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밤이 되었을 때 5연무장에 두 발로 서 있는 건 오직 라온 한 명뿐이었다.
“대련은 대련대로 하고, 연무장도 새로 정비하고.”
라온은 뭍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헐떡거리는 검사들과 말끔하게 다듬어진 연무장을 보며 씩 웃었다.
“태풍에게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는데.”
“이익….”
“흐윽!”
“제기랄!”
라온의 경쾌한 목소리를 들은 검사들. 특히 어제 연무장을 망가뜨렸던 30명의 검사들은 부드러운 연성토를 움켜쥔 채 피눈물을 흘렸다.
“흐아암….”
단상 위에 드러누워서 꿀잠을 때리던 리메르가 침을 닦으며 일어섰다.
“이제 끝났냐?”
“예.”
“으, 무섭다. 무서워.”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검사들을 보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내가 네 상사여서 얼마나 다행인 줄 몰라.”
리메르가 히죽 웃으며 라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 길지 않을 겁니다.”
“응? 뭐가?”
라온은 대답 없이 웃었다. 뭐긴 뭐겠는가. 리메르 위에서 그를 갈구는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지.
리메르의 도박을 막고, 그를 굴리기 위해서라도 빨리 성장하고, 승진하고 싶었다.
“웃음이 왠지 불길한데….”
리메르가 삐질 땀을 흘리고서 몸을 돌렸다.
“어, 어쨌든 난 간다. 다들 무리하지 말고 돌아가.”
이미 무리를 한 검사들은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누워 있었다.
“라, 라온….”
버렌이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파르르 떨면서 몸을 일으켰다.
“수련은 좋다. 정말 좋아. 하, 하지만 매일 이런 대련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보법 수련도 있고, 검술을 다듬을 수도 있고, 체력이나, 육체 단련. 혹은 단체 검진 훈련도 있잖아.”
그는 기도하듯 혹은 용서를 구하듯 손을 모은 채 말을 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대련할 만큼 했으니까. 이제 다른 것도 좀 해보자. 네 말대로 체계적이고 다양한 훈련 좀 하고 싶다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라온이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련만큼 체계적인 게 어디 있어?”
“체계적이 다 얼어 죽었냐? 하루종일 무식하게 얻어맞는 게 무슨 수련이야!”
“잘 들어봐. 일단 대련장에서 나한테 맞는 동안 육체가 단련되고, 내 공격을 피해 다니면서 체력이 늘어나지. 거기다 나한테 맞지 않으려고 밤을 새서 검술과 보법 수련을 하잖아.”
손가락을 펴며 버렌이 원하던 것들을 하나씩 꼬집어 주었다.
“육체 단련, 체력 증강, 검술과 보법 수련. 네가 말한 게 대련에 다 들어가 있네. 이거만큼 체계적인 훈련이 어디 있어.”
“궤, 궤변이야! 검술과 보법은 우리가 따로 수련하는 거고, 맞는다고 육체가 단련되는 게 말이 되냐고!”
“맞아! 단련은 개뿔 한 달 내내 맞아도 아픈 게 줄어들지 않아!”
“그건 훈련이 아니라, 죽기 싫어서 발악하는 거라고!”
버렌이 빽 소리를 질렀다. 다른 검사들도 일어나 동조하며 손을 들었다.
“본래 생물은 목숨에 위협을 느낄 때 가장 빠르게 강해지는 법이야. 조금만 참아.”
“새, 생물이래. 이미 우리를 사람으로 보고 있지 않다고!”
“젠장! 말이 안 통해!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아!”
“제기랄!”
검사들은 주먹으로 땅을 치면서 악을 질렀다. 힘이 없어서 먼지도 잘 나지 않는 걸 보니 아주 조금 안쓰러워졌다.
다만 지금 훈련은 자신이 받았던 것에 비하면 강도를 꽤 낮춘 상태다.
전생에선 뼈가 부러지거나, 폐인이 될 공격도 많이 받았지만, 자신은 후유증이 남을 공격을 절대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계속 대련이지.”
“으어어어!”
“꺄악.”
“시이발….”
버렌이 절망하듯 고개를 처박았고, 루난이 조용한 비명을 질렀으며, 마르타가 처음으로 힘없는 욕을 흘렸다.
* * *
라온은 검사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연무장에 홀로 서서 제천검을 뽑았다.
스르르릉.
달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베겠다는 일념으로 제천검을 그어 내렸다.
후우웅!
어떠한 검술도, 보법도 밟지 않았지만 고절한 검술을 펼친 듯 제천검이 부드럽게 진동하며 그림자 사이에 은빛 궤적을 새겼다.
머리가 아닌, 심장의 울림을 따라 검을 이어갔다. 제천검의 새하얀 검신 위로 홀로 선 달빛의 고고함이 어리며 장대한 검광을 뻗어냈다.
그 검에 담긴 건 지금까지 익혀왔던 초식과 구결 그리고 호흡이다.
조화되지 않았던 검술의 속성들이 조금씩 뒤섞이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검혼을 이뤄낸 것이다.
살수가 본다면 죽음을 담은 살검이라 칭할 것이고, 기사가 본다면 곧고 곧은 정검이라 칭할 것이며, 무희가 본다면 우아한 검무라 칭할 신묘한 검이었다.
“후우….”
라온은 아롱지는 달빛이 어깨 위로 흘러내릴 때가 되어서야 검을 멈췄다.
‘성장했어.’
정체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경지가 상승했다. 검사들을 성장시킬 생각으로 시작했던 훈련이건만 가장 크게 나아간 건 나 자신이었다.
“이런 일이 다 생기네.”
조금씩 강해지는 검사들을 신나게 후려 팼을 뿐인데, 무학의 성취가 오르다니 신기한 일이다.
슬로스가 자면서 강해지듯 자신에겐 남을 패야 강해지는 속성이 있는 것 같았다.
“조금 더 패야 하나?”
라온이 제천검을 집어넣으며 피식 웃었다.
-그 발언.
라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손가락을 겨누었다.
-딱 우리 쪽이니라.
“아니라니까!”
* * *
책상에 발을 올려두고 있던 가론 앞으로 부단주 테크리가 다가왔다.
부러진 팔다리는 붙었지만, 조각난 광대뼈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는지 얼굴에 큼지막한 붕대를 감고 있었다.
쿠웅!
테크리는 가론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았다.
“죄송합니다!”
그는 깨진 광대뼈가 땅에 닿고 있음에도 얼굴을 들지 않았다.
“바, 방심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테니,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뭔지 알아?”
가론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방심이야. 방심.”
“아….
“병신 같은 것들이 ‘방심해서 졌어.’, ‘방심만 안 했으면 이겼는데.’, ‘방심 때문에.’라고 지껄이는데, 그게 다 실력 부족인 거 알아?”
그의 미소가 진해지자, 단주실에 박혀 있는 검들이 살기 짙은 검명을 울렸다.
“흐읍….”
테크리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압도적인 실력이 있다면 방심하든 말든, 상대가 지랄하든 말든 죽여버릴 수 있다. 네놈은 그저 약한 것뿐이야.”
“죄, 죄송합니다….”
“인지도를 쌓아야 하는 때에 망신도 아니고, 개망신을 주다니, 지금 내가 네놈의 목을 따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말해봐라.”
가론은 정말 죽일 것처럼 벽에 박힌 검을 뽑아서 테크리의 목을 겨누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 건방진 놈을 제 손으로 묻어버릴 테니,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테크리는 볼과 이마에서 피가 터지고 있음에도 멈추지 않고,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주먹 한 방에 기절한 놈이 개소리를!”
“주먹이기 때문입니다. 검술로는 절대 지지 않습니다!”
라온이 불길한 기운을 흘리는 괴물인 건 맞지만, 그건 주먹을 맞댈 때다. 검을 든다면 이 굴욕을 갚아줄 자신이 있었다.
“흐음….”
가론이 금방이라도 휘두를 것 같았던 검을 천천히 내렸다.
“단주님께 받은 검술로 놈을 난도질해놓겠습니다! 마지막 기회를 주십시오!”
“뭐, 좋아. 네놈에게 공을 들인 것도 사실이니, 이대로 버리기엔 아깝지.”
“아,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테크리를 노려보는 가론의 눈동자가 악귀처럼 번들거렸다.
“이번에도 진다면 난도질당하는 건 네놈이 될 거야.”
* * *
리메르는 글렌의 호출을 받고, 오랜만에 가주전 알현실을 찾아갔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걸 보니, 인생이 편한 모양이구나.”
글렌이 리메르의 포동한 볼살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토끼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무슨 그런 말을 하십니까.”
리메르는 무섭다는 듯 턱을 떨었다.
“그동안 뭘 했기에 살까지 쪘지? 요즘도 아이들 훈련은 안 시키고 놀고먹는 건가?”
“제가 할 일이 없어서요.”
“할 일이 없다고?”
“예. 사실 라온이….”
그는 한 달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글렌에게 말해주었다.
“…그래서 우리 애들은 매일매일 신나게 얻어터지고 있습니다.”
“반항은 없나?”
글렌이 고개를 살짝 틀며 물었다.
“당연히 있죠. 안 나오거나, 도망치기도 하고, 수련검을 숨긴 적도 있고, 지난주에는 아예 연무장을 갈아엎었더군요.”
“라온은 어떻게 했지.”
“그 계획들을 전부 부숴버렸습니다. 바로 흙을 구해와서 연무장 정비를 시키고, 수련검은 도리안 주머니를 털고, 꾀병을 부리는 녀석은 저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는데 겁에 질려서 돌아오게 만들던데요.”
리메르는 라온이 정말 대단한 녀석이라며 키득거렸다.
“아이들의 실력은 확실히 늘었겠군.”
“예. 매일 죽지 않기 위해 수련하다 보니, 반딧불이가 달빛이 될 정도로 몰라보게 강해졌습니다.”
“그 정도인가?”
“가주님이 내어주신 무학에도 익숙해져서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본인들은 계속 얻어맞기만 하니, 잘 모르지만.”
“그리 말하니 한번 보고 싶군.”
글렌은 대결을 하는 날 봐야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굳어진 입매가 가늘게 풀렸다.
“라온은 보면 볼수록 난 놈 같습니다.”
리메르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본인이 강해지는 데 특화된 천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녀석은 남을 키우는 데도 재능이 넘칩니다. 예상대로 제 애제자는 왕의 그릇이 분명해요.“
“네 제자이기 이전에 내 손자이니라.”
“제 제자가 먼저인데요?”
“무슨 헛소리냐!”
조금 전까지 라온의 대단함에 미소 짓던 두 사람의 얼굴에 주름이 졌다.
“평소에 손자 취급도 안 하시는 양반이 무슨! 그런 말을 할 거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라온 앞에 가서 사랑스러운 손자야. 이 할애비가 한 번 안아보자꾸나! 라고 하시… 아!”
리메르는 머리 위로 번지는 시꺼먼 구름을 보고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아, 아닙니다! 가주님의 손자가 맞죠! 예에!”
이번에 또 맞으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무조건 피해야 했다.
후우우웅!
용서를 빌자, 금방이라도 벼락을 내리칠 것 같은 구름이 사그라들었다.
“그럼 특별한 문제는 없군.”
“아뇨. 문제가 있습니다.”
리메르는 문제라는 단어를 참으로 간단하게 말했다.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지?”
“당연히 수련생들입니다. 1달 넘게 쌓인 스트레스가 거의 최고치에 도달했습니다. 조만간 차라리 죽이라며 배 째라고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밤에는 수련하고, 낮에는 얻어맞는 생활을 한 광풍단의 정신은 거의 한계에 와 있었다. 이성을 아예 놓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라온은 어떻게 대비하고 있지?”
“모를 리 없을 텐데 아무것도 안 하더군요. 오히려 점점 더 심하게 나가고 있습니다.”
리메르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꼭 어디 반항해보라는 것처럼.“
* * *
동이 트지 않은 새벽.
생기 넘치던 광풍단의 검사들을 이제 정말 좀비가 되어 흐느적거렸고, 눈빛에는 초점이 없었다. 체력과 정신력 모두 한계가 온 시점이었다.
“죽겠군.”
“응….”
“시이발….”
정신력이 강한 버렌과 루난, 마르타도 다를 바가 없었다.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버티다가 얼마 가지 못하고 똑같이 휘청거렸다.
“저, 저기 버렌 님….”
크레인이 버렌에게 다가가서 엎어졌다.
“이대로라면 정말 죽습니다.”
“그래서 어쩌자고.”
“우리 훈련을 파업하죠?”
“파업?”
“예. 부단주가 시키든 말든 무시하고 그냥 드러누워 있는 겁니다.”
그는 목소리를 조금 높여서 모두에게 들리게 말했다. 관심이 동한 검사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랬다가 더 맞으면 어쩌려고?”
“더 맞아요? 저희는 매일, 매 순간 맞고 있는데 더 맞을 게 있겠어요? 거기다 이건 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라구요!”
크레인이 손가락을 들어 검사들을 가리켰다.
“애들을 보세요. 저게 팔팔해야 10대의 안색입니까? 다들 기력이 달려서 죽어가고 있잖아요! 살기 위해서 며칠만 휴식을 달라고 해보죠. 이러다가 정말 죽거나, 크게 다칠 겁니다.”
“으음….”
버렌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전의 일 때문에 크레인의 말이 믿음직스럽지 못하지만, 저 말은 정말이다.
자신과 루난, 마르타도 한계가 왔으니, 다른 검사들은 더 힘들고, 지쳤을 것이다. 이 이상으로 구르다간 정말 크게 다쳐서 회복하지 못할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
“부단주님이 강한 건 맞지만, 훈련 쪽으로는 아직 초보가 분명합니다. 채찍을 줬으면 당근도 줘야 하는데, 계속 채찍만 내리치지 않습니까.”
“그건 맞지.”
크레인의 말대로 라온은 2달 동안 채찍질만 했다. 준마라고 해도 죽고 또 죽었을 시간이었다.
“체력이 달려서 꼼짝 못 하겠다고 모두가 드러누우면 부단주님도 백기를 들 겁니다.”
“그래요. 한 번만 해보죠.”
“나, 나도 동의.”
“이젠 정말 못 하겠어요.”
“크레인 말은 듣기 싫지만 이건 맞는 말입니다.”
“그냥 다 배 째라고 누우면 부단주님도 어쩔 수 없겠지.”
버렌과 크레인 주변으로 검사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루난과 마르타, 도리안도 있었다.
세 사람 역시 2달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쉴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럼 라온이 오면 전부 누워서 움직이지 않는 거다. 배신자는 처형이야!”
“예!”
“응.”
“알겠어.”
라온과 리메르를 제외한 광풍단 33명이 처음으로 한마음이 되었다.
잠시 후 오전 훈련 시간이 되었을 때 라온이 큼지막한 보자기를 매고 들어왔다. 그는 연무장에 누워 있는 검사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이제 진짜 못 하겠습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일 수가 없어요.”
“한계입니다. 한계.”
“죽을 것 같아요….”
검사들은 누운 채로 못 일어나겠다고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열심히 훈련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기력도, 체력도 없습니다. 힘이 달립니다.”
버렌이 반쯤 풀린 눈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휴식을 주든지. 아니면 그냥 죽이든지 하십시오.”
그를 따라 연무장에 누운 검사들 모두가 사지를 쫙 펴서 33개의 대(大)자를 만들었다.
“그럼 체력과 기력만 있다면 계속 수련할 수 있다는 건가?”
“물론입니다. 그러니 최소 3일 이상의 휴식 시간이 필요합니다.”
“3일 이하는 절대 안 됩니다. 무조건 3일 이상!”
“옳소!”
버렌을 포함한 검사들은 정말 훈련하고 싶지만, 체력과 힘이 달려서 어쩔 수 없다며 휴식을 달라 외쳤다.
“체력이라, 잘됐네.”
라온이 등에 메고 있던 보자기를 내려놓고 펼쳤다. 30개가 넘는 목갑이 우수수 쏟아졌다.
“포르반 시에 두 번째로 요구한 영약 진명단이 도착했거든.”
그는 검사들에게 진명단이 들어 있는 목갑을 보여주며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은 분명 밝고, 산뜻했지만, 악마의 미소처럼 섬뜩하게 느껴졌다.
“여, 영약?”
“그게 왜 지금 와…?”
“어우, 이게 무슨….”
검사들은 영약이 든 목갑을 보고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이 되었다.
영약을 먹는 건 기쁘지만, 먹는 순간 체력과 기력이 회복되어 또 얻어맞아야 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영약을 먹으면 체력도, 기력도 살아날 테니, 계속 수련할 수 있겠지?”
라온은 기괴한 표정을 지은 채 손을 떠는 검사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희 생각은 다 꿰뚫고 있지.’
당연히 영약은 지금 온 게 아니다. 연성토와 함께 왔는데,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지금까지 숨겨두었었다.
“크윽! 젠장! 제에엔장!”
버렌이 악을 지르고 일어나 영약을 쥐었다. 올 거면 빨리 오던가, 아니면 아예 늦게 오던가 하지 왜 이런 타이밍에 왔는지 정말 신이 원망스러웠다.
당근을 못 준다더니, 더럽게 잘 준다. 그것도 독이 든 당근을!
“흐윽…”
“다, 끝났어. 또 맞아야 해.”
“도망칠 수가 없어. 빠져나갈 구멍이 안 보여!”
“신은 없다.”
검사들은 영약 상자를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영약을 받아서 좋기는 하지만 또 얻어맞아야 한다는 생각에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어, 어쩔 수 없다. 다들 영약을 먹고 다시 여기로 모이….”
“잠깐.”
버렌이 검사들에게 영약을 먹고 오자고 말하려 할 때 라온이 손을 들었다.
“그걸 지금 먹으면 안 되지.”
“뭐? 그게 무슨….”
“진명단은 체력과 오러를 다 쓰고 먹어야 더 효과가 좋은 거 알지? 낮에는 나와 대련하고, 오늘 밤에 먹어.”
라온은 미소를 지으며 빨리 오라는 듯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영약의 효과를 최대로 올리려면 나도 오늘은 힘 좀 줘야겠네.”
그의 수련검이 풍차처럼 맹렬하게 돌아갔다. 검날에서 퍼져나오는 풍압에 이가 덜덜 떨렸다.
“뭐해? 빨리 와.”
“아….”
라온의 부드러운 손짓을 보며 버렌은 확신했다.
‘저 새끼는 악마야.’
그냥 악마도 아니고, 마왕이 확실해!
* * *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3개월이 지나고 광풍단과 금첨단의 대결 날 아침이 밝았다.
결투가 이루어질 대연무장은 시작하기 전부터 사람들로 가득 차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오늘은 누가 이기려나?”
“말해서 뭐 해. 당연히 금첨단이지. 광풍단이 신성이라고 해도 단원의 이름값이 달라.”
“금첨단이 무슨 임무 했는지 아는 사람도 없을걸? 지금은 광풍단의 시대야.”
“오늘은 명성이 아니라, 힘을 겨루는 대결이잖아. 무력이 더 높은 금첨단이 유리할 수밖에 없어.”
“35명의 대결이니까. 대충 30:5정도로 금첨단이 이기겠네.”
“광풍단에는 사도를 쓰러뜨린 라온 지그하르트가 있다고!”
“라온은 한 명뿐이야. 이긴다고 해도 큰 영향이 없지.”
관중석에 앉은 사람들은 서로 안면이 없음에도 오늘 벌어질 대결을 기대하며 누가 이길지를 떠들어댔다.
대부분 광풍단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금첨단의 승리를 점쳤다.
그렇게 모두가 오늘 대련을 기대하며 들 떠 있을 때 대연무장의 정문이 열리고 금첨단이 들어왔다.
그들은 날카로운 기세를 피워내며 연무장 중심에 있는 대련장으로 향했다.
“저 기세가 안 느껴지냐? 저들이 아직 약관도 되지 못한 광풍단에게 질 것 같아?”
“활동 중지만 아니었으면 광풍단보다 명성도 뛰어났을걸.”
“그러게. 눈빛이 장난 아니야. 아주 잡아먹을 기세네.”
사람들은 금첨단이 피워내는 강렬한 기세를 느끼며 본인들의 판단을 확신했다.
쿠구구구!
금첨단이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문이 두 번째로 열리고 광풍단이 입장했다.
금첨단과 달리 자신감이나 패기 넘치는 기세는 없었다. 오히려 불안해 보일 정도로 조용히 대련장으로 향했다.
“쟤, 쟤들 왜들 저래?”
“너무 패기가 없는데?”
“금첨단의 기세를 느끼고 쫀 거 아니야?”
“하긴 몇 수 위의 상대라는 걸 알았을 테니까.”
“망했다! 라온을 믿고 광풍단에 전 재산을 걸었는데!”
“꼴을 보니, 재미없게 끝나겠네.”
사람들은 광풍단의 처진 기세를 보고 오늘 대결은 싱겁게 끝날 것 같다고 떠들어냈다.
라온은 그런 구경꾼들의 반응을 즐기듯 연무장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그 말이 맞지. 재미없게 끝날 거야.”
전승으로 끝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