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02화 (202/653)

제202화

라온은 주디엘에게 받은 책자를 모두 외운 뒤 지그하르트 정문으로 향했다. 출발시간이 되지 않았는데도 천검대주 셰릴과 천검대 5명, 광풍단 5명이 모두 도착해 있었다.

‘천검대….’

확실히 다르네.

천검대 검사들의 기세는 명검처럼 날카롭게 갈려 있었다. 성장한 광풍단도 그들에 비하면 어린아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오! 이게 누구야! 라온 부단주잖아!”

셰릴 옆에 서 있던 중년인이 손을 흔들었다. 인상은 부드러운데, 체구가 건강하여 굉장히 힘이 좋아 보였다.

“같이 간다던 게 저 친구였습니까?”

“그래.”

“역사를 새로 쓴 검사와 함께 임무라니, 이거 영광인데요!”

그는 키득 웃으며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네 결투는 손에 땀을 쥐며 봤다. 천검대 부대주 에컨이다.”

주디엘이 주었던 인명부에 있던 사람이다. 천검대의 부대주 두 명 중 한 명으로 강검과 중검으로 상대를 때려 부수는 파괴적인 검사였다.

“광풍단의 라온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라온은 에컨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임무지만 즐겁게 지내보자고. 기대할게.”

그는 무엇을 기대한다는 건지는 말하지 않았다. 어깨를 가볍게 치고 셰릴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다들 아까부터 도착해 있었다고!”

버렌과 마르타가 왜 더 빨리 오지 않았냐고 인상을 구겼다.

“약속 시간보다 빨리 왔는데?”

라온은 아직 해가 뜨지 않은 하늘을 가리켰다.

“더 빨리 와야지! 천검대 분들이 기다리고 있었잖아!”

“난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일찍 오는 게 좋지.”

두 사람의 눈이 살짝 빨간 걸 보니, 천검대와의 임무를 기대하여 잠을 제대로 못 잔 것 같았다.

“하암….”

루난은 뚱한 눈빛으로 하품을 했다. 얘는 잠을 설친 게 아니라, 그냥 아침잠이 많았다.

“저희 사, 살아 돌아올 수 있겠죠?”

도리안은 걱정이 되는지 배 주머니를 만지며 턱을 떨었다.

“다, 당연하지. 천검대가 함께 가는 데에….”

크레인은 도리안보다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걱정하지 마. 어떻게든 살아서 오게 해줄 테니까.”

라온은 광풍단 다섯 명과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이들 모두는 오랜 기간을 함께 해온 동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응!”

“으음….”

“피, 필요 없어. 알아서 할 거니까.”

루난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고, 버렌은 민망한지 머리를 긁적였으며, 마르타는 고개를 홱 돌렸다.

“저 ‘어떻게든’이 무섭게 들리지 않냐?”

“그러니까. 어우, 이번에는 또 뭘 하려고….”

크레인과 도리안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3달 동안 맞았던 게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인사 다 나눴으면 모여.”

셰릴이 코트를 가볍게 치며 몸을 돌렸다. 그녀의 눈빛이 매섭게 번쩍였다.

“바로 출발한다. 저녁까지 휴식은 없다.”

*     *      *

“흐음….”

천검대 부대주 에컨이 옆에서 말을 타는 셰릴에게 다가갔다.

“대주님. 그냥 잘 지내면 안 됩니까? 전 저 친구 마음에 드는데요.”

그는 뒤에서 따라오는 라온을 힐끔 보고서 씩 웃었다.

“마음에 든다고?”

“예. 가론과의 대련을 보고 나름 감동했거든요.”

에컨이 주먹을 꽉 말아쥐며 말을 이었다.

“검기로 검강에 달려드는 그 모습을 보고도 피가 끓지 않으면 무인이 아니죠. 우리 대에 데려와서 키우고 싶을 정도라구요.”

“키운다라….”

셰릴이 고개를 저었다.

‘저 아이는 누가 키울 그릇이 아니지.’

에컨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그는 라온을 감당할 수 없다. 라온은 누군가의 밑에 있을 재능과 그릇이 아니다.

북해의 별처럼 홀로 고고하게 빛나는 녀석이다.

“그냥 저희가 데려오는 게….”

“시끄럽고, 말했던 대로 해.”

“찌질하게 괴롭히는 건 취향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대주가 되기 전에는 군기반장이었던 놈이 뭐라는 건지.”

지금 부드럽게 웃고 있지만 에컨은 본래 천검대의 군기반장 역할을 하던 녀석이다. 트집을 잡아서 남을 괴롭히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참지 못하고 도전을 해오면 확실하게 밟아놔.”

“그건 문제 될 게 없는데, 저 녀석 뭐 잘못했습니까?”

“아니.”

“근데 왜….”

에컨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온은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우가 많더군. 나이에 비해서 강한 건 분명하지만, 세상은 나이를 보지 않지.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해.”

“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걱정해 주신 거군요! 나가서 개죽음당하지 말라고!”

그가 다시 라온을 돌아보고 히죽 웃었다.

“그런 거라면 인정이죠. 저 아이가 어떻게 나오나 보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괴롭혀보겠습니다.”

*     *      *

해가 저물기 시작했을 때 셰릴이 작은 공터에서 멈춰 섰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녀는 말에서 내린 뒤에 할 일이 있다며 사라졌다.

“우리는 주변을 살피고 올 테니, 야영 준비를 부탁해.”

에컨이 눈을 찡긋하고서 천검대와 함께 숲속으로 들어갔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에서 내렸다. 배낭을 내려놓고 광풍단원을 돌아보았다.

“지금부터 야영 준비를 시작한다. 버렌과 도리안은 천막을 설치하고, 루난과 크레인은 장작을 주워 와.”

“나는?”

마르타가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키며 다가왔다.

“넌 나와 요리.”

“요리? 내가 왜!”

“여기서 사람답게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너뿐이니까.”

수련생 시절에 야영하며 느꼈지만 곱게 자란 광풍단에서 그나마 요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마르타뿐이었다.

“저 녀석들에게 시키면 음식이 어떻게 될지 알잖아.”

“끄응….”

루난과 버렌을 가리키자 마르타가 얼굴을 찡그렸다.

“하아, 알겠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영지 중앙에 자리를 잡고 불을 놓을 공간을 파기 시작했다.

“도리안. 냄비랑 식기, 재료 좀 꺼내줘.”

“넵!”

도리안은 기다렸다는 듯 배 주머니에서 각종 도구와 요리 재료에 식기까지 꺼냈다.

라온은 도구와 식기를 가지고 마르타 옆에 내려놓았다.

-흠!

라스가 슬쩍 올라와 마르타가 재료 손질하는 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소고기 소녀가 그나마 요리를 좀 하지.

‘잘 알고 있네.’

-저 녀석들이 만든 음식을 먹고 입맛만 버렸으니까.

양만 따지는 라스도 광풍단의 단체 음식은 먹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음?

‘왜?’

-큰 문제가 있느니라!

‘큰 문제?’

라스의 심각한 목소리에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검병을 쥐고, 기감을 펼치려 할 때 라스의 말이 이어졌다.

-저 소고기의 질이 별로니라. 마블링이 아예 없느니라.

‘…그게 큰 문제라고?’

습격이나, 큰 사건인 줄 알았는데 고기의 마블링이란다. 라스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었다.

-마블링은 소고기의 생명! 무엇보다 큰 문제가 아니더냐!

‘자칭 마왕님. 여긴 고급 레스토랑이 아니에요.’

-으윽, 어쩔 수 없지. 여기서는 본왕이 참아주겠노라. 그리고 자칭 아니니라.

라스는 다음에는 이런 고기를 용납할 수 없다며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에휴.”

라온이 한숨을 내쉬고, 불을 피우려고 할 때 라스가 다시 머리를 들이밀었다.

‘또 왜?’

-저것들은 저대로 놔둘 것이냐?

녀석은 조금 전 천검대가 들어갔던 숲을 가리켰다.

‘일단은 놔두려고.’

라스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며 턱을 살짝 틀었다.

‘좀 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라온의 입매가 가늘게 올라갔다.

‘들이박아야지.”

*     *      *

에컨과 천검대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식사 준비와 천막 설치가 모두 끝나고 나서야 야영지로 돌아왔다.

“벌써 다했어?”

에컨은 깔끔하게 설치된 천막들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도와주려고 했는데 되게 빠르다.”

“외부 임무 경험이 좀 있나 보네.”

“아, 근데 이 천막은 좀 더럽게 쳤다.”

“구겨진 곳도 있고, 말려 들어간 부분도 있네.”

“구덩이도 조금 더 아래에 파는 게 좋았을 텐데.”

“이쪽도 살짝 부족해.”

천검대 검사들은 돌아오자마자, 설치된 천막에 둘러보며 트집을 잡았다.

“내일부터는 방금 지적한 부분 확실하게 고치도록 해.”

“그래. 다 너희 도움 되라고 하는 소리야. 알지?”

“이럴 때 확실히 배워둬야 나중에 써먹을 수 있잖아.”

그들은 크게 인심 쓴 것처럼 별 의미 없는 부분을 계속 지적했다.

“알겠습니다!”

“옙!”

버렌과 크레인은 천검대의 말을 정말 조언이라고 받아들이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대주님. 먼저 드시지요.”

에컨은 셰릴에게 먼저 소고기 스튜와 빵을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아이처럼 굉장히 꼭꼭 음식을 씹어먹었다.

-허술한 재료치고는 맛이 나쁘진 않군. 역시 시장이 반찬이니라.

라스는 소고기 스튜가 나름 마음에 들었는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음식도 별로네.”

“조금 짜.”

“그러게. 간이 좀 센데?”

“소금을 들이부었나?”

천검대 검사들은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괜찮게 만들어진 스튜에 불평하며 혀를 찼다.

“씨바….”

“다음에는 제대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라온은 바로 욕을 뱉으려는 마르타의 입을 막고, 에컨을 보았다.

“그렇게 해줘. 우리가 음식에는 조금 민감하거든.”

그는 빙긋 웃고서 다시 스튜를 먹기 시작했다. 천검대 검사들은 맛이 이상하다는 말과 달리 스튜가 담긴 그릇을 싹싹 비웠다.

“잘 먹었다.”

“맛은 좀 미묘했지만.”

“내일은 간을 좀 약하게 해줘.”

그들은 다 먹은 그릇을 광풍단 앞에 가져두며 참으로 얄미운 소리만 골라서 해댔다.

“이익! 너희….”

“그만.”

발작을 일으키려는 마르타의 손목을 꽉 잡았다.

“저쪽에 깨끗한 계곡이 있거든. 그릇은 거기서 씻으면 될 거야. 우리는 좀 멀리 다녀와서 쉬어야겠다.”

에컨은 도와준다는 말은 아예 꺼내지도 않고, 품에서 카드를 꺼내 다른 검사들과 포커를 치기 시작했다. 치우는 것도 돕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가자.”

라온은 잠시 그들을 지켜보다가 광풍단원들을 데리고 계곡이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거리가 멀었고, 방향도 그들의 손짓과는 달랐다.

“저 새끼들 우리 엿 먹이고 있는데 참을 거야?”

마르타가 계곡에 그릇을 담그며 이마를 찡그렸다.

“마르타. 말조심해라. 천검대 검사분들은 일반 무력대의 조장급이다.”

버렌이 옆에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조장이고, 지랄이고! 화를 돋우는데 참으라고?”

“그들은 정찰하고 왔고, 우리는 요리와 설치를 했으니, 딱히 불공평한 건 아니잖아.”

“정찰? 정찰은 나가지도 않았을걸? 여기 살필 게 뭐가 있다고!”

“천검대는 그렇게 찌질한 사람들이 아니야.”

마르타는 이미 실망한 것 같았고, 버렌은 아직 천검대에 믿음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씻고 싸워.”

루난은 빨리 자고 싶은지 하품을 하고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저 말이 맞다. 설거지부터 해.”

라온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그릇에 묻은 기름기를 닦았다.

“쯧.”

“쳇.”

버렌과 마르타는 고개를 홱 돌리고서 손에 든 그릇들을 닦기 시작했다.

광풍단원과 함께 설거지를 하고 돌아왔을 때도 에컨과 천검대 검사들은 포커를 치고 있었다. 셰릴은 이미 천막에 들어가서 보이지 않았다.

“수고했다!”

에컨이 카드를 쥔 손을 흔들며 씩 웃었다.

“내일도 새벽 출발이니까. 이만 자자.”

그는 카드를 품에 집어넣으며 일어섰다.

“불침번은 원래 짬 순으로 끊는 거 알지? 오늘은 너희가 서 줘.”

에컨은 광풍단이 뭐라 대꾸하지도 못하게 못을 박아버리고, 천막으로 들어갔다.

“부탁할게.”

“오늘은 편히 자겠네.”

“광풍단 부단주님이 서는 불침번이라니, 안심하고 잘 수 있겠어.”

다른 천검대 검사들도 누가 부를 새라 재빠르게 천막으로 들어갔다.

“윽….”

“왜, 왠지 잡일꾼이 된 느낌인데요.”

“그러니까.”

버렌과 도리안, 크레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천막을 바라보았다.

“…….”

“잡일꾼이 아니라, 그냥 하인이잖아! 이 멍청이들아!”

루난은 조용히 그릇을 정리했고, 마르타는 이를 바득 갈았다.

“너희들은 자라. 오늘 불침번은 내가 서지.”

라온이 모닥불 앞에 앉으며 눈을 감았다.

“부단주님이 혼자요?”

도리안이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그래. 생각할 게 있으니까. 너희들은 자.”

불침번을 서면서 무거운 검을 분석해볼 생각이었다.

“싫다.”

“싫어!”

버렌과 마르타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배려는 필요 없다. 2명이 2시간씩 서는 걸로 하지.”

“괜찮다니까.”

“내가 안 괜찮아!”

마르타는 인상을 찡그리고서 옆에 앉았다.

“너희는 자. 2시간 후에 깨울 테니까.”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인상을 찌푸렸다.

“꼭 깨워.”

“그, 그럼 먼저 쉴게요.”

“응.”

루난과 버렌, 도리안, 크레인은 꼭 깨우라고 말하고서 천막에 들어갔다.

“야.”

마르타가 자작거리며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저놈들 일부러 시비 거는 거 알지?”

“바보가 아니라면 모를 수가 없지.”

“저대로 놔둘 거야?”

“너 처음에 천검대랑 함께 간다고 좋아했잖아.”

라온이 피식 웃었다.

“저렇게 얍실한 놈들일 줄은 몰랐으니까!”

마르타가 얼굴을 붉히고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웃지만 말고, 말해! 저대로 놔둘 거냐고. 네가 안 하면 내가….”

“딱 사흘.”

세 손가락을 들었다.

“사흘 동안 저대로라면 내가 처리할게.”

“처리할 수는 있어? 저쪽이 지위나 무력으로 찍어누르면 방법이 없잖아.”

“걱정 마.”

라온의 붉은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확실하게 밟을 방법이 있으니까.”

*     *      *

3일이 지났다.

당연하게도 변화 따위는 없었다.

이제 천검대는 점심시간이나 휴식 시간에도 여러 주문을 했고, 버렌과 도리안, 크레인이 발에 땀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다.

가장 심한 건 당연히 야영 준비를 할 때다.

천막 설치, 식사 준비, 말 관리, 설거지와 뒤처리에 불침번까지. 전부 광풍단의 몫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천검대는 짐을 지고, 이동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거기다.

“오늘은 좀 싱거웠어.”

“간 조절을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냐?”

“매일 조금씩 부족해서 더 아쉽네.”

“내일은 조금 더. 아주 조금만 더 신경 쓰자. 응?”

천검대 검사들은 요리든, 정리든, 천막 설치든 계속 불평을 늘어놓으며 은근히 신경을 자극했다.

더 열받는 건 맛이 없으면 먹지라도 말지, 다 처먹고 저런 불평을 한다는 점이었다.

“그럼 오늘도 시작하자.”

“누구부터였지?”

그들은 설거지를 도와주겠다는 의무적인 말조차 하지 않은 채 바로 포커를 시작했다.

“끄으윽, 저 시이발 놈들이….”

“아주 대놓고 시비를 거는군.”

마르타는 폭발하기 직전이었고, 버렌의 이마에도 힘줄이 잡혀 있었다.

“오늘은 너희들끼리 다녀와라.”

라온이 너저분한 그릇들을 뒤로하고 일어섰다.

“부단주님은요?”

그릇을 챙기던 도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할 일이 있어.”

“할 일이요?”

“참을 만큼 참았거든.”

라온이 카드를 돌리는 에컨을 보며 흉흉한 눈빛을 뿜어냈다.

“부, 부단주님! 안 돼요!”

“맞아! 처, 천검대라고!”

도리안과 버렌이 양팔을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들 패면 천검대주가 가만히 있겠어?”

“맞아요. 이제 일 좀 그만 벌이세요! 우리가 죽겠다구요!”

“너희 왜 천검대가 맞는다고 생각하는 거냐.”

“어?”

마르타의 말에 버렌과 도리안이 움찔거렸다. 두 사람 모두 자연스럽게 라온이 아니라, 천검대가 얻어터질 거라 생각한 것을 깨달은 것이다.

“어, 어딜 가든 패고 오시니까….”

“지는 걸 본 적도 없고….”

버렌과 도리안이 나란히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에 대한 믿음이 좋네.”

라온이 피식 웃으며 두 사람의 어깨를 툭 쳤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모두에게 손을 저어주고, 나무 위에 앉아있는 셰릴에게 다가갔다.

“조금 의외네요.”

천검대주가 차가운 눈으로 아래를 보았다.

“무슨 말이지?”

“천검대주님이라면 대원들이 포커를 치는 걸 놔두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난 단원들의 취미생활까지 관여할 생각이 없다. 일만 제대로 한다면 포커를 치든, 룰렛을 굴리든 알 바가 아니야.”

“그럼 제가 뭘 해도 신경 쓰지 않으시겠네요.”

“그래.”

천검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다는 듯 눈빛이 파랗게 반짝였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꾸벅이고 뒤를 돌았다. 지금의 말로 천검대주가 관여를 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이제 들이박을 차례였다.

“흐음.”

천검대주는 라온의 뒷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시작이겠군.’

참을 만큼 참은 라온은 에컨에게 찾아가 대련을 하자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패하겠지.’

에컨은 가론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한 검사다. 라온이 아무리 기적을 일으키는 검사라도 절대 닿을 수 없는 위치에 서 있었다.

‘한 번쯤 당해봐야 해.’

천검대가 광풍단에게 은근히 시비를 걸고 조롱하는 건 그녀가 직접 지시한 내용이다.

대부분의 일을 힘으로 처리하려는 라온에게 세상의 무서움을 알려주고, 마스터에 오를 계기를 만들어 줄 생각으로 설정한 계획이었다.

“부대주님.”

라온이 에컨의 앞에 서서 그를 부르는 게 보였다. 대련을 신청하면 심판을 보기 위해서 내려가려 할 때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 들려왔다.

“저랑 팔씨름 한 번 하시겠습니까?”

“엑?”

셰릴의 당황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퍼져나갔다.

*     *      *

라온은 뒤에서 들린 셰릴의 신음과 입을 떡 벌린 에컨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들의 생각대로 넘어가지는 않아.’

지금의 에컨은 분명 자신보다 강하다. 셰릴은 에컨에게 도전한 뒤에 깨지길 바랐겠지만, 저들의 생각을 뻔히 알고 있는 이상 질 방법을 고를 필요는 없었다.

“지금 팔씨름이라고 했어?”

“예.”

“다시 물어볼게. 대련이 아니라, 팔씨름 맞지?”

“예. 서로 조건을 걸고 맨몸 팔씨름 한 번 하시죠.”

라온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한데, 나 마스터거든? 검술도 힘 위주로 익혔고.”

“알고 있습니다.”

“마스터가 되면 육체 능력 자체가 비약적으로 올라가. 오러를 안 써도 익스퍼트는 절대 이길 수 없단 말이지.”

에컨이 힘을 자랑하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굵직한 핏줄이 줄줄이 돋아났다.

“그럼 부대주님이 유리하겠네요.”

“유리한 정도가 아니라, 내가 이긴다고!”

“그러면 하시면 되잖습니까.”

라온은 빨리하자며 손을 들어 올렸다.

“하, 나 참.”

에컨은 단단하지만, 결코 두껍지 않은 라온의 팔을 보고서 헛웃음을 흘렸다.

“네가 검으로 날 이기는 게, 팔씨름으로 이기는 것보다 확률이 높을 거다.”

“그래도 전 이쪽에 걸어보고 싶네요.”

“좋다. 알아서 벌주를 마시겠다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그는 살짝 자존심이 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을 말해봐.”

“제가 이긴다면 이 임무가 끝날 때까지 저희가 하던 잡일들을 천검대가 맡아주십시오.”

“진다면?”

“잡일을 그대로 하고, 천검대가 가진 짐도 저희가 들겠습니다.”

“흐음, 너희 조건이 좀 많이 달리지만, 좋아. 내가 어차피 이길 거니까.”

그는 어차피 절대 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가볍게 조건을 받아들였다.

“라, 라온!”

“부단주님!”

버렌과 크레인이 기겁하며 달려왔다.

“에컨 님의 검술은 중검과 강검이라고!”

“마, 맞아요! 힘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라구요!”

두 사람은 양쪽 귀에 귓속말하며 지금이라도 취소하라고 말했다.

“동료들을 봐서 마지막 기회를 주지. 지금이라도 물러나.”

“생각 없습니다.”

라온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 팔을 내밀었다.

“힘에 자신 있다는 걸 듣기는 했는데, 세상이 넓다는 걸 알려줘야겠네.”

“음….”

에컨이 히죽 웃으며 손을 잡았다. 바위 같은 팔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그의 손아귀에서 어마어마한 힘이 느껴졌다.

“왜 이제 후회돼?”

“아뇨.”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눈으로 웃었다.

‘후회는 당신이 하겠지.’

하분 성에서 이미 마스터에 필적한 근력을 얻었다. 지금의 힘이 어느 정도 인지는 나 자신도 정확히 모른다.

‘지금 근력이 180이었던가?’

라온이 차게 웃으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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