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에컨은 느긋하게 힘을 끌어 올리며 씩 웃었다.
‘젊다 못해 어려서 그런가? 자신감이 넘치네.’
3살짜리 어린 아이가 보기에도 뻔한 승부에 모든 것을 걸다니, 셰릴의 말대로 라온은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상과는 조금 다른 방법이지만, 확실히 알려줘야겠지.’
셰릴에게 허락을 받지는 않았지만, 괜찮을 거다. 어떻게든 라온의 기를 꺾기만 하면 되니까.
“시작해도 되겠지?”
에컨이 턱을 모로 틀어 올리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예. 얼마든지.”
“음?”
웬만한 검사도 비명을 지를 정도의 악력으로 압박을 했는데, 라온의 표정은 평소처럼 덤덤했다.
‘나름 힘 좀 쓴다는 건가?’
하긴 그러니 팔씨름 대결을 신청했겠지.
가끔 말랐는데 의외로 힘이 좋은 검사들이 있다. 라온도 그런 실전 근육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소용없지만.’
에컨이 미소를 짓고서 옆에 있는 천검대 검사에게 눈짓했다.
“둘 다 준비됐습니까?”
천검대 검사가 라온과 에컨이 맞잡은 손을 흔들며 물었다.
“그래.”
“예.”
“그럼 시작!”
에컨은 시작하자마자 손아귀에 힘을 가득 주었다. 굳이 넘길 필요도 없이 악력으로 짓눌러버리겠다는 생각이었다.
쿠구구구!
맞잡은 두 손에서 피어나는 힘의 격돌로 팔꿈치를 대고 있는 바위가 깨질 것처럼 흔들렸다.
‘뭐지?’
상당히 많은 힘을 주고 있건만 라온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손도 찌그러지지 않고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
‘좀 이상한데?’
지금 발휘한 힘은 전력의 7할 이상이다. 웬만큼 힘을 쓰는 검사라도 기겁하면서 손을 뿌리쳤어야 했는데, 라온의 표정은 차라도 마시는 것처럼 평온했다.
“부대주님. 지금 힘주시는 거 맞죠?”
라온은 제대로 하고 있냐는 듯 눈썹을 살짝 내렸다.
“하!”
에컨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적당히 하려고 했는데….’
투쟁심이 마음에 드는 녀석이라 가볍게 하려는 생각을 버렸다. 저 건방짐은 확실히 고쳐놓아야겠다.
“물론 아니지! 지금부터가 진짜다!”
에컨이 팔 전체에 힘을 주며 라온을 밀어붙였다.
쿠구구구구!
바위가 박혀 있는 땅까지 진동이 일어날 정도의 괴력이 뿜어졌다.
‘이번 건 좀 아플 거다!’
육체가 발휘할 수 있는 모든 힘을 폭발시켜 라온을 짓눌렀다.
하지만.
‘뭐, 뭐지?’
에컨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왜 안 밀리는 건데!’
왜 안 쓰러지는 거냐고!
라온의 팔은 조금도 밀리거나 흔들리지 않고, 천년 묵은 나무처럼 그대로 박혀 있었다. 거대한 벽. 아니, 끝이 보이지 않는 산이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이익!”
이를 꽉 물며 고개를 들어 라온을 보았다.
“아….”
어두운 밤의 호수처럼 잔잔한 붉은 눈동자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전력을 다하고 있음에도 라온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흠?”
라온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여쭈어볼게요. 정말 힘주고 계신 거 맞죠?”
“너, 너 어떻게….”
목소리조차 평온하다. 이건 말이 안 된다. 대체 무슨 놈의 힘이 이렇게 강하단 말인가.
“이제 제 차례네요. 가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어마어마한 힘이 훅 들어왔다. 하늘 끝까지 치솟은 해일에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끄으으윽!”
팔 힘만이 아니다. 손아귀에서 전해지는 악력에 손가락이 부러질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으흡!”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팔에 힘을 주었지만 라온의 힘은 의지로 버틸 수준이 아니었다.
‘트, 트롤? 아니 오우거로도 모자라!’
몬스터로도 표현이 안 될 정도의 괴력에 어깨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너무 강해서 자신도 모르게 오러가 움직일 정도였다.
‘안 돼! 절대 안 돼!’
지더라도 반칙을 하고 질 수는 없었다. 일어나려던 오러를 다시 단전으로 집어넣었다.
“이야아아!”
에컨이 악을 지르며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천검대 부대주라는 직책과 시작하기 전에 라온을 무시했던 말이 생각나서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콰아아앙!
두 사람의 막대한 힘을 견디지 못하고, 바위가 무너졌다. 피어나는 먼지가 걷혔을 때 보이는 건 바닥에 깔린 에컨의 손등이었다.
“끄윽….
에컨이 가는 신음을 흘렸다. 뼈가 조각난 것처럼 손등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엄청났지만, 창피하여 아프다는 티도 낼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라온을 보았다. 녀석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손등을 툭툭 털고 있었다.
‘괴, 괴물….’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오직 괴물이라는 단어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생각보다 별로네요.”
라온은 입맛을 쩝 다셨다.
“그 근육들.”
그가 부풀어 오른 에컨의 오른팔 근육들을 가리켰다.
“멋으로 만드신 겁니까?”
“머, 멋? 완벽하게 단련된 내 근육이 멋이라고?”
에컨이 턱을 떨었다. 자신처럼 힘을 키우는 사람에게 몸을 멋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건 최악의 모욕이었다.
“외, 왼손!”
에컨은 깨진 오른손을 빼고,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난 왼손잡이다! 왼손으로 다시 해!”
* * *
라온은 이를 악문 채 왼손을 내미는 에컨이 아니라, 그의 뒤편에 선 셰릴을 보았다.
‘천검대주도 표정이 없는 건 아니었네.’
셰릴은 그 가는 눈매가 보름달처럼 둥글게 보일 정도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아니….”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듯한 표정이다. 에컨이 진다는 상황 자체를 생각도 안 한 것 같았다.
“허억….”
“부, 부대주가 졌다고? 그것도 힘으로?”
“이게 무슨….”
천검대 검사들 역시 상상도 못 한 결과에 턱을 덜덜 떨었다. 하루종일 지적만 하던 입들이 꽉 닫힌 걸 보니 속이 시원해졌다.
“우와아아아아!”
“라온.”
“부단주님!”
“시발! 잡일 해방이다!”
반면 광풍단 검사들은 기대하지 않던 승리에 서로를 붙잡고 환호를 터트렸다.
“왼손으로도 해보자고! 난 왼손잡이란 말이다!”
에컨은 즐거워하는 광풍단을 노려보다가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근육을 멋이라고 한 것에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제가 왜요?”
라온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승부는 제 승리로 이미 끝났는데, 더 할 필요가 없죠.”
“그, 그건….”
“천검대분들끼리 누가 어떤 잡일을 할 건지에 대해서 토론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
“짐!”
에컨이 천막 옆에 둔 짐들을 가리켰다.
“너희가 제안했듯이 이번에 진다면 우리가 너희들의 짐까지 들겠다!”
“아, 그건 괜찮습니다. 도리안.”
“옙!”
라온이 손가락을 튕기자, 도리안이 헤죽 웃으며 천막 앞으로 향했다. 녀석은 검사들의 짐이 든 배낭으로 저글링을 하다가 묘기처럼 배 주머니에 하나씩 쏙쏙 넣었다.
“보셨죠? 저희에겐 최고의 보급관이 있어서 필요 없습니다.”
“아….”
그 모습을 본 에컨이 내민 왼팔을 바르르 떨었다.
“다만.”
라온이 에컨의 허리에 있는 검을 가리켰다.
“저녁마다 중검과 강검에 대한 검술 강의를 해주신다면 해드리겠습니다.”
“가, 강의?”
“예. 어설픈 강의가 아니라, 중검과 강검의 진의를 확실하게 알려주신다면 왼손으로도 승부를 내겠습니다.”
“그 정도야 얼마든지!”
에컨은 승부만 할 수 있다면 목숨도 걸 기세였다.
“그럼 내가 이기면 잡일을 다시 가져가고, 네가 모욕한 내 근육들에게 사과해라!”
근육에게 사과를 하라니, 근육쟁이의 자존심은 생각보다 더 대단했다.
“알겠습니다. 받아들이죠.”
“좋다! 하자!”
에컨이 그 자리에 엎드려서 왼팔을 내밀었다.
“바닥에 누워서 하는 겁니까.”
“아까 그 바위는 내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힘을 제대로 못 냈다! 소매도 정리했으니, 이번에는 다를 거다!”
왼손잡이에, 흔들리는 바위에, 펄럭이는 소매까지 핑계가 참으로 다양했다.
“좋습니다.”
라온이 가벼운 미소를 짓고서 에컨의 손을 잡았다.
-멍청한 놈!
라스가 에컨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네놈 같은 근육 돼지가 본왕의 우아하고 탄력있는 힘을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녀석은 에컨의 머리를 두드리며 한심하다고 떠들어댔다.
“그, 그럼 시작!”
“으리야아아아아!”
에컨은 시작하자마자 전신의 힘을 폭발시키며 밀고 들어왔다. 왼손잡이라는 말이 정말인지 오른손보다 훨씬 강력했다.
‘그래도 의미 없지만.’
시스템이 있는 자신에게 오른손, 왼손의 의미는 없다.
양손 모두 근력 180을 그대로 발휘할 수 있고, 뭔가 부순다고 생각하면 파괴왕 칭호의 힘도 낼 수 있다. 에컨이 아무리 힘이 좋아도 인간인 이상 자신을 넘기는 건 무리였다.
“지루하니까. 이번에는 빨리 끝내겠습니다.”
“뭐?”
라온은 바르르 떨며 힘을 주는 에컨의 왼손을 가볍게 넘겨버렸다.
콰아아앙!
오러 없이 순수한 근력으로 밀어냈을 뿐인데, 바닥에 큼지막한 구덩이가 생겨났다.
“아….”
에컨은 구덩이에 왼손을 묻은 채 바닥에 드러누웠다.
“이, 이건 말이 안 돼!”
연속된 패배에 혼이 나갔는지 그의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나왔다.
“저런 얇은 팔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 거야! 잔근육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힘이 좋은 거냐고!”
“그런 패션 근육과 달리 제 팔은 실전 근육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실압근이라고도 하죠.”
“패, 패션 근육. 내가 패션 근육….”
2번이나 패한 에컨은 패션 근육이라는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땅에 머리를 묻었다.
“또, 또 졌어?”
“…상대가 안 돼.”
“너무 압도적이잖아!”
천검대 검사들은 이 상황에 절망한 듯 맹한 눈빛이 되어 주저앉았다.
“미친….”
셰릴도 평소의 냉랭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창백해진 얼굴빛으로 입술을 떨고 있었다.
“자, 그럼 정리하죠.”
라온이 일어서서 옷과 손에 묻은 흙을 탁탁 털었다.
“말 관리, 설거지, 요리, 천막 설치 등 지금까지 광풍단이 해온 모든 잡일은 천검대하고, 저희는 저녁마다 에컨 부단주님의 검술 강의를 듣는 거 맞죠?”
“…….”
에컨도, 셰릴도, 천검대도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잡일 끝이다!”
“우와아아아아!”
“이제 편하게 갈 수 있겠어!”
“트집이 뭔지를 보여주지.”
광풍단 검사들은 지금까지 들었던 트집을 그대로 갚아줄 생각에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이래서 안 한다고 했잖습니까!”
에컨이 인상을 팍 찡그리며 일어섰다. 셰릴을 향해 흙이 가득 묻은 왼팔을 흔들었다.
“제가 이런 유치한 트집 잡기는 잘 못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는 멍하게 선 천검대 검사들에게 재빠르게 눈빛을 보냈다.
“아, 맞아!”
“일을 너무 잘해서 트집 잡을 게 없었지.”
“지시대로 지적하기 힘들었어.”
그들은 광풍단이 야영 준비를 너무 완벽하게 해서 시비를 걸게 없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시대로 지적?”
“그게 무슨 말이죠?”
마르타와 버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희도 알겠지만, 우리가 억지로 트집을 잡았잖아.”
“시비를 걸려는 건 아니었고, 지시를 받은 거야.”
“적당히 하려고 했는데, 너희 참을성이 꽤 좋아서….”
천검대 검사들이 민망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설마….”
“천검대주님에게 지시를 받았다는 겁니까?”
광풍단 모두의 눈동자가 천검대주에게 향했다.
“후우….”
셰릴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 꽤 빠진 표정이었다.
“그래. 다 내가 지시를 내렸다.”
“왜죠?”
“광풍단이 임무와 대련 모두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기에 혹여나 자만하지 않도록 적당히 눌러놓으려고 했다. 다만 너희들이 일을 해결하는 방식을 보니, 내 걱정이 기우였던 것 같군. 미안하다.”
그녀는 눈을 내리감으며 솔직하게 사과했다.
“우리도 미안해.”
“너희 일 잘하더라. 억지로 트집 잡느라 힘들었어.”
“그래. 점점 유치하게 굴게 되더라고.”
“신입 같지 않아. 너희는 크게 되겠다.”
천검대 검사들도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이고 칭찬을 퍼부어댔다.
“그랬구나.”
“하긴 이상하다 싶었네.”
“우리를 위해서였군.”
광풍단은 에컨과 천검대의 속셈에 넘어간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저희를 걱정해서 한 일이라고 하시니, 이해하겠습니다.”
라온도 셰릴과 천검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고, 고맙다!”
“그래. 무력만큼이나, 마음이 넓네.”
“역시 리메르 님의 제자들이야!”
“다만.”
천검대 검사들이 웃으며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려 할 때 라온이 손을 들어 올렸다.
“계산은 계산이니, 할 일은 하셔야죠.”
에컨을 시작으로 천검대와 천검대주까지 연달아 사과하는 이유는 뻔하다. 넘겨받은 일을 하지 않고, 다시 주도적인 입장을 가져가기 위해서다.
‘누굴 바보로 아나.’
원하는 건 마음을 약하게 만들어서 일을 반반씩 하는 거겠지만, 사과는 사과고 내기는 내기. 할 일은 해야 한다.
“저기 보이시죠?”
라온이 뒤에 쌓여 있는 그릇들을 가리켰다.
“일단 설거지부터 하고 오시고, 불침번도 알아서 정하시길 바랍니다.”
“아….”
그 말에 에컨과 천검대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사과했어도 냉정하게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흥. 바보 같은 놈들.
라스가 천검대를 보며 턱을 치켜 올렸다.
-이 독사 같은 놈이 이런 기회를 그냥 넘길 거라 생각했느냐? 물고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니라.
그 말이 맞다. 어떻게 생긴 수련 기회인데 놓아준단 말인가.
“약속은 약속이니, 일은 해야겠지.”
셰릴이 천검대 검사들을 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임무가 끝날 때까지 잡일은 너희가 맡도록 해라. 일단 설거지부터….”
“왜 다른 사람 일처럼 그러십니까?”
라온이 셰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처음 내기를 할 때 잘 생각해보세요. 제가 뭐라고 했죠?”
“무, 무슨 말이지?”
“제가 이긴다면 이 임무가 끝날 때까지 저희가 하던 잡일들을 ‘천검대’가 맡아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천검대가!’”
“아….”
그 말에 셰릴의 안색이 퍼렇게 질렸다.
“아까 제안할 때도 아무 말씀 안 하셨는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시진 않겠죠? 천하의 천검대주님께서?”
“그, 그게….”
크게 당황했는지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랜드 마스터가 표정 관리 못 하는 모습은 또 새로웠다.
“와아!”
“미, 미쳤다. 진짜….”
“처음부터 여기까지 생각한 거야?”
“저게 사람이냐?”
광풍단과 천검대는 이 상황을 지배하는 라온을 보고, 동시에 탄성을 터트렸다.
“나, 난 맹세했어. 다시는 저 사람 안 건드린다. 적으로 돌리느니, 차라리 죽을래.”
“느리네. 난 하분 성에서 이미 그 맹세를 끝냈는데.”
크레인과 도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허, 저 여자의 목줄까지 잡은 것이냐? 지독하다. 지독해! 마계에서 네놈 같은 독사는 없느니라!
라스도 셰릴을 보며 뜨악한 표정이 되었다.
“자자, 시간이 없어요.”
라온이 손뼉을 치며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천검대주님과 대원님들은 설거지를 하러 가시고, 올 때 장작도 좀 더 주워오세요. 부대주님은 지금부터 중검 강의를 해주셔야죠. 빨리 움직입시다.”
라온은 넋이 나간 천검대와 광풍대를 보며 씩 웃었다.
‘호구 6명 추가.’
* * *
라온은 이야기를 하고 온다는 천검대를 놔두고 광풍단원과 함께 모닥불 앞에 앉았다.
“이, 이거 괜찮은 거 맞냐?”
“일 안 하는 건 좋은데 천검대를 건드려도 되려나…”
“뒤, 뒷일이 무섭긴 하네요.”
버렌과 도리안, 크레인은 뒤에 있는 천검대를 보며 불안한 듯 입맛을 다셨다.
“강의 생각만 해.”
“그럼 계속 호구처럼 당하냐? 칼든 새끼들이 왜 그렇게 겁이 많아!”
루난은 강의를 들을 생각에 즐거워 보였고, 마르타는 시원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걱정 마. 그런 걸로 뭐라고 할 사람들은 아니니까.”
천검대가 했던 행동과 지금의 말 그리고 천검대주의 성격을 볼 때 이런 걸로 해코지를 할 사람들은 아니다. 지금은 여유를 즐기면 그만이다.
“그, 그렇겠죠?”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 배 주머니에서 과자를 꺼냈다.
“하아, 요즘 위장병이 생긴 느낌이야.”
“나도 마찬가지다.”
버렌과 크레인은 배를 움켜쥐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잡일 안 한다니까 편하긴 하네.”
“난 불침번. 자다가 일어나는 거 너무 싫어.”
“저는 설거지가 제일 싫었어요.”
“아, 그래. 생각해보니 설거지가 최악이긴 하다.”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광풍단원들의 잡담을 듣고 있을 때 뒤에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강의를 위해 오는 것 같지만, 그 소리는 에컨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걸음 소리가 앞에서 멈췄을 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보라색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는 천검대주가 서 있었다.
“검술 강의는 에컨 부대주 대신 내가 하겠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광풍단을 지그시 내려보고 있었다.
“예엑?”
“처, 천검대주께서?”
“와아….”
“왜, 왜요?”
광풍단원은 천검대주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생각대로 됐네.’
라온이 천검대주를 보며 피식 웃었다. 잡일에 천검대주를 끼어들게 만들고, 에컨에게 검술 강의라는 내기를 걸며 이런 상황을 기대했는데 완전히 예측대로 되었다.
-허, 헛소리 마라! 네놈이 신도 아니고 어떻게 여기까지 생각해!
라스는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정말이야.’
라온이 살짝 얼굴이 붉어진 천검대주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랜드 마스터도 설거지는 싫을 거라 생각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