지.’
혈뫼진은 웬만한 힘으로는 뚫리지 않는다. 셰릴이 진짜 실력을 발휘한다면 모르겠지만, 에컨이나, 자신 정도로는 뚫을 수 없을 정도로 내구성이 높았다.
퍼어어엉!
진법이 완성되고 나자 사위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나 시야를 가렸다. 묵적탄. 이건 오러의 흐름에 문제를 일으키는 특수한 연막탄이었다.
‘그대로야.’
혈뫼진과 묵적탄의 조화로 오감에 오러에 장애를 일으킨 뒤 습격하는 방식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곧 암살자들의 습격이 시작될 것이다.
“진짜 산이 아니니, 겁먹을 필요 없다! 진법에서 벗어나지 마!”
“응.”
“움직이면 대가리를 후려버릴 테니까! 닥치고 검이나 들어!”
버렌과 루난, 마르타는 이런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경계를 강화했다.
“예엡!”
“아, 알겠습니다!”
도리안과 크레인도 세 사람의 기세에 용기를 얻고 자세를 다 잡았다. 꾸준히 단련시킨 보람이 있는 반응이었다.
‘근데….’
라온이 마차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셰릴과 에컨을 비롯한 천검대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안 움직이나?]
그녀에게 말을 걸려고 할 때 먼저 오러 메시지가 들려왔다.
[네 말대로 습격이 왔으니, 대비도 되어 있겠지?]
‘물론입니다.’
[마차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보호해준다. 놀아봐라.]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묵적탄의 연기가 가볍게 꿰뚫리며 셰릴의 잔잔한 눈빛이 보였다. 어디 한 번 준비한 걸 보여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실망시킬 수 없겠는데.’
하지만 아직은 움직일 때가 아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 이 상황을 만든 자에게 절망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 했다.
화아아악!
모래가 바람에 날리는 듯한 미세한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 속에서 무언가가 퍼지기 시작했다.
‘독. 그것도 세 종류!’
입자가 각기 다른 세 종류의 독이 묵적탄 사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역시 놈이야.’
이제 확신할 수 있다. 독의 종류를 볼 때 암살자들을 부리는 사람은 테머스가 분명했다.
예상했던 대로 자존심이 강한 놈은 망신당한 걸 참지 못하고 이곳까지 찾아와 암살을 계획한 것이다.
지금도 먼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게 뻔했다.
‘잘 왔어.’
라온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놈은 이쪽을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겠지만, 진짜 쥐는 본인이었다.
샤아아악!
독이 퍼져나감과 동시에 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진짜 바람이 아니다, 암살자들이 움직이는 소리를 혈뫼진이 막아주는 현상이었다.
후우우웅!
지금 암살자들은 각자 해독제를 입에 문 채 이곳으로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후우우….”
라온은 암살자들이 가장 많이 그리고 빨리 오는 곳을 확인한 뒤 몸을 돌렸다.
“버렌! 마르타! 루난! 북쪽과 서쪽으로!”
“알겠다!”
“오냐!”
“응!”
버렌과 마르타, 루난이 손목에 차고 있던 녹색 팔찌를 꽉 조이고서 검을 내리쳤다.
콰아아아아!
팔찌에서 치솟은 푸른빛이 세 사람의 검에 스며들며 어마어마한 폭풍을 일으켰다. 용오름처럼 치솟은 바람이 한순간에 펼쳐지며 시야를 막던 묵적탄의 연기와 독 가루를 모조리 날려버렸다.
후우우웅!
거짓된 어둠이 가시고, 다시 푸른 세상이 펼쳐졌다. 시야 장악, 독 그리고 기습까지. 단 한 수에 적의 세 가지 계획을 무너뜨려 버린 것이다.
‘역시 선풍연이야.’
저 팔찌는 거대한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선풍연이라는 아티팩트다. 세 사람의 오러에 바람이 담기니 일검에 묵적탄과 독가루를 모조리 날릴 정도의 위력이 되었다.
‘남은 독은 피독 아티팩트로 충분히 막을 수 있지.’
대부분의 독을 날려 보냈으니, 남은 독 정도는 피독 아티팩트로 가볍게 차단할 수 있었다.
“이건….”
“으음!”
다가오던 암살자들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독과 연기에 당황하여 걸음을 멈췄다. 이렇게 쉽게 계획이 깨질 줄은 몰랐는지 얼굴을 가리고 있음에도 그들의 경악이 그대로 느껴졌다.
“움직여라. 놈들은 이미 묵적탄을 들이마셨고, 아직 혈뫼진이 남아 있다!”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지시를 내리자, 멈췄던 암살자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다 안 통해.”
라온이 목걸이를 툭 치며 웃었다. 묵적탄에 깃든 오러 제한 능력 역시 독을 이용한 물질이었기 때문에 피독 아티팩트에 전부 막혔다. 지금 이곳에 오러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법도 문제없고.”
품에서 둥근 구슬 하나를 꺼내서 바닥에 던졌다.
티이잉!
구슬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와 혈뫼진을 완벽하게 뒤덮었다.
“뭐, 뭐야!”
“몸이 가벼워졌어!”
“이것도 아티팩트야?”
광풍단 검사들은 진법의 효과가 확연히 줄어든 걸 느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발광석이다.”
단순해 보이는 이름과 달리 돌에서 뿜어진 빛으로 진법의 효과를 억제하는 최상급 아티팩트였다.
“허어….”
“이, 이런 것도 준비했어?”
“미쳤네….”
광풍단은 적의 계획을 차례로 깨부수는 라온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우와아아아!”
도리안은 엄청난 보급 실력이라면서 이 와중에 박수를 보냈다.
“준비성 하나는 철저하네.”
셰릴이 피식 웃으며 달려오는 수십 명의 암살자 무리에게 검을 내리쳤다.
강검과 중검이 조화롭게 풀려나며 눈앞의 공간이 여름날의 아지랑이처럼 찌그러졌다.
콰아아아앙!
단 일검에 수십 명의 암살자가 피를 뿌리고 가라앉았다.
그녀의 시선이 이쪽으로 돌아간다. 너도 해보라는 듯 턱짓했다.
‘가르치는 걸 좋아하시는군.’
라온이 옅게 웃으며 제천검을 뽑았다. 쌓아둔 중검의 구결을 일으키며 세 방위에서 달려드는 암살자들을 향해 검격을 쏟아냈다.
칼날 위에서 퍼져나가는 오러의 줄기들에 중검의 묘리가 담기며 공간 자체를 짓눌렀다.
콰아아아아!
빛살처럼 달려오던 암살자들을 꼬나쥔 검을 제대로 뻗어내지도 못한 채 모래처럼 쓸려나갔다.
“그 사이에 그걸 또 습득한 건가?”
셰릴은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넌 재미없는 놈이다.”
그녀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보는 그녀의 입매가 살짝 올라간 듯 보였다.
“개진!”
“개진!”
광풍단도 마차의 뒤로 향해 달려드는 암살자들을 향해 검격을 내쳤다.
암살자들은 단단하게 엮어진 광풍단을 뚫어내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
다만 놈들은 불나방처럼 죽음을 도외시하며 달려들어 칼을 내지르고 독을 퍼뜨렸다. 꼭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역시 이게 다가 아니군.’
테머스의 성격이라면 이 정도로 끝낼 리가 없다. 자신을 확실하게 죽일 방법을 계획해놓았을 것이다.
‘땅 밑이겠지.’
테머스의 주 무기는 독과 의술 그리고 벌레다. 멀리서 독을 퍼뜨렸다간 실패할 가능성이 높으니, 미리 독충을 묻어두었을 게 뻔했다.
촤아악!
검을 내리친 틈을 파고들어 온 암살자들까지 베어버리자, 달려들려던 놈들이 겁에 질린 듯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연기가 뻔하네.’
라온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암살자들의 뒤를 쫓아 마차에서 떨어졌을 때 땅에서 미약한 흐름이 느껴졌다.
진법 안이었기 때문에 미리 대비하지 않았거나, 발광석이 아니었다면 느끼기 힘들 정도로 작은 움직임이었다.
가장 앞에 있던 암살자를 베고 한발 더 나아갔을 때 발밑에 있던 그 기운이 한순간에 폭발했다. 터져 나오는 흙먼지 속에서 수십 마리의 독충들이 이빨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역시나!”
라온은 차게 웃으며 만화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찰나의 순간에 마나 회로에 열화의 기운이 퍼져나가며 검극의 끝에서 피어난 화염의 꽃잎들이 바람에 탄 듯 풀려나갔다.
화아아아아!
햇살의 잔영처럼 퍼져나간 화령의 조각들이 바닥에서 튀어 오른 독물들을 모조리 녹여버렸다.
콰아아아아!
오랜 기간 바닥에서 기회를 노리던 독물들은 날카로운 독니를 써보지도 못한 채 재가 되어 사라졌다.
“아아….”
“이, 이게 무슨!”
“어떻게….”
죽을 때조차 비명을 흘리지 않은 암살자들은 독물을 모조리 녹여버린 라온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모든 계획이 깨진 것에 당황을 넘어 경악한 것 같았다.
하지만 놀라긴 아직 일렀다.
촤아아악!
라온은 멈춰선 암살자들을 단숨에 베어버리고, 불의 고리와 글래시아의 감각의 바다를 동시에 열었다.
‘찾았다.’
혈뫼진을 유지하게 만드는 진핵을 찾은 뒤에 오망성이 이어지는 순서대로 부숴버렸다.
콰아아아아앙!
처음 진법이 열릴 때와 비슷한 굉음이 울리며 산이었던 장소가 본래의 숲으로 돌아갔다. 진법이 사라지니, 발화석도 힘을 다하고 빛을 잃었다.
“정말 혼자 다 했군.”
셰릴이 마지막으로 남은 암살자를 베어버리고 헛웃음을 흘렸다. 연기와 독, 독충, 진법을 모조리 무너뜨린 것에 그녀 역시 놀란 것 같았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뭐?”
“이 일을 일으킨 놈들을 잡아야죠.”
이런 잔챙이들을 위해 이렇게 단단히 준비한 게 아니다. 테머스를 베어야만 데루스 놈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다.
‘개인적인 원한도 있고.’
테머스는 암살자들을 이용하여 생체 실험을 한 놈이다. 자신 역시 놈에게 교육이라는 명목하에 살을 뜯어내는 고문을 당했었다.
요난 가문에서 만났을 때 그 생각을 하면 자신도 모르게 살기를 흘릴 것 같아서 억지로 참았었다.
“아쉽지만, 놈들의 위치는 나도 찾을 수 없다.”
셰릴이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한번 찾아보고 싶습니다.”
“뭔가 힌트를 얻은 모양이군.”
그녀가 알아서 하라는 듯 손을 저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라스.’
얼음꽃 팔찌를 두드리며 라스를 불렀다.
-뭐냐? 벌써 밥 시간인가?
라스는 싸웠던 것도 관심이 없었던 듯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엔시아를 처음 봤을 때 자기가 의원이라던 남자 기억하지?’
-당연히 기억한다. 얼굴 못생겼다고 무시당했을 때 볼만했지.
라스는 재밌었다며 낄낄 웃었다.
‘지금 이곳에 그 의원이 있을 거야. 찾아줘.’
라스는 평소에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감각의 범위 자체가 격이 달랐다. 이 녀석이라면 셰릴도 찾지 못하는 테머스의 위치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본왕이 왜 그래야 하지? 인간 따위의 일은….
‘얼마 전에 아이스크림 사줄 때 약속했지? 내 부탁 하나 들어준다고.’
-어어억….
녀석은 이제 생각났는지 입을 떡 벌렸다.
‘일해라 라스.’
라온이 빙긋 웃으며 제천검을 어깨에 걸쳤다.
* * *
“뭐, 뭐야!”
테머스가 아래를 내려보며 이를 딱딱 부딪쳤다.
“이게 뭐냐고!”
그는 악을 지르며 땅을 내리쳤다.
“저, 저도 이런 상황이 될 줄은….”
유펜이 주저앉은 채로 마른침을 삼켰다. 아예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테머스가 피나도록 입술을 씹었다.
‘준비한 계획이 모조리 막히는 게 말이 되냐고!’
묵적탄과 세 종류의 독은 검풍으로 날리고, 진법은 발광석으로 영향을 극소화 시켰다.
덕분에 암살자들은 당황한 적을 기습한 게 아니라, 방비를 완벽하게 끝낸 검사들에게 파리 떼처럼 죽어 나갔다.
‘그 상황에서 독물에도 반응하다니….’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하여 독충들을 조종했지만, 라온 놈은 그 찰나의 순간에 반응하여 독물들을 태워버렸다. 단 하나의 계책조차 통하지 않았다는 것에 어이가 없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콰아아앙!
대지가 쪼개지는 듯한 굉음에 다시 아래를 보았다. 혈뫼진이 깨지고 본래의 땅으로 돌아가는 소리였다.
“허….”
상황을 보니, 진법도 라온 놈이 깬 것 같았다. 이젠 말도 안 나온다. 대체 뭐 하는 놈인지를 모르겠다.
“지랄이다. 정말 지랄이야!”
테머스가 말아 쥔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화가 났지만, 방법이 없다. 천검대주가 있는 저곳에 쳐들어가는 건 자살 행위였으니까.
‘돌아가면 난리가 나겠군.’
데루스에게 알리지 않고, 일을 벌였다가 실패했으니, 단순한 꾸중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스, 스승님.”
유펜이 마른침을 삼키고 아래를 가리켰다.
“그 괴물 새끼가 안 보입니다.”
“뭐?”
“라온 놈이 사라졌다구요!”
그는 기겁하며 어깨를 떨었다.
“이, 이곳에 오는 거 아닙니까? 놈이 온다면….”
유펜은 모든 계획을 가볍게 부수는 라온에게 겁을 먹은 듯 눈동자를 떨었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어흑!”
테머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유펜의 뺨을 후려쳤다.
“거리도 거리지만 이 진법은 이중으로 설치되어 있다. 천검대주도 느끼지 못하는데, 그놈 따위가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하지만 그놈은 우리가 준비한 걸 다 깨부쉈지 않습니까. 처, 천검대주보다 더 불길한 놈이라구요!”
유펜은 테머스의 말에도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개소리 말고, 떠날 준비나 해.”
“바, 바로요?”
“이미 실패한 마당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지.”
“알겠습니다!”
떠난다고 하자 유펜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 있을 수 없는 사태에서 최대한 빨리 도망가고 싶은 것 같았다.
“후우, 돌아가자.”
테머스는 엔시아가 탄 마차를 마지막으로 노려보고 뒤를 돌았다.
“예.”
유펜이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진법 밖으로 나갔다.
“아, 스승님. 남은 그림자들은 미끼로….”
그가 다시 뒤를 돌려고 할 때였다. 붉은 섬광이 번쩍이고, 유펜의 목이 땅으로 떨어졌다.
“유, 유펜!”
테머스가 비명을 질렀을 때 이중으로 설치한 진법이 얇은 유리창처럼 깨지고, 피에 젖은 제복을 입은 검사의 모습이 드러났다.
“라, 라온 지그하르트….”
“여기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었구나.”
라온의 눈동자에 붉은빛 해일이 일어났다.
“만나고 싶었다.”
아주 오랫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