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금첨단 부단주 테크리는 바로 앞에 선 라온을 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뭐지?’
라온을 치려고 일어났지만 팔다리가 삐걱인다. 뭔지 모를 불길한 기운이 자신의 몸을 꽉 동여맨 것 같았다.
‘이놈은 아니야….’
라온은 때릴 테면 때리라는 듯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런 표정을 짓는 놈이 오러를 운용하여 자신을 막을 리가 없었다.
으득.
테크리는 이를 갈며 오러를 끌어 올렸다. 몸에 압박을 가해오는 기운을 밀어내고 손을 들었다. 몸은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불길한 기운은 후각을 자극할 정도로 강해졌다.
‘이, 이거 설마….’
속으로 헉 소리가 터졌다. 이제 알았다. 외부가 아니라, 내부다. 손을 들 수 없게 막고, 불길한 기운을 풍긴 건 라온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이었다.
수련하고 싸우며 키워온 전투의 감각이 속삭인 것이다. 라온과 싸우면 안 된다고.
“부, 부단주님!”
“뭐 하시는 겁니까!”
“저놈이 우리를 얕보고 있지 않습니까!”
뒤에 있던 금첨단 검사들이 라온을 응징하라는 듯 손을 휘젓고 소리를 질렀다.
“안 칠 건가?”
라온은 빨리 치라는 듯 건방진 미소를 지으며, 아예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부하들도 보고 있는데, 그냥 넘어가게?”
“이놈이….”
본래 사람은 좋아하는 이성과 부하들 앞에서는 없던 힘과 용기도 생기는 법. 테크리는 본인의 감각을 무시하고 주먹을 쥐었다.
“크아아아!”
테크리가 말아쥔 주먹에 오러를 가늘게 휘감아 내질렀다. 푸른 오러가 뱀처럼 꼬이며 주먹 앞에 창과 같은 형상을 이뤄냈다. 금첨단에 와서 익힌 시멸권의 절기였다.
피이이익!
섬광처럼 뻗어나간 주먹이 라온의 왼쪽 볼에 작렬했다.
‘별거 아니잖아!’
불안했던 감각과 달리 라온은 시멸권을 피해 내지 못했다. 미소를 지으며 팔을 끝까지 뻗었다.
“어?”
하지만 주먹에 걸리는 느낌이 없다. 바람에 날리는 보자기를 친 듯 허무함만 가득했다.
찌이이잉!
이상하다고 생각한 순간 라온과 눈을 마주쳤다.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붉은 눈. 짐승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고 있는 것처럼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후우우웅!
라온은 목을 돌려 시멸권을 완벽하게 흘려낸 뒤 오른쪽 주먹을 뻗어왔다. 놈의 주먹에 어린 막대한 기운이 대기를 터트리며 짓쳐 들었다.
“흐읍!”
테크리가 고개를 숙인 채 재빠르게 보법을 밟아 물러섰다.
‘으윽!’
안전한 장소에 도착한 후 고개를 들었지만. 주먹은 사라지지 않았다. 라온이 자신의 회피 방향을 읽고 따라온 것이다. 시야를 가득 채운 주먹을 피할 곳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당할 줄 알… 헉!’
다급하게 오러를 운용해서 방벽을 세우려고 했지만, 단전에 반응이 없다. 단전만이 아니다. 전신이 밧줄에 묶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 이건….’
도리안의 다리를 걸고 넘어뜨렸을 때 사용했던 오러 억제다. 라온은 자신이 도리안과 똑같이 당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제, 젠자… 쿠헥!”
테크리는 욕을 채 내뱉지 못한 채 라온의 주먹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흘리기를 할 틈도 없이 어마어마한 충격이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뿌드드득!
테트리는 본인의 얼굴이 뭉개지는 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잃었다.
* * *
쿠와아아앙!
폭발 같은 충격음이 울려 퍼지고 테크리는 식당의 우측 벽면에 액자처럼 처박혔다.
“아, 미안.”
라온은 손을 툭툭 털며 옅게 웃었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 말을 하고서 테트리의 주먹이 스쳐 지나갔던 뺨을 만졌다.
“이, 이런!”
“이게 뭐야!”
“부단주님!”
“정지.”
금첨단 검사들이 벽에 박힌 테트리에게 달려가려 할 때 라온이 손을 들었다. 그 한 단어에 검사들이 목각인형처럼 우뚝 멈췄다.
“거기 중간에 하늘색 머리 이쪽으로.”
“왜, 왜….”
하늘색 머리의 검사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이름은?”
“도, 돌란이다.”
“네가 저 녀석 다음이지? 조장인가?”
“헉….”
조장이냐고 묻자 돌란의 표정이 굳어졌다. 한 번에 본인의 지위를 알아차릴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예상대로네.’
라온이 피식 웃었다. 테트리를 제외하고 가장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 찍어봤는데, 역시나였다.
“돌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겠지?”
“아, 알고 있다.”
“근데 왜 말을 놓지? 난 부단주고, 넌 조장인데.”
“윽!”
주먹을 쥘 것처럼 손가락을 까딱이자, 돌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죄, 죄송합니다.”
돌란이 고개를 꾸벅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높였다.
“아쉽게도 너희 부단주가 저렇게 되었으니, 대결에 관해서는 너와 이야기해야겠네.”
라온은 테크리가 일어선 의자에 앉았다. 돌란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마른침만 삼켰다.
“일단 대결 날짜는 3달 뒤.”
“3달? 3달은 너무 깁니다!”
돌란이 눈을 부릅떴다. 가론은 아무리 늦어도 대련 날짜를 2주 안에 잡으라고 말했었다. 3달 후에 대결이라고 전한다면 분명 경을 칠 것이다.
“이건 우리가 배려해주는 건데?”
“예?”
“저거 한 달 안에 일어날 수 있을 거 같아?”
라온이 피식 웃으며 벽에 박힌 테크리를 가리켰다.
“아….”
돌란은 멍한 눈으로 테크리를 보았다. 벽에 박힌 기괴한 모양새를 보니, 맞은 건 얼굴이지만 온몸의 뼈가 부러진 것 같다. 재활 기간을 생각하면 한 달로 회복하는 건 무리였다.
“어때?”
“모, 못 일어나는 게 맞습니다. 그럼 3달로….”
“배려를 해줬으면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예?”
“내가 너희를 생각해서 배려해준 거잖아. 그럼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지.”
“아, 가, 감사합니다!”
돌란은 머리를 숙이면서 눈동자를 굴렸다. 테크리를 저 꼴로 만든 게 라온인데, 이게 정말 고맙다고 해야 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그럼 날짜는 정해졌고, 방식은 35명이 1:1로 대결해서 더 많은 승을 올린 쪽이 이기는 단체 결투 형식으로 한다.”
“알겠습니다.”
“너희가 이겼을 때 원하는 건 광풍단의 활동 중지겠지?”
“허억!”
그 말이 맞았는지 돌란의 얼굴이 파래졌다.
“어떻게 한치의 예상도 벗어나지 않는지.”
라온이 키득거렸다. 예상대로 금첨단주 가론은 진무전이 활동을 중지당한 것에 대한 복수로 시비를 걸어 온 게 맞았다.
“기간은 2년 정도겠고.”
“…맞습니다.”
“우리의 조건은 뭐든 받으라고 했겠지?”
“그, 그것도 맞습니다.”
돌란은 귀신을 본 듯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조건은 일단 백지로 하겠다. 승리하면 정하도록 하지.”
“예. 예에….”
정신이 멍해진 건지, 이제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건지 돌란은 풀린 눈으로 네라는 말만 반복했다.
“이제 이 대결의 공증인이 필요한데.”
“그건 제가 불러오겠….”
“내가 하지.”
돌란이 움직이려 할 때 식당 문이 열리고, 보라색 머리칼의 여성이 들어왔다. 체구가 작지만 피부가 하얗고, 눈매가 가는 미인이었다.
다만 그녀의 등에는 회색 검이 사선으로 매여 있었고,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기파를 뿜어냈다. 저 외모에, 저런 무력을 가진 검사는 지그하르트에 딱 한 명뿐이었다.
‘천검대주….’
글렌 지그하르트 직속 천검대를 수십 년째 맡고 있는 호걸이자,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강자 천검대주 셰릴이었다.
‘그런데 이 기운은…’
셰릴의 기세가 낯설지 않다. 오늘 무아지경 때도 그렇고 이전에 집중할 때도 그렇고 미세하게 느껴졌던 기운이었다.
“처, 천검대주께서 왜 여기에….”
돌란은 겁에 질린 듯 주저앉아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너희들 때문에 아무도 식당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열린 문을 가리켰다. 본래 식당을 이용하던 기술자들과 검사들이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했다.
“빨리 끝내고 모두 사라져라. 결투할 건가, 말 건가.”
셰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말투는 퉁명스러웠다.
“하겠습니다.”
“저, 저희도 하겠습니다.”
“검투가 벌어지는 건 3달 뒤 대연무장. 내기 방식은 35명의 단원끼리 1:1일 대련. 금첨단이 원하는 대가는 광풍단의 2년간 활동 중지 그리고 광풍단은 끝난 후 아무거나 맞나?”
“예.”
라온과 돌란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천검대주 셰릴의 이름으로 광풍단과 금첨단의 대결을 공증하겠다.”
“감사합니다.”
“그럼 둘 다 사라지도록.”
셰릴은 인사도 받지 않고, 빨리 가라는 듯 손을 저었다.
“아, 예!”
돌란은 벽에 박힌 테크리를 뽑아서 금첨단 검사들과 함께 식당을 빠져나갔다.
“넌 안 가나?”
“할 일이 있습니다. 도리안.”
라온은 멀찍이 서서 입만 벌리고 있던 도리안을 불렀다.
“청소 도구 좀 줄래?”
“예? 아, 알겠습니다.”
도리안은 당황한 표정으로 배 주머니에서 빗자루와 걸레, 물통을 꺼내주었다.
-음식을 버리다니, 네놈은 천벌을 받을 것이니라.
‘마왕도 천벌이라는 말을 쓰나?’
-시끄럽다! 귀하게 자라서 음식 귀한 줄도 모르는 어린 놈아!
‘그래. 미안해.’
-오옥!
바로 미안하다고 하자 라스가 이상한 소리를 터트렸다.
-네, 네놈이 사과하다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이냐?
‘그럴 리가.’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전생에서 배고프게 살았기에 음식 귀한 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다만 이번만큼은 도리안이 당했던 대로 갚아주고 싶었다.
“저, 저도 하겠습니다!”
“나도 도와주마.”
라온은 도리안, 버렌과 함께 바닥과 테이블, 의자 잔해를 모두 치운 뒤에 당황하고 있는 직원들에게 다가갔다.
“사정이 있다고 해도 음식을 버려서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이, 이러지 마십시오! 어차피 떨어진 것들인데….”
식당 직원들이 손을 내저었다.
“이제 그놈들이 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식당 수리 비용은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전부 가장 좋은 자재로 고치세요.”
라온은 식당 직원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해주고서 셰릴의 앞에 섰다.
“공증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눈매를 좁힌 채 자신을 살폈다. 꼭 생각을 읽으려는 것처럼.
“그리고. 앞으로 따라다니실 때는 표정을 조금만 풀어주십시오. 무서워서 수련하기 힘듭니다.”
“무, 무슨!”
셰릴의 눈동자가 보름달을 담은 듯 부풀었다.
‘역시.’
혹시나 해서 떠봤는데 예상대로다. 무아지경 때나 아주 가끔 느껴졌던 기운의 주인은 셰릴이었다.
“너, 너 어떻게….”
라온은 당황하는 셰릴에게 손을 저어주고, 식당을 떠났다.
“허….”
셰릴은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 녀석이 내 기척을 느꼈다고?”
* * *
“그러니까.”
가론은 돌란을 굽어보며 이를 갈았다. 그의 살벌한 기세가 퍼져나가며 단주실에 박힌 칼날들이 기괴한 울음을 터트렸다.
“테크리는 라온의 주먹 한 방에 이런 병신 꼴이 되었고, 대결은 3달 뒤로 미뤄졌다 이거냐?”
“그, 그렇습니다.”
돌린이 덜덜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너 미쳤냐? 대가리에 빵구라도 뚫렸어?”
가론의 눈동자가 악귀처럼 살벌하게 번들거렸다.
“조장 따위가 뭐라고 네 마음대로 결투 내용을 정해! 할 거면 제대로라도 하던가! 3달 뒤? 내가 그 망할 놈들이 설치는 꼴을 3달 동안 봐야겠어? 어?”
“죄, 죄송….”
“거기다 우리 부단주가 병신이 되어서 돌아왔는데 그냥 넘어가라고?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간 거야!”
“그게 반사적으로 쳤다고….”
“반사? 내가 네 눈깔을 꺼내서 반사시켜 줘?”
“아, 그, 그니까 식당에서….”
돌란은 가론에게 식당에서 있었던 라온과 테크리의 전투에 대해 말해주었다.
“라온의 주먹질 한 번에 털려서 이렇게 줄 끊어진 인형처럼 되었다는 거지?”
“그, 그렇습니다.”
“지랄 났군.”
가론은 이미 쓰러진 테크리의 뺨을 철썩 후려쳤다. 충격이 큰지 여전히 깨어나지 못했다.
“후우, 가자. 이따위 결투는 받아들일 수 없어. 다른 건 몰라도 3달은 너무 길다.”
"하지만 테크리 님을 치료하고 회복하는 시간이….“
"저 머저리 따위 없어도 놈들에게는 지지 않아. 어차피 공증인도 우리 쪽이니까.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그, 그게 공증인이 우리가 준비했던 분이 아닙니다.”
“뭐?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이 결투의 공증인이 천검대주가 되었습니다."
돌란은 죽을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예, 예정된 공증인을 불러오기 전에 갑자기 천검대주가 찾아와서 공증을 섰습니다."
"그 늙지도 않는 귀신 같은 년이!”
가론이 이를 바득 갈았다. 평소처럼 무관심하게 지나가기나 하지 뭘 주워 먹겠다고 쳐 와서 공증을 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기랄. 그년은 독해. 절대 안 바꿔줄 거다.”
천검대주는 깐깐하기로 가문에서 제일가는 사람이다. 어려 보이는 외모와 달리 나이도 글렌과 동갑이라 웬만한 술수나, 압력도 통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3달 동안 단원들의 훈련 강도를 높여라.”
가론이 쓰러진 테크리를 보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이런 병신 같은 꼴이 되지 않도록.”
* * *
천검대주는 식당을 떠난 뒤 바로 글렌을 찾아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보고했다.
“금첨단과 광풍단이라….”
글렌은 별 관심 없는 듯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데르가 관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진무전 쪽에서 먼저 시비를 건 건 확실합니다. 집법부가 나서지 못하도록 꽤 고약한 방법을 썼더군요.”
“레이든이 당하는 걸 보고 명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이군. 방식은 더럽지만, 압박하기에 좋은 수단이다.”
그는 괜찮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건 그렇고, 라온이 식판으로 금첨단 부단주를 쳤다고 했나?”
“예. 식판에서 그런 소리가 날 줄은 상상 못 했습니다.”
셰릴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익스퍼트 최상급에 오른 테크리를 주먹 한 방으로 기절시키더군요. 라온의 힘과 순발력, 오러 운용은 이미 마스터 이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크흠.”
글렌은 웃는지, 찡그리는지 애매한 표정을 짓다가 입을 가렸다.
“그런데 너는 왜 나서서 공증을 해준 거지? 그런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
“계속 시간을 끌었다간 식당 직원이나 기술자, 다른 검사들에게도 피해가 생길 것 같아서 끼어들었습니다.”
“그렇군.”
글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이 대결에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무슨 말이지?”
“가주님께서 왜 라온을 지켜보라고 하셨는지는 이해했습니다. 지금까지 보았던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재능에 성실함과 끈기까지 갖췄더군요. 언젠가 제가 있는 위치. 아니, 절 넘어 하늘에 닿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셰릴이 가늘게 눈매를 좁히며 말을 이었다.
“이번 대결은 라온 혼자 싸우는 게 아니라, 집단 대 집단. 광풍단과 금첨단의 대결입니다. 라온과 리메르 그리고 3명의 조장을 제외하면 광풍단은 전패하게 될 겁니다.”
그녀는 이미 끝난 싸움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리메르가 했던 말을 기억하나?”
“한 말이라고 하신다면….”
“라온이 왕의 그릇이라고 한 거 말이다.”
“당연히 기억합니다. 볼 때마다 하니, 지겨웠죠.”
셰릴이 인상을 찌푸렸다. 언젠가부터 리메르는 라온이 왕의 그릇이라고 세뇌하듯 중얼거렸었다.
“다만 전 무의 재능만으로 왕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동의한다. 그 아이의 재능이 역대급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왕이 되는 건. 이 가문의 주인이 된다는 건 또 다른 문제지.”
글렌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었다.
“왕은 훌륭하고 뛰어난 신하들이 있기에 만들어지는 법. 만약 이번 대결에서 광풍단이 금첨단을 이긴다면 라온에게 정말 왕의 기질이 있을지도 모르겠지.”
“그건….”
셰릴은 대답하지 않고, 입매를 꾹 다물었다. 오늘 라온에게 은신이 들켰던 게 갑자기 떠올라서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힘을 줘서 숨은 건 아니지만, 들켰다는 자체에 자존심이 상했다.
“아직 못 믿는 눈치로군. 그럼 나와 내기 하나 할까?”
“내, 내기라고 하셨습니까?”
셰릴이 눈을 부릅떴다. 도박쟁이 리메르라면 모를까. 글렌은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변하고 있어.’
* * *
라온은 오후 정규 훈련이 시작되기 전에 광풍단 모두를 모아놓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주목.”
단상 위를 올려보는 검사들의 눈을 마주한 뒤 천천히 입을 뗐다.
“최근 금첨단이 시비를 걸어왔다는 건 모두 알고 있을 거다. 놈들이 원하는 건 우리와의 결투였고. 나와 단주님은 그 결투를 받아들였다.”
“으음….”
“후우!”
검사들은 불안한 듯 입술을 깨물거나,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3달 뒤 대연무장에서 놈들과 단체 결투를 벌인다. 35명이 참여하고, 더 많은 승을 챙긴 쪽이 승리한다.”
“저, 저기….”
3조 검사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만약에 저희가 지면 어떻게 됩니까?”
“2년간 활동 중지다.”
“허억!”
“화, 활동 중지? 그것도 2년?”
2년간 활동 중지라고 말하자 검사들이 입을 떡 버렸다.
“단체전을 벌이는 건 좋은데, 금첨단을 이기긴 힘들지 않나?”
“거긴 우리 같은 신입 검사가 없잖아.”
“2년간 활동 중지….”
“이제 시작인데, 우린 망했어!”
“젠장….”
그들은 이미 패하기라도 한 것처럼 표정이 침울하게 변했다.
“병신들아! 왜 벌써 진 것처럼 짖어대! 다 입 안 닥쳐?”
마르타가 뒤를 돌아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저 말이 맞다. 아직 출발선에 서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시상식을 바라보는 거냐.”
버렌도 마르타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루난은 뭐, 평소와 같았다.
“편을 들어줘서 고맙지만, 아쉽게도 아니야.”
라온은 마르타와 버렌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싸운다면 필패고, 이대로 훈련한다면 3달 뒤에도 필패다.”
“뭐?”
“무, 무슨!”
“억!”
“그럼 왜 싸움을 받아들인 거야!”
버렌과 마르타만이 아니라, 검사들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이길 수 있으니까.”
라온은 덤덤한 눈빛으로 모두를 굽어보았다.
“이대로라면 필패지만, 나와 단주님이 짠 플랜대로 훈련한다면 3달 뒤 너희 모두는 금첨단의 떨거지들을 쓰러뜨릴 수 있을 거다”
“플랜?”
“저, 정말이십니까?”
“3달 뒤에 우리 모두가 금첨단을 이길 수 있다고요?”
“그래. 체계적으로 짠 플랜대로 따라오기만 한다면 이길 수 있게 해주겠다.”
라온의 확답과도 같은 말에 검사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당연한 게 지금까지 라온은 거짓말을 하거나, 실패한 적이 없었으니 모두의 신뢰가 쌓인 상태였다.
“그럼 뭐하십니까! 빨리 시작하시죠.”
“그 체계적인 계획이 뭔가요?”
“부단주님!”
검사들은 빠르게 강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활짝 웃으며 라온을 불렀다.
“그럼 모두 내 플랜에 따른다고 동의하는 거지?”
“예!”
검사들은 연무장이 떠나갈 정도로 우렁찬 대답을 내놓았다.
“웃는 걸 보니, 좋군. 그럼 바로 시작하지.”
라온이 방긋 웃으며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스르르릉.
바로 검을 뽑아서 가장 앞에 있던 버렌을 가리켰다.
“억?”
“뭐, 뭡니까?”
“수련하자고 해놓고 왜 검을….”
버렌만이 아니라, 모두가 당황한 듯 침을 꼴깍 삼켰다.
“너희의 수련은 나와의 대련이다. 매일, 매 시간마다 싸워야 하니까. 마음의 준비를 해두도록.”
“어? 어어?”
“대, 대련? 부단주님과?”
“미쳤어? 사도를 이긴 사람이랑 무슨 대련을 해!”
검사들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거기다 이게 무슨 체계적인 플랜이야! 매일 싸우기만 하다니, 그냥 무식한 대련이잖아!”
“싸운 만큼 강해지다니, 이보다 체계적인 게 어디 있어.”
“체, 체계적이라는 단어는 그럴 때 쓰는 게 아닌….”
“거기다 너희는 내 플랜에 동의한다고 대답했다. 도망칠 곳은 없어.”
라온의 서늘한 미소에 광풍단원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벗어날 수 없는 마수에 걸렸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덤벼.”
내가 너희를 죽여. 아니, 강하게 만들어주마.
-방금 죽인다고 하지 않았냐?
‘기분 탓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