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아, 아니… 커헉!”
엔시아는 검은 인영이 말을 하기 전에 목을 잡고 바닥에 메쳤다.
콰아앙!
검은 인영이 피를 토하고, 엔시아의 방 전체가 흔들렸다. 1년 넘게 침대에 누워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괴력이었다.
“아, 아가씨 대체….”
“입 닫아.”
엔시아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검은 인영을 짓누르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고, 셰릴과 검사들이 들어와 불을 켰다.
“허어….”
“지, 진짜였잖아.”
“라온 님의 말이 그대로 들어맞다니….”
검사들은 엔시아의 밑에 깔린 시녀 차림의 젊은 여성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저 여자 엔시아 님 옆에 붙어 있던 그 시녀잖아!”
“그래. 계속 수발을 들었던 사람이야.”
마르타가 이를 드러냈고, 버렌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
마지막으로 미셀의 부축을 받는 엔시아가 들어왔다. 바닥에 깔린 시녀를 보고 턱을 떨었다.
“로, 로렌. 너였어?”
엔시아의 하늘색 눈망울이 비가 흘러내릴 것처럼 일렁거렸다.
“대체 네가 왜 이런 짓을….”
“아, 아가씨가 왜 둘….”
로렌이라 불린 시녀는 앞에 있는 푸른 눈의 엔시아와 본인을 누르고 있는 붉은 눈의 엔시아를 번갈아 보고 눈을 부릅떴다.
“미안하지만 난 네 아가씨가 아니야.”
붉은 눈의 엔시아가 본인의 얼굴을 톡 두드렸다. 어깨 위에서 회색 망토가 떨어져 내리고 라온의 얼굴이 드러났다.
“도, 도플갱어의 망토….”
로렌은 바닥에 떨어진 망토와 라온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네가 올 거라 생각해서 연기 좀 했지.”
라온이 도플갱어의 망토를 손에 쥐며 피식 웃었다. 이 망토는 외형을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 있는 전설급 아티팩트였다. 여러 단점이 있긴 하지만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로렌.”
“대체 네가 왜….”
엔시아와 미셀의 눈동자는 파도를 맞은 듯 흔들렸다. 이 상황이 믿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반면 라온은 당연하다는 듯 평온한 눈빛으로 로렌을 내려다보았다.
‘뻔했지.’
헬 웜은 입이나 코를 통해서 직접 넣어야 하기에 세작은 엔시아와 가까운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엔시아의 시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오른쪽에 서서 계속 수발을 들었던 저 로렌이 로베르트 가문의 세작이었다.
“여덟 살부터 함께 지냈는데 네가 어떻게 이런 짓을….”
엔시아가 입을 틀어막은 채 주저앉았다.
‘8살이라.’
로베르트 가문에서 아이들에게 암살이나 세작 활동을 시키는 나이가 6살에서 8살이다. 나이를 들어보니 더 확신이 들었다.
‘물론 본인이 누굴 위해 일하는지 모르겠지만.’
데루스는 세작들을 점조직으로 운영해서 본인들의 진정한 소속이 어디인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세작들은 세뇌당한 대로 그저 명령을 따를 뿐이다.
“라온 님. 로렌인가요? 저, 정말 로렌이 한 짓인가요?”
엔시아가 한참 만에 입술을 뗐다. 말라붙은 입술이 안쓰러울 정도로 떨렸다.
“이 자가 세작입니다.”
“아닙니다!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로렌이 고개를 억지로 흔들었다.
“이걸 내 미간에 박아넣으려고 해놓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라온이 바닥에 떨어진 구부러진 바늘을 로렌에게 보여주었다.
“그, 그건 약입니다!”
로렌이 눈에 핏줄을 세운 채 악을 질렀다.
“약?”
엔시아가 바늘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마지막 희망을 거는 듯한 표정이었다.
“몇 달 전에 가문에 용한 약사가 오지 않았습니까. 그분께 열기를 내리는 용도로 받은 약입니다.”
“그걸 왜 바늘에 바르고, 이 야밤에 와서 찌르려 한 거지?”
“저, 전 약사의 지시대로 했을 뿐입니다. 아가씨가 주무실 때 바늘에 약을 발라서 아주 살짝 찌르면 열기가 줄어든다고 했습니다.”
로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술술 뱉어냈다.
“아가씨가 주무시면서 너무 힘들어하실 때마다 한 번씩 약을 넣었습니다. 전 정말 아가씨를 걱정해서… 흐윽!”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정말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연기였다.
“그, 그런….”
엔시아의 눈동자가 크게 출렁인다. 저 말 같지도 않은 변명에 흔들리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겠지.’
이게 오래된 세작의 가장 무서운 점이다. 지금까지 쌓아온 정을 이용하여 억지 변명을 퍼 붙는다면 판단력이 흐려질 수밖에 없다.
특히 엔시아는 여덟 살 때부터 함께 자랐다고 하니, 더더욱 믿고 싶어질 것이다.
‘다만.’
그건 엔시아와 미셀에겐 통해도 완전히 타인인 자신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그렇게 살짝 찔렀다면 바늘이 이 정도로 구부러지지 않았겠지. 이건 깊숙이 찌르려다가 실패한 흔적이잖아.”
라온이 구부러진 바늘의 끝을 가리켰다.
“거기다 이 바늘에 발라진 약을 조사하면 정말 약인지, 독인지 나올 텐데.”
“아, 아닙니다. 오해….”
로렌은 새로운 핑계를 찾기 위해 무서울 정도로 눈알을 굴렸다.
“로, 로렌….”
엔시아가 억지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고통스러운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전 정말 아가씨를 걱정했을…커헉!”
라온은 로렌의 말을 듣다 말고 그녀의 턱을 빼버렸다.
“이제 어느 정도 받아들이신 듯 하니, 제대로 된 증거를 보여도 되겠군요.”
“증거?”
“세작들은 언제 정체를 들킬지 모르기 때문에 입안에 독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건 아니에요. 로렌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확인했어요.”
미셀이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독을 넣지 않은 겁니다.”
“예?”
“처음에는 정말 이 가문의 일원이 된 것처럼 제 일을 하고, 정보를 빼돌리지 않습니다. 평범한 아이로서 가문 사람들의 신뢰를 쌓게 한 다음에야 세작으로서 임무를 시키고, 이빨에 독을 심죠.”
인간의 정과 심리를 이용하는 게 로베르트 놈들의 수법이었다.
“보면 아실 겁니다.”
“으으읍!”
라온이 당황한 로렌의 입 안에 손을 넣고서 어금니 바깥쪽에 숨겨둔 하얀색 구슬을 꺼냈다. 하얀색이지만 깨무는 순간 장기를 녹여서 절명 시키는 지독한 독이었다.
“아억!”
로렌은 이젠 질린 듯한 눈으로 라온을 올려보았다. 이곳에 찾아올 걸 예측하고, 입 안에 있는 독을 단번에 찾아내는 두뇌에 경악한 것 같았다.
‘놀랄 거 없어.’
라온이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나도 겪어서 아는 거니까.’
암살자로 살아가던 시절에 항상 이 독구슬을 이빨에 박아넣고 있었다. 이 여자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강요당하는 노예 생활을 했기에 알 수 있는 것이다.
“로렌….”
엔시아는 분노할 힘도 빠진 듯 팔을 축 늘어뜨렸다.
“왜 그런 거야! 대체 왜!”
“아가씨! 제 말을…큭!”
로렌은 턱이 빠진 상태에서도 핑계를 대려 했지만, 라온이 그녀의 심장에 충격을 주어서 기절시켰다. 혹시라도 심장에 있을지 모르는 레이지 웜을 처리하기 위한 조치였다.
“아론 총관님.”
라온이 뒤에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아론을 불렀다. 그나마 그가 제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아, 예.”
“일단 이 자를 가둬두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아론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로렌을 데리고 나갔다.
“음….”
라온이 쓰러진 엔시아를 보았다. 심하게 흔들리던 눈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받아들인 모양이군.’
처음부터 로렌을 제압하고 독을 빼낼 수 있음에도 이렇게 귀찮은 짓을 한 건 엔시아와 미셀이 로렌에게 미련이 없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큰 충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았다.
‘로렌을 심문해도 의미가 없지.’
암살자와 달리 세작은 점조직으로 운영한다. 저 시녀가 데루스나 테머스에게 연락하기 위해서는 최소 4개에서 5개의 연락 통로를 거쳐야 하다 보니, 그녀의 입에서 저 둘의 이름이나, 엔시아의 치료법에 대한 게 나올 일은 없었다.
“출발은 내일이 아니라, 모레 아침에 할 테니, 푹 쉬십시오.”
“감사합니다.”
“라온 님. 고마워요.”
라온은 힘없는 미셀과 엔시아의 감사 인사를 듣고, 밖으로 나갔다.
“라온.”
숙소로 돌아가려 할 때 셰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천검대와 광풍단이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셰릴이 인상을 찡그린 채 다가왔다.
‘세작이 오는 상황을 만드는 게 다가 아니라, 그 세작의 정체와 심리까지 파악해?’
라온의 계획이 그럴듯해서 허락은 했지만 이렇게 잘 풀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강한 무력?
타고난 재능에 끊임없는 노력이 어우러져 저 위치까지 갔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오늘 보여준 덫 설계와 심계는 이제 두 번째 임무를 시작하는 신입 검사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노련함이 가득했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나도 그 작은 머리에 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건지 궁금하군.”
에컨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평소에도 머리 잘 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라온. 대단해. 잘생겼어.”
“뭐, 머리 좀 굴리긴 하네.”
버렌이 헛바람을 흘렸고, 루난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으며, 마르타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제 좀 무서운데….”
“그러게. 무슨 귀신도 아니고….”
도리안과 크레인은 턱을 바르르 떨었다.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라온이 놀란 눈을 한 검사들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확신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확신한 거 같은데?”
눈매를 좁히는 셰릴에게 그저 웃어주었다.
“대답할 생각이 없나보군. 어쨌든 수고했어. 네 덕분에 세작을 잡은 건 맞으니까. 다만 세작들은 보통 하나 이상의 라인을 거치기 때문에 정보를 역으로 얻기는 쉽지 않아. 심문해도 소용이 없을 가능성이 높으니, 너무 기대하진 마.”
“알겠습니다.”
라온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내가 17살짜리와 대화하는 건지, 71살과 대화하는 건지 모르겠군.”
셰릴은 질린다며 손을 젓고서 다시 엔시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만 그녀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소득은 있지.’
그것도 아주 큰 소득이.
데루스 로베르트는 완벽주의자다.
요난 가문을 먹어치우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인력을 소모했을 텐데, 그게 한 번에 무너졌으니, 점잖은 척을 그만두고 지랄, 발광, 난동을 부릴 게 분명했다.
‘그 꼴을 직관하지 못하는 게 아쉽군.’
라온은 남쪽에 있을 데루스 로베르트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 * *
세릴이 방으로 돌아갔을 때 엔시아는 어느새 잠이 들었고, 미셀은 그런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제가 지킬 테니, 가주께서도 쉬시지요.”
셰릴이 엔시아의 침대 곁으로 다가가 미셀을 보았다.
“감사합니다.”
미셀이 숨을 고른 채 고개를 숙였다.
“저희는 그저 빚을 갚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러 가지 배려를 해주셨지 않습니까. 특히 라온 님께서.”
그녀는 한 가문의 가주답게 라온이 이런저런 배려를 해줬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대체 그분은 뭐죠?”
“무슨 말씀이시죠?”
“머리를 쓰시는 거나, 판단, 단호함 모두 어린 사람 같지 않아요.”
미셀이 라온이 로렌을 잡고 있던 바닥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북멸왕께서 직접 봐주시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스승은 있지만 거의 홀로 성장했더군요. 그리고….”
셰릴이 고개를 저으며 문을 돌아보았다.
“저 녀석의 진면목은 저도 궁금하네요.”
한계가 대체 어디까지인지.
* * *
테머스는 숲 안쪽에서 어둑한 밤을 물리치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찬란하게 쏟아지는 햇볕을 받아들이는 그의 얼굴을 살벌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왜 연락이 없지?
테머스가 눈을 부라리며 옆에 있는 큼지막한 나무를 후려쳤다.
콰아아앙!
지축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가 그대로 쓰러지고, 시꺼멓게 재가 되어 사그라들었다.
“이미 한참 전에 연락이 왔어야 하잖아! 왜 연락이 없는 거냐고!”
“자, 잘 모르겠습니다. 연결부에서도 아예 연락이 없다고만 합니다….”
유펜이 어깨를 덜덜 떨며 고개를 숙였다.
“지시를 확실하게 전한 거 맞아?”
“예. 저녁 전에 전해졌을 겁니다.”
“그럼 들킨 거잖아!”
테머스가 발을 굴렀다. 바닥에서 피어난 검은 기운에 주변의 수풀들이 가뭄을 맞은 듯 바스러졌다.
“멍청한 년! 고작 바늘 하나 찌르는 일도 제대로 못 하고 들켜?”
간신히 가라앉힌 분노가 다시 차오른 듯 테머스의 눈동자가 악의로 번들거렸다.
“그, 그럼 당장 그분께 연락을 하겠…크윽!”
“너 미쳤냐?”
유펜이 그림자에서 까마귀를 소환했을 때 테머스가 그의 목을 잡았다.
“유난 가문을 집어삼키는 건 15년도 넘게 준비한 계획이다. 이게 그분의 귀에 들어간다면 너나 나나 목이 날아갈 거다.”
“아….”
유펜이 본인의 목을 잡고 이를 덜덜 떨었다.
“보고하더라도 결과를 내고 해야 해. 이대로라면 죽도 밥도 안 되니까.”
테머스는 차분히 심호흡하며 화산처럼 폭발하려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하지만 그분에게 숨길 수가….”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고! 그림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근처까지 와 있습니다. 오늘 출발한다고 해도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유펜이 빠르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림자만이 아니라, 근처에 있는 놈들을 다 불러. 빠르게 쫓을 필요 없다. 느려도 좋으니, 주변 지부에 있는 무기와 독을 모조리 챙겨오라고 해.”
“저, 전부요?”
“상대는 천검대주다. 그년을 잠시라도 잡아두려면 독과 연막을 모두 쏟아부어야 가능성이 있다.”
테머스가 오늘 보았던 천검대주를 생각하며 이를 바득 갈았다.
‘그년을 죽이는 건 무리야.’
존재감을 지우고 있을 때는 깃털 같다가 한 번 드러내니, 산보다 더 거대해졌다. 듣던 것보다 더한 무력이었다.
“라온! 라온 지그하르트만 확실하게 죽이면 돼. 그러면 다 복구할 수 있어.”
테머스의 손아귀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그 잘난 얼굴 가죽을 생으로 뜯어내 주지.”
* * *
라온은 다음날 오후에 가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방은 여전히 난장판이었지만, 미셀은 어제와 달리 표정이 밝았다.
“어서 오세요.”
미셀이 어제보다 훨씬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좀 괜찮으십니까?”
라온이 마주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아직 가슴이 답답하긴 한데, 라온 님이 로렌의 본 모습을 보여주셔서 정신을 좀 빨리 차렸네요. 충격 요법이 효과가 좋나 봐요.”
그녀는 이제 받아들일 수 있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저희 총관이 밤새 로렌을 심문했지만, 나오는 건 없었어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렇군요.”
예상대로다. 로렌이 아는 건 바로 위의 점조직에 연락하는 방법뿐일 거다.
“결국 치료를 위해 레트란으로 가야겠네요. 출발은 내일 맞죠?”
“예. 이제 세작도 잡혔으니, 엔시아 님을 도와줄 시녀도 데려가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네. 준비할게요.”
“그리고….”
라온은 조금 고민이 된다는 듯 뜸을 들였다.
“어려워 말고 말씀해주세요.”
미셀은 뭐든 말하라는 듯 소파에서 등을 뗐다.
“아무래도 엔시아 님을 모시고 가는 길이 그리 쉽지 않을 듯합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죠?”
“이렇게 노골적으로 엔시아 님을 노리는 모습을 보면 놈들은 분명 요난 가문의 무언가를 원하고 있을 겁니다.”
그놈들이 바로 로베르트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그런 놈들이 이 기회를 그냥 지나칠 리 없습니다. 분명 단단히 준비해서 엔시아 님과 저희를 노리고 습격을 해올 게 분명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죠?”
“놈들이 엔시아 님에게 사용한 것처럼 이상한 힘이나, 독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으니, 가주님께서 조금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 손을 쫙 펼쳤다.
“저희 가문의 자랑이 아티팩트잖아요. 얼마든지 말씀해보세요.”
“잘되었군요.”
라온이 옅게 웃으며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서 내밀었다.
“피독 아티팩트, 선풍연, 발광석, 근력 강화 아티팩트, 야간 투시 아티팩트, 민첩성 강화, 열화덕, 풍령주….”
그녀는 끝도 없는 목록을 차례로 읊으며 점차 목소리가 떨려갔다.
“저, 저기 이제 정말 다 필요한….”
“그렇습니다. 특히 피독 아티팩트가 중요하죠.”
해독은 중독된 독을 치료하지만, 피독은 아예 독을 무시한다. 해독보다 훨씬 좋고 비싼 게 피독 아티팩트였다.
“조, 좀 필요 없어 보이는 게 보이는데….”
“모두를 살려서 복귀하려면 저것들이 필요합니다.”
-무슨 헛소리냐!
라스가 팔찌 위로 올라와서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리쳤다.
-피독 아티팩트는 몰라도, 근력 강화나 민첩성 강화는 필요 없는 것들이잖아!
‘그건 내 거야.’
-그니까 사기를 치고 있지 않느냐!
‘전혀.’
라온이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강해져서 다른 사람을 보호하면 그만큼 생존 확률이 높아지는 거잖아. 난 거짓말 안 했어.’
-끄으으윽!
라스는 논리가 없지만, 논리가 있는 묘한 말에 대꾸하지 못하고 미셀을 노려보았다.
-어이 계집! 절대 넘겨주지 마라! 이놈은 그리드보다 독한 악귀이니라!
다만 라스의 바람과 달리 미셀은 이미 결정을 내린 듯해 보였다.
“모두의 복귀….”
미셀은 모두 살려서 복귀한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분은 믿을 수 있지.’
라온의 계획 덕분에 세작을 골라낼 수 있었고, 정에 흔들리지 않게 될 수 있었다. 이 남자라면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이것도 내일까지 준비해놓겠습니다.”
미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으윽!
라스가 미셀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이걸 다 들어주다니! 돈이 썩어나는 것이냐! 대체 왜 이놈만 보면 다들 못 해줘서 안달이야!
녀석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냉기를 훌훌 내뿜었다.
“조금 전에 말씀하신 대로 만약 엔시아가 완전히 회복되고, 떠난 모두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원하시는 모든 것을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미셀은 진심이라는 듯 손을 꼭 모은 채 말했다.
-아, 안 돼!
라스가 눈을 부릅떴다.
-이놈은 진짜 모든 것을 말할 놈이라고!
“정말이신가요?”
손을 마구 흔드는 라스를 밀어내고 옅게 웃었다.
“네.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지요.”
“그 말 잘 기억하고 계세요.”
라온이 빙긋 웃으며 일어섰다.
‘알아서 준다는데 거절할 필요가 없지.
오늘 보여준 목록이 고맙게 여겨질 정도로 뜯어낸 자신이 있었다. 장담하는 데 미셀은 저 말을 분명 후회하게 될 것이다.
-미치겠도다!
라스가 고개를 맹렬하게 흔들었다.
-대체 왜 네놈에게는 호구들이 제 발로 걸어오는 것이냐! 본왕에게도 호구를 끄는 방법 좀 알려달란 말이다!
‘글쎄….’
라온은 버둥거리는 라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호구왕이 옆에 있어서가 아닐까?
본인이 퍼주는 걸로 모자라 다른 호구까지 불러들이다니, 역시 아낌없이 주는 라스가 최고였다.
* * *
라온이 미셀을 만나고 내려왔을 때 루난이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디 가게?”
“구슬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었어.”
그녀는 신제품이 나왔다며 꼭 가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라, 라온.
라스가 팔뚝 위로 슬금슬금 올라왔다.
-우리도 가는 게 어떠냐?
‘내가 왜?’
-아이스크림 맛있잖아. 먹으면 기분도 좋아지고.
‘난 별로.’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맛은 있지만, 수련을 하는 게 더 기분이 좋았다.
-이 지독한 수련광 놈이….
‘할 말 없지?’
-자, 잠깐만 그럼 이건 어떠냐?
-뭐?
‘분노를 이용하지 않는 일에 본왕이 도움을 주마!’
‘도움?’
-그래. 도박장에서처럼 카드를 봐준다던가, 다른 놈이 오는 것을 알려준다던가.
라스는 필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아이스크림이 어지간히 먹고 싶은 것 같았다.
‘공짜로 써먹게 생겼네.’
어차피 출발이 내일이라 루난과 함께 나가려고 했는데, 이런 이득이 생기니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좋아.’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루난에게 다가갔다.
“같이 가자.”
“응!”
루난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입술을 가늘게 말아 올렸다.
루난과 함께 요난 가문의 정문으로 향했다.
문지기 검사들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을 때 갑자기 라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시기를 잘못 맞췄군.
‘그렇네.’
라온이 혀를 찼을 때 요난 가문의 정문이 열리고 그 앞으로 은발의 남자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아….”
그 남자를 본 루난이 뒤로 물러서며 입술을 떨었다.
“이곳에 왔다는 말이 정말이었네.”
은발의 남자. 시리아 슬리온이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루난. 오랜만이구나.”
“그래. 오랜만이네.”
라온이 루난의 앞으로 나오며 차게 웃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시리아 슬리온의 산뜻한 미소에 작은 균열이 돋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