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8화
라온이 시리아 슬리온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저 정신병은 여전한 모양이네.’
전과 같이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움직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화사한 미소라고 하겠지만, 그의 진면목을 아는 자신에게는 기괴한 표정으로만 보였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군.
‘그래.’
기감을 풀지 않았기 때문에 문이 열리고 나서야 시리아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물론 저놈이 기척을 완전히 감췄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으으….”
뒤에서 루난의 신음이 들렸다. 피를 무서워하는 건 극복했지만, 그 트라우마를 심은 시리아를 마주하는 건 아직 버거워 보였다.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시리아의 시선에서 루난을 감추기 위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임무로 뎀벨 시를 지나는 중에 지그하르트 검사들이 요난 가문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거든. 검사 중에 은발의 미소녀가 있다고 하기에 혹시나 하고 와봤지.”
시리아가 빙긋 웃으며 라온의 어깨 너머에 있는 루난을 슬쩍 살폈다.
“혹시나?”
라온이 턱을 모로 틀며 피식 웃었다.
“확신하고 있던 거 같은데요?”
시리아는 왼손에 구슬 아이스크림 상자를 들고 있었다. 정말 혹시나 였다면 저걸 가지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넌 사람 말을 안 믿는구나?”
“‘사람’ 말은 믿습니다.”
넌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잖아.
시리아는 대륙 전체를 돌며 임무와 검술 수행을 하는 걸로 유명하니, 이곳에 온 게 정말 우연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지금 그의 표정과 분위기를 보면 루난의 행적에 관한 정보를 듣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루난. 오랜만에 오빠를 봤는데, 인사도 안 해줄 거니?”
시리아가 가지고 있던 아이스크림 상자를 들어 올렸다.
“네가 좋아하는 구슬 아이스크림도 사 왔어.”
“으윽….”
루난은 아이스크림이라는 말을 듣고도 고개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그나마 지금 이 상태가 나아진 거다. 이전에는 무서워도 무서워하는 티를 내지 못했으니까.
“흐음, 어디 아프니? 한 번 봐야겠는데.”
“멈추십시오. 여긴 요난 가문의 땅입니다.”
시리아가 들어오려고 할 때 요난 가문의 무인들이 그 앞을 막았다.
“신분을 밝히시고, 방문 목적을….”
“아, 제 이름은 시리아 슬리온. 저 아이의 오빠입니다. 동생의 상태가 좀 이상해서, 잠시만 들어가도 될까요?”
시리아가 라온의 뒤편에 있는 루난을 가리켰다.
“시, 시리아 슬리온?”
“대륙십이성의 창검!”
문을 지키던 요난 가문의 무인들은 시리아의 정체를 알고서 황급히 길을 열었다. 가뜩이나 유명하고 인상이 좋은데, 동생이 안에 있다고 하니, 프리패스나 다름없었다.
“오빠가 네 상태를 좀 봐줄….”
“물러나세요.”
라온이 오른손을 뻗어서 시리아의 접근을 막았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시리아는 미소를 유지한 채 눈썹을 내렸다. 그에게서 퍼져 나오던 부드러운 기운이 매섭게 벼려진다. 예리한 바늘이 피부를 찌르는 듯한 기파였다.
“장난도 적당히 해야 받아주는 거야. 라온 지그하르트.”
그가 입매를 말아 올리며 한 발 더 다가왔다.
“네가 뭔데 내 길을 막는 거지?”
“루난이 원하지 않으니까요.”
“루난은 아직 한마디도 안 했는데?”
“꼭 말을 해야 아는 건 아니죠.”
“착각이 심하군. 난 루난의 친오빠고, 넌 타인이다. 넌 내 앞을 막을 자격이 없어.”
시리아가 물러나라는 듯 손짓했다. 막대한 오러의 파동이 일어나 몸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하군.’
젊은 무인 중 최강이라는 대륙십이성의 칭호를 괜히 달고 있는 게 아니었다. 7사도, 가론과는 격이 다른 기파가 몸을 짓눌러왔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자격?”
라온은 시리아의 기세를 이겨내며 허리를 폈다. 큰 키. 이젠 시리아에게도 밀리지 않는 모습으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자격은 충분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전 루난의 직속 상사고, 지금은 임무 중입니다. 아무리 혈육이라고 해도 제 허락 없이는 루난을 볼 수 없습니다.”
“으음….”
광풍단 부단주와 조장의 직책을 말하자 시리아의 미소가 뚝 끊겼다. 이건 생각도 못 했다는 표정이었다.
“할 말 없는 거 같은데, 돌아가시죠.”
라온은 시리아가 했던 것과 똑같이 손을 저었다. 역으로 퍼진 기파가 시리아를 전신을 밀어냈다. 그의 옷과 머리가 미친 듯이 펄럭였다.
“라온 지그하르트의 검보다 입을 조심하라더니, 그 말이 정말이었군.”
시리아가 입매를 비틀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로 성장하다니, 놀라울 정도야.”
그의 눈동자가 어둠을 훑어내린 것처럼 검게 물들었다. 길게 늘어지는 동공에서 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오싹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근데 그만큼 더 건방져졌네. 전보다 훨씬 심해졌어.”
건방져졌다는 말과 달리 시리아의 목소리에는 분노도, 짜증도 담기지 않았다. 아무 감정도 없는 건조한 음성에 심장이 우그러드는 것 같았다.
“음….”
라온이 시리아와 뒤편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요난 가문의 무인들을 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이놈도 더 강해졌군.’
이 지독할 정도로 섬뜩한 기운에 노출된 건 오직 자신뿐이다. 시리아 슬리온도 창검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전보다 훨씬 더 강해져서 돌아왔다.
“네 말이 맞아. 임무라면 어쩔 수 없지. 다만….”
시리아가 평상복을 입은 루난을 가리켰다.
“지금은 딱히 임무를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제복을 입지 않았다고 임무 중이라는 게 바뀌지는 않습니다.”
“무슨 임무지?”
“그걸 말할 이유는 없죠.”
시리아가 퍼뜨리는 기세가 점차 거대해졌지만, 라온은 물러서지 않았다.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며 두 발로 대지를 내리눌렀다.
“내가 루난을 정말 오랜만에 보거든? 동생이 건강한지, 다친 곳은 없는지 얼굴을 꼭 봐야겠는데?”
“말했듯이 안 됩니다.”
“오빠가 동생을 걱정해서 보고 싶다는데, 이렇게까지 막는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무슨 문제가 있는 모양인데?”
“걱정이라….’
라온이 차게 웃었다. 동생을 보고 싶다는 시리아의 눈동자가 길게 늘어진다. 저 안에 담긴 건 걱정이 아니라 욕망. 자신만의 물건을 바라보는 듯한 탐욕스러운 눈빛에 소름이 돋았다.
“네가 아무리 상사라고 해도 난 루난의 오빠로서 그 아이의 안전을 확인해봐야겠다.”
시리아는 말로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우기기로 마음먹은 듯 오러를 끌어 올렸다.
“본색을 드러내는군.”
라온이 제천검의 검병에 손을 올렸다. 언제라도 출수할 수 있도록 불의 고리를 휘돌리고, 만화공을 운용했다.
쿠구구구!
시리온도 물러설 생각이 없는지 등에 멘 대검의 손잡이를 매만지며 턱을 들었다. 빛이 사라진 눈동자. 이전에 보았던 감정이 마모된 괴물의 모습이었다.
-지금의 넌 못 이긴다.
라스가 팔찌 위로 나오며 인상을 찌푸렸다.
-본왕에게 몸을 넘겨라. 본왕의 시녀를 건드리는 저 변태 놈을 통째로 얼려주겠노라.
녀석은 아끼는 루난이 떠는 게 안쓰러웠는지 빨리 몸을 내놓으라고 소매를 흔들었다.
‘집중하게 조용히 해.’
라온이 라스를 무시하고 호흡을 골랐다.
‘지는 거 누가 모르나.’
시리온은 이전에 만났을 때부터 이미 안정된 마스터였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최소 한 단계 위로 올라갔을 테니, 이기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 물러나라고!
‘지는 걸 알아도 물러날 수 없을 때가 있는 거야.’
뒤에 루난이 있는 이상 비켜선 안 된다. 아직도 트라우마에 떠는 녀석에게 저자를 극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어야 했다.
“이 상황에서도 안 비킨다? 역시 네가 내 동생에게 무슨 짓을 한 모양이군.”
시리아는 이 와중에도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쓴다. 미쳐도 정말 단단히 미친놈이었다.
“동생이 싫다고 하는데도 이렇게 접근하려는 걸 보면 당신이야말로 무슨 일을 저질렀나 보네. 뭔가로 협박을 했다던가? 가령 피?”
“라온 지그하르트….”
라온이 역으로 공격을 하자, 시리아의 표정이 한층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살의라는 감정 하나만을 담은 눈으로 검병을 꽉 쥐었다.
쿠구구구구!
라온과 시리아가 검을 뽑으려고 할 때 그보다 더 압도적인 기파가 옆에서 폭발하듯 치솟았다.
“거기까지.”
셰릴이 북풍을 담은 듯한 서늘한 눈빛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힘 자랑이지?”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린 채 라온과 시리아를 노려보았다.
“천검대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리아가 순식간에 기파를 가라앉히고 미소를 지었다.
“너무 조용해서 계신지 몰랐네요.”
“아닐 텐데?”
셰릴은 시리아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무슨 일이지? 무슨 짓들을 했기에 남의 집에서 쌈박질을 하려고 한 건데?”
“별일은 아닙니다. 동생을 좀 보려고 했는데, 광풍 부단주가 비켜주지 않더군요.”
“임무 중인지라 면회를 거절했을 뿐입니다.”
라온은 셰릴에게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흐음, 둘 다 말이 되긴 하네.”
셰릴이 라온과 시리아를 번갈아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는 당연히 시리아를 돌려보내야 하건만 눈치가 없었다.
“서로 물러날 생각이 없다면 검투를 하면 되겠군.”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렸다.
“검투?”
라온과 시리아 둘 다 당황하여 눈을 부릅떴다.
“남의 집이니까. 딱 일검에 결정 나는 소검투로 하자고.”
“일검이라면….”
“한 번의 검격으로 승패를 가리는 거지.”
셰릴이 옅게 웃으며 검집을 툭 쳤다.
“네가 이긴다면 루난과 대화할 시간을 주고, 라온이 이긴다면 네가 물러나는 거야. 어때?”
“그거 좋군요.”
“대신 경지의 차이가 있으니, 강기는 금지.”
“받아들이겠습니다.”
시리아는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검대주님 전….”
[해라.]
무서워하는 루난을 걸고 내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 하려 할 때 셰릴의 오러 메시지가 들려왔다.
[시리아는 대륙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재능을 가진 검사다. 일검승부라고 해도 네 수련에 큰 도움이 될 거다. 그간 내 강의를 듣고, 네가 밤새 수련한 검술을 발휘해봐라.]
그녀의 말에 라온이 살짝 입을 벌렸다.
‘이 와중에 내 생각을 한 건가?’
당황하여 입을 살짝 벌릴 때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루난은 걱정하지 마. 네가 지더라도 넘겨줄 일 없으니까.]
셰릴은 루난을 쓱 보고 눈빛을 반짝였다.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었다.
“하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루난.”
“으응….”
루난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잘 보고 있어.”
그 말을 하고서 앞으로 나왔다.
-똥폼 잡기는….
‘시끄러워.’
이렇게 말해놓았으니, 절대 져서는 안 된다. 루난에게 시리아가 절대 깨지 못할 벽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어야 한다.
“일검승부라, 재미있군.”
시리아가 미소를 지으며 등에 멘 대검을 뽑았다. 검게 물든 칼날 위로 숨이 막힐 듯한 패기가 뿜어졌다.
“후우….”
라온은 호흡을 고르며 제천검을 들었다. 대검과 반대되는 하얀 검신 위로 정심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준비하도록.”
“네.”
“예.”
셰릴의 말에 하체를 낮추고 검을 뒤로 젖혔다. 염룡결의 자세를 취하자, 시리아의 눈동자에 작은 이채가 돌았다.
‘역시 알고 있군.’
시리아의 성격이라면 루난을 조사하며 자신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을 테니, 가론을 쓰러뜨린 염룡결을 파악하고 있는 건 당연했다.
스으윽.
시리아가 발목을 미세하게 돌리며 대검을 조금 더 옆으로 빼냈다.
‘쾌검.’
대검의 위력에 빠름을 담아 염룡결이 제힘을 받기 전에 쳐내려는 게 분명했다.
“시작.”
셰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리아의 대검이 짓쳐 들어온다. 시꺼먼 칼날이 공간을 파고들어 오며 어마어마한 기운을 폭발시켰다.
‘예상대로야.’
생각했던 대로 시리아는 염룡결이 제 위력을 뿜어내기 전에 힘과 속도로 끊어버리려는 게 분명했다.
다만 단순한 휘두름에도 검술 묘리가 가득 담긴 듯 검격에 현기가 흘러넘쳤다. 어설픈 검격을 내쳤다가는 제천검이 부러지고,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될 거다.
‘파악된 무기를 쓸 필요는 없지.’
라온은 뻗어나가는 제천검에 모든 기운을 쏟아부었다. 강렬한 불꽃이 검날을 휘감았지만, 그 형태는 매서운 용이 아니라, 묵직한 산이었다.
‘중검.’
가론의 검에서 힌트를 얻고, 셰릴의 강의를 통해 이해했던 공간을 집어삼키는 중검이 펼쳐졌다.
쿠구구구!
스스로 엮어낸 구결들이 제천검에 담기며 두터운 선이 피어난다.
칼날 위에 어린 명멸하는 붉은 빛이 묵직한 파도가 되어 대기를 쓸어내렸다.
우우우웅!
공간을 장악하며 나아가는 라온만의 무거운 칼날이 시리아의 대검과 맞부딪쳤다.
콰아아아아앙!
대지가 쪼개지는 듯한 굉음이 터지며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찌이이이잉!
시리아의 대검은 그 충격파에서도 밀려나지 않고, 막대한 힘을 뿜어냈지만, 오러를 불태우며 나아가는 제천검에 막혀 비명 같은 검명을 울렸다.
“이, 이게 무슨….”
시리아의 어둑한 눈동자에 경악이 비쳤다. 본인의 검이 중간에 막힐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반응이었다.
“후우우….”
라온은 제천검의 칼날에 담은 무거움을 유지한 채 눈매를 좁혔다.
‘이게 정답이었군.’
염룡결의 정체를 아는 시리아에게 새로운 중검을 펼쳐낸 건 신의 한수였다. 내기에서 지지 않은 것도 큰 성과지만, 이 한 번의 부딪침으로 중검에 대한 깨달음이 이전과 비할 수 없이 올랐다.
‘으음….’
셰릴은 중간에서 경합하는 대검과 제천검을 보며 들리지 않을 신음을 흘렸다.
‘무승부라고?’
라온이 어느 정도 활약을 해주면 나이와 경험을 이야기해서 시리아를 물러서게 할 생각이었는데, 아예 무승부를 이뤄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무리 강기를 쓰지 않았다고 해도 대륙십이성인데….’
시리아가 힘을 많이 뺐다고 해도 일검 대결에서 동수를 이루다니, 어이가 없어서 표정 유지가 되지 않았다.
끼기기기긱!
셰릴은 두 검이 맞물리며 흘려내는 검명에 정신을 차리고 손가락을 튕겼다.
“거기까지.”
그녀는 오러를 쏘아내 두 사람을 떨어뜨렸다.
“중간에 막혔으니, 무승부겠군.”
“아, 아닙니다! 이건….”
“아니긴 뭘 아니야. 대결은 일격의 승부. 막힌 이상 무승부다.”
“크윽….”
시리아는 처음으로 짜증이 가득 돋아난 표정이 되어 입술을 깨물었다.
“이긴 사람이 없지만, 라온의 경험과 실력이 달리는 건 명확하지. 이건 라온의 판정승으로 하겠다.”
셰릴은 미리 준비한 듯한 말을 읊으며 손을 저었다.
“…….”
시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섬뜩한 눈동자로 라온을 노려보았다. 명확한 감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시리아. 물러나라. 네 패배다.”
“천검대주….”
“불만이 있다면 내가 상대해주지.”
셰릴은 팔짱을 낀 채로 시리아 앞을 막았다. 작은 키였지만, 그녀가 뿜어낸 기파는 시리아를 압도하며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알겠습니다. ‘지금은’ 당신을 이길 수 없으니, 어쩔 수 없군요. 라온. 내가 졌다. 대단한 검이었어.”
시리아는 역시 보통 놈이 아니다. 이 상황에서 냉정을 되찾고 웃음을 지었다.
“루난. 오늘은 몸이 별로 안 좋은 것 같으니까. 나중에 오마. 이건 동료들과 먹으렴.”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내려놓았던 아이스크림 상자를 내밀었다. 끝까지 착한 오빠의 모습을 유지하다니, 대단하다면 대단했다.
“그건 필요 없….”
“내가 말할게.”
라온이 거절하려 할 때 루난이 앞으로 나왔다.
“루난?”
* * *
루난은 라온의 뒤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다.
직접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모두를 죽인다는 시리아의 목소리가 떠올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일임에도 라온에게만 맡겨둔 채 귀를 막고, 시리아가 빨리 사라지기만을 바랐다.
모든 소리가 알 수 없는 이명으로 바뀌어 들려올 때 라온이 뒤를 돌며 입을 뗐다.
“잘 보고 있어.”
그 말은 귀를 막고 있었음에도 생생히 들려왔다.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쿠구구구!
하늘처럼 막대한 기운이 폭발하는 시리아의 대검. 세상 모든 것을 쪼개버릴 듯한 검격에 비명을 질렀다.
“피해!”
하지만 라온은 물러서지 않고, 천천히 검을 내질렀다. 검날에 어린 불꽃이 하나의 벽처럼 뻗어나가며 공간을 잠식해나갔다.
쩌어어어엉!
바다조차 갈라버릴 것 같았던 시리아의 대검은 제천검의 얇은 칼날을 넘지 못하고, 중간에 막힌 채 기이한 신음을 흘렸다.
“아….”
루난이 탄성을 흘리며 입술을 떨었다.
‘막았어….’
자신의 머릿속에서 시리아는 누구도 막지 못하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의 검이 라온에게 막히자, 머리를 가득 채웠던 시꺼먼 먹구름들이 붉은 빗물과 함께 흘러내렸다.
‘못 막는 게 아니었어.’
시리아는 무적이 아니었다. 뇌리를 울리던 그의 말이, 하늘을 뒤덮었던 그의 존재감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파컁!
손과 발을 묶고 있던 족쇄가 뜯겨나간 듯 시원해졌다.
‘라온.’
루난이 홀가분해진 몸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라온이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뜬 모습을 보며 옅게 웃었다.
시리아가 처음으로 죽음을 가르쳐주었다면, 라온은 처음으로 굳은 의지를. 시리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평생의 은인이라고 해도 부족했다.
“고마워.”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시리아에게 한발 다가가 그를 똑바로 보았다.
‘무서워.’
무서움은 여전했다. 눈을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뒤에서 느껴지는 라온의 따스한 기운에 그를 마주 볼 수 있었다.
“난 오, 오빠와 할 말이 없어.”
루난이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들었다. 햇살을 두른 보라색 눈동자에 새싹처럼 작은 당당함이 비쳤다.
“내가 찾아갈 때까지 오지 마.”
목소리를 떨었지만, 그녀는 처음으로 시리아에게 할 말을 뱉어냈다.
“루, 루난….”
시리아의 얼굴을 꽁꽁 감싸고 있던 가면이 산산조각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