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라온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창가에서 내려오는 햇살을 받으며 눈을 떴다.
‘개운한데.’
라스가 뱉은 저주의 말 덕분인지 나른함은 없고, 온몸에 활력이 넘쳤다.
‘역시 이 녀석은 마왕이 아니라,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니까.’
피식 웃으며 얼음꽃 팔찌를 볼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극한까지 높아진 수면의 질이 <나태>의 효율을 강화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상승했습니다.]
<나태> 덕분에 잠을 잘 자서 모든 능력치가 상승했다는 메시지였다.
“아, 그러고 보니….”
눈을 감을 때 라스가 슬로스를 욕하던 게 생각났다. 이 효과를 예상하고 난동부렸던 것 같다.
-크으!
라스가 팔찌에서 빼꼼히 솟구쳐 인상을 찌푸렸다.
-이럴 줄 알았다. 이 더럽고, 추잡한 사기 능력 같으니!
녀석은 모든 능력치가 올랐다는 메시지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잠만 처잤는데, 모든 능력치가 오르는 게 말이 되느냐! 본왕도 가지지 못한 지랄 맞은 능력이니라!
‘가끔 이러는 거잖아.’
-무엇이 가끔이라는 것이냐. 미량이지만 매일매일 능력치가 오르고 있거늘!
라스의 어깨 위로 분노의 냉기가 스멀스멀 솟아올랐다.
-본왕은 절대 잊지 않는다. 슬로스 그 멍청한 놈이 평생 잘 수 없게 만들어 주겠노라.
‘근데 너 나한테 힘 다 뺏겨서 슬로스한테 얻어맞는 거 아니냐?’
-그게 무슨 머리털 다 빠지는 소리냐! 본왕이 힘 좀 빼앗겼다고 그 잠탱이 놈에게 질 것 같으냐!
라스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며 인상을 구겼다. 다만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호, 혹시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다. 도망치면서 놈이 잘 수만 없게 만들면 패배를 인정할 테니까!
녀석은 어떻게 되든 이긴다며 히죽였다.
‘아….’
라온이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슬로스에게 힘이 밀려서 잠만 방해하고 도망치는 라스를 상상하니, 갑자기 녀석이 안쓰러워졌다.
“구슬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을래?”
살짝 미안해져서 서랍에 있던 아이스크림 상자를 꺼냈다.
-네, 네놈! 무슨 속셈이냐! 본왕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라스는 경계를 하는 듯 손을 척 올리고 입맛을 다셨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 마음과 무엇을 요구할지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자 더 애잔해졌다.
‘밥 먹고, 저 안에 있는 아이스크림 다 먹어줄게.’
-믿지 않는다! 네놈의 속셈을 밝혀라!
‘그런 거 없어.’
라온이 한숨을 내쉬고 문을 열었다. 씻기 위해 세면장으로 갈 때 복도를 나오는 유아와 마주쳤다.
“아, 라온님!”
유아는 평소와 달리 밝은색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어디 가?”
“오늘부터 로엔님께서 음악이랑 무학을 알려준다고 하셔서요.”
기대되는지 유아의 양갈래 머리가 팔랑였다.
“그거면 나도 갈게. 조금만 기다려.”
“네? 아니에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라온님은 쉬셔야….”
“잠을 잘 자서 괜찮아. 금방 준비할게.”
라온은 손을 젓고서 빠르게 세면실로 들어갔다.
-후후, 이럴 줄 알았다. 네놈이 순순히 아이스크림을 먹어줄 리가 없지.
라스는 유아의 머리 위에 내려앉으며 차게 웃었다.
-알았는데. 그래 알긴 알았는데, 왜 속이 쓰린 것이냐….
훌쩍.
* * *
5연무장에 근처에 세워진 검사 식당.
본래 수련생들만 출입할 수 있던 식당이었지만, 5연무장이 광풍단 본부가 되고, 찾는 사람이 줄어서 지금은 모두에게 개방되었다.
다만 근처에 있는 게 5연무장과 시설관리부라서, 식당을 이용하는 사람은 대부분 광풍단과 기술자들이었다.
“뭐?”
그 식당의 배식대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벼락을 맞았다고?”
버렌이 도리안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니까요. 그것도 하루에 두 번 맞으셨대요.”
“그게 말이 돼?”
“정말이에요. 그래서 단주님 이틀 전부터 의무실에 계시잖아요.”
“아니, 최근에 계속 맑았잖아. 벼락을 어떻게 맞냐고.”
“그야 저도 모르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도리안이 식판을 쥔 채 어깨를 으쓱였다.
“휴가가 끝났는데도 안 보이길래 도박장에 갔나 했는데. 벼락? 정말 가지가지하시는 단주님이군.”
버렌은 마지막으로 스튜를 식판에 담고서 헛웃음을 흘렸다.
“그럼 라온은 왜 안 오지?”
“탈진이래요.”
“탈진? 걘 또 왜?”
“이틀 동안 수련만 했다고 하던데요?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도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지독하다고 중얼거렸다.
“이틀….”
버렌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놈은 가능하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겠지만, 라온. 그 독종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단주는 벼락을 맞고 입원, 부단주는 수련하다 탈진. 집안이 아주 잘 돌아가는군.”
버렌이 헛바람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그래도 라온 님은 내일이면 돌아오실… 어어억!”
앞서가던 도리안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졌다. 식판에 담겨 있던 음식들이 날아가 앞 테이블에 있던 키가 큰 검사의 제복에 떨어졌다.
“아악! 죄, 죄송합니다! 바로 세탁해서….”
“이 새끼가.”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려고 할 때 검사가 이를 갈며 일어섰다.
“이 제복이 어떤 건지 알고!”
키 큰 검사는 도리안의 사과를 무시하고, 꽉 쥔 주먹을 내질렀다.
“커헉!”
방심하고 있던 도리안은 그대로 턱을 얻어맞고, 우측 테이블을 뒤집어엎었다.
“뭐 하는 짓이야!”
“지금 시비 거는 거 맞지?”
“야 밟아!”
그 테이블에 앉아 있던 검사들은 잘 걸렸다는 듯 도리안에게 주먹질을 하고, 밟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하지.”
버렌이 식판을 빈 테이블에 놓고 기세를 피워올렸다. 도리안을 때리던 검사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먼저 발을 걸고, 균형을 잡을 수 없게 오러까지 사용해놓고, 뭐 하는 짓이지? 이 근처에서 못 보던 놈들인데, 광풍단에 시비를 걸러 온 건가?”
“시비를 걸 리가 있나.”
“허억!”
갑자기 귓가에서 들린 소리에 버렌이 황급하게 뒤를 돌았다. 아무도 없었던 등 뒤에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의 남자가 빙긋 웃고 있었다.
“가, 가론 지그하르트.”
진무전주 발데르의 둘째 아들이자, 진무전 소속 금첨단의 단주 가론 지그하르트였다.
“가론 지그하르트 단주님이겠지.”
“가, 가론 단주님. 죄송합니다.”
“그래. 그래. 그 정도는 너그러운 내가 이해해줘야지. 그런데….”
가론이 빙긋 웃으며 턱을 치켜올렸다.
“조금 거슬리는 말을 하더라고.”
“예?”
“시비를 걸다니, 우리 애들이 왜 시비를 걸어. 저거 보라고.”
그는 도리안을 밟던 검사들의 제복을 가리켰다.
“최고급 원단과 재료를 써서 만든 제복에, 그것도 아직 제대로 개시도 못 한 제복에 추잡한 음식물을 쏟았는데, 가만히 있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정말 도리안의 실수로 음식을 쏟았다면 그렇겠죠. 하지만 이번에는 저자가 먼저 다리를 걸고, 오러로 압박을 해서 균형까지 잃게 했습니다.”
버렌이 도리안의 다리를 걸었던 인상 더러운 검사를 가리켰다.
“우리 부단주가 그랬다는 증거 있어?”
“예?”
“다리를 걸고, 오러를 움직였다는 증거 있냐고.”
“눈에 뻔히 보였는데, 그런 억지를….”
“억지는 지금 네가 부리는 거지. 본 사람이 너밖에 없잖아.”
가론이 팔을 들어 주변을 가리켰다. 식사하던 기술자들은 불똥이 튈까 봐 먹던 식판을 가지고 밖으로 뛰쳐나갔고, 요리사와 직원들은 주방 안으로 숨었다.
이렇게 노골적인 걸 보니, 시비를 걸러온 게 확실했다.
“노리는 건 라온입니까?”
진무전 소속의 무력단체인 금첨단이 광풍단에 시비를 거는 이유는 뻔하다. 라온이 이전에 레이븐을 패고, 진무전의 활동을 1년간 중지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라온? 그 녀석이 왜 나와?”
가론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 가문의 자랑이 될지도 모르는 그 아이를 내가 왜 노리겠어.”
그는 피식 웃으며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일어나.”
“가, 감사합니다.”
버렌은 가론을 지그시 보며 쓰러진 도리안을 일으켜 세웠다. 오러가 어린 주먹에 맞아서 얼굴과 몸이 멍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평소 도리안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더러운 방식에 화가 치밀었다.
“그럼 뭘 원하는 겁니까.”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악당 같잖아. 정말 우연히 일어난 일일 뿐인데.”
“여기까지 와서 그런 내숭을 부릴 필요 없습니다. 확실하게 말씀해주시지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뭐….”
가론이 옅게 웃으며 검집을 툭 쳤다.
“대련이나 하자.”
“예?”
“너희 광풍단과 우리 금첨단이 단체 대련을 하자고.”
“갑자기 무슨….”
버렌이 눈매를 좁혔다. 라온을 내놓으라던가, 라온에 관한 시비를 걸 줄 알았는데, 대련을 하자고 할 줄은 몰랐다.
“생각해보니까. 조금 불합리하더라고.”
가론이 테이블에서 일어나 버렌에게 다가갔다.
“생각해봐. 내가 금첨단의 단주가 되고, 첫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쳤는데, 진무전이 활동 중지를 당했어. 임무를 완수했는데 보상도 못 받고, 누구도 알아주지도 않아.”
그의 눈동자가 붉게 번들거렸다.
“그런데 다른 임무도 못 해. 금첨단의 윗대가리인 진무전이 멈춰버렸으니까! 1년 넘게 할 일 없이 개백수처럼 보내고, 이제 좀 움직여볼까 했는데, 너희는 첫 임무를 완수해서 아주 찬양을 받네? 이거 좀 지랄 맞지 않아?”
“그건 진무전 소속인 레이든이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레이든 형이겠지.”
“지그하르트 이름에 먹칠할 자를 형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음, 그 단호함은 마음에 드네. 나도 그 새끼 내 동생 취급 안 하거든.”
가론이 빙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이 순식간에 오락가락한다. 위험한 놈이라는 냄새가 풀풀 풍겼다.
“어쨌든 그 잘난 광풍단과 시궁창에 처박혀 있던 우리 금첨단이 대련을 했으면 좋겠는데, 주선해줄 수 있나?”
“그건 제가 결정할 게 아닙니다.”
버렌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가론의 목적을 알았다. 그는 1년간 활동을 중지당한 원한을 풀고, 광풍단의 명성을 가져가고자 이곳에 온 것이다.
다만 멍청한 레이든과 달리 아주 골치 아픈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뭐 우리도 여기서 좀 쉬어야겠네.”
가론이 기울어진 테이블을 걷어차고 빈 의자에 앉았다. 그를 따라온 금첨단 검사들도 테이블을 밀치거나 테이블 위에 앉으며 위압감을 조성했다.
“여기 로틴 양갈비랑 투탄 돼지 통구이 좀 해와.”
“닭고기도 좀 튀겨오고!”
“술도 내와!”
그들은 이곳에서 구하기 힘든 재료의 요리를 주문하며 시시덕댔다.
“그, 그건 지금 불가능한….”
“불가능? 불가능한 게 어디 있어! 하라면 해야 할 거 아니야!”
“흐으윽!”
검사들이 소리를 지르자, 주방 직원들의 신음이 들려왔다. 겁에 질린 듯 덜덜 떨고 있었다.
“그만하시죠. 기술자와 직원들이 겁을 먹고 있습니다.”
“응? 겁을 먹으니까. 그만두라고?”
“모두 두려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그하르트의 검사된 자로서 약자를 보호하고….”
“아, 모두가 두려워한다? 그러네. 요리사가 두려워하면 안 되지. 요리를 못 하니까. 아, 내가 잘못했네. 내가 아주 큰 실수를 할 뻔했네! 지그하르트 직계이자, 금첨단주인 내가 요리사를 무섭게 할 뻔했잖아!”
그는 이를 드러내며 앞의 테이블을 걷어찼다.
콰아아앙!
테이블이 회전하며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부서지지도, 뭉개지지도 않고 벽에 박힌 것만 봐도 가론의 무력 수준이 느껴졌다.
“야! 다들 먹지 마! 우리 요리사님이랑 기술자님들이 두려워하신단다! 다 굶어!”
“예!”
금첨단 소속 검사들이 이죽거리며 대답하고 이쪽을 노려본다. 이 상황을 끝내고 싶으면 도전을 받으라는 뜻이었다.
“후….”
버렌이 그들 모두를 노려보며 호흡을 골랐다.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저들에게 상스러운 욕을 날릴 것만 같았다.
“단주님과 부단주님에게 의사를 물어볼 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죠.”
“흐음.”
가론이 눈동자를 뱅글 돌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여기는 장사를 안 하는 것 같으니, 다른 데 가는 게 좋겠네. 얘들아 가자.”
“예!”
금첨단 검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일어나 가론의 뒤편에 섰다.
“근데 그 제안이 안 받아들여지면 난 여기 또 오고 싶어질 것 같아. 알고 있지?”
버렌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협잡꾼과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좋아. 나중에 보자고.”
그는 손을 휘젓고서 식당을 떠났다.
달캉! 캬앙!
주방에서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이 풀린 직원들이 식기를 떨어뜨린 것 같았다.
“괜찮나?”
“아, 괜찮아요.”
도리안은 안 괜찮은 표정으로 괜찮다고 중얼거렸다.
“그, 그런데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저놈들 또 오는 거 아니에요?”
“그래. 분명 올 거다.”
하는 짓을 보았을 때 대답을 미루거나 거절하면 계속 찾아올 놈들이었다.
“그러니 해결할 사람을 찾아가야지.”
* * *
지그하르트 본관의 소정원. 로엔이 유아와 눈높을 맞춘 채 미소 짓고 있었다.
“이전에 한번 보았죠. 로엔이라고 합니다.”
“유아에요!”
로엔과 유아는 서로를 존중하는 인사를 건네고, 미소를 지었다.
“도련님은 그곳에 계실 겁니까?”
“어떻게 가르치는지 한번 보고 싶어서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유아에게 암살 기술을 가르친다면 막아야 하니, 처음 몇 번의 수업은 참관할 생각이었다.
“조금 민망하지만, 알겠습니다. 그곳에 앉아계시지요.”
“감사합니다.”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하얀색 정원 의자에 앉았다.
“유아 아가씨. 좋아하시는 노래 하나를 불러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유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옆으로 물러섰다. 양 갈래머리를 까딱이며 노래를 시작했다.
“피에 젖은 성벽과, 밤에 물든 설원은 겨울 성의….”
유아는 평범한 노래가 아니라, 하분 성의 군가를 불렀다. 유아가 부르기 때문일까. 연극에 쓰이는 곡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고하고 우아했다.
“녹색 비와 붉은 비가 대지를 적시는 새벽녘에도 창칼은 울부짖고….”
노래를 들을수록 가슴이 요동친다. 고성의 뿔피리와 끝없이 쏟아지는 활 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 당장 검을 들고 성벽 위에 서서 몬스터와 싸우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허어!”
유아의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로엔이 헛웃음을 흘리고 박수를 보냈다.
“놀랍다는 말 밖에 나오지를 않는군요.”
그는 명검을 본 검사처럼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음색도, 감정도 대단합니다. 힘이 깃든 군가에 서글픈 감정을 제대로 녹여냈어요. 다른 곡도 들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칭찬을 받아서 자신감이 차오른 유아가 작은 주먹을 움켜쥐고 다른 노래를 시작했다.
두 번째는 사랑을 속삭이는 곡이었고, 세 번째는 단풍놀이의 즐거움이 담긴 노래였다.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왜 에덴이 유아 양을 노렸는지 알겠습니다.”
유아의 노래를 드던 로엔이 라온의 옆으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유아 양의 목소리에는 신이 깃들어 있고, 음악에 대한 재능도 넘칩니다. 만약 유아 양이 에덴에 들어갔다면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대량 학살을 이뤄내는 괴물이 태어났을 겁니다.”
그는 정말 큰일을 했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음악 쪽에선 가르칠 게 없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혼자 음악을 배우다 보니, 살짝 아쉬운 게 있으니까요.”
“아쉬운 거요?”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듣기에 유아의 노래는 완벽했는데, 무엇이 부족하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리듬 혹은 운율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조금 부족합니다.”
“아….”
“노래가 달라져도 리듬은 거의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그래서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지요. 그것만 조절하면 정말 완벽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완벽했으면 제가 해줄 게 없지 않습니까.”
그는 옅게 웃으며 다시 유아에게 다가갔다.
“유아 양은 리듬에 대해 아시나요?”
“어, 잘은….”
“세상만물 모든 것에는 리듬이 있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살아 있게 만드는 심장의 고동도, 지저귀는 산새의 울음에도, 정원을 다듬는 정원사분들의 목소리에도 리듬이 어려 있죠.”
로엔이 리듬의 예시로 들었던 순서를 차례로 가리켰다.
“리듬은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반복되는 구절을 더 신나게, 더 즐겁게 혹은 더 슬프게 만들어 주죠. 간단히 예를 들자면….”
그는 유아가 불렀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유아보다 잘 부른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가사와 멜로디가 쏙쏙 들어박혔고 노래에 담긴 의미가 훨씬 잘 느껴졌다.
“어떤가요?”
“좋아요!”
유아가 폴짝 뛰며 손을 들어 올렸다.
“듣기 편하시지 않았나요?”
“편하기도 했고 감정이 더 잘 와닿았어요!”
유아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리듬의 힘입니다. 노래마다 그에 알맞은 리듬에 맞춰서 부른다면 음악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혹은 공격적으로도 잘 맞게 되죠.”
로엔은 그렇게 말하며 몇 가지 이야기들을 추가해주었다.
“리듬….”
라온이 유아의 노래 그리고 로엔의 노래를 되새기며 눈매를 좁혔다.
‘때에 맞는 리듬이라….’
확실히 유아는 노래를 부를 때 리듬 혹은 윤율이라 부르는 요소를 그리 신경 쓰지 않았고, 로엔은 톱니바퀴처럼 딱 들어맞는 리듬을 사용했다.
노래 자체는 유아가 더 잘 불렀지만, 듣기 편하고 어울리는 건 로엔쪽이었다.
‘보법도 그런 걸까.’
탈진하기 전에 생각했던 자신과 글렌의 차이점이 바로 그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첫 번째 걸음과 두 번째 걸음을 밟는 타이밍이 조금 달랐어….’
글렌이 첫 번째 걸음을 걸을 때와 두 번째 걸음을 걸을 때의 발소리 그리고 족적의 깊이가 달랐다.
‘그것도 리듬인가?’
상황에 다른 리듬. 글렌은 태화보를 사용할 때 그에 가장 적절한 호흡을 사용한 게 분명했다.
찌이이잉!
보법에 운율이 있음을 깨닫자, 머리가 화악하고 열린다.
그날 밤. 글렌이 보여주었던 태화보가 물길처럼 재생되며 그의 움직임이 하나하나가 손에 잡힐 듯 했다.
라온은 본인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섰다. 자세를 조금 낮추며 왼발을 앞으로 뻗었다.
투우웅!
온 세상에 닿을 듯한 웅장한 흐름이 발끝에 어리며 대지와 합일했다.
* * *
“그리고 이제 제가 알려드리는 오러 연공법을…음?”
유아에게 오러 연공법을 전수하려던 로엔이 고개를 홱 돌렸다.
우측에 앉아 있던 라온이 천천히 일어났다. 귀신에 홀린 듯한 눈동자로 보법을 밟기 시작했다.
투웅!
잔디를 스치며 뻗어나가는 일보는 글렌의 태화보였다.
‘태화일보?’
다만 얼마 전까지 라온이 보여주었던 일보와는 달랐다. 미숙함이라는 껍질을 벗어던지고, 글렌과도 같은 신비로움과 웅장함을 뿜어냈다.
이어서 두 번째 걸음을 나아간다. 극쾌의 걸음. 암살자로 살아온 자신이 감탄할 정도의 속도로 단숨에 반대편에 이르렀다. 마법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속도였다.
“라오… 읍.”
깜짝 놀란 유아가 라온을 부르려는 것을 막고, 세 번째 걸음을 지켜보았다. 라온의 몸이 검 끝처럼 파르르 흔들리더니 두 개의 형체로 변했다가 합쳐졌다.
쿠구구구구!
네 번째는 느리다. 굼벵이가 기어가는 듯 느린 걸음에 패도와 위압이 실린다. 대지를 짓누르는 족적에 공간을 휘감는 장악력이 짙게 퍼져나갔다.
“아….”
로엔이 입을 떡 벌렸다. 라온은 고작 며칠 만에 태화보에 진의를 담아서 펼치기 시작했다.
이전의 그가 기어 다니는 아기였다면 지금은 걸음마를 시작해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미쳤군.’
저 절세의 보법을 이렇게 빨리 익혔다는 것이 경악스러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리메르가 매번 라온을 왕의 그릇이라고 말해도 그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단한 아이인 건 알지만 아직 지켜볼 게 많으니까.
하지만 이 짧은 순간 자신의 말에서 힌트를 얻고 위로 향하는 그를 보자 리메르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후.”
옆에서 들린 숨소리에 로엔이 고개를 돌렸다. 천검대주가 팔짱을 낀 채로 라온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짜증이 가득 돋아나 있었다.
“저놈 대체 뭐야.”
“예?”
“삼매경에서 깨어나자마자 다시 삼매경에 들었어.”
천검대주는 미간에 주름을 만든 채 고개를 틀었다.
“저거 삼매경을 제집처럼 드나든다고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제가 아는 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로엔이 부드러운 눈으로 라온을 바라보며 웃었다.
“훗날 이 가문의 주인이 될 사람이라고.”
* * *
라온은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스스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태화일보를 밟을 때는 내가 나아갈 세상을 생각하며 심장의 고동을, 태화이보를 뻗을 때는 찰나의 순간에 내리꽂히는 벼락을, 삼보는 창살을 통해 번져가는 태양의 빛무리를, 사보는 글렌 지그하르트의 위엄을 담아냈다.
스스로가 보았고, 느꼈던 호흡과 운율이 태화보에 깃들자, 이전과는 격이 다른 보법이 되었다. 더 빠르게, 더 느리게 혹은 더 장대하게 뻗어나갈 수 있었다.
라온은 지칠 때까지 태화보의 아홉 걸음을 펼치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하아….”
흥분하여 손끝이 떨린다. 이게 진짜 태화보라는 걸 깨닫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단언할 수 있다. 성취 자체는 비교할 수 없지만, 자신은 글렌이 보여준 태화보와 같은 길에 올라섰다.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면 언젠가 그의 보법을 따라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후우!”
보법을 익힌 것에 감격하여 심장이 크게 약동하고 있을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현 경지로 불가능한 성취를 이뤄내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5포인트 상승합니다.]
[<칭호> 깨닫는 자가 생성되었습니다.]
[<특성> 집중의 단계가 4성으로 상승합니다.]
태화보를 확실하게 습득한 업적 덕분에 모든 능력치와 집중의 단계가 오르고, 칭호까지 생겼다는 메시지였다.
메시지까지 이렇게 보여주니, 자신이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이런 미친!
라스는 메시지를 보며 눈동자를 떨었다.
-조잡한 보법을 익혔다고 이런 보상을 주는 건 아니지 않느냐!
소리를 지르지만, 라스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같은 자신감이 담겨 있지 않았다.
‘태화보는 너도 대단하다고 인정한 보법인데?’
-보, 본왕은 그런 적이….
‘학습 능력이 올라가는 효과는 네가 배울 만한 절대의 무학에만 나타난다고 했잖아. 보법 자체도 뛰어나다고 했었고.’
-끄윽, 빌어먹을!
라스가 말을 잇지 못하고 이를 바득 갈았다. 거짓말하지 못하는 녀석의 특성상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기랄! 이틀만에 또 능력치를 빼가면 대체 어쩌라는 것이냐!
모든 능력치가 오른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또 5포인트를 빼앗기니 죽을 맛인 것 같았다.
-이 운만 오질라게 좋은 놈 같으니!
‘운이 아니라, 로엔 님과 너 덕분이지.’
-뭣이?
‘네가 나한테 마음과 정신을 성장해서 자신의 길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했잖아.’
-그, 그랬느니라….
라스가 살짝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보법에 리듬을 담으면서 마음까지 함께 움직였거든. 내가 겪었던 경험을 담으니까. 아주 경지가 쑥쑥 늘어나던데, 이번 성취의 반은 네 덕분이야. 고맙다.’
라온이 씩 웃었다. 역시 라스는 물질적인 부분과 정신적인 부분을 가리지 않고 퍼주는 아낌 없이 주는 나무였다.
-보, 본왕을 조롱하는 것이냐!
‘이제 잘 아네.’
-죽인다! 네놈을 죽이고 본왕도 지옥에 가겠느니라!
‘너 원래 지옥에서 왔잖아.’
-끄으으윽! 닥쳐!
라온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도움받은 게 있으니, 아침에 약속한 대로 아이스크림을 모두 먹어줄 생각이었다.
“라온!”
“음?”
기분 좋게 라스를 놀리고 있을 때 정원 입구에서 버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인상이 구겨진 버렌이 양쪽 눈이 시퍼렇게 멍든 도리안을 데려오고 있었다.
“도리안?”
눈만이 아니라, 볼이나, 팔목에서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목검이 아니라, 주먹에 맞은 상처였다.
지금 광풍단은 휴식 후 개인 수련 기간이라 저리될 이유가 없는 걸 보면 말 그대로 얻어터진 게 분명했다.
라온의 붉은 눈동자에 짜증이 어렸다.
어떤 놈이 내 주머니를 건드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