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10화 (210/653)

제210화

지그하르트 별관 뒤편의 북망산 중턱.

“쩝.”

리메르가 풀잎이 가로로 세워진 듯한 길쭉한 바위에 등을 기댄 채 입맛을 다셨다.

“가주님.”

그는 고개를 들어 바위 위쪽을 올려보았다.

“왜 그 답답녀한테 라온을 맡기신 겁니까?”

“…….”

글렌은 대답하지 않고 가라앉은 눈으로 어둠 속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는 별관을 바라보았다.

“라온이 셰릴의 깐깐함을 배워오면 어쩌시려구요!”

리메르는 끔찍하다는 듯 손을 떨었다.

“지금도 빈틈이 없는 녀석인데, 셰릴을 닮는다면… 으으! 생각만 해도 끔찍해!”

그는 절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아이는 자신만의 검술을 만들려고 하더군.”

글렌이 느릿하게 시선을 올리며 입을 뗐다.

“맞습니다. 지금은 중검을 연구하고 있죠.”

리메르가 중검 수련을 하던 라온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검대주는 여러 속성의 검술을 극한까지 단련했지. 지금 그 아이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어줄 사람이다.”

글렌은 담담하게 셰릴에게 라온을 맡긴 이유를 말했다.

“역시 이번에도 라온을 챙기신 거군요. 천검대까지 운용하면서 가르침을 주려고 하다니, 정말 손자 바보시네요.”

“시끄럽다.”

“그렇게 라온이 좋고, 챙겨주고 싶으시면 말을 좀 하세요! 아니면 앞에서 직접 챙겨주던가! 답답해 죽겠네!”

리메르가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가주님. 그러시다가 정말 속마음 한번 보여주지도 못하고 끝날 수도 있어요. 우리 나이에 가는 데는 순서가 없는….”

“네놈은 한 달에 한 번씩 맞지 않으면 입에 가시라도 돋는 모양이지?”

“흐읍!”

글렌의 손아귀에서 붉은색 스파크가 튀자, 리메르가 입을 꽉 다물었다.

다만 잠시의 침묵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10초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입을 열었다.

“라온을 생각하신 건 좋았는데, 이번에는 실수하셨습니다.”

“실수?”

“그 답답녀가 검술을 알려주겠냐구요.”

리메르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일단 가르치기 시작하면 제대로 알려주겠지만, 거기까지 가질 못할 겁니다.”

셰릴은 지그하르트에서 깐깐하기로 제일가는 사람이다. 쉽게 라온을 가르칠 리가 없었다.

“라온이 여러모로 대단한 녀석이지만, 셰릴의 마음을 열려면 임무를 최소 열 번은 같이해야 할 겁니다.”

리메르가 손을 빙빙 저었다.

“그거 기다릴 시간이면 차라리 서고를 열어서 다양한 검술서를 보여주는 게 나아요.”

라온을 인정하긴 하지만 셰릴의 깐깐함을 이길 거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럼 셰릴이 라온에게 검술을 알려 준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음, 가르친다면 큰 도움이 되긴 하겠죠.”

리메르가 턱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깐깐한 만큼 제대로 가르치는 녀석이니, 크게 성장해서 돌아올 겁니다.”

셰릴이 가르치려고 마음먹었다면 진의를 파악할 때까지 확실히 알려줄 테니, 전과는 격이 다른 성취를 이뤄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럼 걱정할 필요 없겠구나.”

글렌이 품에서 뜯어진 편지 봉투 한 장을 꺼냈다.

“천검대주는 라온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도 검술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니까.”

“예에?”

리메르가 입을 떡 벌렸다.

“마, 말도 안 돼! 대체 왜요?”

“라온에게 속아 넘어갔다더군.”

“소, 속아요? 그 셰릴이?”

“그래.”

“허어….”

리메르가 입술을 떨었다. 빈틈없는 셰릴까지 라온의 술수에 홀라당 넘어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정말 난 놈은 난 놈이었다.

“라온에게는 중검을 확실히 가르치겠다고 하는구나.”

“어억….”

“네 말대로 크게 성장해서 돌아오겠어.”

글렌은 놀란 리메르의 반응을 즐기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조금은 기대되는군.”

*     *      *

라온은 멈춰 선 셰릴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또 저녁 만들기 싫으셔서 도망치신 겁니까?”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셰릴은 당황한 듯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요난 가문으로 갈 때도 음식을 여러 번 망치셔서 도망을….”

신기하게도 셰릴은 다른 건 다 잘해도 요리를 못 했다. 그녀가 만든 요리에서는 기묘하게도 넣지도 않은 진흙 맛이 났다.

-그건 끔찍했지….

라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폭식의 마왕도 셰릴의 음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며 두 손을 들었다.

“그땐 그랬지만, 이번엔 아니라고!”

그녀는 진짜 오해라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럼 갑자기 왜 여기에 오신 겁니까?”

“후우, 중검을 알려주겠다고 했잖아….”

셰릴은 이미 말렸다고 생각했는지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었다.

“난 한 번 하면 확실히 끝내는 성격이다. 중검에 대한 강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녀가 제천검을 가리키며 눈매를 좁혔다.

“지금 네 중검에는 큰 빈틈이 있다. 그게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려고 왔을 뿐이지. 음식 때문이 아니야. 정말로!”

“아, 네….”

라온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라고 하는 걸 보니, 요리도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았다.

“중검을 알려주기 전에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말씀하십시오.”

“넌 왜 기존이 있는 검술을 배우지 않고, 새로운 검술을 만들려고 하는 거지?”

셰릴은 중검의 묘리를 얻어 새로운 검술을 창안하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당연하겠지.’

대부분의 검술 속성을 익힌 사람이니, 자신이 뭘 하려는 건지는 진즉에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대답해줄 수 있나?”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라온이 담담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 상급 검술을 익히고 나서도 계속 연성 검술을 수련했습니다. 몸을 풀고, 검술의 기본을 잊지 않으려고 했을 뿐인데, 언젠가부터 검술이 제 성향에 맞게 변화하더군요.”

“변화한다?”

“본래 연성검술은 공격보다 방어에 치중되어 있지만, 요즘 제가 사용하는 연성검은 공격 비중이 더 높아졌습니다. 제 성격과 오러에 맞게 검술이 진화한 거죠.”

익스퍼트 최상급에 오르고, 서리연을 만든 이후부터 확실히 머리가 깨였다. 극한으로 습득한 검술이라면 검술 자체의 흐름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변하더라도 제가 직접 만든 검술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치수를 잰 맞춤복이 기성복보다 편하듯, 직접 만든 검술이 위력도, 반응도 뛰어났고, 발전할 길도 가장 멀리까지 보였습니다.”

“그래. 네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으니, 다른 어떤 검술보다도 잘 맞겠지. 다만 그건 굉장히 험난한 길이다.”

셰릴이 담백한 눈동자로 라온이 쥔 제천검을 바라보았다.

“검술을 만든다는 건 깨달음의 영역. 수많은 검술을 익히고, 검술 숙련도를 높이더라도 문이 열리지 않을 수도 있다.”

“상관없습니다.”

“뭐?”

“검술을 만들지 않아도, 그저 수련하고 강해지는 것만으로도 즐거우니까요.”

라온이 미소를 지었다. 거짓말이 아니다. 라스에게 말했듯이 발전하고 나아진다는 즐거움은 그 어떤 감정보다도 큰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그런가. 그래서였군.”

셰릴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평범한 녀석이 아니야.’

대답 자체에 현기가 넘친다. 어떻게 저 나이에 대종사의 기질을 가지게 되었나 했더니, 정신력과 영혼의 격이 일반적인 사람과는 궤를 달리했다.

‘괜찮군.’

당당하고 여유 있는 대답도 좋았지만, 기본 검술인 연성검술을 극한까지 익혔다는 게 특히 마음에 들었다.

“대답이 되었습니까?”

라온이 생각에 빠진 셰릴을 보며 턱을 살짝 내렸다.

“그래. 충분하다.”

그리 대단한 말을 하지 않았는데, 뭔가가 마음에 든 듯 셰릴의 입가에 단아한 미소가 피어났다.

“네 대답을 들었으니, 이제 내 차례겠지.”

셰릴이 등에 메고 있던 검을 검집 채 들었다.

“방식 자체는 시리아 때와 같다. 너는 네가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중검을 내리쳐라. 나는 네 힘과 성취에 맞춰서 나의 중검을 사용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몸으로 부딪치는 방식이라니, 이론 교육보다 편해서 마음에 들었다.

“와라.”

셰릴이 네 손가락을 모아서 까딱였다.

쿠구구구!

라온이 제천검을 상단으로 세우며 만화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마나 회로를 질주하는 열화의 기운을 폭발시키며 셰릴에게 돌진했다.

콰아아아아!

제천검을 단숨에 내리치며 무거움을 담았다. 그리는 건 산. 지그하르트 전체를 감싼 북망산의 무게를 검날에 휘감았다.

“그 정도인가.”

셰릴이 차가운 눈빛을 발하며 아래에 둔 검집을 위로 쳐올렸다.

쿠구구구구!

평온한 바다에서 갑자기 해일이 일어난 듯, 거대한 힘이 일시에 터져 나오며 제천검과 맞부딪쳤다.

콰아아아아앙!

제천검과 셰릴의 검집이 격돌하며 터져 나온 무시무시한 파동에 대지가 거미줄처럼 쩍 갈라졌다.

“크으윽!”

라온이 전율적인 힘이 터져 나오는 셰릴의 검집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밀린다!’

분명 오러의 양도, 검에 담긴 무게도 비슷했지만, 나뭇가지로 강철을 막는 듯 사정없이 밀려났다.

찌지지지직!

라온은 셰릴의 검집에 담긴 막대한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뒤로 다섯 걸음이나 물러섰다.

“이, 이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셰릴은 약속했던 대로 자신과 같은 수준의 오러와 중검의 묘리를 담았지만, 어른과 아이가 힘을 겨루듯 너무 쉽게 밀려났다.

‘더구나 내가 위였어.’

중검으로 내려치기와 올려치기를 겨눈다면 당연히 내려치기가 유리하다. 그런데도 밀렸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다시 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다.”

셰릴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검집을 아래로 내렸다. 또 내려치기를 해보라는 뜻이었다.

“후우….”

라온이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고, 만화공을 휘돌렸다. 생사를 가르는 싸움을 벌일 때처럼 집중력을 극한으로 끌어 올린 채 땅을 박찼다.

화아아아!

제천검의 칼날 위로 피어난 새빨간 불꽃이 무거움과 어우러지며 막대한 압력을 일으켰다. 검날 위에만 어려 있던 무게들이 공간을 잠식한 채로 셰릴을 향해 쏟아졌다.

‘제대로 봐야 해.’

라온은 전력을 다한 중검을 내리치면서 셰릴의 검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치이이잉!

검집 위로 아지랑이처럼 퍼져 나오는 회색 오러가 자신의 것보다 훨씬 빠르게 공간을 장악하며 솟아올랐다.

‘검만이 아니었어!’

그녀의 검격에 실린 무게는 검날만이 아니었다. 검집 위로 퍼져 나오는 오러의 갈래에도 중검의 묘리가 깃들어 있었다.

콰아아아앙!

다시 한번 제천검과 검집이 맞부딪쳤고, 라온은 고무공처럼 튕겨 나가 무릎을 꿇었다.

“이, 이제 알았습니다.”

라온이 거친 숨을 뱉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무게를 담는 방식.”

“음?”

“전 지금까지 검날에만 무거움을 담았습니다. 물고기가 물살의 흐름을 따르듯 검날에 깃든 무거움으로 공간을 장악해나갔죠. 하지만 천검대주님의 검격은 달랐습니다.”

그녀의 검집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검날만이 아니라, 검날에서 퍼져나가는 오러의 갈래에도 무거움이 담겨서 더 많은 공간을, 더 빠르게 장악당했기에 제가 밀려난 겁니다.”

검에 담은 오러와 중검의 묘리가 같았음에도 밀려난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녀는 검만이 아니라, 검에서 퍼지는 오러에도 무거움을 담았다.

“정답이다.”

셰릴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오직 검날에만 무게를 실었어. 네 오러와 육체의 힘 덕분에 강한 위력을 보이지만 무거움이 먹어치우는 공간이 협소해.”

“맞습니다.”

“하지만 검만이 아니라, 퍼져나가는 오러에도 무게를 싣는다면 그 위력과 속도, 범위는 배가 되지. 그리고….”

그녀가 처음으로 검집을 위로 들어 올렸다. 검집 위로 회색 기운이 뭉치고 뭉쳐 완벽하게 유형화된 강기를 만들어냈다.

콰아아아아앙!

그저 가만히 있음에도 무지막지한 압력이 쏟아졌다. 전에 강의할 때 보여준 중검은 장난이라고 말하는 듯 만화공을 운용하고 있음에도 전신이 찌그러질 것 같았다.

쿠구구구!

자신만이 아니라, 이 공터 전체가 짓눌리고 있었다. 이 공간이 그녀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강기와 진정한 중검을 동시에 운용하면 이런 결과를 만들어내지. 이 안에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나와 같은 경지에 오른 무인뿐이다.”

“끄으….”

“검에 매몰되지 말고, 오러와 공간에도 검의 속성을 담는 연습을 해라. 힌트는 이전에 말했듯 심상이다.”

셰릴은 강기를 지워버린 뒤 검집을 다시 등에 찼다.

“그걸 이룰 수 있다면 네 검술은 한 차원 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야. 그리고 그게….”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검계현신에 닿을 수 있는 길 중 하나다.”

“검계현신….”

검계현신이라는 말에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한참 걸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끝날 줄은 몰랐어. 넌 가르치는 맛이 없는 녀석이다.”

셰릴이 피식 웃으며 등을 돌렸다. 미련 없다는 듯 야영지로 향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떠나가는 셰릴의 등에 고개를 숙였다.

‘생각과는 다르네.’

처음 셰릴을 보았을 때 소문대로 그저 깐깐하기만 한 검사인 줄 알았는데, 같이 다니니 여러 모습이 보인다. 생각보다 정과 배려가 많은 사람이었다.

“배웠으니, 연습 좀 해봐야겠어.”

-그 정도 허접한 기예는 연습하지 않아도 할 수 있어야지. 그냥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난 마왕이 아니라서 연습이 필요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네놈의 마인드는 이미 훌륭한 마왕이니라! 본왕도 배워야 할 점이 있어!

라스는 진심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칭찬인지 욕인지….”

라온은 한숨을 내쉬고, 제천검의 칼날 위로 중검의 구결을 담아냈다.

‘검만이 아니라 오러에도….’

검날에서 퍼져 나오는 아지랑이 같은 불꽃에 중검의 구결을 담아냈다. 하지만 불꽃은 무게가 담기기 전에 흩날려서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쉽지 않군.’

셰릴이 진짜 중검이라고 한 만큼 퍼지는 오러에 중검의 구결을 담아내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재밌겠어.’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분명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이걸 이뤘을 때 자신의 중검이 어떻게 변할지가 기대되어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검계현신.

아직은 너무도 머나먼 경지이기에 일부러 생각하지 않았지만 셰릴의 말 덕분에 머릿속에 그 이름이 떠올랐다.

“그걸 이룰 수도 있다는 말이지….”

은백색 칼날 위에 중검의 구결을 가득 얹어 내리쳤다.

콰아아아아아!

조금 전과 달리 우측의 오러에 무게가 실리며 오른쪽 바닥이 시꺼멓게 그을리며 터져나갔다.

“가주지.”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제천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곳이 어디라도.

*     *      *

라온이 수련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천막은 완성되었고, 식사 준비도 끝나서 침이 고이는 향기가 야영지 전체에 퍼져 있었다.

-향이 좋구나. 오늘 고기는 오리인 모양이다. 버터를 발라서 구운 오리는 무조건 맛있지.

냄새만으로 음식을 알아차린 라스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엔시아가 있을 마차로 향했다.

마차 앞에는 작은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고, 엔시아와 루난, 도리안, 크레인이 둥글게 앉아 있었다.

“저기 엔시아 님?”

도리안이 장작을 던져 넣고, 엔시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심미안이 굉장히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맞으시죠?”

“그 정도는 아니고, 다른 사람들보다 아주 조금 더 나은 정도에요.”

엔시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도 좀 봐주실 수 있나요? 제 얼굴은 어때요?”

도리안이 손가락을 들어 본인의 얼굴을 가리켰다.

“으음.”

엔시아는 눈매를 좁힌 채 도리안의 얼굴을 이쪽저쪽에서 살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우세요.”

“귀, 귀여운 거 말고 잘생긴 건….”

“착해 보이세요.”

그녀는 외모에 대해 칭찬할 게 없을 때 하는 말로 도리안을 다독였다.

“아니, 착하다 말고. 다른 거 있잖아요! 부단주님께 하는 거!”

“옷이 잘 어울리세요.”

그녀는 절대 잘생겼다는 말을 하지 않으며 생글생글 웃었다. 거짓말을 절대 못 하는 성격인 것 같았다.

“저도 봐주시죠.”

크레인이 왼쪽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엔시아의 앞에 섰다. 목소리도 까는 걸 보니까. 꼭 잘생겼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 같았다.

“어디 가서 얼굴로는 안 꿀리는….”

“멋지세요.”

“아니 잘생겼는지를 묻고 있는데….”

“분위기 있어 보여요.”

엔시아는 이번에도 크레인이 원하는 말을 하지 않은 채 헤헤 웃었다.

“그럼 라온 님의 얼굴은….”

“말해서 뭐해요! 오지게 잘생겼잖아요!”

엔시아는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구경하는 라온을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머리카락, 피부, 콧대 다 미쳤어….”

“아니, 나도 잘생겼다는 소리 좀 들었….”

“비교될 사람이 없다구요!”

그녀는 뭐 하러 물어보냐는 듯 오히려 화를 냈다.

“도리안.”

“응.”

크레인이 도리안을 부르고, 도리안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죽자.”

“응.”

두 사람은 눈을 감은 채 흐느끼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뭐가 중요하다고….”

라온은 두 사람을 보며 혀를 찼다.

“크흑!”

“너무해요!”

도리안과 크레인은 소매로 눈가를 훑어내며 숲으로 달려 들어갔다.

-네놈은 역시 마왕이 어울려.

*     *      *

여정은 순탄했다.

길은 잘 닦여 있었고, 몬스터나 도적단도 없었으며, 엔시아가 잘 버텨주었기에 예정보다 빨리 레트란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숲만 넘으면 바로 레트란이다. 휴식 없이 이동할 테니, 마음 단단히 먹도록!”

셰릴이 활엽수와 동물의 털처럼 울창한 수풀로 가득한 크른 숲을 가리켰다. 돌아가면 3일이 더 걸리기에 이 숲을 지나는 게 레트란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진입!”

그녀는 모두의 준비가 끝난 걸 확인한 뒤 선두에 서서 크른 숲으로 들어갔다.

“진입!”

라온과 검사들은 셰릴의 말을 복명복창하며 뒤를 따랐다. 기감을 열고 숲길을 나아갔지만, 딱히 느껴지는 건 없었다.

‘아직도 안 오는 건가?’

로베르트 놈들이 습격하기 가장 좋은 곳이 이 크른 숲이라서 기대했는데, 느껴지는 건 동물과 몬스터뿐이었다.

‘그놈의 성격이라면 무조건 와야 하는데.’

“부단주님.”

테머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예측하려고 할 때 도리안이 옆으로 다가왔다.

“레트란에서 몇 달째 전쟁 중이라는데,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계속 싸우는 건가요?”

녀석은 이제야 그 전쟁이 궁금한 건지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다른 검사들도 흥미가 있는지 이쪽으로 시선을 슬쩍 돌렸다.

“뭘 착각하는데, 전쟁은 커다란 이유로 일어나는 게 아니야.”

“예? 그럼요?”

“대부분 굉장히 사소하지. 레트란 역시 마찬가지야.”

라온이 도리안만이 아니라, 다른 검사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레트란에서 전쟁 중인 가문은 바신과 트리안이고, 그들이 싸우는 이유는….”

“이, 이유는요?”

“한 명의 아이 때문이다.”

“아이요?”

“아이?”

주디엘에게 듣고, 뎀벨 시에서 들었기 때문에 확실하다. 레트란에서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딱 하나.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소년을 양쪽에서 가지겠다고 싸움이 붙었다가 전쟁으로 번진 것이다.

“그, 그게 말이 돼요? 아이 하나 때문에 전쟁이라니….”

“처음에는 아이 하나였겠지만, 두 가문은 레트란를 양분하고 있잖아. 자존심 싸움에 불이 붙어서 전쟁까지 이어진 거다.”

“그럼 그 아이는 어떻게 됐죠?”

“이젠 딱히 관심도 없을걸. 자존심으로 싸우는 거지.”

이런 종류의 싸움은 대륙에서 굉장히 흔하게 일어나는 편이다. 전생에서도 작은 땅이나,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물건 하나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성자님이 고생이시겠네요.”

“그렇겠지….”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눈매를 좁혔다.

후우우웅!

활엽수들의 잎이 조금 어둑해지는 곳에 들어온 순간, 공기가 서늘해지며 아주 미세한 기척들이 잡혔다.

‘역시 왔군.’

너무 평온해서 포기했나 걱정했지만 아니었다. 테머스는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미리 와서 진법을 설치하고 암살자들을 대기시켜놓았다.

셰릴과 에컨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지 눈빛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 상황을 광풍단의 교육으로 이용하려는 것 같았다.

쿠구구구.

엔시아가 탄 마차가 커다란 구멍이 나 있는 떡갈나무를 지나가는 순간 숲 전체를 덮고 있던 기척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적이다!”

“전투 준비!”

셰릴과 에컨이 지시를 내리자마자, 천검대가 사위로 퍼지며 방어진을 펼쳤다.

“광풍단은 소검진을 펼치고 마차 뒤로!”

“알겠습니다!”

버렌이 상황을 파악하고 검사들을 데리고 마차 뒤로 이동한 뒤 검진을 펼쳤다.

“지시했던 대로 움직인다면 누구도 죽지 않는다!”

라온은 긴장한 광풍단원의 기세를 북돋아 주며 고개를 돌렸다.

찌이이잉!

진법 때문에 소용돌이에 휩싸인 듯 비틀리는 숲을 보며 여유롭게 웃었다.

“오래 기다렸지?”

너희가 날 기다렸듯, 나도 너희를 기다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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