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9화
쿠구구구!
거대한 강기의 파도가 녹아내리며 그 뒤에 숨은 가론의 모습이 드러났다. 망치로 내리친 듯 가슴이 내려앉으며 피를 토한다. 태화보와 염룡결의 조화가 이뤄낸 신기였다.
하지만 충격이 있는 건 가론만이 아니다.
“쿨럭!”
라온 역시 허리를 굽힌 채 핏물을 뱉어냈다. 심각한 내상. 저 정도 강기를 베었는데 괜찮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끄으윽!”
가론이 가슴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선다. 지진이 일어난 듯 눈동자가 흔들린다.
“어딜 가려고.”
라온은 울대에 고인 피를 삼키며 땅을 박찼다. 가론이 뒷걸음질을 칠 때 오히려 앞으로 나아갔다.
속이 진탕되어 머리가 아찔했지만, 꾹 참고 태화보를 밟았다.
“끄아아악! 꺼져! 꺼지란 말이다!”
가론이 악을 지르며 우충검을 연달아 펼친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듯하지만 검에는 여전히 강기가 어려 있고, 그 투로는 정확했다.
‘그렇기에.’
피할 방법이 있지.
공명하는 여섯 개의 고리가 우충검의 묘리를 완벽하게 꿰뚫었다.
터엉!
무릎을 굽혀서 갈퀴처럼 휘어오는 검격을 회피한 뒤 태화이보를 밟았다. 시야가 좁아지며 기겁하는 가론의 얼굴이 보였다. 빠름의 구결을 손목에 두른 채 화령을 뻗어냈다.
화아아아아!
봄이 스치고, 여름이 다가온 듯 찰나의 순간에 피어난 붉은 꽃잎이 허공을 수놓았다. 찬란하게 흩날리는 화염의 조각들이 아릿하게 회전하며 가론의 전신을 휘감았다.
“이익!”
가론이 모아둔 강기를 폭발시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새빨간 꽃잎은 이미 놈의 지척에 닿아 있었으니까.
“자, 잠깐!”
“싸움에 잠깐은 없어.”
라온의 웃음과 동시에 가론에게 닿은 화령의 꽃잎이 동시에 폭발했다.
“끄아아아악!”
열화의 폭풍에 휘감긴 가론이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크흑!”
라온이 다시 한번 피를 토했다. 뱃속을 헤집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어, 어떻게….”
가론은 간신히 피워낸 오러로 만화공의 불길을 꺼뜨리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어떻게 그 상태로 싸울 수 있는 거야!”
그의 눈동자는 넋이 나간 듯 풀려 있었다. 훨씬 내상이 심한 자신이 움직이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네가 강자와 싸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온이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손등으로 훔치며 웃었다.
“너는 계속 도망만 치려고 했지?”
가론은 본인이 유리할 때는 막강한 공세를 펼치고, 이해할 수 없거나, 맞물리는 상황에서는 뒤로 물러섰다. 그의 패인은 두려움. 더 강한 상대와 목숨을 건 싸움을 해보지 않았기에 일어난 문제였다.
“혼자 수련을 해도, 약자와 싸워 이겨도 높은 경지에는 오를 수 있다. 하지만 강한 인간은 될 수 없어.”
“아….”
“이기는 싸움만 하고 싶다면 진무전에 처박혀서 부하들하고만 놀아!”
라온이 말아 쥔 주먹으로 가론의 턱을 후려쳤다.
뻐어어억!
제대로 방어하지도 못한 가론의 몸뚱이가 바닥을 굴렀다.
“끄허억….”
라온은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가론에게 다가갔다.
“네가 바닥을 구르는 상황은 예상 못 했지? 그래서 세상이 재밌는 거다.”
“으으….”
가론은 턱이 빠져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텅 빈 앞니에서 피를 흘리며 또 물러서기만 했다.
“그, 그만! 내가 졌… 흡!”
라온은 검집으로 가론의 입을 막았다.
“그 동생에 그 형이라고 하는 짓도 똑같군.”
“끄윽….”
“너 때문에 우리 애들이 3달 동안 고생했거든. 그 책임을 져줘야겠어.”
말을 할 수 없도록 가론의 턱을 반대로 후려쳤다.
퍼어어억!
가론이 대련장의 끝에 처박혔다.
“우릴 때린 건 저놈이 아니라, 부단주잖아.”
“진짜 뒤지도록 맞았지. 지금에 와선 왜 맞았는지도 모르겠어.”
“강해지긴 했는데 뭔가 손해 같단 말이야.”
“이게 맞나?”
광풍단 쪽에서 들려오는 의문이 담긴 목소리는 일단 무시했다.
“끄으으윽!”
가론은 입안이 피투성이가 되어 말을 하지 못하고, 장외로 기권하기 위해서 바닥으로 손을 뻗었다.
“어딜 가려고.”
라온이 가론의 발목을 잡고 반대편 바닥에 메쳤다.
“커허억!”
“이제 시작인데 여기서 끝낼 수는 없지.”
피를 토하는 가론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라온이 말아쥔 주먹을 들어 올리며 서늘하게 웃었다.
-그렇지! 걸어온 싸움은 이겨야 하고, 다시는 덤빌 수 없도록 철저하게 밟아주어야 하느니라. 드디어 좀 마음에 드는구나.
라스가 히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 후보 한번 해볼 테냐?
‘시꺼!’
* * *
라온이 가론을 주먹으로 패기 시작할 때부터 대연무장 전체에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쿠웅!
샌드백처럼 얻어맞던 가론이 기절한 채 바닥에 거꾸로 꽂히고 나서야 관중들이 한 명씩 입을 떼기 시작했다.
“허어….”
“이, 이겼어. 라온이 이겼다고!”
“가론 님이 저리 처참하게 지다니….”
“지, 지금 이거 현실 맞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라온의 패배와 가론의 승리를 점치던 대부분의 관중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익스퍼트가 마스터를 꺾은 역사가 있던가?”
“저기 있잖아. 그것도 3달 전에.”
“그, 그럼 7사도를 이겼다는 것도….”
“진짜라는 거지.”
“마스터 2명을 쓰러뜨린 17살 짜리 익스퍼트라니.”
“1번이면 우연이지만, 2번이면 실력이지.”
“이건 지그하르트 역사에. 아니, 대륙 역사에 남겠군.”
대연무장에 가득 찬 관중들은 오직 라온만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 결투를 직접 본 내가 승자네! 휴가 내길 잘했어!”
“그러게. 돈을 왕창 잃었는데 아쉽지가 않아.”
“나도! 월봉을 모조리 박았는데, 웃음만 나와.”
“그건 슬퍼서 웃는 건데?”
“정말 광풍을 일으키는군.”
본래 이변은 인간을 흥분시키는 법. 관중들은 돈을 잃었음에도 미소를 지으며 라온에게 박수를 보냈다.
강함을 추구하는 무인들답게 가문 역사상 최고의 천재가 나온 것을 기뻐했다.
“우와아아아아!”
“라온! 라온! 라온!”
“광풍단! 광풍단!”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대연무장의 많은 검사들이 라온과 광풍단을 향해 환호를 터트렸다.
다만 그들과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쯧.”
“저 멍청한 놈….”
“이번에 끝냈어야 했거늘.”
“저런 허술한 검술에 뚫리다니, 마스터라는 딱지도 아까워.”
직계와 그들을 따르는 방계들은 이 반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 분노의 찬 그들의 눈동자에 당당히 선 라온이 비쳤다.
* * *
뿌드득!
글렌이 잡은 옥좌의 손잡이가 고철처럼 우그러졌다. 본인도 모르게 들어간 힘이 손잡이를 종잇장처럼 구긴 것이다.
감정을 잃은 듯 항상 지루함을 담고 있던 붉은 눈동자에 확연한 떨림이 일고 있었다.
“허어!”
글렌이 침음성을 흘리며 옥좌에서 등을 뗐다.
‘이렇게 빨리 태화보의 진의를 파악하다니….’
태화보는 단순한 보법이 아니라, 보법을 밟음으로써 검술의 속성을 증폭시키는 절세의 무학이다.
라온이 그걸 파악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1년은 걸리리라 생각했는데, 고작 4달이 지나기도 전에 이뤄냈다. 직접 가르쳤기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태화보만이 아니지. 이건….’
인간의 기질. 위기 앞에서 물러나지 않고 나아가는 라온의 성격이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강기 앞에서 겁먹지 않고 나아가는 17살짜리 검사라니, 직접 보지 않는다면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나 참.”
글렌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저 용감한 녀석이 자신의 손자라는 게 참으로 기꺼웠다.
“…정말이지 예상대로 움직여주질 않는군요.”
천검대주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긴 시간동안 봐왔지만 이렇게 당황한 목소리는 오랜만이었다.
“저런 아이는 처음입니다.”
“그래.”
글렌은 본인이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예상도 벗어났다.”
그에게도 라온이라는 존재는 예측불허의 사고뭉치였다. 물론 즐거운 의미의.
“그러고 보니 가주님이 손주를 보며 웃는 건 처음 보는군요.”
“으음!”
글렌은 바로 손을 들어 올라간 입매를 억지로 내렸다.
“3달 전에 봤을 때만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셰릴이 가는 눈매를 더 얇게 좁혔다.
“나도 의외다. 태화보와 검술을 조화시키려면 1년은 걸릴 줄 알았으니까.”
글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의 재능을 인정했기에 1년을 생각했는데, 고작 3개월 만에 끝을 낼 줄은 몰랐다.
“아이들도 성장시키면서 말이지.”
라온은 혼자 강해진 게 아니라, 광풍단 검사들의 실력을 끌어올리면서 본인까지 막대한 성장을 이뤄냈다.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업적이었다.
“가론은 처음 라온의 주먹에 맞은 이후 방심하지 않았습니다.”
셰릴은 가론을 기절시킨 라온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마스터와 정면에서 붙어서 이긴 익스퍼트라니, 정말 역사가 새로 쓰이겠군요.”
“그래.”
글렌의 입매가 다시 살짝 올라갔다. 지금까지 라온이 7사도를 쓰러뜨렸다는 말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 대결을 끝으로 그런 의심은 쏙 들어갈 것이다.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게 만든 라온이 자랑스러웠다.
“저 녀석이 왜 맨날 라온, 라온 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대박 터졌다! 난 이제 부자야!”
셰릴이 광풍단 쪽에서 양손을 들어 올린 채 함성을 지르는 리메르를 가리켰다.
“난 부자라고! 다들 나를 경배해라!”
그는 도박 용지를 꽉 쥔 채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크흠, 저렇게 보여도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니까.”
글렌이 헛기침을 하며 다시 옥좌에 등을 기댔다.
“왕의 그릇까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범상치 않은 재능입니다. 특히 물러서지 않는 투지가 마음에 들더군요.”
셰릴의 눈동자에 작은 호감의 빛이 아른거렸다. 이제 라온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저 아이는 앞으로 더욱 강해질 겁니다.”
“벽을 부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지, 지금 벽을 부쉈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라온은 마스터와 익스퍼트의 경계가 되는 벽을 넘지 않고 깨버렸다.”
“하지만 아직 그는….”
“그래. 마스터가 아니지.”
글렌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익스퍼트에서 마스터가 될 때는 무아지경에 빠진 상태에서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긴 시간 동안 쌓인 무학이 깨달음이 되어 자연스레 벽을 넘게 되는 거지.”
“맞습니다.”
셰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처음으로 무아지경에 빠진 때도 마스터가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저 녀석은 달라.”
글렌이 허공을 올려 보는 라온을 가리켰다.
“저 아이는 이 대련에서 본인이 쌓은 무학들을 정리하고, 정립하며 벽 자체를 깨부숴버렸다. 본인이 무엇을 했는지, 어떤 경지에 올랐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럼 앞으로도….”
“마스터가 된 이후에도 정체기 없이 쭉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무인이 마스터에 오른 순간 각성에서 깨어나며 실력 자체가 줄어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수련과 명상을 통해서 각성했을 때의 무력을 되찾게 되는데, 라온에게는 그 정체기가 없다는 뜻이었다.
“타고난 재능… 아니, 노력과 재능에 운까지 받쳐주는 경우군요.”
“저런 녀석은 거의 없지.”
글렌이 턱을 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작은 계기 하나만 있다면 무너진 벽 너머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자아의 방에 넣는 건 어떻겠습니까? 입문을 넘어 마스터 하급에도 오를 수 있을 겁니다.”
셰릴은 먼저 라온이 강해질 방법을 제안했다.
“자아의 방은 평생 1번만 들어갈 수 있지. 지금 넣기에는 아까운 일이다.”
글렌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 아이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게….”
셰릴이 눈매를 좁혔다. 17살에 저 수준이면 솔직히 말해 장래가 예측되지 않는다. 안개가 껴서 정상이 보이지 않는 산을 바라본 느낌이다.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 위치는 마흔이 되기 전에 뛰어넘을 것 같군요.”
“정체기가 없으니, 그만큼도 걸리지 않을 게다.”
“으음….”
고개를 끄덕였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너무 말이 안 되는 걸 보다 보니,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우리도 계산을 해야겠군.”
글렌이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계산이라시면….”
“이번 대결의 승패를 가지고 내기를 하지 않았던가.”
“아!”
셰릴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번 대결에서 누가 이길지를 걸고 글렌과 내기를 했었다. 금첨단이 졌듯이 자신도 완패였다.
“그럼 내가 원하는 걸 말하지.”
글렌은 가론을 던져버린 라온을 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저 아이를….”
* * *
“대, 대련 종료! 35:0으로 광풍단이 단체 대결에서 승리했습니다!”
사회자의 떨리는 목소리를 끝으로 길면서도 짧았던 대련이 종료되었다.
“우와아아아아!”
“드디어 끝났어!”
“이제 안 맞아도 된다! 안 맞아도 된다고!”
“저 악마 자식과 마주 서는 것도 끝이야!”
“시이이이발!”
광풍단원들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이제 안 맞아도 된다고 소리쳤다. 모두는 금첨단을 이긴 것보다 라온과 대련을 하지 않는 걸 훨씬 기뻐하고 있었다.
다만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이들이 아니다.
“난 부자다!”
리메르가 도박 용지를 든 손을 파르르 떨었다.
“이히히히! 난 이제 부자라고!”
그는 광풍단의 전승에 건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배율이 상상을 초월했다. 눈동자가 광기에 물들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어우. 이걸 어떻게….”
사회자는 난동을 부리는 광풍단을 통제하지 못하고 라온을 바라보았다.
“모두 조용.”
“흡!”
“음.”
라온의 한 마디에 광풍단 전원이 입을 다물었다. 웃기는 건 리메르까지 조용해졌다는 점이다.
“스, 승리하셨으니, 이제 금첨단에게 승리 조건을 말씀하실 차례입니다.”
말을 반쯤 놓던 사회자는 이제 라온에게 극존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대련장의 중심에 서서 단상 위를 올려 보았다.
“저희 광풍단이 금첨단에게 원하는 건….”
잠시 말을 멈추자, 대연무장의 모든 눈동자가 자신에게 모여들었다. 감탄, 대견, 놀라움, 증오, 질투. 수많은 감정이 어린 시선을 즐기며 말을 이었다.
“금첨단의 해체입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대연무장에 다시 한번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 지금 뭐라고….”
“해체? 정말”
“나도 들었어. 해체라고 하셨어….”
“이, 이 정도면 진무전에 대놓고 시비를 거는 거 아냐?”
“세상에나….”
정말 금첨단을 해체 시킬 줄은 몰랐던지 이곳에 있는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라온 지그하르트!”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진무전주 발데르가 의자를 부수며 일어섰다. 가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한 기운이 라온의 전신을 짓눌렀다.
“지금 금첨단을 해체하겠다고 한 것이냐?”
“그리 말했습니다.”
“네놈 제정신이냐! 미치지 않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못 할 말은 아닐 텐데요.”
라온의 입술 위로 핏물이 흘러내렸다. 발데르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가라앉혀 놓은 내상이 다시 돋아났다. 통증이 심했지만 볼 안쪽을 씹으며 견뎠다.
“금첨단주는 저희의 요구가 무엇이든 받아들인다고 말했습니다. 즉, 해체를 말해도 안 될 이유는 없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단의 해체는 네놈 따위가….”
“가능하다.”
발데르의 말을 끊은 낮은 음성은 가장 높은 단상 위에서 들려왔다. 천검대주 셰릴. 그녀가 발데르와 라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증인인 내가 말하지. 금첨단의 해체는 충분히 가능한 요구다.”
“천검대주!”
“왜 부르지? 진무전주?”
“이건 불합리하다! 누가 이런 사소한 내기에 단의 해체를 생각한단 말인가!”
“저기 있지 않나. 생각한 사람이.”
셰릴이 차분하게 손을 들어 라온을 가리켰다.
“먼저 대련을 신청한 건 금첨단이고, 조건을 마음대로 정하라고 말한 것도 금첨단이다. 대체 무엇이 문제라는 거지?”
“다, 단의 설립과 해체는 가주님의 허가 없이는….”
“가주님께서도 이미 허락하신 일이다.”
그녀는 뒤에 있는 글렌을 슬쩍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진무전주. 조건에 문제가 있다면 시작 전에 바꿨어야 했다. 다 끝난 마당에 주절대봤자 네 찌질함만 보일 뿐이다.”
“천검대주….”
발데르의 막대한 기파가 천검대주를 휩쓸었지만, 그녀는 우습다는 듯 미소를 피워내며 팔짱을 풀지 않았다.
“불만이 많으신 것 같네요. 그럼 이기시지 그러셨습니까.”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광풍단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뺏길 수는 없었다.
“네놈. 네놈 때문에….”
“저 때문이 아닙니다. 전주님의 아들들 때문이죠. 저는 오는 대련을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검집을 툭 치며 말을 이었다.
“검술을 가르치기 전에 예의와 사람 보는 눈을 길러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끝까지 해보겠다는 건가?”
“그러니 여기에 서 있죠.”
“후우욱….”
“다만.”
발데르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타올랐다. 그가 폭발하기 직전 라온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해체 하나만 있으면 너무 인정 없어 보이니까. 다른 선택권을 하나 드리죠.”
“다른 선택권?”
“예. 앞으로 금첨단이 활동을 하면서 얻을 소득과 보상의 8할을 4년 동안 광풍단에 넘겨주세요.”
“소, 소득의 8할….”
“해체에 비하면 상당히 괜찮은 조건일 겁니다.”
“4년은 너무 과하다!”
“금첨단이 저희를 활동 중지시키려는 기간이 3년이라 1년 추가했을 뿐입니다.”
“크으윽….”
금첨단이 먼저 일으킨 일이라 발데르는 대꾸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저 정도면 무조건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해체보다는 훨씬 낫지. 이런 창피를 당하고 단이 해체당하면 다시 만드는 데 10년은 걸릴걸.”
“그래. 좀 길고, 많긴 한데 해체보다는 나아.”
“그래도 숨통은 틔워주네. 인정이 있어.”
관중들은 무조건 받아야 한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이 주변의 반응을 들으며 빙긋 웃었다.
‘그럴 수밖에.’
4년간 8할이면 노예계약이나 다름없지만, 처음에 해체를 말했다 보니 상대적으로 지금의 조건이 너그럽게 들리면서 모두가 합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간과 비율을 바꿀 생각은 없나?”
“없습니다. 싫으시면 해체를 고르면 됩니다.”
“리, 리메르!”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발데르가 리메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끝까지 이렇게 나올 것이냐! 우리와 틀어져서 괴로워지는 건 너희들이다!”
“흐음, 사실 그렇긴 하지….”
리메르가 고민이 되는지 입맛을 다셨다.
“금첨단이 가져오는 돈 중 절반은 단의 공금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절반은 단원 모두에 나눌 겁니….”
“라온! 4년 말고, 10년으로 하고, 비율을 그냥 100% 전부 받아버리자! 응? 봐줄 필요 없잖아!”
돈을 나눈다고 하자마자, 그는 발데르를 쳐다보지도 않고, 오히려 비율을 올리라고 눈을 부라렸다. 저게 진심이라는 게 더 무서웠다.
“들으셨죠?”
라온이 당당한 걸음으로 발데르에게 다가갔다.
“크으윽….”
“이제 고르시죠. 해체를 하실 건지. 아니면 돈을 주실 건지.”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나를. 아니, 광풍단을 건드리면 쫄딱 망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