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05화 (205/653)

제205화

요난 가문으로 이어지는 뎀벨 시 중앙 도로.

백의를 입고 지팡이를 든 중년인과 허리에 검을 찬 청년이 같은 보폭으로 길을 오른다. 두 사람은 분명 말을 하고 있음에도 목소리와 발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드디어 연락이 왔군요.”

청년은 옆으로 길게 이어지는 요난 가문의 담벼락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참지 못하고 그 쓰레기들을 모조리 태워버렸을 거다.”

노인은 인자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살벌한 말을 흘리며 손을 탁탁 털었다.

“죽는 게 더 나은 벌레들이 주제도 모르고 찾아오는 꼴이라니, 그분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우물에 독이라도 풀었을 겁니다.”

청년 역시 부드러운 입매로 지독한 말을 뱉어냈다.

“딱히 안 할 필요가 있나? 일을 끝내고 떠날 때 하면 되지. 내 취미가 뭔지 알잖아.”

“당연히 알고 있죠. 직접 살린 환자에게 더 지독한 고통의 병을 심는 거잖습니까.”

“그 맛에 이 일을 계속하는 거지.”

노인이 소매를 올리며 빙긋 웃었다.

“일은 잘 되겠죠? 갑자기 페드릭에게 간다고 하면 문제가 커질 텐데요.”

“그러니 사료를 주어야지.”

“사료라고 하신다면?”

청년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엔시아 요난의 치료에 차도를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당연한 일이야. 그건 병도, 저주도 아니니까.”

“그렇죠. 그 존재를 아는 건 저희뿐이니까.”

“마지막으로 페드릭 그 미치광이를 찾으려 할 때 우리가 가서 그 계집의 고통을 줄여주면 어떻게 될까?”

“미쳐 날뛰겠죠. 어떻게든 구해만 달라고 모든 걸 바칠 겁니다!”

“맞아. 페드릭에게 간다는 계획을 포기하고, 뭐든 다 해주려 할 거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올라간 입매 위로 사이한 기운이 번들거렸다.

“우리는 그 어린 계집을 치료하는 척 시간을 끌면서 요난의 돈과 아티팩트를 빼내고, 사람을 심으면 된다. 어렵지 않은 일이야.”

“그래서 사료라고 하신 거군요!”

“그래. 개에게 먹이를 주듯 천천히 길들이는 거야. 꾸준히 희망을 주면서.”

그는 지독할 정도의 이야기를 부드러운 미소를 피워내며 말했다.

“절대 치료를 끝내서는 안 돼. 일 년. 일 년이 지났을 때 요난의 절반은 우리 손에 들어와 있을 거다. 그 이후에 요난을 먹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지.”

“의학과 주술만 능통한 게 아니라, 심계마저 뛰어나시다니, 존경합니다. 스승님!”

“앞으로는 네가 할 일이니, 잘 배워두도록.”

“예!”

대화가 멈췄을 때 두 사람은 요난 가문의 입구 앞에 도착해 있었다.

“흠.”

노인은 소리를 막던 기막을 지우고,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문지기에게 다가갔다.

“엔시아 아가씨의 상태를 보러 온 치료사 테머르라고 합니다.”

*     *      *

라온은 벙찐 표정으로 엔시아를 바라보았다.

‘뭐지?’

갑자기 잘 생겼다고?

웬만한 사람의 심리는 파악할 수 있다고 자부하지만 지금 일어난 저 여자의 생각은 전혀 읽지 못하겠다.

“오지게 완벽해.”

엔시아는 반쯤 풀린 눈으로 라온을 보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어?”

“저, 저게 무슨….”

“라온이 잘생긴 건 맞긴 한데….”

“뭐, 뭐지?”

셰릴과 다른 검사들도 당황하여 입을 떡 벌렸다.

“아, 죄송해요.”

미셀이 헛바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다만 설명을 좀….”

라온이 볼을 긁적였다. 스스로 외모가 나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잘 생겼다고 하는 사람은 실비아와 헬렌 이외에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혹시 심미안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미셀은 라온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엔시아를 놔두고 뒤를 돌았다.

“심미안?”

“아름다움을 찾거나, 발견해내는 안목이라는 뜻이에요. 저희 요난 가문은 예술가이자, 장인으로서 긴 세월을 이어온 덕분에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심미안을 가진 채 태어나죠.”

그녀가 방에 이곳저곳에 놓인 보석들을 가리켰다. 보석들은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고 세공만 했음에도 찬란한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특히 저 아이는 요난 가문에서도 격이 다를 정도의 심미안을 가지고 있어요. 어떻게 해야 보석 본연의 아름다움과 힘을 가진 채 세공할 수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죠.”

“아….”

“덕분에 엔시아가 만든 아티팩트는 전부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어요. 반면 그 심미안이 너무 강해서 며칠 동안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보석만 보고 있기도 하지만요.”

아까 미셀이 엔시아의 실력이 대단했다고 말한 건 그저 딸 자랑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럼 지금은….”

“검사님을 보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이미 장인의 세공을 거친 완벽한 보석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보석이에요!”

엔시아는 미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치고 들어왔다.

“미쳤어…. 머리 색, 눈빛, 콧대. 어떻게 모자란 부분이 하나도 없지?”

“으….”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라온의 얼굴이 붉어졌다.

‘힘든데.’

차라리 7사도와 싸우는 게 낫지. 외모 칭찬을 듣고 있으니, 속이 거북해졌다.

-심미안이 뛰어나다?

라스가 팔찌 위로 나와 턱을 치켜들었다.

-네 몸을 내놓아보아라.

‘넌 또 뭔데?’

-저 인간에게 본왕의 미모를 보여주고 싶구나. 그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마주하지 못하고 기절하게 될 것이니라. 그 이후에는 평생 본왕을 추종하며….

‘아, 그래.’

녀석의 자랑이 시작되면 말이 끝나질 않으니 무시했다.

-야! 들어! 들으라고!

팔을 휘젓는 녀석을 억지로 밀어내고, 엔시아를 보았다.

“최고야. 존나 완벽해… 악!”

홀린 눈으로 라온만을 바라보던 그녀가 신음을 터트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분들은 누구시죠?”

엔시아는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물어봤어야 할 질문이 이제야 나오다니, 하루종일 보석만 보고 있었다는 게 거짓이 아닌 모양이다.

“이분들은 널 레트란으로 호위하기 위해서 지그하르트에서 오신 분들이야.”

라온이 말을 하기 전에 미셀이 먼저 입을 뗐다.

“지그하르트….”

엔시아는 라온만을 바라보며 푸른 눈동자를 빛냈다.

“네가 치료를 힘들어하는 건 알지만 마지막으로 딱 두 번만 더 진단을 받아보자. 그 이후에는 엄마도 아무 말 안 할게.”

미셀은 손을 모은 채 엔시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럼 저분이 호위해주시는 거예요?”

엔시아가 힘겹게 손을 들어 라온을 가리켰다.

“그래. 이분이랑 다른 지그하르트 검사님들이 함께 갈 거야.”

미셀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에 있는 검사들을 가리켰다.

“아! 이쪽도….”

엔시아는 셰릴, 버렌, 루난, 마르타 보고서도 눈을 반짝거렸다. 심미안이 있다는 말대로 단순히 잘생긴 남자가 아니라, 외모가 뛰어난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모두를 훑은 그녀의 시선은 다시 라온에게 고정되었다.

“검사님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합니다.”

“라온. 이름도 쩔어….”

엔시아가 홀린 듯한 눈으로 라온이라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라온 님도 함께 레트란으로 가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엄마. 저 갈게요. 가서 치료할래요!”

미셀에게 들었던 것과 달리 엔시아는 치료를 거부하지 않고 바로 가겠다고 외쳤다.

“저, 정말이니?”

“네. 대신 저분이 꼭 같이 가야 해.”

엔시아가 힘겹게 손을 들어 라온을 가리켰다.

‘그래도 거부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라온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민망하긴 하지만 저렇게 좋아해 주니, 접근하기 쉬울 것 같았다.

“허어….”

“이거 못생긴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그러게. 갑자기 죽고 싶어졌어.”

“요즘 강물은 따땃한가?”

뒤에 있던 검사들은 본인들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보기만 해서 죄송해요. 라온 님을 보고 있으니, 영감이 떠올라서….”

엔시아가 빨갛게 부푼 오른손을 떨었다.

“영감이요?”

“이렇게 되고 난 이후로 1년 넘게 공방에 들어가지도, 작업을 하지도 못 했거든요. 다 포기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라온 님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더 완벽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고 싶어져요.”

그녀는 만들고 싶은 것들이 떠올라서 가만히 있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렇군요.”

예상대로 그녀는 남녀가 아니라, 그저 예술품을 감상하는 느낌으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게 더 민망했지만.

“생각보다 쉽게 풀렸군요.”

셰릴이 라온과 엔시아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게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어요.”

미셀도 엔시아가 다시 희망을 은 게 기쁜지 미소를 지었다.

“엔시아. 넝마의 성자님을 만나기 전에 한 번만 더 진료를 받고 가지 않을래?”

“테머스 님?”

“그래. 그분도 의술로 유명한 분이시잖아. 말씀은 드려놨으니, 곧 와주실 거야.”

“난 바로 떠나고 싶은데….”

엔시아는 계속 라온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음.”

라온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테머스가 나타나는 타이밍이 너무 공교로워.’

테머스는 데루스 로베르트의 심복 중 하나답게 아무 의미 없이 움직이는 자가 아니다. 분명히 여기에 나타난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다.

“엔시아 님.”

라온이 엔시아에게 다가갔다.

“네? 네!”

“제가 진맥을 한 번 해봐도 될까요?”

“지, 진맥이요? 얼마든지요!”

엔시아는 거리낄 게 없다는 듯 바로 팔을 내밀었다.

“너 의술도 익혔어?”

셰릴이 다가와 눈매를 좁혔다.

“조금은요.”

“누구한테?”

“어릴 때 페드릭 님께 이론을 들었고, 수련생 때 단주님에게도 배웠습니다.”

“페드릭 님이야 그렇다 치고, 리메르? 그 게으름뱅이가 의술도 가르쳤다고?”

“예. 어쩌다 보니.”

“그놈이 널 아끼긴 하는 모양이군.”

리메르에게 배웠다고 하자 셰릴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러났다.

‘역시 리메르 패스.’

리메르가 부상자들의 상태를 빠르게 안정시키는 걸 보고 말해봤는데, 잘 통한다. 리메르 패스는 항상 정답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얼마든지요.”

라온은 팔을 통째로 내미는 엔시아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이게 사람의 피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뜨거웠다.

“윽.”

천을 잡듯이 부드럽게 쥐었는데도 엔시아는 신음을 흘리고, 어깨를 떨었다. 타인의 손에 닿는 것만으로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것 같았다.

“와아….”

엔시아는 이 와중에도 뺨을 붉게 물들인 채 라온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얼굴이 미쳤어.”

감탄하는 목소리를 보니, 죽어도 고개를 돌리지 않을 기세였다.

우우웅.

라온은 만화공의 오러를 최대한 가늘고 얇게 저몄다. 엔시아에게 부담이 가지 않게 그녀의 마나 회로에 오러를 흘려 넣었다.

“윽….”

만화공을 최대한 천천히 운용하는데도 고통이 있는지 엔시아가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군.’

라온이 인상을 찌푸리고 엔시아의 상태를 살폈다.

‘심해.’

마나 회로는 머리카락보다도 좁아졌고, 단전은 이미 녹아내린 듯한 모양새였다. 이 상태로 버텼다는 게 이해 안 될 정도로 최악의 몸 상태. 그녀가 왜 삶을 포기하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좁아진 마나 회로와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의 지속. 역시 비슷해.’

엔시아의 몸을 전체적으로 살핀 뒤 그녀의 상체 부근으로 올라갔다. 체온은 더 뜨거웠고, 마나 회로 역시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좁아져 있었다.

“으으….”

K22

그녀의 떨림이 더 강해진다.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오러를 운용해야 했다. 수련에 빠질 때처럼 집중하여 마나 회로에 조금도 닿지 않게 오러를 움직여 그녀의 머리 부분을 살폈다.

‘아닌가?’

데루스 로베르트는 인간의 머리 부근에 주술이나, 벌레를 심는 방법을 연구했었다. 이 일에도 관여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너무 예민했을지도….’

그 저주받은 계획, 헬 웜은 이미 폐기되었으니까.

헬 웜은 인간에게 지속적인 고통을 주는 벌레를 연구하는 계획이었는데, 꾸준한 고통을 주는 게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단숨에 앗아가 버려서 연구를 폐기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라온이 만화공을 회수한 뒤에 글래시아의 냉기를 주입했다. 순도 높은 냉기는 달아오른 엔시아의 마나 회로를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으으윽!”

엔씨아는 냉기에도 고통을 느끼고 이전보다 더 커진 신음을 터트렸다. 손목으로 전해져 오는 그녀의 떨림에 입술을 깨물며 다시 상체로 올라갔다.

목의 마나 회로를 넘어 냉기가 머리로 향하는 순간 그녀의 뇌에서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놈이다!’

라온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엔시아의 머리 안쪽에서 좁쌀보다도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진한 열기를 보니, 당시에 헬 웜이라 이름을 붙였던 벌레가 분명했다.

‘연구에 성공한 건가.’

벌레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그녀의 몸에 퍼지는 열기가 강해진다. 저놈이 엔시아의 육체를 이 지경으로 만든 원흉이었다.

‘이 미친놈들이 진짜!’

이가 갈린다. 인간을 포기한 데루스와 테머스는 결국 사람의 머릿속에 벌레를 심는 미친 짓까지 저질렀다. 어이가 없어서 잠시 오러의 흐름을 놓칠 뻔했다.

‘어디….’

여기서 제거할 수 있다면 최고의 결과다. 침착하게 글래시아를 운용하여 더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꺄아악!”

엔시아가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냉기로 공격하려는 순간 헬 웜이 그녀를 자극해서 전보다 더 극심한 고통을 준 것이다.

‘어디로….’

동시에 놈의 기척이 사라졌다. 아무래도 냉기를 피해 숨어버린 것 같았다. 기계적이라기보다는 본능적인 움직임. 이 녀석은 레이지 웜과 달리 자아를 가진 것 같았다.

‘위험하군.’

억지로 찾아서 제거하기에는 엔시아의 몸 상태가 최악이다.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성자님이라면 엔시아의 몸 상태를 끌어 올릴 수 있어.’

혹한의 저주를 가진 자신의 육체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였으니, 넝마의 성자 페드릭이 가진 침술과 약학을 이용한다면 엔시아의 몸 상태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가긴 가야겠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엔시아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아프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뇨. 지, 지금 엄청 편해졌어요.”

엔시아가 양손을 꼼지락거리며 입술을 떨었다.

“고통이 훨씬 줄었어요!”

그 말대로 부어 있던 그녀의 팔과 다리의 열이 미세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저, 정말이니?”

미셀이 헉 소리를 내며 다가와 엔시아의 손을 잡았다.

“네. 괜찮아졌어요.”

“엔시아….”

그녀는 딸의 손을 정말 오랜만에 잡았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숨었군.’

헬 웜이 글래시아의 냉기에 겁을 먹고 숨어서 지금 엔시아의 상태가 좋아진 것 같았다.

“어떻게 한 거야?”

셰릴이 옆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그녀의 머리 부근에 열기를 퍼뜨리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아!”

“지, 진짜인가요?”

“정말?”

미셀과 엔시아가 고개를 홱 돌렸고, 다른 검사들 역시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다만 지금 몸 상태로 치료는 무리입니다.”

“그건 어째서죠?”

“너무 오래 앓아서 치료하는 동안 몸이 버티질 못하실 겁니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미셀이 손을 떨며 다가왔다. 간신히 찾은 희망. 그것도 직접 눈에 보이는 희망을 어떻게든 잡으려는 손짓이었다.

“레트란에 있는 넝마의 성자님께 가야 합니다. 페드릭님이 엔시아 님의 몸 상태를 끌어 올려주시면 제가 치료할 수 있습니다.”

놈의 정체를 파악했기에 엔시아의 몸 상태만 회복된다면 무조건 치료할 수 있다.

“정말 가능한 건가?”

“예.”

셰릴이 다시 물어보았고, 라온은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갈게요!”

엔시아가 손을 들어 올렸다.

“저 이제 살고 싶어요!”

“아….”

미셀은 울먹이는 엔시아를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알겠어요. 그럼 바로 준비를….”

그녀가 시종에게 마차를 준비하라고 하려 할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총관 아룬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기다리고 계시던 테머스 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아!”

미셀이 손뼉을 쳤다.

“라온 님. 혹시 테머스 님으로는 안 될까요? 그분도 의술로는 페드릭 님 못지않다고 하던데….”

“안 됩니다. 페드릭 님이 계셔야 100% 치료할 수 있습니다.”

테머스가 이 짓을 한 것과 다를 바가 없는데 그에게 치료를 시키는 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 가문의 많은 것이 데루스 쪽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그, 그렇군요. 그럼 어쩔 수 없지. 돌려보내는….”

“아뇨.”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한 번 불러 보죠. 그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 궁금하니까.”

이 일에 더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 그리고 테머스를 죽이기 위해서 놈을 부르는 게 나았다.

“괜찮으시겠어요?”

“상관없습니다. 다만….”

라온이 손가락을 들어 올려 입을 막았다.

“그 사람이 진단을 내릴 때까지 제가 엔시아 아가씨를 치료할 수 있다는 건 비밀로 해주세요.”

*     *      *

테머스는 요난의 총관 아룬의 안내를 받아 9층에 있는 엔시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부에는 미셀과 엔시아 말고도 칼을 차고 있는 12명의 검사들이 있었다.

‘지그하르트?’

검사들의 제복에 박힌 불타는 검을 본 테머스의 눈동자가 좁아졌다.

‘페드릭 놈에게 데려가기 위해서 부른 모양이군.’

그는 단숨에 상황을 파악하고 검사들을 향해 옅게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지만 너희들이 할 일은 없어.’

이 자리에서 엔시아의 상태가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게 될 테니, 저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북쪽의 척박한 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오셨군요!”

엔시아의 침대 옆에 서 있던 미셀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환자들을 보고 오느라.”

“아니에요. 지금에서라도 와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럼 환자부터 볼 수 있겠습니까?”

테머스는 다른 속셈은 아무것도 없고, 환자만 생각하는 이미지 그대로 엔시아를 가리켰다.

“물론이죠. 엔시아 너도 괜찮지?”

“으응.”

엔시아는 고민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테머스가 입맛들 다셨다. 고통 때문에 진맥을 하는 것과 밖으로 나온 피부가 붉게 부은 것을 보니, 헬 웜이 제대로 박힌 모양이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엔시아의 손목을 잡고, 한참 동안 그녀의 내부를 전체적으로 살폈다.

‘좁아진 마나 회로, 통증에 떨리는 몸, 망가진 단전 그리고….’

테머스는 마지막으로 머리에 자리를 잡은 헬 웜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임이 조금 느리긴 하지만, 제 역할을 해낸 상태였다.

‘조금 잠들어 있어라.’

그는 헬 웜을 잠시 재운 뒤에 엔시아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어떠십니까?”

“아, 토, 통증이 줄었어요.”

엔시아가 주먹을 쥐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정말이니?”

“네!”

미셀도 놀라서 다가와 엔시아를 잡았다.

“어, 어떻게 하신 거죠?”

“엔시아 님의 몸에 열기가 모여 있습니다.”

테머스가 씁쓸한 눈빛을 발하며 말을 이었다.

“굉장히 위험한 곳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 같군요.”

“그게 어디죠?”

“상체 부근입니다. 좋지는 않아요.”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맛을 다셨다.

“아, 그럼 치료는….”

“다행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제가 연구 중인 부분과 연관이 있어서.”

“저, 정말이세요?”

“예. 하지만 처음 보는 증상이라 시간과 비용이 좀 많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환자의 상태가 워낙 좋지 않기도 하고….”

말을 이어가던 테머스가 눈매를 좁혔다.

‘뭐지?’

미셀이 가장 아끼는 자식이 엔시아인 건 요난의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런 보물을 치료할 수 있다고 했는데 반응이 너무 침착했다.

‘이상한데?’

지금쯤이라면 돈이든, 사람이든, 아티팩트든 전부 다 준다는 소리가 나와야 했다.

“어, 어쨌든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치료는 확실히 가능합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지금 물리적인 시간을 말씀드리기는 곤란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처음 보는 증상인지라….”

가문을 차근차근 장악해야 하기에 정확한 시간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엄마. 나 그냥 라온 님에게 치료받을래.”

“치, 치료라구요?”

치료라는 말에 테머스가 눈을 부릅떴다.

“지그하르트에서 와주신 검사님도 이 증상을 치료하실 수 있다고 하셨어서요.”

미셀이 뒤에 서 있는 훤칠한 금발 사내를 가리켰다.

“그, 그게 무슨!”

레이지 웜이라면 모를까. 헬 웜을 제거할 수 있는 건 자신과 로베르트에 있는 극소수뿐이다. 저런 애송이가 고칠 수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치료사도 아니고, 검사가 어떻게!”

“라온 님도 치료사님처럼 통증을 줄여주셨어요.”

엔시아가 홀린 듯한 눈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오래 걸린다고 하셨으니, 전 라온님에게 치료받을래요!”

그녀는 테머스를 쳐다보지도 않고 이미 결정한 듯 손을 들었다.

‘라온? 그러고 보니….’

예전에 데루스가 라온 지그하르트를 조사하라고 명령했던 게 생각났다. 한 가문에서 같은 이름을 쓸리가 없으니, 저놈이 그 라온인 것 같았다.

“자, 자네 이 증상이 뭔지 아는가?”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치료를 하겠다는 건가!”

“치료사님도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아니 난….”

스스로 짠 판에 걸려버린 테머스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거기다 전 저 혼자 치료하려는 게 아닙니다. 엔시아 님을 레트란으로 모시고 가서 페드릭 님과 함께 치료할 생각입니다.

“위험할 수 있네. 가만히 있을 때도 고통스러워하는데, 이동한다면 참기 힘든 통증을 느끼게 될 것이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통증을 줄이는 방법을 알았으니까요.”

라온이라는 애송이는 열받을 정도로 평온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자네는 검사이지, 치료사가 아니지 않은가!”

“치료사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는 페드릭 님에게 나중에는 제 스승님에게 의술을 배웠습니다.”

“서, 성자에게 의술을 배웠다고? 그럼 스승은 누구지?”

“리메르 님입니다.”

“지그하르트의 광검!”

테머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엘프놈이 잡기에 능하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의술도 익혔을 줄은 몰랐다.

“두 사람이 뛰어나다고 해도 자네가 그들의 역량을 모두 이어받지는 않았을 텐데? 어설프게 닦은 의술로 환자를 치료하다간 크게 경을 칠 것일세.”

“테머스 님이 아까 상체 부근에 열기가 모여 있다고 했죠?”

“그, 그렇네.”

“저는 그 부위가 정확히 어디인지도 파악했습니다.”

“무슨….”

“머리.”

라온이 옅게 웃으며 머리를 가리켰다.

“윽….”

테머스가 억지로 인자함을 유지하던 표정을 깨뜨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가, 가주님.”

그는 라온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미셀을 불렀다.

“믿어주십시오. 전 평생 의술에 몸을 바쳐온 사람입니다. 엔시아 님을 데리고 움직였다간 넝마의 성자에게 가기 전에 큰일이 생길 겁니다!”

“으음, 그건….”

“제 일이고 제 목숨이니까. 제가 결정할게요.”

미셀이 고민하듯 입술을 깨물 때 엔시아가 손을 들어 올렸다.

“저는 라온 님을 따라가겠어요.”

“무, 무슨!”

그는 예상외의 답변에 흥분하여 소리를 질렀다.

“저 친구는 검사고, 난 평생을 의술에 바친 치료사야!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의원이라고!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대체 왜 저 검사를 고른다는 건가!”

“이유는 간단해요.”

엔시아는 답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듯 빙긋 웃었다.

“잘 생겼으니까.”

“미, 미친! 치료를 잘못하거나, 늦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무슨 해괴한 소리를 하는 거냐!”

“저 얼굴과 함께라면 죽어도 괜찮아요.”

“끄윽!”

테머스의 이마에 힘줄이 우수수 돋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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