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암살자로 살아가던 시절.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훈련을 꼽으라면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대답할 수 있다.
바로 교관과의 대련.
쇠몽둥이로 악랄하게 빈틈과 급소만을 찌르는 교관들의 공격을 막고 반격하는 훈련이었는데, 조금도 봐주지 않아서 피멍은 당연했고, 뼈가 부러지거나, 살이 뜯겨나가는 경우도 흔했다.
더 어려운 건 아이들이 공격에 적응할 만하면 교관들은 힘과 속도를 높이고, 더 많은 급소와 약점을 공격해서 절대 막을 수 없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매일매일 죽고 싶을 정도의 통증을 견디며 본인이 살아남을 방법을 궁리했다. 그 결과 결국 자신의 빈틈은 지우고, 역으로 교관의 빈틈을 노릴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지옥에 떨어진 것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실력 하나는 일취월장했다. 실제로 몸에 박힌 그 본능 덕분에 목숨을 구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의 광풍단은 글렌의 배려로 본인들의 부족함을 채울 무학서를 얻었기 때문에 이 본능 훈련을 하기 딱 좋은 때였다.
“버렌.”
라온은 연무장의 중앙에 서서 버렌에게 나오라고 손짓했다.
“언제까지 구경만 할 거야.”
“젠장….”
버렌은 입술을 씹으며 앞으로 나왔다. 전력으로 붙어서 깨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얼굴에서 불안감이 흘러내렸다.
“준비 운동은 필요 없겠지? 와라.”
“흐아아압!”
버렌이 오러를 전력으로 끌어 올리며 땅을 박찼다. 접근하여 삭풍검을 내리치려는 순간 라온이 태화보를 밟아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어, 어디!”
“여기.”
라온은 버렌이 당황하여 머뭇거린 순간 옆으로 짓쳐 들어 녀석의 다리를 걷어 차버렸다.
뻐억!
보법을 밟는 중에 다리를 차인 버렌이 꼴사나운 자세로 넘어졌다.
“으으윽….”
충격은 크지 않았지만, 자존심이 상했는지 버렌의 얼굴이 뻘게졌다.
“보법을 운용한다고 네가 무적이 되는 게 아니야. 더 세심하게 주변을 살피면서 움직여라.”
“아, 알겠습니다.”
버렌이 이를 바득 갈고 다시 뛰어들었다. 라온은 버렌의 검격을 지붕에 타고 내려오는 빗물처럼 부드럽게 흘린 뒤 수련검을 내질렀다.
치이이잉!
수련검의 검극이 갈대처럼 흔들리더니, 십수 개로 변해 버렌의 빈틈을 노렸다.
“흐읍!”
버렌은 놀란 와중에도 바로 오러를 운용하여 둥근 방패와 같은 검기를 퍼뜨렸다.
쿠구구궁!
하지만 조급하게 만든 오러로 라온의 검을 막는 건 무리였다. 빨갛게 달아오른 수련검이 연녹색 오러를 찢어버리고, 그 아래에 있는 버렌을 후려쳤다.
퍼버버버벅!
당연히 그냥 치는 게 아니다. 현재 버렌에게 있는 약점과 빈틈을 무자비하게 찍어버렸다.
“끄엑! 그만!”
버렌이 없어 보이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방어가 아니라, 살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졌습니다! 져, 졌다고!”
“반응 속도는 빨랐다만 대응이 별로였다.”
라온은 수련검을 내리고, 허공에 흩어진 버렌의 오러를 가리켰다.
“자세히 보았으면 내 검격 중 더 약한 부분이 보였을 텐데 무조건 같은 힘으로 막으면 당연히 깨지지.”
“어, 언제 이런 변검을….”
“딱히 변검을 익힌 건 아니야. 그냥 해본 거지.”
특별한 변검을 배운 게 아니라, 그저 화령의 변화를 이용해서 검을 내려쳤을 뿐이었다.
“아….”
자신의 대답을 들은 버렌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얻어맞은 것보다 더 충격이었던 것 같다.
“33명을 다 돌면 다시 너니까. 조금 전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했는지를 생각해보도록.”
“어억….”
다시 돌아서 대련을 한다고 하자 버렌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루난.”
“으응.”
루난은 얻어맞은 버렌을 슬쩍 보고 눈동자를 굴렸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모습. 다만 광아검 때와는 다르다는 걸 알았는지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갈게.”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렸다는 듯 바닥을 빙판으로 만들고서 섬전처럼 검을 내질러왔다. 연무장의 온도가 급속도로 내려가며 피어난 서리가 몸을 굳게 만들었다.
콰앙!
라온은 진각 한 번으로 바닥과 허공에 깔린 서리를 모조리 쓸어버리고 검을 내리쳤다. 얇은 나뭇가지처럼 휘청이는 수련검이 다섯 개로 늘어나 루난의 머리와 어깨를 동시에 노렸다.
타앙!
루난은 고무줄을 튕기듯 탄력 있게 뒤로 물러섰지만 이미 상정 내였다.
후우웅!
라온은 루난의 움직임을 자석처럼 따라가 그녀가 반응하기 힘든 속도로 검을 그었다.
따악!
그 짧은 순간에도 방어하려는 루난의 손목을 때린 뒤 그녀의 빈틈 열 곳을 동시에 찔렀다.
“아악.”
루난은 비명도 조용했다. 맞은 급소를 부여잡고, 눈매를 축 내렸다. 비에 젖은 강아지 같은 표정이었다.
-솔직히 말해라. 너 마계에서 왔지!
‘무슨 헛소리야.’
-아이스크림 소녀에게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그 짧은 순간에 열 대를 치는 것이냐! 이 마귀 같은 놈!
‘이래야 강해져.’
루난의 표정을 보면 조금 미안해지긴 하지만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한다. 전부 이들을 위한 일이니까.
“탄력 있는 보법은 좋다만 방향을 제대로 살피지도, 내 검을 파악하지도 않았어. 상대의 검을 분석해서 피할지, 막을지 혹은 반격할지를 결정해.”
“응.”
“다음 대련에 똑같이 할 테니까. 어떻게 반격할 건지 생각해두고 있어.”
“…….”
루난은 처음으로 자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멀어졌다.
“그럼 나네.”
마르타가 씩 웃으며 대련장으로 올라왔다. 두려움은 없다는 듯 호승심을 불태우며 수련검을 들었다.
“바로 간다!”
그녀는 어떠한 시작 신호도 없이 돌진해 검을 내리쳤다. 강력한 힘과 속도가 어린 검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챠아아앙!
라온은 수련검을 굽이치는 물결처럼 그어 마르타의 검격을 흘려내고 그녀의 빈틈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퍼어억!
강한 충격에 몸이 휘청였음에도 마르타는 멈추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방어하고, 아파할 시간에 더 공격하겠다는 기세였다.
“그게 옳을까?”
라온은 피식 웃으며 마르타의 공격은 모조리 흘려내고, 그녀의 약점과 빈틈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크윽….”
지독한 고통과 한 대도 맞추지 못했다는 사실에 마르타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강한 힘과 맷집은 네 큰 무기지만 그게 항상 통하지는 않아. 너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할 수도 있고, 나처럼 네 공격 자체를 무효로 만들 수도 있지.”
라온이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순식간에 검날이 다섯 개로 번지며 그녀의 오러를 사정없이 뚫어버렸다.
“꺄악!”
이를 까득 깨물고 공격을 버티던 마르타는 결국 비명을 지르고 무너졌다.
“타이탄 오러의 방어력을 믿는 것도 좋지만, 빈틈이 너무 많다. 맞을 건 맞고, 피할 건 피하는 방법을 익혀.”
“으으윽!”
얻어맞은 곳을 꽉 부여잡은 채 자신을 노려보는 검은 눈동자에 분노가 담겼다.
“부, 부단주님. 이거 좀 심하지 않나요?”
도리안이 창백한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실전처럼 대련해야 발전하는 법이지.”
라온은 미소를 지으며 방금 질문을 한 도리안을 가리켰다.
“마침 질문 잘했어. 다음은 너다. 도리안.”
“히이이이익!”
* * *
반쪽 달이 하늘의 중심에 떠올랐을 때야 5연무장의 비명이 그쳤다.
“오늘은 여기까지.”
라온은 수련검을 어깨에 걸치고서 씩 웃었다.
“으어어억!”
“사, 살았다….”
“지인짜 죽는 줄 알았어.”
“허어어어….”
수련생들은 대답도 못 하고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다 연무장에 쓰러졌다. 드러난 피부에는 멍이 가득했고, 수련복은 땀에 젖어서 허옇게 물들었다.
아프고 힘들겠지만, 후유증이 남지 않도록 쳤으니 내일 아침이면 어느 정도 회복될 것이다.
“너희들이 왜 맞았고, 어떻게 하면 맞지 않을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해라. 새로 얻은 무학을 이용한다면 조금이나마 더 빨리 나아질 수 있을 거다.”
“그, 그게 하루아침에 되냐?”
버렌이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세 번째 맞을 때부터는 존댓말도 내다 버리고 다시 반말을 시작했다.
“안 되면 맞는 거지.”
“크윽!”
녀석은 이만 북북 갈 뿐 대꾸하지 못했다.
“…….”
“씨발. 씨발! 개씨발!”
루난은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일어나지 못했고, 마르타는 분한 듯 하늘을 본 채로 욕설만 뱉었다.
“으어어!”
“나 죽어….”
“아, 안 아픈 곳이 없어.”
수련생들 모두가 이런저런 자세로 자빠져서 신음만 흘렸다.
“첫날은 가볍게 했다. 내일 오전부터는 봐주지 않을 테니, 새벽에 나와서 몸을 풀고 준비하도록.”
“가, 가벼워? 이게? 거기다 내일은 제대로 한다고?”
“그것도 아침부터?”
“정말 우리를 죽일 셈인가….”
“다, 단주님! 어디 있어요! 부단주가 우리를 죽이려고 해요!”
광풍단원들이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러댔다.
“소리 지를 힘이 있으면 빨리 가서 안 맞을 방법을 연구하는 게 좋을 거야. 내일은 더 고달플 테니까.”
라온은 서늘한 미소를 짓고서 연무장을 떠났다.
쿠구궁!
도리안은 라온이 사라지자마자 배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급 썰매를 꺼냈다.
“나 집에 갈래!”
* * *
라온은 별관으로 들어가지 않고, 공터로 향했다. 달빛이 번지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주디엘이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말씀하신 검술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주디엘이 고개를 주억이고, 얇은 책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고마워.”
라온은 옅게 웃고서 주디엘이 내민 책자를 받았다. 그 안에는 검술 자세와 설명이 적혀 있었다.
“이게 백향검인가.”
백향검은 가론이 금첨단 검사들에게 내려준 무학으로 다채로운 변화와 뛰어난 공간 장악력이 어우러진 상급 검술이었다.
광풍단원들을 때릴 때. 아니, 교육시킬 때 사용하려고 주디엘에게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녀는 늦지 않게 검술을 구해왔다.
본인이 직접 그림과 설명을 그려 온 걸 보면 역시 눈썰미와 감각이 보통이 아니었다.
라온은 백향검 책자를 두 번 정독한 뒤 만화공을 이용해서 태워버렸다.
“지금부터 한 번 해보려고 하는데 봐줄 수 있어?”
“알겠습니다.”
주디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섰다.
치이잉!
라온은 손목을 돌리고서 검을 뽑았다.
후우우우!
바람을 머금은 은빛 칼날이 봄날의 꽃향기처럼 퍼지며 네 개 곡선을 그렸다.
만화경처럼 화려한 변화가 깃든 칼날은 각기 다른 속도와 궤적으로 번져가며 호수에 비친 달빛을 수십 조각으로 갈랐다.
“어땠어?”
백향검법의 초식을 전부 펼친 뒤에 주디엘에게 다가갔다.
“거, 거의 완벽합니다….”
주디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책자를 두 번 본 것으로 백향검법을 따라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다만 속도가 조금 더 빠르고, 궤적들이 조금 더 넓게 퍼졌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라온은 그녀의 조언을 받아 다시 백향검술을 펼쳤다.
“예. 제가 보았던 백향검술과 흡사합니다. 어떻게 책자를 두 번 본 것으로….”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최근에 좀 깨달은 게 있어서.”
불의 고리와 화령 덕분에 변검과 환검의 이해도가 굉장히 높아졌다. 그림과 설명만으로 백향검술을 따라 할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 정도이신데 백향검에 대한 자료는 왜 구해달라고 하신 거죠? 지금 도련님이 알고 계신 무학이 더 뛰어날 텐데.”
“이건 내가 익힐 게 아니야.”
“예?”
“백향검을 쪼개고, 나눠서 광풍단 애들을 훈련시킬 때 사용할 거야.”
백향검에서 뽑아낸 변화와 공간 장악력으로 광풍단을 공격해서 녀석들에게 본능을 심어줄 생각이다. 금첨단의 검을 압도하고 씹어먹을 수 있는 본능을.
“하….”
그 말뜻을 알아들은 주디엘의 눈동자가 탁 풀렸다. 놀라움을 넘어, 경악한 표정이었다.
“수고했어. 이만 가서 쉬어.”
“도, 도련님은….”
“나는 검술을 더 다듬고 갈게.”
“하루종일 검사들을 상대하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시간이 많지 않아. 내가 제대로 배우고 익혀야 단원들을 강하게 만들 수 있거든.”
“알겠습니다. 그럼.”
주디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별관으로 들어갔다.
‘그럼 빠르게 끝내볼까.’
-빠르게 한다는 걸 보니, 날 새겠군.
라스는 잠은 다 잤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금방 할게.”
라온은 옅게 웃고서 백향검을 펼쳤다. 초식에 깃든 변화와 공간 장악력을 잘게 쪼갠 뒤 그 호흡을 자신의 검에 담아냈다.
백향검은 낱낱이 분해되어 라온이 강해질 토양에 뿌려졌다.
그가 검술을 익히는데 집중하고 있을 때 주디엘이 샌드위치를 가지고 와서 공터 옆에 있는 나무 밑동에 올려놓았다.
주디엘은 라온의 집중에 방해가 될까봐 멀리 떨어진 채 그가 백향검을 펼치는 걸 조용히 지켜보았다. 혹시라도 도와줄게 있지 않을까 고민하면서.
* * *
대련만으로 훈련을 진행한 지 한 달이 지났다.
라온은 광풍단원들이 빠르고 다채로운 공격이 눈에 익을 만하면 강도를 높여서 절대 적응할 수 없게 만들었다.
광풍단원들은 매일매일 수련하고 얻어맞고, 고민하는데도 본인들의 실력이 전혀 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기이한 늪에 빠져 있었다.
“지, 진짜 미치겠다.”
“죽고 싶어. 죽여줘….”
“엄마가 보고 싶어. 엄마….”
검사들은 간신히 얻은 쉬는 시간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바닥에 얼굴을 비비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도망치려는 검사들도 많았지만, 라온의 감각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전부 포기한 상태였다.
“이야!”
퇴원한 후 훈련 진행도 하지 않고 놀고 먹느라, 얼굴에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리메르가 수련생들을 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내가 너희였으면 진즉에 검사 때려치웠을 거야. 어휴!”
“다, 단주님.”
“너희와 같은 입장이 아니라는 것에 신께 감사드린다.”
그는 진심인지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채 기도를 올렸다.
“흐으응.”
콧노래를 부르며 멀어지는 리메르는 라온보다 더 얄미워 보였다.
“버, 버렌 님. 이대로 참으실 겁니까? 이러다가 저희 정말 죽습니다!”
“맞아요.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괴물 때문에 다 죽게 생겼다구요!”
“부단주 자식! 이제 때리는 것에 맛들려서 매일 웃고 있습니다!”
광풍단원들은 가장 말이 통하는 버렌을 찾아가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루난은 아예 말을 잃었고, 마르타는 입에서 욕밖에 안 나와 의논할 사람은 버렌 뿐이었다.
“나도 죽겠지만, 방법이 없다. 단주님은 아예 손을 놨고, 라온 저 독한 놈은 절대 봐주지를 않아.”
“꼭 대련을 그만 두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젠 버렌의 충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크레인이 고개를 들었다.
“이 지옥 같은 대련을 며칠 쉬기만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쉰다고? 어떻게 쉬어?”
“예를 들자면 이 땅.”
크레인이 연무장 바닥을 가리켰다.
“지금은 부드러운 흙이 있어서 그나마 덜 다치게 해주지만, 이게 없으면 라온도 심하게 굴리지 못할 겁니다. 혹은 부드러운 흙을 구해올 때까지 대련을 연기할 가능성도 있죠.”
“으음, 확실히.”
버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모든 연무장에 다 차 있는 상태라, 다른 곳에서 대련을 진행하는 것도 무리다. 여기서 못한다면 정말 며칠 쉴 시간이 나올지도 모른다.
“오늘 밤에 강한 태풍이 지나간다는 건 들으셨죠? 부단주가 밤에 이곳을 지키고 있을 리 없으니, 그 태풍을 이용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태풍을 이용해?”
“예. 흙을 가져다 버리고, 땅을 뒤집어엎은 뒤에 태풍 때문이라고 하면 부단주도 뭐라 못할 겁니다. 연무장을 정비해야 하니 최소 2일에서 3일은 대련을 하지 못할 겁니다.”
“으….”
버렌이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이대로 계속 대련했다간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그래. 딱 며칠만. 며칠만 쉬는 거야. 내가 아니라, 애들이 죽겠어.’
2주 넘게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던 그는 이성 결여된 자기합리화를 마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말이 통하는 녀석들을 전부 불러와.”
버렌은 루난과 마르타 그리고 라온의 직속이라고 볼 수 있는 도리안을 제외한 모두를 불러 모아 계획을 설명했다.
* * *
그날 밤.
불이 꺼진 5연무장에 다리가 휘청거리는 광풍단원 30명이 모였다.
“지금부터 작업을 시작한다.”
버렌이 모두를 모아놓고 바닥의 흙을 가리켰다.
“1조는 연무장에 깔린 부드러운 흙을 전부 버린다. 조금도 남기지 말도록.”
“예!”
“크게 대답하지 마.”
“2조는 땅을 갈아엎어. 태풍이 온 척해야 하니까. 최대한 자연스럽게.”
“예!”
“크게 대답하지 말라고!”
조금 전까지 훈련을 했기에 검사들은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3조는 나와 함께 연무장 외부를 어지른다. 자연스러움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기억하고 모두 작업 개시.”
“예!”
“아 큰 소리 내지 마! 좀!”
버렌은 본인이 가장 시끄럽다는 걸 모른 채 작업을 시작했다.
검사들은 단 일주일 혹은 며칠이라도 제대로 쉬기를 원하며 흙을 모아서 버리고, 땅을 갈아엎었다.
살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참으로 눈물겨웠지만, 연무장 지붕 위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붉은 눈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 * *
다음 날 아침.
라온은 평소와 같은 시간에 연무장에 들어갔지만, 그곳은 어제와는 너무도 다른 장소가 되어 있었다.
연무장 전체가 폭격을 맞은 것처럼 난장판이 된 상태였다.
“이게 뭐지?”
“어제 온 태풍이 이 주변을 쓸고 지나갔다고 합니다.”
버렌이 다가와서 인상을 찌푸렸다.
“태풍? 아, 태풍이 온다는 이야기는 있었지.”
“예.”
“확실히 그렇게 보이긴 하네.”
라온은 걸레짝이 된 바닥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부, 부단주님.”
크레인이 손을 모은 채로 버렌의 옆에 섰다.
“이런 바닥에서 대련했다가는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여기서는 무리야.”
라온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으니까. 모두 단상 앞으로 모여.”
“예!”
“아, 옙!”
계획대로 되었다는 생각에 작업했던 버렌과 검사들의 표정이 붕 떴다. 흐느적거리는 걸음이 경쾌하게 보일 정도였다.
“후우….”
라온은 단상 위에 올라가서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보았다시피 연무장 상태가 좋지 않다. 오늘은 연무장 정비를 해야겠어.”
“오!”
“이야….”
“드디어!”
라온의 말을 들은 검사들의 표정은 숨길 수 없을 밝아졌다. 하지만 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에겐 방법이 있다.”
“바, 방법?”
“무슨 방법이요?”
“도리안.”
라온이 손짓을 하자, 도리안이 한숨을 푹 내쉬고서 단상 앞으로 갔다. 그는 힘겨운 손동작으로 배 주머니에서 큼지막한 포대 하나를 꺼냈다.
“포르반 시청에 요구했던 연성토다. 부드럽고, 안전하기로는 제일인 흙이지.”
라온은 미소를 지으며 도리안이 꺼낸 시작한 연성토를 가리켰다. 시장을 직접 찾아가서 첫 번째로 요구했던 게 바로 이 연성토였다.
“이게 딱 그저께 도착했거든. 훈련 다 끝나고 바꾸려고 했는데, 차라리 잘 됐어. 도리안. 전부 꺼내.”
“예에.”
도리안은 힘겹게 대답하고서 연성토 포대 백 개를 단상 앞에 늘어놓았다. 눈동자가 풀린 걸 보면 다 포기한 표정이었다.
“아….”
“어….”
“이, 이거 꿈인가….”
조금 전까지 행복에 젖었던 검사들은 지옥의 구덩이에 빠진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 한 표정이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오늘 안에 끝내자. 삽이랑, 연무장 정비 도구를 가지고 오도록.”
라온의 지시에 검사들이 팔다리를 덜덜 떨며 뒤를 돌았다.
“제, 젠장….”
“잠도 못 자고 그 지랄을 했는데….”
“저 멍청한 새끼!”
“그냥 개고생이었잖아.”
그들은 이 계획을 짰던 크레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 그래도 하루. 오늘 하루는 대련이 없을 겁니다. 그걸로라도 위안 삼죠.”
크레인이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저었다.
“그거라도 없었으면 넌 지금 뒈졌을 거야.”
“후, 그래. 오늘이라도 좀 쉬자.”
“하루 쉬는 게 어디야.”
“너희 어디 가냐?”
검사들이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 할 때 라온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바, 방금 도구를 가져오라고 하셔서….”
“빨리 정비해야죠.”
“겨우 정비하는 건데 다 갈 필요는 없잖아.”
라온이 빙긋 웃으며 포대 하나를 뜯고 단상 앞 바닥에 뿌렸다. 그는 오러를 이용하여 바닥을 다져서 바로 임시 대련장을 하나 만들었다.
“시간은 금이고, 결투는 얼마 남지 않았어. 대련은 계속되어야 한다.”
“아….”
“으….”
“크헉!”
눈 깜짝할 사이에 만들어진 간이 대련장을 보며 검사들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연무장을 밟고 턱을 치켜든 라온의 모습이 지옥에서 올라온 사신으로만 보였다.
“역시 연성토야. 밟는 맛이 나네.”
라온은 땅을 확실하게 다지고서 버렌에게 손짓했다.
“안 덤비고 뭐 해?”
“나?”
“그래. 시작은 고유 버렌이잖아.”
“으으….”
버렌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도리안이 챙겨준 수련검을 들었다.
“젠에에에엔장! 커헉!”
그는 비명 같은 기합을 지르고 달려들었다가 바로 얻어터지고 연성토로 다져진 바닥을 굴렀다.
“바닥이 부드러우니까 덜 아프지? 오늘부터 조금 더 강도를 올려도 되겠어.”
“허어!”
“인생….”
라온이 씩 웃자, 정비 장비를 들고 있던 검사들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너 인간 맞냐?
지금까지 모든 상황을 지켜본 라스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볼수록 우리 쪽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