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라온이 시리아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게 놈의 본모습인가?’
분노 혹은 건조함마저 연기였던 건지, 가면이 깨진 시리아의 얼굴은 기괴할 정도로 비틀려 있었다. 인간이 아니라, 흡사 야생에서 튀어나온 듯한 짐승을 보는 듯했다.
‘그것도 굶주린 짐승.’
번들거리는 보라색 눈동자에선 조금의 이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독할 정도의 흉폭함과 욕망만이 열화처럼 타올랐다.
‘덤벼들지도 모르겠군.’
라온이 제천검을 고쳐 잡았다. 시리아의 저런 모습은 처음 보기에 놈의 행동이 예측되지 않았다. 루난이나 자신을 공격할 수도 있으니, 대비를 해야 했다.
“흐음.”
셰릴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옆으로 다가온 채 눈매를 좁혔다.
“루난….”
시리아가 평소보다 훨씬 끈적한 말투로 루난을 불렀다.
“방금 뭐라고 했지?”
그는 허리를 뒤로 빼고 상체를 앞으로 내미는 이상한 자세로 루난을 내려보았다. 놈의 어깨 위로 음습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오, 오지 말라고 했어.”
루난은 시리아의 섬뜩한 눈동자를 마주하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오빠를 막을 거야. 옛날처럼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
그녀는 가슴 앞에 꼭 모은 손을 떨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이어갔다.
“하아아….”
시리아의 입에서 허연 김이 흘러나온다.
“네가 날 막아? 막는다라….”
“으윽!”
불길함으로 가득 찬 기운에 루난의 다리가 휘청였다.
“말 한번 잘했어.”
라온이 루난의 옆에 붙으며 어깨를 잡아주었다. 언제라도 반응할 수 있도록 제천검을 중단에 세웠다.
“루난. 아흐으, 나의 동생….”
시리아는 라온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루난만을 바라보며 입을 쩍 벌렸다.
“언제부터지? 언제부터 그런 눈을 뜨게 된 거니? 어떻게 그런 차가운 눈동자로 나를 보는 거냐!”
놈은 기괴한 웃음을 흘리며 쫙 편 손아귀를 뻗어왔다.
“꺼져.”
라온이 다가오는 시리아를 향해 광아검을 쳐냈다.
쩌어어엉!
시리아는 역수로 든 대검으로 검격을 차단했지만, 처음에 있던 곳까지 밀려났다.
“루난이. 나의 루난이 저런 눈빛이 되다니. 아아….”
“승자가 꺼지라잖냐.”
시리아가 다시 달려오려고 할 때 셰릴이 움직였다. 가볍게 땅을 구르며 나아가 오른 주먹을 내뻗었다.
콰아아아앙!
회색 섬광이 번쩍이는 순간 시리아는 방어조차 하지 못한 채 고무공처럼 튕겨 나가 바닥에 처박혔다. 준비도 없이 뻗어낸 주먹이라고는 믿기 힘든 위력이었다.
‘빨라. 그리고 강해.’
셰릴의 권격에는 빠름과 강함 그리고 정확함이 모두 어려 있었다. 저 짧은 순간에 그 모든 묘리를 조화시켜 주먹을 내지르다니, 괜히 그랜드 마스터가 아니었다.
“크흐….”
충격이 컸는지 시리아의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루난은 입술을 꾹 깨문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곳에 패자가 설 곳은 없다. 약속대로 사라져라.”
라온이 서늘한 눈빛을 발하며 시리아에게 검을 겨눴다.
“루난. 너와 난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
시리아가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루난을 굽어보았다.
“이 피로부터는 도망칠 수도, 벗어날 수도 없지.”
입에서 흘러나온 피로 입술을 적시며 히죽 웃었다.
“아아….”
루난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린다. 피를 극복하기 전으로 돌아간 듯 공포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 나는….”
“있다.”
라온이 루난의 옆에 서며 눈매를 좁혔다.
“도망칠 수도, 벗어날 수도 혹은 널 때려눕힐 수도 있지.”
“라온 지그하르트….”
그 말에 시리아의 시선이 처음으로 라온을 향했다.
“잘 봐. 저놈도 피를 흘리는 인간일 뿐이야. 두려워할 필요 없어. 훗날 네 검으로 꺾을 수 있어.”
“그게 정말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거냐?”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다.”
“너….”
진중한 의지가 담긴 라온의 목소리에 시리아가 턱을 떨었다.
“라온.”
루난은 떨림이 멈춘 손으로 주먹을 쥐고서 시리아가 아닌 라온을 바라보았다.
“루난! 어딜 보는 거냐! 나를 봐라! 그놈이 아니라, 나를….”
“꺼지라고.”
시리아가 루난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달려올 때 라온이 만화공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앙!
화염으로 타오르는 제천검의 칼날이 대검을 들고 들어오는 시리아를 또 한 번 쳐냈다.
“크으으으….”
대검을 바닥에 박아 넣은 채 밀려난 시리아가 신음을 흘렸다.
“끝까지 방해를….”
“시리아 슬리온.”
시리아가 살기를 뿜어내며 다가오려 할 때 우측에서 화산이 폭발한 듯한 무시무시한 기파가 치솟았다.
“거기서 한 발이라도 다가오면 베겠다.”
셰릴이 등에 멘 검에 손을 얹으며 시리아의 앞에 섰다.
“네가 했던 말을 지켜라.”
그 말이 진심인지, 셰릴의 눈동자에서 섬뜩한 냉기가 흘러내렸다.
“패했으면 사라져. 이곳에 네 자리는 없으니까.”
라온도 만화공을 극성으로 운용하며 시리아를 노려보았다.
“좋아. 좋다고.”
시리아는 라온과 루난을 보며 히죽 웃었다. 처음으로 눈까지 웃고 있었지만, 그건 사람이 아니라, 마귀의 미소 같았다.
“크흐흐흐흐….”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키득대다가 허리를 폈다.
“이제 그만….”
“패배했으니, 떠나야 하는 건 맞군.”
라온이 억지로 쫓아내려 할 때 시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놈은 이 짧은 순간에 다시 두꺼운 가면을 착용하고, 거짓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약속대로 떠나지. 루난. 네 여정에 무운이 깃들길 바라마.”
“네 무운 따위는 필요 없어.”
라온이 손을 내저었다.
“훗.”
시리아는 피식 웃고서 뒤를 돌았다. 요난 가문의 무인들에게도 인사를 하고서 미련 없다는 듯 떠났다.
“아으….”
루난은 그제야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뱉어냈다.
“잘 버텼어.”
라온은 미소를 지으며 루난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응.”
루난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저게 창검의 본 모습인가?”
셰릴은 시리아의 등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많은 걸 숨기고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심각한데? 거의 미치광이잖아.”
그녀는 호흡을 고르는 루난을 부축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게요.”
“어쨌든 수고했다. 저 아이가 용기를 낸 것도 네 덕분이겠지.”
셰릴은 잘했다는 듯 등을 치며 웃었다. 거의 처음으로 보는 미소였는데, 산뜻하다기보다는 인자한 느낌이었다.
-저건 그냥 미치광이가 아니니라.
라스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변태끼가 넘치는 또라이이니라. 본왕에게 몸만 있었다면 모조리 얼린 뒤 사지를 조각냈을 것이야!
녀석은 아깝다는 듯 말아쥔 주먹을 흔들었다.
-마계에도 저런 놈은 흔치 않은데, 인간 중에 저리 미친놈이 있었다니….
‘저런 게 또 있다고?’
-마왕 중에도 있지. 으윽….
라스는 생각만 해도 싫다는 듯 어깨를 떨었다.
‘마왕이라….’
-쓸데없는 생각 말고, 아이스크림 소녀나 봐라.
라온이 다시 물어보려 할 때 라스가 어깨에 매달렸다.
‘응?’
-아이스크림 소녀가 힘들어하지 않느냐. 빨리 위로해주어야지.
‘스스로 일어났는데, 위로가 아니라 칭찬을 해주는 게 맞지 않나?’
-아니다. 지금은 힘들 때니, 위로가. 그것도 아주 맛난 위로가 필요 하느니라.
‘…맛난?’
-지금 당장 구슬 아이스크림 매장에 가서 소녀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거라. 그것이 최고의 위로이니라!
라스는 빨리하라는 듯 손을 마구 흔들었다.
‘위로가 아니라, 네가 먹고 싶은 거겠지.’
라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조금. 아주 조금은 있지만, 본왕은 저 아이를 생각하는 것이니라.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니, 우울함이 가실 것이다.
‘음….’
그러고 보니 헬렌에게 단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말을 들었던 적 있었다.
“가자.”
라온이 루난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어딜?”
루난이 다시 맹해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놈 때문에 계획을 취소할 필요는 없잖아.”
“아….”
“천검대주님도 함께 가시죠. 제가 쏘겠습니다.”
그녀를 일으켜 세운 뒤에 셰릴을 보았다.
“나도?”
* * *
더운 지역이기 때문인지 뎀벨 시의 구슬 아이스크림 매장은 카멜룬에 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유리창 너머에 수십 가지의 구슬 아이스크림이 가득 차 있었고, 아이스크림으로 만든 디저트들도 줄줄이 진열되어 있었다.
“많아. 커….”
루난은 유리 너머의 아이스크림을 살피며 말똥한 눈동자를 굴렸다.
“으음, 다 괜찮아 보이는데.”
셰릴 역시 유리창에 바짝 붙어서 아이스크림으로 만든 디저트들을 살폈다. 식사 이후 작은 초콜릿이라도 꼭 챙겨 먹은 걸 보면 이런 디저트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크흑!
라스는 루난의 등을 보며 코를 훌쩍였다.
-기특해! 너무 기특하느니라!
‘뭐?’
-아이스크림 소녀가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왔지 않느냐! 기특해서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다!
녀석은 푸른 눈망울을 글썽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본왕이 그 변태 새끼를 씹어먹으려고 했는데, 네 말대로 아이스크림 소녀가 직접 이겨내는 게 옳았어. 잘된 일이다.
라스는 대견하다며 따스한 눈빛으로 루난을 지켜보았다.
‘음….’
라온이 입맛을 다셨다.
얘 진짜 마왕 맞나?
가끔. 아니, 자주 보이는 호구끼를 제외하더라도 이젠 마왕이 아니라, 오지랖 넓은 아저씨, 아줌마 같은 느낌이다.
-아이스크림 소녀가 스스로 선 걸 보니, 안 먹어도 배가 부르구나.
‘그럼 네 아이스크림은 없는 걸로.’
-닥치거라!
라스가 웃기지 말라는 듯 손을 펄럭였다.
-본왕은 배가 고프니라! 당장 가서 이곳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모조리 주문하거라!
‘역시 네가 먹고 싶어서 오자고 했네.’
-그게 아니라 본왕은….
라스가 우기기에 가까운 반박을 할 때 메시지가 떠올랐다.
[압도적인 차이가 나는 적을 상대로 비등한 승부를 이뤄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6포인트 상승합니다.]
[중검의 성취가 크게 상승합니다.]
수준 차이가 크게 나는 시리아와 동수를 이룬 덕분에 능력치와 중검의 성취가 올랐다는 메시지였다.
‘6포인트나?’
비겼는데도 6포인트나 올려주다니, 시리아가 강하긴 했던 모양이다. 아직도 기분이 좀 더러웠는데, 이 메시지를 본 순간 짜증이 확 사라졌다.
-어억….
반면 아이스크림을 먹겠다며 날뛰던 라스는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이 멍청한 시스템 같으니! 그 변태 놈은 전력을 다하지 않았는데, 왜 능력치를 올려주는 것이냐! 이건 불공정한 처사이니라!
라스는 봐준 대결에서. 그것도 비겼는데 왜 능력치를 올려주냐며 이를 갈았다.
‘내가 불리한 싸움을 이겨냈으니까.’
라온이 피식 웃었다. 시리아가 힘을 다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쪽이 한참 불리한 싸움이었다.
전략과 순간의 판단으로 이뤄낸 승리였기에 저런 보상이 쏟아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끄으응! 입맛이 확 가셨느니라!
라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라온은 뭐 먹을 거야?”
아이스크림을 열 개나 고르고도 고민하던 루난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입맛 없다고 했으니까. 난 안 먹는다.’
-어? 어어?
라온은 라스에게 손을 젓고 루난을 바라보았다.
“아, 난 입맛이 사라져….”
-민트 초코!
입맛이 없다던 라스가 빽 소리쳤다.
-민트 초코라고 말해!
‘너 입맛 없다고….’
-민트초오오오코!
* * *
뎀벨 시 북쪽 성벽 위.
시리아 슬리온이 아이스크림 매장을 나오는 루난과 라온을 보며 열기가 차오른 눈동자를 굴렸다.
“시리아 님.”
그의 뒤에서 백색 로브로 전신을 가린 남자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다른 분들은 이미 그 근처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꼭 나까지 가야 하나?”
“그에게서 얻어야 할 물건도 있으니, 이번에는 확실하게 끝을 내야 합니다.”
로브의 남자는 시리아의 시선을 받는 루난과 라온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가만히 놔둬도 백혈교에 죽을 놈이지만, 말씀만 하시면 라온 지그하르트를 제거할 계획을 짜보겠습니다.”
“아니.”
시리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놔둬. 오늘 굉장히 좋은 걸 봤으니까.”
“조, 좋은 거라고 하신다면….”
로브 사내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시리아의 목소리에 깃든 광기가 평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넘쳤다.
“루난. 그 아이가 그런 눈빛을 보일 줄은 몰랐어. 아름답더군. 그 투명한 보라색 눈동자에 내가 비치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지.”
시리아가 오른손으로 왼팔을 피나도록 쥐어뜯으며 히죽였다.
“내게 그런 표정을. 그런 눈빛을 보이다니. 아아, 좋더구나.”
“시, 시리아 님?”
로브 사내가 마른침을 삼키며 턱을 떨었다.
“난 말이야. 사과를 유리병 안에서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어. 해충도, 비도 맞지 않게 아주 조심스럽게 성장시켜야 한다고 여겼지.”
시리아가 입맛을 다시며 그 기괴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아니었어. 병 밖으로 나가서 진짜 햇볕을 받고, 해충과 싸우다 보니, 아주 생기가 넘쳐. 보고만 있어도 심장이 떨릴 정도야. 그러니까.”
그가 뒤를 돌아서 로브 사내의 입을 막았다.
“저 해충을 건드릴 생각은 절대 하지 마. 알겠나?”
“네. 네!”
로브 사내는 생각이라는 걸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시리아를 본 지 10년이 넘어가지만, 이 정도 광기를 뿌리는 건 처음이었다.
“루난이 빨리 클수록 내게는 이득이야. 결국 저 아이는 내 손 안에 들어오게 될 테니까.”
시리아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미세한 웃음을 짓는 루난을 보며 귀에 닿을 정도로 입을 찢었다.
고오오오.
루난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을 때 시리아에게서 퍼져 나오던 광기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후우….”
그가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뒤를 돌았다, 조금 전까지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괴인은 사라지고, 세간의 칭송을 받는 창검 시리아 슬리온이 있었다.
“가자.”
시리아가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옷을 툭툭 털었다.
“그 늙은이들 비위를 맞춰주려면 길이라도 막아야겠지.”
* * *
다음날.
라온은 요난 가문 정문에 세워진 사두마차를 올려다보았다.
“굉장한데.”
외관은 직선과 곡선의 조화로 우아한 아름다움이 깃들었고, 내부에는 흔들림을 줄이는 충격 완화 장치가 있으며, 튼튼함은 강철보다 더했다.
가주인 미셀 요난이 직접 만들었다고 했는데, 외형과 내부를 보니 엔시아를 위해서 제작한 세상에 한 대뿐인 마차 같았다.
딸을 향한 사랑이 느껴지는 것 같아 더 아름다워 보였다.
“이야! 마차 한번 끝내주네요. 역시 요난 가문이야.”
도리안이 마차를 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보는 사람이 없다면 주머니에 넣을 기세였다.
“라온. 이거 우리가 정말 받아도 되는 거냐?”
버렌이 목에 걸고 있는 둥근 목걸이를 가리켰다.
“이 정도 급의 피독 아티팩트라면 돈이 있어도 사기 힘든 물건이잖아.”
“음….”
“그러게요. 살짝 부담스러운데.”
마르타와 크레인도 피독 아티팩트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잘 쓰고 돌아와서 반납하면 되니까. 부담스러워하지 마.”
라온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어차피 이 물건들은 반납해야 한다. 진짜 보상은 이 임무가 끝난 뒤에 얻을 것들이었다.
“출발 준비를 해라!”
안쪽 건물에서 셰릴과 미셀이 엔시아를 부축하며 내려오고 있었다. 현실을 완전히 받아들인 듯 엔시아의 표정은 조금이나마 밝아져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광풍단과 천검대가 우렁찬 대답을 하며 마차를 확인하고, 말에 올라탔다.
“괜찮으십니까?”
라온은 엔시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몸 상태를 살폈다.
“네. 이제 괜찮아요.”
그녀는 중의적인 의미의 대답을 하며 옅게 웃었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바로 말씀해주십시오.”
“감사해요. 오늘도 미치도록 잘생기셨네요.”
엔시아는 마차에 오르다 말고 라온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만 좀 해! 이것아!”
“아, 엄마! 라온 님 얼굴 조금만 더 보고….”
“나중에 봐!”
미셀이 인상을 찡그리면서 엔시아를 직접 마차에 밀어 넣었다.
라온은 티격태격하는 모녀를 보며 옅게 웃었다. 다행히 두 사람은 가족 같은 사람의 배신을 이겨낸 것 같았다.
“이제 시작이군.”
무사를 기원하는 듯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미셀에게 받은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준비는 모두 끝났어.’
얼마든지 와라. 로베르트의 개들아.
* * *
“오늘은 여기서 머문다.”
셰릴이 말에서 내리며 숲 외곽의 공터를 가리켰다. 그리 넓지는 않지만, 하룻밤 묵어가기엔 괜찮은 곳이었다.
“야영 준비를 해라!”
“예!”
그녀의 지시에 천검대 검사들이 자연스럽게 이곳저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으음?”
마차에서 내린 엔시아는 바쁘게 움직이는 천검대와 느긋하게 수련 준비를 하는 광풍단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뭔가 신기하네요. 천검대 분들이 선배인 줄 알았는데.”
“선배님들 맞아요. 한참 선배시죠.”
도리안이 엔시아에게 다가가며 웃었다.
“예? 그런데 왜 천검대 분들만 일하시는 거죠?”
“아, 이게 굉장히 재밌는 일이 있었는데. 저희 부단주님이….”
그는 엔시아에게 이전에 일어났던 팔씨름 사건에 대해 말해주었다.
“와, 잘생겼는데, 머리도 좋고, 잘생겼는데, 힘도 좋은 거예요?”
엔시아는 손을 꼭 모은 채 감동한 눈빛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긴요. 오지게 잘생기셨는데.”
신기하게도 그녀는 잘생겼다는 말을 할 때만 비속어가 튀어나왔다. 여러모로 신기한 사람이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네. 집에 있을 때보다 훨씬 좋아요.”
엔시아가 열기가 가라앉은 팔뚝을 보여주며 방긋 웃었다.
“다행이네요. 전 잠시 주변을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라온이 뒤를 돌아서 광풍단을 불렀다.
“다들 헛짓하지 말고. 경계 똑바로 서고 있어.”
“걱정마라.”
“응.”
“나 못 믿어?”
“알겠습니다아!”
개성 넘치는 검사들의 대답을 듣고서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30분 정도 주변을 돌아보며 위험이 될 요소를 찾았지만, 뎀벨 시와 가까운 지역인지라 도적이나,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검 좀 휘두르고 갈까.’
아영지에 셰릴과 에컨이 있으니, 이곳에서 몸을 풀고 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겹지도 않느냐.
라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지겨워? 난 재밌는데?’
발전하고, 나아간다는 건 전생에서 못해본 경험이기에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라온은 투덜대는 라스를 밀어내고, 제천검을 뽑았다.
‘중검부터 시작해볼까.’
시리아를 밀어냈던 중검의 손맛은 아직도 생생하다. 다시 그 감각을 느껴보기 위해서 검을 위로 들어 올렸다.
‘무겁게. 무엇보다도 무겁게.’
제천검의 칼날에 만화공의 기운을 담아 내리쳤다.
쿠구구구구!
얇은 칼날에서 퍼져나오는 강대한 압력에 닿지도 않은 대지가 폭삭 무너져내렸다.
“역시 부족해.”
중검의 성취가 올랐기 때문인지, 실전이 아니기 때문인지 지금의 검격이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그 부족함이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저벅.
다시 검을 들어서 중검을 내리치려 할 때 낮은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소리였기에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수련하는 건가.”
셰릴이 무심한 눈빛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예.”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천검을 내렸다.
“시리아와 싸울 때의 감을 찾고 싶어서요.”
“그건 나름 괜찮았지.”
셰릴이 담담한 어조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중급이라고 하기엔 모자라.”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정확히 뭐가 아쉬운지 모르겠다는 건가?”
“맞습니다.”
“그럼 네게 무엇이 부족한지 알려주지.”
가라앉아있던 셰릴의 눈동자에 기광이 어렸다.
“검을 들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