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0화
“제, 젠장….”
발데르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라온은 여유롭게 팔짱을 낀 채로 부르르 떠는 발데르를 지켜보았다.
‘둘 중 뭘 고를까가 아니라, 기간과 비율을 줄일 방법을 고민하고 있겠지.’
발데르의 생각은 뻔하다. 급여와 보상을 주는 걸 고르되 기간이나 비율 혹은 그 둘 모두를 줄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안 되지.’
다른 세력이라면 봐줄 수도 있지만, 진무전은 이걸로 두 번째다. 확실하게 밟아놓아야 한다.
‘고민을 좀 덜어줘야겠네.’
라온이 옅게 웃으며 발데르에게 한 발 더 다가갔다.
“고민되시는 것 같으니, 저희 단주님 말씀을 따라야겠네요.”
“뭐?”
“지금부터 금첨단의 급여와 보상을 받는 기간을 4년 6개월로 늘리겠습니다.”
본래 4년이었던 기간을 4년 6개월로 올려버렸다.
“이 미친놈이!”
발데르가 기겁하며 단상 위에서 뛰어내렸다. 물론 글렌의 눈치를 보고 달려들지는 못했지만 죽일 듯 이를 갈았다.
“대답을 조금 미뤘다고 한 번에 반년을 늘리는 게 어디 있단 말이냐!”
“여기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넌 이미 제안을 말했다!”
“그 제안을 받지 않은 건 전주님이십니다.”
“끄윽! 하지만….”
“4년 6개월에 85%.”
라온은 미소를 유지한 채 80%였던 보상도 85%로 올렸다.
“허….”
발데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라온 잘했어! 네가 최고다!”
리메르는 역시 내 제자라며 만세를 불렀다. 진무전과 적이 되든 말든 일단 눈앞의 돈만 생각하는 불나방 같았다.
“아, 알겠다! 받아들일 테니, 처음 것으로 하자! 4년에 80%를 주겠다!”
“전주님은 이미 흘러간 강물을 퍼담으실 수 있습니까?”
“뭐?”
“흘러간 강물은 누구도 잡을 수 없죠. 그 비율과 기간은 이미 지나간 과거입니다.”
“이 미친놈이 정말!”
발데르의 눈동자가 뻘겋게 타오른다.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 듯 그가 밟은 대지가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발데르.”
“으흑!”
가장 높은 단상 위에서 들려온 글렌의 목소리에 발데르의 몸이 우뚝 멈췄다. 죽일 듯이 살기를 피우다가 목소리 한 번에 기겁하다니, 이전에 꽤 심하게 당했던 것 같았다.
“이것도 싫으시다면 한 번 더 올려야겠군요. 이번에는 5년….”
“그만! 알겠다! 알겠다고!”
발데르가 졌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물론 표정은 여전히 사납고 흉악했지만.
“그럼 앞으로 4년 6개월 동안 금첨단이 벌어오는 금화와 보상의 85%는 광풍단의 소유입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후우, 받아들인다.”
그는 뼈를 씹듯이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됐군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사회자를 보았다.
“이, 이것으로 광풍단과 금첨단의 단체 결투를 종료하겠습니다!”
그의 선언을 끝으로 징이 울리며 대결의 끝을 알렸다.
“이걸로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발데르는 죽일 것처럼 눈을 부라리고서, 쓰러진 가론을 어깨에 메고 연무장을 떠났다. 표정과 기세를 보니 포기하지 않고 복수할 생각인 것 같았다.
‘그래도 아들은 챙기는군.’
성격이 난폭하긴 하지만, 아들이 기대에 못 미친다고 아예 내쳐버린 냉혈인보다는 훨씬 나았다.
‘다 끝났….’
“아이고! 우리 복덩이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돌아가려고 할 때 리메르가 달려와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우리 부단주님 덕분에 제가 삽니다! 내 삶의 빛이시여!”
리메르는 여전히 도박 용지를 꾹 쥔 채 경배하듯 엎드렸다. 슬쩍 뒤를 본 그가 광풍단원에게 손짓했다.
“뭣들 하냐! 너희 부단주님이 돈을 왕창 벌어오셨는데!”
“예에?”
“뭐, 뭘요?”
“인사드려야 할 거 아니야!”
“아니, 우리는 3달 동안 얻어맞기만 해서….”
“됐고, 빨리 와!”
리메르는 라온에게는 웃음을 보이고, 다른 광풍단원에게는 인상을 구겼다.
-조금 전 확실히 보았다.
라스가 느릿하게 일어나 눈앞으로 떠올랐다.
-상대를 농락하고, 끝까지 실속을 챙기는 그 모습. 역시 네놈은 마족이 어울리느니라.
“우리의 빛과 소금. 부단주님께 경배를….”
“다 시끄러워!”
* * *
“저, 저게 정말 17살이 맞나?”
“산전수전 다 겪은 진무전주를 가지고 노는군.”
“무력보다 입심이 더 강해 보여.”
“마스터를 꺾는 무력과 판단력에 저 외모까지. 살맛 안 나네. 테린 강 따뜻하냐?”
“저대로라면 단주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겠어.”
“어떻게 저런 괴물을 키운 거지?”
지그하르트 검사들은 말과 상황으로 발데르를 압도한 라온을 괴물처럼 바라보았다.
“일단 리메르 님은 아니야.”
“그러게. 오늘 한 거 아무것도 없잖아.”
“평소에도 그냥 누워만 있다던데?”
“그럼 그냥 바지 단주잖아!”
“리메르 님답네.”
그들은 라온에게 헹가래를 쳐주는 리메르를 보며 피식 웃었다.
관중들 대부분이 놀라워하거나, 즐거워하고 있었지만, 카룬 지그하르트의 인상은 나무껍질처럼 구겨져 있었다.
“쯧.”
카룬은 가론을 업고 나가는 발데르를 보며 혀를 찼다.
‘저 멍청한 새끼….’
가론이 라온에게 져서 당황한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뒤의 언행은 최악이었다. 버러지 같은 최하위 방계. 그것도 17살짜리 꼬마에게 농락을 당하는 꼴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생각이라는 걸 안 하는군.“
대련을 신청한 금첨단주가 기절했으니,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말한 뒤에 진무전의 힘으로 압박을 가하면 그만이다.
이곳에서 끝을 볼 필요가 없는데, 저 단순한 놈은 라온에게 농락을 당하며 모든 일을 망쳐버렸다.
‘여러모로 놈에게 힘만 실어줬어.’
오늘 라온은 마스터를 상대로 승리했고, 진무전주 발데르를 말 그대로 가지고 놀았다. 이번 사건은 직계에 반항하는 방계와 외부 놈들에게는 큰 희망이 되어줄 것이다.
‘한동안 짜증… 아니지. 차라리 잘 됐어.’
카룬의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스쳤다.
‘오랜만에 뜬 저 희망을 완전히 꺾어버린다면 다시는 반항할 생각을 안 할 테니까.’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라온을 헹가래 쳐주는 버렌을 바라보았다.
‘저 버러지를 다시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군.’
* * *
똑똑.
데루스 로베르트가 집무실에서 햇살이 쏟아지는 창을 바라보고 있을 때 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라.”
은회색 머리로 한쪽 눈을 가린 집사가 문을 열고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 이전에 지시하신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데루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얼굴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 지그하르트에 대한 조사인가?”
“예.”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손을 앞으로 모았다.
“암시장에서 라온 지그하르트가 7사도를 베었다는 소문은 9할의 확률로 사실이라고 전해왔습니다.”
“암시장에서 9할로 봤다면 확정이라는 소리로군.”
암시장의 주요 수입원은 희귀한 물건 경매와 도박이 아니다. 대륙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정보력이 진정한 돈줄이었다.
그들이 9할 이상으로 본다면 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예. 믿기 힘들지만, 사실인 듯합니다. 성벽에서 뛰어내려 하분 성의 웨이브를 막았다는 어린 검귀의 이야기 역시 진실이라고 합니다.”
“그럼 나이도?”
“17살이 맞습니다.”
“마스터를 꺾은 17살짜리 익스퍼트라….”
데루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17살에 익스퍼트는 흔하지만, 마스터를 꺾은 17살짜리 익스퍼트는 대륙 역사상 처음이었다.
역대급 천재라 불리며 대륙십이성에 이름을 올린 자신의 막내아들도 17살에 저 수준에는 손조차 뻗지 못했었다. 어떤 놈인지 한번 보고 싶었다.
“그 이상의 정보는 없나?”
“본래 지그하르트의 정보는 잘 풀리지 않으니, 암시장 쪽에서도 어려움을 겪는 모양입니다. 대부분이 사소한 것들 뿐입니다.”
집사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북쪽으로 보낸 그림자들은?”
“그쪽도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서 거의 정보를 물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보낸 녀석들은 다시 회수하는 게….”
“아니.”
데루스가 인상을 찡그린 채 고개를 저었다.
“더 투입해라.”
“예?”
“확실하게 조사하도록 해. 놈이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에게 사사 받았는지, 어떤 검술을 익혔는지, 누구와 친한지까지 전부.”
“으음, 분명 엄청난 재능이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직 마스터도 아닐 텐데….”
“마스터가 아니라서 더 무서운 거다.”
데루스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굳어졌다.
“마스터에 오르지 못한 어린놈이 마스터를 꺾었어. 그놈이 마스터가 되고,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대륙의 모든 역사를 새로 쓰고, 언젠가는 이 자리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그는 본인이 선 로베르트 가문의 가주 자리를 가리켰다.
“격을 벗어난 재능이라는 건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지그하르트와는 필연적으로 부딪치게 될 것이다. 예정대로 라온이라는 아이만이 아니라, 지그하르트의 모든 정보를 갱신해.”
“예!”
집사가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했다.
“요난 가문의 일은 어떻게 됐지?”
데루스는 집사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창틀에 걸터앉았다.
“가주의 막내딸에게 그걸 주입했습니다. 의원도, 치료사도, 신관도 모두 고개를 젓고 돌아갔으니, 곧 여기저기에 도움을 요청할 겁니다.”
“바로 응답해서는 안 된다. 우연인 듯 천천히 손을 내밀어야 해. 그 고집쟁이 핏줄에 최대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물론입니다.”
집사는 고개를 꾸벅이고 집무실을 나갔다.
“곧. 이제 정말 곧이로군.”
데루스는 다시 창밖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그 전에 방해되는 건 모두 지워야겠지.”
* * *
라온은 의무대에 가서 내상을 안정시킨 뒤 별관으로 돌아왔다. 아직 속이 쓰렸지만 7사도와 싸웠을 때보다는 훨씬 상태가 좋았다.
“이틀 동안 절대 움직이면 안 돼. 알겠지?”
실비아는 무조건 안정하라며 침대에 눕히고 어깨를 꽉 잡았다.
“이번에도 움직이면 아예 묶어놓을 거야!”
피를 워낙에 많이 토해서인지 그녀의 눈동자에 단단한 고집이 어렸다.
“시녀들도 24시간 교대로 앞을 지킬 테니까. 절대 나올 생각 마세요.”
믿고 있던 헬렌도 움직이지 말라며 눈을 흘겼다.
“후, 알겠어.”
라온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을 때까지 가만히 있을게.”
“지켜볼 거야.”
“전 믿을게요.”
두 사람은 자신의 확답을 듣고서야 방을 나갔다.
‘이것도 나쁘진 않네.’
전생에는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진심으로 걱정을 해준다는 걸 알기 때문에 두 사람의 잔소리가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그래선 안 되느니라.
라스가 팔찌 위로 올라오며 인상을 찡그렸다.
-마족에게 가족의 정 따위는 필요 없느니라. 강함. 모든 욕망을 강해지는 것에만 맞추는 것이 진정한 마족의 자세이니라.
“그건 마족이 아니라, 네 욕망 아니냐? 마족이라고 다 너처럼 살진 않을 텐데.”
-당연히! 본왕은 특별하다. 본왕 정도로 강함에 몰두하는 자는 없느니라. 그러니 분노의 군주라 불리며 마왕 중에서도 최강자로 이름이….
“분노가 아니라, 식탐이겠지.”
-아니란 말이다! 그딴 토깽이 놈과 비교하지 마라!
녀석이 악을 지르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어쨌든! 네놈의 무력은 한참 부족하지만, 끝을 모르는 아귀 같은 성격과 투쟁심은 나름 마음에 드느니라.
라스가 입매를 살짝 내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이 된다면 본왕이 잘 챙겨주겠노라.
“인간도 마족이 될 수가 있어?”
-당연하다. 지금까지 꽤 많은 인간이 마족이 되었느니라.
“어떻게 하면 되는데?”
-일단 본왕에게 몸을 바치고….
“기각.”
라온은 손을 젓고서 눈을 감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기라도 하려 했는데 아무 의미 없었다.
-저, 정말이니라! 일단 본왕이 강림하여 네 육체와 영혼의 격을 올려주면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네. 안 사요.”
잡상인을 내쫓듯 손을 휘휘 저었다. 요즘에 조용해서 포기했나 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녀석은 여전히 자신의 몸을 노리고 있었다.
-쯧, 안 통하는군.
라스가 아쉽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당연하지. 누굴 바보로 아나.”
-그래도 네놈이 나름 괜찮게 보이는 건 사실이다. 원한다면 인간이 마족이 되는 방법을 알려주도록 하지. 일단….
‘잠깐만.’
녀석이 마족이 되는 방법을 말하려고 할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올라왔다.
[또 한 번 이길 수 없는 결투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불의 고리>의 성취가 상승합니다.]
[<설화의 감각>의 단계가 4성으로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6포인트 상승합니다.]
익스퍼트의 경지로 마스터를 꺾었다는 업적 덕분에 나온 메시지였다. 기감을 늘려주는 설화의 감각과 모든 능력치가 동시에 상승했다.
-으윽!
“와….”
감탄하며 메시지를 읽고 있을 때 두 번째 메시지가 떠올랐다.
[<태화보>의 진의를 깨달았습니다.]
[현 경지로 불가능한 성취를 이뤄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7포인트 상승합니다.]
두 번째로 상승한 포인트에 라온이 숨을 들이마시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고오오오!
육체가 변화하며 불에 타는듯한 통증이 일었다가 찬물에 몸을 담근 듯한 시원한 활력이 온몸을 적셨다. 내상으로 인한 속쓰림마저 깨끗하게 사라졌다.
“단숨에 13포인트라….”
라온이 박동하는 가슴을 움켜쥐며 미소를 지었다. 많은 능력치가 올라서인지 강해진 힘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 능력치에 적응하려면 한동안 수련에 열중해야 할 것 같다.
“설화의 감각도 한 단계 올랐고.”
설화의 감각은 기감의 범위와 민감도를 늘려주는 특성이다. 암살자로 살아온 자신과는 찰떡으로 잘 맞는 능력이라 더욱 마음에 들었다.
-제, 젠장….
라스는 떠오르는 메시지에 짓눌린 채로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이런 저급한 업적을 이뤘다고 이렇게 퍼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네놈에게 양심이 있다면 뱉어내라!
“양심 없어.”
라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 나한테 마족 같다며. 마족이 이미 먹은 걸 토해내는 거 봤어?”
-끄응, 어떻게 뱉는지도 안 물어보는 거냐?
“필요 없는 질문이잖아.”
이런 보상이라면 배가 터져도 절대 뱉어낼 생각 없었다.
-네, 네놈은 정말 악마보다 악마 같은 인간이니라.
“칭찬인가?”
-끄으윽!
라온은 부르르 떨며 분노를 일으키는 라스를 보며 빙긋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뭐라고 했어? 마족이 되려면 어떻게 한다고?
-절대 안 알려준다!
라스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네놈이 마족이 되면 마계가 말라붙을 것이니라!
* * *
일주일 뒤.
라온은 내상을 완벽하게 회복한 뒤 별관 공터에 나왔다.
오랜만에 밖에 나와서 바람을 맞으니 자연스레 기분이 고조되었다.
가볍게 몸을 풀고서 제천검을 뽑았다. 검병을 쥐자, 살아 있다는 감각이 든다. 이제 어쩔 수 없는 검사가 된 모양이다.
후우우웅!
태화육보를 밟으며 연성검술을 펼쳤다. 은백색 칼날 위로 피어난 기운이 강물처럼 도도하게 흘러 공터 전체를 휘감았다.
본래 연성검술에 깃들어 있던 부드러움의 묘리가 태화육보와 어우러져 극대화된다. 아롱져 떨어지는 햇살조차 흘려버리는 신기가 드러났다.
찌지지지직!
다음으로 태화오보를 운용하며 광아검을 내리쳤다. 길들이지 않은 야수의 이빨이 더욱 날카롭게 갈려서 허공을 찢어발겼다.
“역시 잘못 느낀 게 아니었어.”
가론과 싸우면서 느꼈던 대로 태화보에는 검술의 속성과 위력을 강화하는 능력이 있었다.
육보와 유검을 동시에 펼치면 강기를 흘려버릴 방진이 되고, 오보와 강검을 사용하면 강기의 벽을 뚫어버리는 맹렬한 창칼로 다듬어진다.
공격, 방어, 회피에 반격까지 어떤 방법으로도 운용이 가능한 절세의 보법이었다.
‘물론 내상은 입지만.’
검술의 위력을 강화하지만 그만큼 반동도 크게 돌아온다. 이번에 심한 내상을 입은 건 태화보 때문이기도 했다.
‘세상에 완벽한 건 없으니까.’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는 법. 태화보는 글렌이 높은 경지에서 만든 보법이다 보니 지금의 경지에 쓰기에는 몸에 무리가 갔다. 능력치로 강화된 육체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침대에 죽은 듯 누워있었을 것이다.
“어디 한번.”
라온이 가라앉힌 오러를 모조리 끌어 올려 제천검에 담았다.
찌이이이잉!
장중한 검명과 함께 제천검의 칼날 위로 붉은색 빛이 피어난다.
실처럼 얇고 가는 검기가 꼬이고 꼬여 검사가 되고. 그 검사가 꽃잎처럼 모여들어 장대한 선을 이루었다.
추아아아아앙!
혜성처럼 광대한 빛이 제천검의 칼날 위에서 피어났다. 선명한 오러의 응집체 강기였다.
찌지지직!
하지만 강기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바람 앞의 촛불처럼 사그라들었다.
“쯧.”
라온이 혀를 차며 제천검을 내렸다.
“역시 안 되는군.”
가론과의 대련을 통해 그간 익혔던 무학을 다듬으며 눈앞에 있던 마스터의 벽이 무너진 건 확실하다.
하지만 아직 마스터에 도달하지 못했다. 무너진 벽 앞에 서서 그 앞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는 기이한 상황이었다.
‘모르겠어.’
익스퍼트도, 마스터도 아닌 것 같은데.
전생에 마스터는 죽여봤지만, 마스터에는 오르지 못했기에 지금 자신의 상태가 어떤 건지 알 수 없었다.
‘라스.’
-무엇이냐.
‘지금 내 경지는 뭐지? 익스퍼트도, 마스터도 아닌 것 같은데.’
-그걸 왜 본왕에게 묻는 것이냐.
‘요즘 네가 먹고 싶다는 거 다 먹어줬잖아. 밥값은 하자고.’
별관에서 쉬는 동안 라스가 먹고 싶다던 음식과 간식을 모두 먹어주었다. 녀석은 능력치를 빼앗겼다는 것도 잊고 나오는 음식마다 찬사를 보냈었다.
-음….
라스는 살짝 찔리는 듯 입맛을 다셨다.
-넌 경계에 있다.
‘경계?’
-너희 인간들이 말하는 마스터의 벽. 그 벽을 무너뜨린 곳을 밟고 있지.
‘역시.’
예상대로다. 지금의 자신은 마스터도, 익스퍼도도 아닌 위치에 서 있었다.
‘그럼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계기가 필요하다.
‘계기?’
-그래. 발을 뻗을 수 있는 계기.
‘그 계기는 어떻게 찾아야 하지?
-모르느니라.
‘뭐?’
-본왕은 그따위 벽을 느끼지도 못했느니라. 처음부터 2단계, 3단계를 뛰어넘었지. 네놈 같은 고민을 해본 적이 없으니, 모른다.
‘재수 없는….’
이런 쪽으로는 참으로 도움 되지 않는 마왕이었다.
‘더 해볼까.’
몇 번 더 강기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이전처럼 유지하지 못하고 오러가 녹아내렸다.
‘지금은 안 되는 모양이군.’
라온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럼 너무 몰두할 필요 없겠지.’
사실 지금의 성장 속도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수준이다. 지금까지처럼 전심전력을 다해서 수련한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 걸음을 걸어 앞으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하던 대로…음?”
검을 고쳐잡고 검술 수련하려 할 때렸다. 단계가 오른 설화의 감각에 인기척이 잡혔다. 뒤쪽 나무 위였다.
“나오시죠.”
몇 번 느꼈던 기척이라 나무 위에 있는 사람을 향해 손짓했다.
“계신 거 알고 있습니다.”
“망할.”
퉁명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보라색 머리의 여성이 뛰어내렸다. 가는 눈매와 작은 체구. 등에 착용한 검이 눈에 띄는 천검대주 셰릴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잠깐 호흡이 흐트러지셨습니다.”
“어이없는 걸 보았으니 그럴 수밖에.”
셰릴은 이마를 찡그리며 다가와 라온의 앞에 섰다. 조금 당황한 듯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앞으로 그녀와 볼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바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몸 상태는 어때?”
“거의 다 나았습니다.”
“그럼 괜찮겠군.”
셰릴은 라온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듯 위에서부터 아래를 쭉 훑어내리고서 손을 내밀었다.
“나와 일 하나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