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화
라온은 천검대주 셰릴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일이라면 임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셰릴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검대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천검대의 목적은 가문과 가주님의 수호다. 일반적인 무력대와는 역할이 달라.”
주디엘에게 가문의 주요 거점은 전부 천검대 검사들이 지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실제로 별관 주변을 지키는 검사들도 천검대 소속이었다.
“거기다 최근 임무 때문에 검대의 3할이 외부에 나가 있다. 지금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이 많지 않아.”
천검대주는 움직일 수 있는 검사가 별로 없다고 말하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말과는 달리 그리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만이라는 느낌이다.
“음.”
라온이 입맛을 다셨다.
‘기회라면 기회인데.’
천검대주 셰릴은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고수.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다면 분명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험할 수도 있지.’
천검대주가 움직일 정도의 임무라면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혹여 실패라도 했다간 죽거나, 지금까지 쌓은 명성이 곤두박질칠 가능성도 있었다.
‘성공하면 그 이상의 이득을 얻을 테고.’
이 임무를 제대로 완수한다면 천검대주의 신뢰를 얻고, 많은 보상을 받을 것이다.
장점도 단점도 명확한 임무였다.
“어떤 임무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알려줘야지.”
셰릴이 검지를 들어 올렸다.
“이번 임무는 호위다.”
“호위? 그럼 가주님의….”
“아니. 다른 가문의 귀빈을 모시는 임무다.”
“그걸 왜 천검대가 하는 겁니까?”
셰릴이 직접 말했듯이 천검대의 역할은 가문 내부와 가주의 수호였기에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임무였다.
“빚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빚?”
“가주님이 후계자일 적에 남겼던 빚이지. 글렌 지그하르트라는 이름을 걸고 남겼으니, 천검대가 수행할 수밖에.”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눈빛에 힘을 주었다.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명문가의 영애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다. 신관도, 치료사도, 의원도 손을 놓았다고 하더군. 그녀를 넝마의 성자가 있다는 레트란으로 데려가는 게 우리의 임무다.”
“넝마의 성자….”
“너랑도 인연이 있지?”
“예.”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넝마의 성자 페드릭은 자신이 아기일 때부터 5살이 될 때까지 매년 찾아와서 상태를 봐주고, 화속성 영약을 주고 갔다.
“그럼 제가 선택된 이유가….”
“이번 대련이 인상 깊었기도 했지만, 성자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별 접점이 없는 셰릴이 왜 찾아왔는지 이제 알았다. 자신이 넝마의 성자와 자그마한 인연이 있기에 고른 것이다.
“너도 왜 그녀를 데리고 가야 하는지는 아는 모양이군.”
“예. 성자님께서는 환자를 가리지 않으시니까요.”
넝마의 성자 페드릭은 왕이 부른다고 가지 않고, 노예가 찾아온다고 거절하지 않는다. 적과 아군조차 가리지 않고 치료하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눈앞의 환자뿐이다.
아무리 명문가라고 해도 페드릭을 부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감사드릴 수밖에.’
페드릭이 매년 자신을 찾아와서 상태를 봐주고 영약을 준 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다. 그에게 목숨 빚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쁘지 않겠어.’
임무 자체도 그리 위험할 것 같지 않았고, 명문가의 영애이니 보상도 만족스러울 것이다.
‘오랜만에 그분을 뵙고 싶기도 하고.’
사실 임무보다 넝마의 성자를 만나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혹한의 저주를 거의 극복한 자신에게 그가 무슨 말을 할지도 궁금해졌다.
“하겠습니다.”
“출발은 이틀 뒤 새벽이다. 너와 광풍단 조장을 포함한 여섯을 데리고 오도록.”
“여섯이면 되는 겁니까?”
“그 가문의 호위도 있으니, 많은 숫자는 필요 없다. 너무 많으면 이동속도가 느려지고, 복잡해진다. 너희들은 여섯이면 충분해.”
“알겠습니다.”
셰릴은 좋은 티도, 좋지 않은 티도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나?”
돌아가려던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서 라온의 앞에 섰다.
“말씀하십시오.”
“조금 전 강기를 만드는 연습을 했었지?”
“예.”
셰릴이 다 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기에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포기하고, 기본 단련을 하려고 한 거지? 너도 네가 마스터를 코앞에 두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물론 알고 있지만 강기에 매몰될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매, 매몰될 필요가 없다고?”
“몇 번 시도하고서 느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10년을 수련해도 강기에 닿을 수 없다는 걸.”
라온이 제천검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검날 위에 어렸던 건 그저 오러의 응집일 뿐 제대로 된 무학이 섞여 있지 않았다. 그런 건 몇 년을 연습해도 아무 의미도 없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천천히 무학을 쌓아가면 자연스레 그 너머에 닿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너는 정말….”
천검대주의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꽉 잡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예?”
“아니다. 아니야.”
그녀는 놀란 티를 빠르게 감추고서 등을 돌렸다.
“모레 아침에 바로 출발이니, 늦지 마라.”
“저도 하나 여쭤도 되겠습니까?”
“뭐지?”
“저희가 호위할 영애의 가문은 어디입니까?”
“요난.”
“요난….”
요난은 무력이 아니라, 아티팩트 제작으로 발카르와 쌍벽을 이루는 유명한 제작 전문 가문이었다.
“그 가문의 막내딸을 호위하여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레트란으로 가는 게 우리 임무지.”
천검대주가 뒤를 돌며 옅은 미소를 흘렸다.
“임무는 그리 어렵지 않을 테니, 마음 편히 먹도록.”
* * *
천검대주는 그 길로 알현실을 찾아가서 글렌의 앞에 섰다.
“라온이 임무를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받아들인 건가?”
글렌이 턱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틀었다.
“임무를 확인하고, 충분히 생각한 뒤에 받아들이더군요.”
“몸 상태는 어때 보였지?”
“전부 회복되었습니다. 내부의 오러와 육체 모두 안정적이었습니다.”
“그렇군.”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글렌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지만, 이 임무는 그리 평탄하지 않을 거다. 제대로 굴리고 오도록.”
“물론입니다.”
셰릴이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준비해야 하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잠깐.”
그녀가 뒤를 돌려고 할 때 글렌이 손을 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는군.”
“음….”
셰릴이 작게 한숨을 쉬고 글렌을 보았다.
“라온. 그 녀석 정상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글렌이 드물게도 음성을 놓이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가 찾아갔을 때….”
셰릴은 라온이 강기 수련을 단호하게 포기하고, 기본 수련을 하려고 했다는 걸 말해주었다.
“제 상식으론 그건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강기란 무인들의 꿈이자, 목표다. 특히 마스터를 코앞에 두고 있을 때는 하루종일 오직 그 영롱한 빛만을 쫓게 된다.
‘강기에 홀린다고 하지.’
다른 사람의 충고도 듣지 않고, 매일매일 강기만을 바라보고 수련하다가 한참 후에서야 그게 옳은 길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게 일반적이다.
자신도 그런 멍청한 시간을 1년 가까이 보냈는데, 라온은 몇 번 시도를 한 뒤 강기를 만드는 걸 포기하고 기본 수련으로 돌아갔다.
‘소름이 돋았지.’
라온의 눈빛은 한밤의 호수처럼 잔잔했다. 강기를 잊고, 기본으로 돌아가 무력을 쌓겠다는 의지에 소름이 돋아서 자신도 모르게 손목을 잡았다.
누구보다 간절할 마스터 직전의 무인이 저렇게 쉽게 강기를 포기하는 건 정말 처음 보았다.
“괴물이라고밖에는 표현이 안 됩니다.”
글렌의 말대로 라온은 마흔이 되기 전에 그랜드 마스터의 벽마저 넘어설 것 같았다.
“크흠, 그, 그런 거였나.”
글렌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고서 다시 옥좌에 몸을 기댔다.
“전부터 계속 말하지 않았더냐. 그 아이는 특이하다고.”
“그것도 정도가 있지. 너무 심합니다. 무학의 재능만이 아니라, 정신이 더 놀랍습니다.”
셰릴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온의 첫인상은 평범했는데, 보면 볼수록 기겁을 하게 된다. 수많은 검사들을 봐왔지만 저런 아이는 처음이었다.
“아쉽지만, 제가 딱히 뭘 하지 않아도 복귀할 때 라온은 마스터가 되어 있을 겁니다. 본인의 힘으로.”
“딱히 힘을 쓸 필요는 없어. 그저 자네가 쌓아온 무를 여러 방향에서 보여주기만 하게. 광풍단의 아이들이 못 알아차린다면 제 팔자겠지.”
글렌은 라온이 아니라, 광풍단이라고 강조했다.
“알겠습니다.”
셰릴이 고개를 꾸벅이고 뒤로 물러섰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녀는 그대로 가주전을 나섰다.
“흐흠….”
글렌 홀로 남은 가주전에서는 억지로 참는 듯한 묘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 *
라온은 광풍단 모두가 모여 있는 5연무장으로 향했다. 자율훈련이 끝났기 때문에 광풍단 모두는 연무장에 모여 있었다.
“이제 괜찮아?”
루난이 가장 먼저 달려왔다. 표정은 맹했지만 목소리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다 나았어.”
옅게 웃어주자, 루난은 티 나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스크림도 잘 먹었어.”
-끝내 주었느니라!
누워 있을 때 루난이 구슬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병문안을 왔었는데, 맛이 모두 민트초코여서 자신보다는 라스의 환호가 터져 나왔었다.
“빨리 복귀하셨네요.”
도리안이 과자를 씹으며 다가왔다. 쉬는 동안 많이 먹었는지 볼이 포동포동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살이 좀 쪘네. 편해 보인다?”
“펴, 편하다뇨! 전혀요!”
녀석은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펴, 편하다는데?”
“설마 다시 시작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대련도 다 끝났는데 무슨!”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해!”
“으음….”
광풍단원은 아직도 3개월의 지옥을 잊지 못하고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벌써 다 나았다고? 넌 무슨 철인이냐?”
“몸만 튼튼해 가지고.”
버렌과 마르타가 뭘 벌써 왔냐는 듯 퉁명스레 말했지만, 작게 반가운 미소를 드러냈다.
콰아아앙!
세 사람을 불러서 임무에 관한 말을 하려 할 때 연무장 문이 부서질 듯 열리고, 금빛 코트를 입은 리메르가 들어왔다.
손가락과 팔목, 목에 건 가지각색의 보석들이 찬란히 빛났다.
“허….”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 정도로 졸부 티를 내는 인간은 정말 처음이었다.
“다, 단주님. 왜 그런….”
버렌이 입을 떡 벌렸다.
“돈이 너무 많아서 쓸 곳이 없더라고, 일단 보석부터 좀 샀지.”
그는 반지를 자랑하듯 손과 손가락을 마구 흔들었다.
-짜증 나는군. 저놈을 밟고, 저것들 전부 불태워라!
라스도 마음에 안 드는지 리메르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돈이 없을 때는 불쌍하지만, 돈이 있을 때는 꼴 보기 싫다니, 참 특이한 사람이었다.
“또 수련이냐? 그냥 편하게 살아. 어차피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잖냐.”
리메르는 검사들을 차례로 보며 히죽거렸다. 마음이 여유로워서인지 목소리도 평소보다 부드러웠다. 물론 단주가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오, 라온! 우리 복덩이도 왔네! 다 나았지?”
“예.”
“그래. 그래. 내가 너 빨리 나으라고 기도하고 다녔어.”
“기도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돌아다니신 거 같은데요.”
차게 웃으며 리메르의 옷과 보석들을 가리켰다.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돈 쓸 때마다 기도했지. 이 돈을 벌어다 준 라온의 만수무강을!”
“만수무강….”
어이가 없어서 헛바람이 나왔다. 빠른 회복이 아니라, 아예 오래 살라고 기도한 모양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뭐든지 들어줘야지!”
리메르는 돈 달라는 것만 빼면 다 해줄 생각인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라온은 천검대주가 찾아왔던 걸 말하며 조장과 2명을 더 데리고 임무에 다녀와도 되겠냐고 물었다.
“천검대주? 그러면 가야지!”
리메르가 손뼉을 짝하고 쳤다.
“걔가 모르는 검술 속성이 없거든. 따라다니면 배울 게 많을 거다.”
그는 좋은 기회라며 무조건 가라고 말했다.
“원래 이 단을 만들 때도 여러 곳에 지원을 나갈 거라고 말했잖아. 다녀오도록 해.”
“처, 천검대주님과 함께 임무라고? 기연이잖아!”
리메르가 다녀오라고 하자, 버렌이 환호를 질렀다.
“천검대주?”
“흥. 가문 여검사 중 제일이라던데, 내가 직접 보고 판단해주지.”
루난은 별생각 없는지 고개를 갸웃거렸고, 마르타는 코웃음을 쳤지만, 손가락이 떨리는 걸 감추지 못했다.
“너까지 4명이잖아. 나머지 2명은 누구를 데리고 갈 거야?”
리메르가 남은 광풍단원을 가리키며 물었다.
“일단 한 명은 제 주머니를.”
“주머니?”
“아, 도리안입니다. 쟤 살 좀 빼야겠어요.”
라온이 도리안을 보며 옅게 웃었다.
“히익!”
주머니가. 아니, 도리안이 기겁하며 과자를 떨어뜨렸다. 볼살이 푸들 떨렸다.
“그럼 나머지 한 명은?”
“음….”
라온이 남은 광풍단원을 쭉 둘러보았다. 대부분이 가기 싫은지 눈동자를 굴리며 딴청을 했다.
“크레인. 나와.”
그중에 가장 뒤에 숨어 있던 장발의 검사에게 손짓했다.
“저, 저요? 절 왜….”
크레인이 눈동자가 터질 듯 부풀었다.
“대련 때 보니까.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더라고.”
라온이 빙긋 웃으며 검집을 툭 쳤다.
“임무 동안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좀 해보자.”
“아….”
크레인은 대련장에서 라온을 향해 악마나 미친놈이라고 했던 걸 떠올리고 뒤로 넘어갔다.
“난 죽었다….”
그는 이미 얻어맞은 것처럼 침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조금 시간이 걸릴 듯하니까. 단원을 부탁합니다.”
라온이 다섯 명에게 일정을 알려주고서 리메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거 단주인 내가 할 말 아니냐?”
“단주 역할 제대로 할 생각 있으십니까?”
“아니.”
그는 당당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말씀드렸습니다. 돈 버셨으니 도박도 그만두시구요.”
“안 할 거니까. 걱정 마.”
리메르는 도박에서 손을 뗐다는 듯 양손을 흔들었다.
“가서 많이 배워와라. 셰릴의 검술만이 아니라, 자세, 걸음, 호흡 모든 게 배울 거리니까. 전부 훔쳐.”
그의 목소리에 오랜만에 진중함이 담겼다.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 때의 주문을 알려주마.”
“주문이요.”
“그래.”
리메르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셰릴한테….”
* * *
이틀 뒤 새벽.
라온은 별관 공터에 서서 두 손으로 제천검을 쥐고 있었다.
가장 기본자세인 중단세. 검병을 단전 앞에 두고, 검날로 앞을 겨눈 채 미동도 없이 기세만을 일으켰다.
고오오오오!
라온의 기파는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처럼 느릿하게 흘러 아주 천천히 공터 주변을 휘감기 시작했다.
10분이 지났을 무렵 라온의 기세는 공터 전체를 가득 메웠고, 온 공간이 그의 호흡과 함께 진동했다. 공간 자체가 라온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것이다.
“후우….”
라온은 공터를 지배하던 기세를 단번에 흩어버리고서 숨을 골랐다.
-더럽게 느리군. 지루해서 죽을 뻔했느니라.
라스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건 중검이니까.”
-무거움으로 공간을 집어삼키겠다는 것이냐.
“그래. 이번에 가론과 싸우면서….”
-가론이 누구냐?
“얼마 전에 나하고 싸웠던 놈 있잖아.”
-아, 그 버러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기억 못 하는 걸 보니, 마스터에 오른 가론조차도 라스에게는 어중이떠중이와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어쨌든 그가 썼던 건 빠르면서 공간을 차단하는 검이었는데, 내 생각엔 빠름을 지우고, 무거움만으로 공간을 장악하기 더 좋을 것 같아서.”
가론의 검은 분명 강하고 빨랐지만, 공간을 장악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빈틈이 많았다.
억지로 속도를 높이는 것보다는 느리더라도 모든 공간을 확실히 집어삼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 말은 맞다만 그렇게 굼벵이처럼 기어서 언제 적을 잡을지 의문이로구나.
“열심히 하면 되겠지.”
가론의 검을 눈에 담은 덕분에 공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했다. 꾸준히 수련한다면 무거움과 공간 장악력을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라온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상태창을 켜보았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깨닫는 자>.
상태 : 혹한의 저주(두 가닥).
특성 : <분노>, <나태>, 불의 고리(6성), 수속성 저항력(5성), 설화의 감각(4성) 만화공(4성), 글래시아(4성), 화속성 저항력(4성), 블리딩 커스(1성), 암습(3성), 불굴의 의지(3성), 요기적응(3성), 집중(4성).
근력 : 181.
민첩성 : 175.
체력 : 176.
기력 : 178.
감각 : 199.
분노 : 25.
그동안 많은 성장을 이룬 능력치와 특성의 등급에 보고만 있어도 미소가 피어났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가문에 복귀할 때는 저 칭호를 마스터와 연관된 것으로 바꾸고, 중검과 공검을 조화시키겠다고 다짐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궁금하네.’
인간을 뛰어넘은 저 능력치로 마스터가 되면 검술이 어떻게 변할지 벌써부터 기대되었다.
‘가볼까.’
라온이 옆에 놓아둔 배낭을 메고 공터를 떠나려고 할 때 앞으로 주디엘이 다가왔다.
“시간이 짧아서 많은 조사를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얇은 책자를 건넸다.
“이건….”
“요난 가문의 막내에 대한 정보와 넝마의 성자가 있는 레트란 지역에 관한 정보입니다.”
“아!”
라온이 책자를 펴보았다. 딱 알아보기 좋은 크기의 글씨로 요난 가문의 막내딸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엔시아 요난. 아티팩트 제작의 천재?”
이름 아래에는 그녀가 요난 가문에서도 뛰어난 장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20대 중반인데 액세서리형 아티팩트 제작에는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중무전 쪽에도 모르고 있는 걸 보니, 병에 걸린 건 극비인 것 같습니다.”
그 말대로다. 글렌에서 바로 셰릴에게 넘어갔으니, 아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중부에서는 꽤 유명한 이름이니 요난 가문을 떠나게 되면 그녀를 노리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 정도로 재능이 넘치는 사람의 호위라면 셰릴의 말과는 달리 편한 여정이 되지 않을 게 확실했다.
‘바라던 바야.’
편한 여정 따위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 더 빨리, 더 높게 갈 수 있다면 지옥이라도 걸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고생할수록, 힘이 들수록 강해지는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재밌겠네.’
라온의 눈동자에 새빨간 불꽃이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