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06화 (206/653)
  • 제206화

    “미쳤군. 미쳤어!”

    테머스가 입매를 찌그러뜨렸다.

    “아파서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말을 하겠어!”

    그는 머리를 맹렬하게 흔들었다. 평생 쌓은 의술이 얼굴에 밀린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같았다.

    “가주. 정말 저대로 놔둘 생각이십니까? 죽을 게 뻔히 보이는 여정이거늘! 말리셔야지요!”

    테머스는 환자에 대한 걱정보다는 확연한 분노를 담아 소리쳤다.

    ‘하.’

    라온은 그런 테머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얼굴 비교에 화가 단단히 났네.’

    냉정함이 장점 중 하나인 테머스가 저리 흥분한 건 전생에서도 보지 못했다. 얼굴 비교에 자존심이 상당히 뭉개진 것 같았다.

    ‘상황이 재밌게 됐어.’

    놈이 쌓아온 게 워낙에 많아서 정체를 밝히는 건 무리지만, 이 상황을 잘 이용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주님!”

    테머스는 재촉을 하듯 다시 미셀을 불렀다.

    “그게….”

    미셀은 고민이 되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라온과 테머스 중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확신이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따님처럼 얼굴만으로 결정하진 않으시겠지요? 절 이곳에 부른 건 가주님이십니다!”

    “얼굴만 있는 건 아닙니다. 검술과 의술도 나름 자신 있습니다.”

    라온은 인상을 찡그린 테머스를 보며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네게 말하지 않았다!”

    얼굴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테머스의 눈빛이 더 사나워졌다.

    “가주. 전 국가와 가문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을 치료해왔습니다. 환자와 치료에 관해서는 단 한 번의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왈왈. 개소리다.

    저놈은 의술을 그리고 저 고귀한 이미지를 이용하여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노예로 만들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하는 걸 보니 데루스의 심복다웠다.

    “지금 따님을 이동시킨다면 분명 위험한 순간이 찾아오게 될 겁니다. 거기다 성자가 있는 레트란은 현재 전쟁 중입니다. 도착한다고 해도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테머스는 정말 엔시아를 걱정하는 듯 눈동자를 글썽거렸다.

    “전 아직 부족한 치료사지만 저자보다 훨씬 많은 경험과 노력을 했습니다. 운 좋게 원인을 찾은 것만 믿으셨다간 분명 후회하시게 될 겁니다.”

    말은 점잖지만, 본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엔시아가 죽을 거라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라온이라고 했던가?”

    라온은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테머스 관자놀이에 힘줄이 하나 더 솟아났다.

    “조금 전에 환자의 머리 부근에서 열기를 일으키는 원인이 있다고 했었지?”

    “그랬습니다.”

    “다른 치료사들이 왜 그걸 발견하지 못했을까? 너보다 실력이 떨어져서? 아니. 머리 부근은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환자가 죽을 수 있는 위험한 부위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살폈기 때문이다.”

    테머스가 눈썹을 아래로 내리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만, 그렇게 무식하게 마나 회로를 헤집다가는 환자를 죽이거나 폐인으로 만들었을 거야. 의술을 익혔다고 하고 싶다면 그 잘난 얼굴에 신경 쓰지 말고, 머리가 얼마나 위험한 부위인지….”

    “108개.”

    “뭐?”

    “머리에서 오러가 닿으면 위험한 부위는 108개라고.”

    라온은 팔짱을 낀 채로 담백하게 입을 뗐다.

    “아, 아니. 그걸 어떻게….”

    테머스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억?”

    “그, 그런 걸 알아?”

    “성자님의 제자라는 게 진짜였어?”

    “와아….”

    다른 검사들도 테머스를 당황 시킨 라온을 보며 눈을 치켜떴다.

    “그걸 모르는 게 이상한 거지.”

    라온은 테머스의 경악한 반응을 즐기며 피식 웃었다.

    ‘네가 알려준 거니까.’

    의원만큼이나 사람의 몸에 정통해야 하는 직업이 뭘까?

    바로 암살자다.

    어디를 건드리면 어떻게 죽을지, 어디를 건드리면 폐인이 되는지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아야 제 몫을 할 수 있는 암살자가 될 수 있다.

    ‘데루스가 완벽주의자였으니 더더욱.’

    데루스 로베르트는 암살을 자연사로 위장하거나, 다른 세력이 죽인 듯한 흔적 세탁도 자주 시켰다.

    적과 아군의 죽음을 자주 이용해야 했기에 테메스에게 인간의 약점과 급소에 대한 교육도 주기적으로 받았었다.

    이번에 엔시아의 머리 부분을 살필 때도 테머스에게 배운 지식이 큰 도움이 되었다.

    “아, 하나 더.”

    라온이 손가락을 들어 올려 본인의 얼굴을 가리켰다.

    “난 딱히 얼굴 관리 안 해. 이거 그냥 타고난 거야.”

    “너… 왜 조금 전부터 반말이지?”

    테머스가 매서운 눈으로 라온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계속 반말을 했으니까.”

    “뭐? 나는….”

    “난 당신에게 충분히 대우를 해줬어. 계속 존댓말을 사용했고, 질문을 했을 때는 솔직하고 예의 있게 답해주었지.”

    라온이 차게 웃으며 턱을 삐딱하게 틀었다.

    “하지만 당신은 내가 지그하르트에서 어떤 위치인지, 무엇을 대표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아예 말을 놨잖아. 예의에 밥을 말아 먹은 사람에게 내가 계속 대우해줄 필요가 있을까?”

    “이이익!”

    테머스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엔시아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얼굴이 붉어졌다.

    “와아, 조롱하는 모습도 잘생겼어.”

    엔시아는 손을 꼭 모은 채 라온만을 바라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중간중간 터지는 엔시아의 발언 때문에 테머스가 더 열받는 것 같았다.

    “테머스 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으면서 그딴 태도를 보이는 거냐!”

    테머스에 옆에 있던 청년이 인상을 찡그리며 앞으로 나왔다.

    “이분은 대륙을 돌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고 대가조차 받지 않은 성인이시다! 네놈과는 의원으로서의 격이 달라!”

    “격이 다르면 예의 없어도 되는 거냐?”

    “배, 배분 상….”

    “배분. 배분이라….”

    라온이 차게 웃었다.

    “내가 아까 누구에게 배웠다고 했지?”

    “너, 넝마의 성자와 지그하르트의 광검….”

    “그 두 사람에게 배웠으면 딱히 그런 배분 차이도 없을 텐데?”

    “그게….”

    테머스의 제자로 보이는 청년은 대답하지 못한 채 턱을 떨었다.

    “빠져 있어라.”

    테머스가 이마를 찡그린 채 앞으로 나왔다.

    “확실히 내 실수였네. 당황하여 자네에게도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걸 잊었어. 사과하겠네.”

    그는 진중한 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도 사과드리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숙인 채로 미소를 지었다.

    ‘제대로 먹혔네.’

    테머스는 침착해진 게 아니다. 살심이 극도로 치솟아 오히려 냉정해진 상태. 이번 일이든, 아니면 다른 곳에서든 자신을 직접 죽이러 올 게 분명했다.

    “가주님. 확실히 결정해주시지요.”

    테머스가 미셀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 의견은 변함없습니다. 따님을 데리고 레트란에 가는 건 죽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위험한 행동입니다. 제게 맡겨주신다면 최선을 다해서 1년 내로 치료해보겠습니다.”

    그는 이전과 달리 1년이라는 확실한 시간도 말했다.

    “저도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레트란에 가서 성자님을 만난다면 확실하게 치료할 수 있습니다. 천검대주님이 가장 앞에 서실 테니, 적이 누구라고 해도 엔시아 님께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할 겁니다.”

    라온 역시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음성으로 치료를 할 수 있다고 확신하여 말했다. 천검대주는 믿으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검대주….”

    천검대주를 처음 보았는지 테머스가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하아….”

    미셀은 고민이 되는지 두 사람의 사이에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본래 장부라고 들었는데, 막내딸의 일이라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엄마.”

    엔시아가 손을 들었다.

    “제 생각은 변함없어요. 라온 님과 함께 가고 싶어요.”

    “너 진짜….”

    “테머스 님도 나쁘지 않겠지만, 라온 님이 더 빨리 고쳐주실 거 같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잘생겼잖아!”

    그녀는 이번에도 만능 얼굴론을 꺼냈다.

    “이 정도로 잘생긴 사람은 거짓말 안 해!”

    “엔시아….”

    “저 얼굴이 약이고, 치료라니까. 보고 있으면 하나도 안 아파.”

    “아휴!”

    미셀이 관자놀이를 잡고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를 부여잡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던 눈빛에 망설임이 사라졌다.

    “테머스 님 죄송해요.”

    그녀가 테머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저 아이의 말을 들어주고 싶네요.”

    “…….”

    테머스는 말없이 미셀, 엔시아, 라온과 셰릴을 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환자와 보호자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죠.”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걷어 있던 소매를 내렸다.

    ‘저놈….’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마음먹었군.’

    저 표정과 목소리를 보니, 테머스는 자신을 확실하게 죽이기로 결심했다. 엔시아도 저 증상을 실컷 이용한 뒤에 죽일 게 분명했다.

    “일단 약속드린 치료비용이라도….”

    “아닙니다. 치료도 못 했고, 본래도 받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손을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자네에게도 실례했네. 내가 너무 흥분했었어.”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저런 침착성을 보이다니, 역시 보통 놈은 아니었다.

    “이만 돌아 가보겠습니다. 멀리서나마 완쾌를 기원하겠습니다.”

    테머스는 조금의 미련도 없다는 듯 제자와 함께 엔시아의 방을 떠났다.

    “총관. 테머스 님을 배웅해드리세요.”

    “아, 알겠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에 따라가지 못하던 총관이 급하게 테머스를 쫓았다.

    “하아, 이거 잘한 거 맞겠죠?”

    미셀이 깊은숨을 뱉어냈다.

    “절대 후회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잘한 정도가 아니라, 구원의 손을 잡은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테머스를 골랐다면 이 가문은 그대로 로베르트에 먹혔을 테니까.

    “다짐하는 모습도 오지게 잘생겼어.”

    엔시아가 감탄을 터트리며 눈을 빛냈다.

    “그럼 출발은 언제….”

    “으윽!”

    미셀이 출발을 이야기하려 할 때 엔시아가 신음을 흘리며 침대로 쓰러졌다.

    “엔시아!”

    라온이 바로 엔시아에게 다가가서 글래시아의 냉기를 마나 회로에 주입했다.

    ‘겁만 주는 거야.’

    공격했다간 헬 웜이 엔시아에게 고통을 줄 가능성이 높다. 이전처럼 빠르게 움직일 게 아니라, 위협을 한다는 느낌으로 냉기를 운용했다.

    우우우웅!

    글래시아의 냉기로 열기를 밀어내며 느릿하게 엔시아의 마나 회로를 따라 올라가자, 헬 웜의 기척이 사라지고, 엔시아의 육체에 퍼지던 열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와아….”

    엔시아가 손으로 주먹을 쥐어보고서 입을 벌렸다.

    “아프지도 않고, 전보다 더 편해졌어요!”

    그녀는 붓기가 조금 가라앉은 팔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도 웃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되겠네.’

    엔시아의 고통이 심해질 때 헬 웜에게 겁을 줘서 숨게 만든다면 레트란까지 가는 동안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다행이야.”

    미셀이 엔시아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출발은 언제 하실 건가요? 바로….”

    “아뇨. 내일 아침에 갈 생각입니다.”

    “내일이요?”

    “네. 이것저것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대주님 괜찮겠죠?”

    “그래.”

    셰릴도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쪽에서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죠?”

    “최대한 빨리 이동해야 해서, 엔시아 님만 모시고 갈 생각입니다.”

    “예? 하지만 저 아이는 혼자서 뭘 할 수가 없어요!”

    미셀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을 저었다.

    “저희 쪽에 여성 검사도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한 명쯤은….”

    “방해가 될 겁니다.”

    라온은 그렇게 말하고 오러 메시지로 미셀에게 추가 지시를 내렸다.

    [가주님. 지금 방 안에 있는 시녀들을 모두 내보내 주세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셀은 잠깐 움찔했지만, 그 말을 알아듣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빨리 준비해야겠네요. 얘들아. 마차를 점검하고, 엔시아와 검사님들이 먹을 식량과 필수품들을 챙겨줘,”

    “예.”

    “알겠습니다.”

    방에 있던 시녀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갔다.

    우우우웅!

    라온은 문이 닫히자마자 기막을 펼쳐 방에서 소리가 빠져나가는 걸 막았다.

    “대체 무슨 일이죠?”

    “범인을 잡아야죠.”

    “버, 범인?”

    “엔시아 님의 머리에 있는 기운은 자연적인 증상이나, 병이 아니라, 인위적인 현상입니다.”

    “그, 그 말은….”

    “누군가가 엔시아 님을 노렸다는 뜻이죠.”

    “아….”

    그 말에 엔시아와 미셀이 턱을 떨었다.

    “혹시 손가락이 아프시기 전에 외부에 나가서 다치신 적 있으십니까?”

    “아, 아뇨. 없어요. 전 공방에서 계속 작업만 해서….”

    “그럼 내부인이겠네요.”

    라온은 확신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확실해?”

    셰릴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이런 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해.”

    “확실합니다. 누가 했는지는 모르지만, 절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에요.”

    테머스가 오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놈의 반응을 보면 확실하다. 이 안에 로베르트 가문의 세작이 있을 것이다.

    “으음, 그럴 리가….”

    “제, 제가 공방에 있을 때 만난 사람들은 다 믿을 수 있는 가족들이에요!”

    미셀과 엔시아는 믿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저었다.

    “만약에 범인을 찾고 싶지 않으시다면 물러나겠습니다. 임무와 상관없고, 저희 집안일도 아니니까요. 다만 범인을 찾고 싶다면 지금이 유일한 기회입니다.”

    라온은 마지막 기회라고 말하며 눈을 내리감았다. 거절해도 상관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 정말 찾을 수 있나요?”

    미셀이 마른침을 삼켰다.

    “덫을 만들었으니, 밟을 수밖에 없습니다.”

    “덫이라니?”

    셰릴도 궁금한지 한발 다가왔다.

    “범인이 엔시아 님을 저 상태로 만든 건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녀가 아파야만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로베르트가 이 가문을 먹으려는 계획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걸 꺼낼 수는 없었다.

    “제가 엔시아 님의 증상을 완화 시킬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고, 바로 내일 엔시아 님만 데리고 떠난다고 말했으니, 범인은 지금 급한 상태일 겁니다. 아파야 하는 그녀가 치료된다면 뭔지 모를 계획이 물거품이 될 테니까.”

    “그, 그러면 엔시아가 떠나기 전에….”

    “예. 엔시아 님이 떠날 수 없도록 상태를 악화시키려고 할 겁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내일 떠나고 요난 가문의 누구도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했으니, 엔시아의 증상을 악화시킬 기회는 바로 오늘뿐이었다.

    “즉, 오늘 밤에 엔시아 님에게 찾아올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거죠.”

    “아,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보내 달라고….”

    라온의 오러 메시지의 의미를 알아차린 미셀이 입을 떡 벌렸다.

    “너 그거 언제 생각했지?”

    “처음부터요.”

    “…미쳤군.”

    셰릴이 눈매를 좁힌 채 라온의 눈을 보았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테머스에게 밀리지 않는 의술 지식에, 범인이 있다는 걸 예측하고 바로 덫을 까는 설계 능력은 자신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커온 거지?’

    무력, 심계, 지식과 냉정함에 하다 못 해 얼굴까지. 빠지는 게 하나도 없는 17살짜리 검사에 헛웃음이 나왔다.

    “허….”

    “저 생각을 처음부터 했다고?”

    “우리 부단주. 지, 진짜 무섭다….”

    “그러니까.”

    광풍단과 천검대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빛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그,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엔시아를 이대로 놔둘 수도 없잖아요.”

    미셀이 조급해진 듯 손톱을 깨물었다.

    “당연히 놔둬서는 안 되죠.”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필요한 게 하나 있습니다.”

    “필요한 거요?”

    “예. 제가 알기로 요난에 ‘그 아티팩트’가 있다고 들었는데….”

    *     *      *

    콰과과과광!

    뎀벨 시 외곽에 있는 숲 주변으로 갑작스러운 폭발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시발! 시발! 시이이이발!”

    테머스는 숲이 뭉개지든 말든 상관없이 연달아 오러를 뿜어내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을 짓이겨버렸다.

    치이이익!

    나무와 수풀은 단순히 부서지는 게 다가 아니라, 검은 재가 되어 녹아내렸다.

    “라온 지그하르트!”

    요난 가문에서 라온에게 탈탈 털렸던 분노가 터진 듯 그의 눈동자는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죽인다. 얼굴 가죽을 산 채로 녹여버릴 거다. 절대로 쉽게 안 죽여!”

    테머스는 괴성을 지르며 숲을 완전히 뭉개버릴 기세로 오러를 일으켰다.

    “으으….”

    테머스의 제자인 유펜은 뒤에 훌쩍 물러선 채로 겁에 질린 듯 입술을 깨물었다.

    “더 떨어져야겠… 음?”

    유펜이 뒷걸음질을 치려고 할 때 그의 그림자에서 눈이 하얀 까마귀가 솟아올랐다.

    까악!

    어깨에 내리 앉은 까마귀가 날카로운 부리를 쩍 벌리고서 검은 종이 한 장을 뱉어냈다.

    “이건!”

    종이의 내용을 확인한 유펜이 눈을 부릅떴다.

    “스, 스승님! 큰일 났습니다!”

    유펜이 종이를 들고 아직도 숲을 때려 부수는 테머스에게 달려갔다.

    “놈들이 바로 내일 출발하고, 시녀나 하인은 한 명도 데려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뭐?”

    그 말에 테머스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왜!”

    “최대한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지그하르트에 여성 검사들도 있다고….”

    “그 망할 놈들이 끝까지!”

    테머스가 이를 바득 갈았다. 요난 가문에 세작이 있기에 미련 없는 척하면서 나간 건데 이리되면 문제가 생겨 버린다.

    “어, 어떻게 하죠?”

    “후우, 오늘 밤에 헬 웜의 활동력을 8할로 올리라고 전해.”

    “8할이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고통은 죽는 것보다 심하겠지만 버틸 수는 있을 거다. 일정을 늦춰야 하니까. 그 정도는 해야 해.”

    “일정을 늦추신다구요?”

    유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예 출발을 못 하게 한다면 모를까. 일정을 늦춘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아예 출발 못 하면 그 망할 새끼를 죽일 기회가 사라지니까.”

    “예? 하지만 저곳에는 천검대주가 있는데….”

    “그림자를 부를 거다.”

    “아무리 그림자라고 해도 천검대주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년을 죽일 생각은 없다. 내가 노리는 건 라온 지그하르트 그 한 놈이야. 그림자를 이용해서 천검대주를 막은 뒤에 그 새끼에게 ‘잿독’을 퍼뜨리면 그만이다. 놈이 죽는다면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겠지.”

    그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라온. 그 건방진 새끼는 내가 죽일 거야. 피부 가죽이 모조리 녹아내리는 꼴을 봐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하나 더!”

    유펜이 고개를 끄덕이고, 까마귀에게 전할 내용을 적으려고 할 때 테머스가 손을 들었다.

    “레트란에 있는 그 미치광이에게도 암살자를 보내.”

    테머스가 이를 바득 갈았다.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는 요난 가문의 힘이 필요하다. 지그하르트든, 성자든 넘겨줄 수는 없어.”

    *     *      *

    달이 거먹구름에 숨은 어둑한 밤.

    요난 가문 9층 가장 안쪽에 있는 분홍색 문이 조용히 열리고 검은 인영이 들어왔다.

    방에 들어온 검은 인영은 익숙한 걸음으로 중앙에 있는 침대로 향했다. 엔시아는 고통을 느끼는지 잠에 빠진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가씨.”

    “으음….”

    이름을 불러도, 엔시아는 깨어나지 못하고 옅은 신음만 흘렸다. 열기가 심한지 피부가 평소보다 더 빨갛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스으윽.

    인영이 입안에서 작은 천 조각을 꺼냈다. 천 조각에 감싸져 있던 붉은 바늘을 빼내서 엔시아의 미간을 찔렀다.

    “어?”

    하지만 바늘은 엔시아의 피부를 파고들지 못했다. 흡사 돌을 찌른 것처럼 끝부분이 구부러져 버렸다.

    “이, 이게 무슨…허억!”

    바늘을 빼려 할 때 엔시아가 눈을 떴다.

    “너였군.”

    바다 같은 푸른 눈이 아닌 죽음을 담은 듯한 시뻘건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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