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04화 (204/653)

제204화

“불만 있나?”

천검대주가 서늘한 눈으로 라온과 광풍단원을 쭉 둘러보았다.

“어, 없습니다!”

“당연히 없어요!”

버렌과 마르타가 동시에 소리쳤다. 둘 다 그랜드 마스터에게 검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여 콧김을 뿜어냈다.

“저도!”

드물게 루난조차 앞으로 고개를 내밀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너는?”

셰릴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라온을 바라보았다.

“저도 좋습니다.”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검대주는 모든 검술 묘리에 통달한 무인. 그녀에게 배운다는 건 기연이나 다름없었다.

“내기에 건 검술은 중검과 강검이지만, 내가 너희를 잘못 평가했다는 사과의 의미로 요난 가문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검술들도 설명해주겠다.”

“감사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라온과 광풍단 모두가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중검부터 시작하지.”

셰릴은 시간을 끌거나, 잡설을 시작하지 않고 바로 강의를 시작했다.

“중검의 기본은 검에 육체와 오러의 무게를 싣는 거다. 수직 베기, 수평 베기, 찌르기 같은 기본 검술에도 무게를 얹는다면 훨씬 강한 파괴력을 낼 수 있지. 그 안에 강검의 묘리를 조화시킨다면 위력은 배가 된다. 다만 힘과 위력에 집중되며 속도는 느려진다. 그러니 다른 검술 묘리와 조화를 할 때는 주의해서….”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중검과 검술 묘리의 기본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설명이 간략하고 정확하여 이해하기 굉장히 쉬웠다.

“중검을 계속 수련하면 어떻게 될까?”

셰릴이 바닥에 놓아둔 작은 단도를 쥐었다.

“상대가 받아낼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지겠죠.”

“적이 누구든 일격에 쓰러뜨릴 수 있을 위력을 가지게 될 겁니다!”

“그건 하수와 싸울 때다. 네가 중검을 익혔고, 상대가 같은 수준으로 쾌검을 익혔다고 쳐보자.”

도리안과 크레인의 대답에 셰릴이 고개를 저었다.

“빛살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검사를 느린 중검으로 어떻게 잡아야 할까?”

“으음, 잡기 힘들 거 같은데….”

“맞힐 수가 없으니까.”

“보법도 밀릴 테고.”

“버티다가 한 방을 노려야지.”

검사들은 불리할 것 같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경지에 오른다면 달라. 중검사는 쾌검사에게 절대 밀리지 않는다.”

셰릴의 몸에서 피어난 회색 기운이 단검의 날을 휘감았다.

쿠구구구!

회색 오러가 단검에 맺힌 순간 이 공터 전체에 무지막지한 압력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끄윽!”

“허억!”

“뭐, 뭐야!”

광풍단 검사들은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크으….”

라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거대한 기둥 두 개가 양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게 그랜드 마스터가 보여주는 중검….’

강기를 운용하지 않았음에도 가론의 검과는 차원이 다른 무게와 장악력이다. 자신의 육체로도 서기 힘들 정도의 무게였다.

“이게 중검의 중간 단계다. 검날에 무거움을 담는 것을 넘어서 이 공간 자체를 내리누를 수 있지.”

셰릴이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자, 압력이 줄어들어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럼 검만이 아니라, 공간에 무거움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나?”

“오, 오러를 검에 가득 담는….”

“아니지. 주변에 퍼뜨린 오러를 이용해서….”

광풍단 검사들이 각자 의견을 말했지만 셰릴의 고개는 끄덕여지지 않았다.

“심상.”

라온은 생각을 마친 뒤에 천천히 입을 뗐다.

“검에 무거움을 담는 심상을 그립니다.”

“정답이다.”

셰릴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검을 내렸다.

콰아아아아!

이전보다 배는 더 거세진 압력이 전신을 짓눌렀다.

“끄으윽!”

‘아악!”

크레인과 도리안이 먼저 비명을 터트리고, 버렌과 마르타, 루난도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으윽!”

버티고 있는 건 라온뿐이었다.

“조금 전에 내가 검에 담은 건 통나무였고, 지금 내가 검에 담은 건 바위다. 차이를 알겠나?”

“두, 둘 다 지랄 맞게 무겁습니다….”

마르타가 이를 갈며 대답했다.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전에는 한 부위가, 지금은 전신이 눌리는 기분 아닌가?”

“아….”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셰릴의 말대로 이전은 어깨만 누르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전신이 짓눌리고 있었다.

“검에 무게를 담는다는 생각을 한다고 중검이 되는 게 아니다. 자면서 검술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검형에 집중하면서, 그 검술로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도 생각해야 한다.”

셰릴이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심상을 상세하게 그릴수록 그 효과는 뛰어나다. 멀리 그리고 높이 나아가고 싶다면 매일 시간을 정해서 심상 수련을 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돈을 주고도 듣지 못한 교육에 광풍단 모두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녀는 단검을 내려놓고, 본인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와, 몸으로 얻어맞으니까. 이해가 쏙쏙 되네요.”

“어렵긴 한데,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어.”

“그러게. 역시 그랜드 마스터는 달라.”

광풍단 검사들은 셰릴의 강의에 감동했는지 전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심상이 중요하군.’

라온은 셰릴이 놓고 간 단검을 보며 눈을 빛냈다. 라스, 글렌, 리메르, 셰릴까지 고수들은 모두 심상을 중요시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심상으로 쌓아온 무력이 승패를 가르는 것 같았다.

-본왕이 말했잖느냐. 심상만 쌓으면 다 된다고.

‘그러게.’

특히 호구왕인 라스가 매번 같은 말을 하는 걸 보면 앞으로 심상 수련 시간을 더 늘려야 할 것 같다.

-음? 코가 간지럽느니라.

‘코?’

-네놈 방금 본왕에게 실례되는 생각 했지.

‘기분 탓이야.’

라온이 어색하게 웃었다.

*     *      *

“반은 천막을 정리하고, 반은 요리를 하시는 게 좋겠네요. 인원은 알아서 나누시길.”

라온은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천검대를 깨워서 일을 시켰다.

“으윽….”

“꾸, 꿈이 아니었구나.”

“부대주님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나라고 쟤가 그렇게 괴물일지 알았겠냐고!”

에컨과 천검대원들은 어제 일이 현실이라는 걸 깨닫고 죽을 듯한 표정으로 각자 할 일을 찾아 움직였다.

“으음….”

셰릴은 요리에 자신이 없는지 천막을 정리하는데 합류했다.

“우, 우리도 도와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 일단….”

“정지.”

라온은 나서려는 광풍단원들을 멈춰 세웠다.

“천검대 분들이 잡일을 하는 동안 너희는 수련을 한다.”

“어?”

“수련을 하라고?”

“여기서?”

버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천검대 분들이 희생하여 시간을 만들어줬으니, 수련이나 해. 여기서 가장 약한 건 너희니까.”

“크윽!”

“바, 반박할 수가 없네요….”

크레인과 도리안이 목을 긁적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라온은 광풍단이 몸을 풀고 각자 훈련을 시작한 걸 확인하고 눈을 감았다.

‘무거움이라….’

어제 셰릴이 보여주었던 중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단순히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짓누르는 그 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는 다른 심상이 필요하겠어.’

라온은 식사를 준비하고, 천막을 치우는 짧은 시간에도 강해지기 위한 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하!”

에컨이 수련하는 광풍단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이 와중에 수련을 시킨다고? 저 녀석 진짜 17살 맞아?”

조롱을 하거나, 지적을 할 줄 알았는데, 라온은 검사들에게 훈련을 지시했다. 예측이 안 되는 녀석이다.

“대주님. 쟤들 시간이 생겼다고 노는 게 아니라, 수련하잖습니까. 저희 정말 괜한 짓 한 거 같은데요?”

“나도 알고 있어.”

셰릴이 명상에 빠진 라온을 보며 인상을 팍 찡그렸다.

‘정말 쓸데없는 짓을 해버렸어.’

라온을 더 높이 보내기 위해서 짠 계획이지만, 저 아이는 자신의 예측을 이미 넘어서 있었다. 심계와 정신력만큼은 산전수전 다 겪은 검사들보다도 뛰어난 것 같았다.

‘훈련을 시키는 것도 좋았고.’

천검대가 잡일을 하게 되면서 생긴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훈련하게 만든 것도 마음에 쏙 들었다.

“근데 저희 진짜 이 임무 끝날 때까지 잡일 계속하는 건 아니겠죠?”

“아닐 거다. 저 아이들도 생각이 있으니, 적당히 하고 말겠지.”

셰릴의 말에 에컨과 천검대 검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라온이 간이 부었어도 적당히 하고 일을 반반으로 나누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서 쉽니다. 천검대 분들은 정찰, 요리, 천막 설치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라온은 천검대가 광풍단을 괴롭혔던 것보다 하루 더 많은 4일째 모든 잡일을 천검대에게 떠넘겼다.

“아, 장작도 많이 좀 주워오세요. 새벽에 온도가 떨어지더라구요. 훈련에 쓰려고 하니까. 몽둥이도 몇 개 주워오시고.”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천검대를 하인처럼 부려 먹었다.

“오늘은 고기 좀 많이 넣어주세요.”

“맞아. 어제 맛은 있었는데 고기가 좀 적었어.”

“스튜의 생명은 고기의 양이지.”

처음에는 미안해하던 광풍단원들도 이제는 대놓고 여러 주문을 하고 있었다.

“나는 시원하게요.”

“시, 시원하게….”

에컨이 루난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 슬리온 가문의 아이는 매번 음식을 차갑게 해달라고 해서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너희는 훈련 시작해.”

“옙!”

“알겠어.”

광풍단은 라온의 지시를 받자마자 서로 떨어져서 각자 모자란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으으….”

에컨이 헛바람을 흘렸다. 광풍단이 자신들에게 잡일을 시켜놓고 노는 게 아니라, 훈련을 하고 있기에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말 그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외통수였다.

“부대주님….”

“이거 정말 계속해야 해요?”

“포기해. 이제 어쩔 수 없다.”

에컨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돌아가면 크게 한 번 쏴….”

“부대주님. 말들 먹이도 부족하던데, 가서 건초 좀 주워오세요.”

라온은 나무에 묶어 둔 말들을 가리켰다.

“으응? 가져온 풀이 있잖아.”

“그거 오래되어서 별로 안 좋아하더라구요.”

“그, 그래도 어제 비가 와서 건초를 구하기에는….

“숲 깊이 들어가면 비에 안 젖은 풀이 좀 있지 않을까요?”

그는 알아서 하라는 듯 빙긋 웃고 돌아갔다.

‘아, 악마야….’

에컨이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자신들이 먼저 시비를 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부려 먹을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다.

“대, 대주님!”

셰릴을 보았지만, 그녀는 모른 척 고개를 홱 돌렸다.

“크윽! 망했어.”

에컨은 불을 피우느라 검게 물든 손으로 땅을 내리쳤다.

“진짜 잘못 걸렸다고!”

*     *      *

라온은 그 어느 때보다 편한 여정으로 요난 가문이 있는 뎀벨 시에 도착했다.

따뜻한 지역이다 보니, 지열과 해충을 피하기 위해 건물들이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대주님이 지휘하시죠.”

라온이 옅게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럼 이제 그 조건은 끝….”

“그건 아니죠.”

기대감을 드러내는 셰릴에게 고개를 저었다.

“약속대로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때까지는 잡일을 해주셔야겠습니다.”

불침번과 식사를 챙겨주고. 강의까지 해주는 호구들을 놓아주어야 쓰겠는가. 끝까지 써먹어야지.

“젠장!”

“진짜 악귀야….”

“난 앞으로 절대 광풍단이랑 임무 안 나간다.”

에컨과 천검대는 라온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후우….”

셰릴은 가는 한숨을 쉬고 뎀벨의 중심가에 있는 요난 가문으로 향했다. 이전에 와보았는지 길을 찾는 게 빨랐다.

“와….”

“진짜 크네!”

“이게 제작 가문이라는 게 놀랍다.”

사실 찾을 필요도 없었다. 요난 가문은 뎀벨 시의 4분지 1을 차지할 정도로 거대한 땅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군,’

요난 가문의 담벼락은 성벽처럼 높았고, 검은색 보자기에 가린 것처럼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아티팩트의 힘인 것 같았다.

“신분과 용건을 밝히십시오.”

정문 앞에 선 문지기들이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창대를 움켜쥐었다.

“지그하르트에서 왔소.”

셰릴이 앞으로 나오며 지그하르트를 상징하는 패를 보여주었다.

“아!”

“지, 지그하르트!”

패를 확인한 문지기들은 황급하게 고개를 꾸벅이고 옆으로 물러섰다. 내부와 연결되는 방식인지 바로 문이 열렸다.

찌이이잉!

거대한 철문이 열리며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티팩트 장인들의 가문답게 안쪽에 형태가 다른 공방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열린 정문으로 정장 차림의 중년인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요난의 총관 아룬이라고 합니다.”

“천검대의 셰릴입니다.”

“천검대주님의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명문가의 총관답게 아룬은 셰릴의 이름을 듣고도 당황하지 않고 예의를 갖췄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는 손을 뻗으며 앞을 가리켰다.

“가자.”

모두는 아룬의 뒤를 따라 요난 가문의 중앙에 있는 10층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 안에는 마법 장치가 되어 있어 계단을 오르지 않고도 바로 10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 문….’

라온이 10층에 딱 하나 있는 방문을 보고 눈매를 좁혔다. 방문은 철 같기도 했고, 나무 같기도 했으며, 한 장의 종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것도 아티팩트겠네.’

아마 허락된 자는 종이 문처럼 가볍게 열 수 있고, 허락이 안 되면 그 무엇보다 단단한 강철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들어가시죠.”

아론이 앞을 가리키자, 두 짝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

시야가 밝아진 것처럼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내부의 전경이 드러난다.

방 전체에는 사용법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아티팩트들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어서 발 디딜 틈도 없었고, 중앙의 소파에는 적발을 왼쪽 어깨로 내리고 있는 중년 여성이 앉아 있었다. 선이 굵어 시원함이 돋보이는 미인이었다.

‘미셀 요난.’

저 중년 여성이 바로 요난 가문의 가주이자, 현재 아티팩트 제작으로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대장인이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셰릴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타 가문의 가주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이다.

“오랜만이에요. 천검대주.”

미셀 요난도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셰릴은 바닥에 깔린 아티팩트들을 용케 밟지 않고 미셀의 맞은 편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와주셔서 고마워요.”

“저희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셰릴은 대답하며 미셀의 손에 있는 패를 보았다. 붉은 검이 그려진 패에는 글렌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저게 바로 글렌이 남겼다는 빚인 것 같았다.

“에컨 부대주님도 잘 지내셨죠?”

“아, 예. 가주께서는 더 아름답고 젊어지셨습니다.”

에컨은 그 근육에 맞지 않게 낯부끄러운 소리를 잘도 했다.

“후후, 아니에요. 그리고 이분은….”

손을 젓던 미셀의 시선이 라온에게 향했다.

“광풍단 부단주 라온입니다. 요난의 주인을 뵙습니다.”

라온이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아! 7사도를 쓰러뜨리셨다던!”

미셀이 눈을 크게 떴다. 7사도가 쓰러졌다는 소문은 여기까지 퍼진 모양이다.

“운이 좋았습니다.”

“근데 정말 잘생기셨군요.”

“예에?”

무력이 아닌, 외모 칭찬에 라온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무력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렇게 잘생기셨을 줄은 몰랐어요. 어떤 보석과도 다르시군요.”

그녀는 라온의 얼굴을 이리저리 보며 탄성을 흘렸다. 사람이 아니라, 무슨 예술품을 감상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가주님. 시간이 많지 않으니, 일 이야기부터 시작하죠.”

“아, 미안해요. 직업병이 있어서.”

셰릴의 말에 미셀이 본인의 뺨을 두드리며 사과했다.

“제게 엔시아라는 딸이 하나 있어요.”

미셀은 글렌의 패를 테이블 중앙에 밀며 천천히 입을 뗐다.

“막내라 모두의 사랑을 받고 자라서 밝고,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아티팩트 제작에도 재능이 넘쳤죠. 제 최고의 걸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이였어요. 이 자리를 넘겨줄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그녀는 타인인 지그하르트 앞에서도 후계자에 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밝혔다.

“그런데 작년 중순부터 그 아이의 몸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문제라고 하신다면….”

“처음엔 손가락 마디 하나가 아프다고 하더라구요. 꼭 뜨거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작업하다가 가시가 박혔나 했지만 그건 아니었어요. 치료사나, 의원도 별문제 없다고 하기에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미셀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한 달 뒤에는 손가락이. 또 한 달 뒤에는 손 전체가 아프다고 하더군요.”

“손가락 한 마디에서 손 전체로?”

“예. 고통도 점점 심해져서 바늘이 아니라, 불에 달군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라고 해요.”

“그런….”

“허어!”

그게 얼마나 심한 고통인지 알기에 천검대와 광풍단 모두가 인상을 찡그렸다.

“예상하시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죠. 손에서 손목, 팔뚝, 팔. 왼손에 오른 다리까지. 지금 그 아이의 몸 절반 이상은 고통에 잠겨 있는 상태에요.”

미셀의 안색이 시꺼멓게 질려갔다. 본인이 아팠으면 좋겠다는 듯 손을 바르르 떨었다.

“유명한 신관과 의원들도 치료 방법은커녕 원인도 찾지 못했어요. 발작 주기도 점차 짧아지고, 고통은 심해지니, 이젠 치료조차 거부하고 그냥 죽겠다고 하고 있어요.”

“음….”

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정말 칼로 찌르는 고통이 전신의 반 이상에서 전해진다면 죽는 것보다 더 지독한 통증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상태를 보는 것도 힘들 테고.’

치료할 때 누가 만지면 더 고통이 심할 테니. 치료를 거부한다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근데 뭔가 익숙한데….’

바늘에서 칼처럼 점차 심해지는 통증 그리고 그 부위가 전신을 퍼져나간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마지막 희망으로 넝마의 성자님께 걸어보기로 했어요. 하지만….”

“연락이 되지 않으셨군요.”

“맞아요.”

미셀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넝마의 성자 페드릭은 눈앞의 환자를 최우선을 생각한다. 그 지역에 있는 환자가 모두 사라지지 않는 이상 미셀의 딸을 구하러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패를 썼어요. 넝마의 성자님께 데려가서 제 딸아이를 구해달라고.”

“알겠습니다. 임무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셰릴은 글렌의 이름이 적힌 목패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는 게….”

“죄송하지만 며칠 후에 가도 될까요?”

“이유가 있습니까?”

“치료사 테머스 님이 근처 마음에 계시다고 해서 마지막으로 그분께 진단받게 하고 떠났으면 해요.”

“테머스….”

라온이 뒤로 뺀 손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오랜만에 듣는 더러운 이름이네.’

테머스는 로베르트 가문 소속으로 대륙 전체에 이름이 퍼진 유능한 치료사였으며, 데루스의 어두운 면을 아는 놈의 심복 중 하나였다.

“엔시아가 테머스 님의 치료를 거부할 가능성이 많지만, 억지로라도 보이려고 해요.”

미셀의 얼굴은 바싹 마른 상태다. 딸에 대한 걱정과 치료에 대한 불안에 혈색이 정말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냄새가 나는데.’

로베르트는 예전부터 뛰어난 가문에 빚을 만들거나, 가주를 죽여서 복속시키는 걸 좋아했다. 특히 아끼는 테머스를 아무 의미도 없이 보낼 놈이 아니었다.

“저기.”

라온이 처음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따님을 한번 뵈어도 되겠습니까?”

“엔시아를요?”

“예. 지금 상태와 문제를 알아두어야 이동할 때 적당한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말이 맞습니다. 한 번 뵈어야 계획을 짤 수 있을 것 같군요.”

셰릴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 아이가 1년 넘게 앓고 있어서 신경이 정말 날카로워요. 최근에는 진맥이나, 상태를 살피는 것도 못 하게 해서….”

“괜찮습니다. 보게만 해주십시오.”

“후우….”

다시 부탁하자, 미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그런데 당신은 괜찮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녀는 라온의 얼굴을 보며 기묘한 말을 남겼다.

*     *      *

라온은 미셀을 따라 9층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분홍색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커다란 침대에 누워 있는 젊은 여성이 보였다. 미셀처럼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한 미인이었는데, 입술은 말랐고, 피부는 창백하여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왼손은 달군 유리처럼 붉게 부풀어 있었다.

‘심하군.’

라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외부의 상처가 없음에도 저런 상태라면 평범한 사람이 견디기 힘든 고통일 게 분명했다.

“음….”

셰릴도 그걸 느꼈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내부의 기운이 너무 적습니다. 이동할 때 주의를 해야겠군요.”

“마차는 저희가 준비했어요. 저 아이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로 충격이 적은….”

두 사람이 마차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라온은 엔시아를 향해 다가갔다.

‘만약 데루스가 작업을 친 거라면….’

그녀를 살피기 위해 오러를 살짝 끌어 올렸을 때였다.

“으윽….”

엔시아가 자그마한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가 방에 있는 사람들을 쭉 둘러보다가 라온의 앞에서 멈췄다.

“에, 엔시아! 놀라지 마렴! 이분들은!”

“아….”

당황한 미셀이 다가갈 때 엔시아의 입술에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존나 잘 생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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