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은은한 달빛이 먼지 낀 창살을 스치는 광풍단의 단주실.
아직 수석 교관 휴게실 딱지가 떼어지지 않은 그곳에서 부스럭 소리와 함께 리메르가 일어섰다.
그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 몸을 휘청거렸다.
“후우….”
리메르가 시꺼멓게 그을린 코트를 벗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안 죽고 여기까지 살아왔네.”
어떻게 단주실까지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글렌의 벼락에 맞아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가장 익숙한 곳을 찾아온 것 같았다.
‘오늘은 좀 많이 아프던데.’
글렌은 당연하게도 자신에게 치명상을 주거나, 후유증이 남을만한 타격은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고통만 주는 벼락만 사용하는데, 오늘 건 무언가 달랐다.
검계 발동보다 빠르게 내려찍고, 검계 자체를 찢어버리는 무위라니, 아무래도 그는 또 한 번 벽을 넘은 것 같았다.
‘대단하다니까.’
이미 인간을 초월한 수준에 있으면서 또 나아갈 곳이 있다니, 글렌이라는 사람은 정말이지 불가사의 그 자체였다.
마를 극복한 글렌이 그 중립자 놈들의 말을 듣지 않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면 대륙의 3분지 1은 이미 지그하르트 밑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조심 좀 해야겠네.’
리메르가 검붉은색이 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피식 웃었다. 손주 걱정으로 가득한 할아버지를 놀리는 건 한동안 자제해야겠다. 강해진 그를 놀렸다간 정말 죽을지도 모르니까.
“흐아아.”
리메르가 손을 위로 올리며 기지개를 폈다.
‘일은 다 잘 풀려서 다행이군.’
광풍단은 돈을 주고도 얻지 못할 기회인 오마와의 실전을 치렀고, 라온은 사도를 쓰러뜨렸다.
글렌이 깨달음의 서고를 열어주어 단원들에게 큰 선물까지 주었으니, 모든 일이 다 잘 풀렸다고 봐도 좋았다.
‘라온은 말 안 해도 알아서 챙겨주실 테고.’
지금 글렌이 가장 챙기는 사람이 라온이니, 녀석에겐 더 특별한 무언가를 줄 것이다.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이제 마음 놓고, 쉬어도 되겠어.’
리메르가 바닥에서 글렌에게 받았던 포상금 주머니를 들었다. 벌은 주지만, 상은 빼앗지 않았다. 역시나 깔끔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도박장에 가는 건 무리겠네.’
글렌이 살벌하게 눈을 뜨고 있으니 한동안 도박장에 가는 건 멈춰야 할 것 같았다. 며칠 단원들을 수련시키면서 눈치를 좀 봐야겠다.
“그럼 편하게 쉬러 가볼… 응?”
금화 주머니를 품에 넣고 단주실 문을 열었는데, 누군가가 연무장을 가로질러 다가온다. 익숙한 걸음걸이와 어둠 속에서 번들거리는 붉은 눈. 글렌이었다.
“가, 가주님?”
리메르는 글렌을 보고 눈매를 좁혔다.
‘왜 오시는 거지?’
포상금도 주었고, 벌도 주었는데 그가 왜 이 늦은 시간에 자신에게 오는 건지 모르겠다.
‘아! 그건가?’
오늘 벼락에 힘 조절을 못 하여 약이라도 들고 온 것 같았다.
“그렇게 신경 써주시지 않아도 되는… 윽!”
리메르가 웃으며 마중 나가다가 우뚝 멈췄다. 글렌의 표정은 싸늘했다. 약을 주거나, 사과하러 온 사람의 눈빛이 아니라, 씹어 먹으러 온 악당 같았다.
“네가 미친 것으로 모자라서 아이들에게도 도박을 가르쳤나?”
“예? 제가요?”
무슨 소리지? 웬 도박?
“네놈 혼자 잃고, 망하는 건 신경 쓰지 않았거늘. 이젠 어린 새싹도 검게 물들이려 하는구나.”
“제, 제가요?”
애들에게 따고, 잃었다는 말은 자주 했지만, 가르친 적은 추호도 없었다.
“발뺌을 하는 것을 보니 뻔하군.”
글렌의 손이 하늘을 가리키자, 팔다리에 족쇄를 찬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쿠르르르릉!
밤하늘보다 더 어둑한 먹구름이 스멀스멀 모여들어 뇌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아까는 가볍게 쳤으니, 이번에는 힘 좀 주겠다.”
그게 가벼워? 아파서 기절할 뻔했는데?
“네 업보이니, 달게 받아라.”
떨어지는 붉은 우레를 보며 리메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제가요?”
* * *
천검대주는 눈을 비비고 다시 공터를 보았다. 라온이다. 라온이 분명하건만 순간 글렌이 보법을 밟는 것처럼 보였다.
라온이 글렌처럼 보인 이유는 간단했다.
‘발전했어….’
지금의 라온이 운용하는 태화보에는 힘이. 글렌이 보여주었던 신비와 위엄이 어려 있었다.
이전과는 격이 다른 성취에 헛바람이 흘러나왔다. 물론 글렌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같은 길 위에 올라섰다는 건 확실했다.
‘이 짧은 시간에 어떻게?’
집중력을 계속 유지했다고 해도 고작 7시간이다. 하룻밤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수련하여 천고의 무학인 태화보를 이해하다니, 자신이 아는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체 뭐야….’
라온은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 계속 족적을 관찰하고, 태화보를 밟고, 다시 족적을 살피고, 태화보를 뻗어낼 뿐이건만, 어느새 그의 보법에서 글렌의 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천검대주는 이게 정말 현실인가 싶어서 볼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아프다. 꿈이 아니건만 꿈처럼 느껴지는 상황. 말이 안 되는 현실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무슨 수를 쓴 거지?'
어떻게 마스터도 되지 않은 애송이가 한참 윗단계에 있는 태화보를 습득해나가는 건지 모르겠다. 재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후우….”
대충 살피던 것을 그만두고 라온에 집중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발자국이 어려 있었다. 글렌이 남기고 갔던 보법의 극치가.
‘설마….’
천검대주가 입술을 떨었다.
‘삼매경에 들어간 건가?’
높은 경지에 다다른 무인들은 수련을 하거나, 생사결을 벌일 때 본인의 모든 감각이 수십 배로 민감해지고,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흔히 삼매경, 무아지경 혹은 상승 진입이라고 하는 현상인데, 라온은 지금 그 상태에 들어간 것 같았다.
‘마스터에 오르지도 못한 애송이가 수련을 하며 삼매경에?’
생과 사가 달린 전투라면 모를까. 수련하면서 무아지경에 들어가는 경우는 정말 흔하지 않다. 자신조차도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고, 그 다섯 번 모두 마스터가 된 이후 깨달음을 얻었을 때였다.
아직 마스터에도 오르지 못한 라온이. 그것도 집중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난도의 수련을 하면서 삼매경에 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가주께서 지켜보라고 하신 이유가 있었군.”
글렌이 라온을 지켜보라고 한 이유는 그를 지키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라는 뜻이었다.
“신비, 기이, 별종인가.”
그 세 단어 외에는 라온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나름 굴곡진 삶을 살아왔지만 저런 녀석은 처음이었다.
터어엉!
라온은 삼매경에 빠진 채로 계속 태화보를 밟는다. 본인이 발전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홀린 듯한 눈동자로 계속 족적을 보고 발을 뻗을 뿐이다.
칼날처럼 날카롭게 세워진 라온의 집중력이 여기까지 느껴진다. 그가 어디까지 갈지 궁금해져서 해가 산 위로 올라오는데도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음?”
라온을 지켜보고 있을 때 별관 쪽에서 시녀 한 명이 음식이 든 쟁반을 가지고 공터로 다가가는 게 보였다.
막아야 하나.
지금 라온이 진입한 삼매경은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다. 방해를 했다간 지금까지 나아간 깨달음을 잃고, 되려 내상을 입게 될지도 모른다.
천검대주가 움직이려고 할 때 시녀가 라온에게 다가가다 말고 멈춰서 그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들고 있는 음식을 도로 가져가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별관이 다시 밤이 된 듯 조용해지고, 별관에서 나온 시녀들도 공터로는 절대 가지 않았다.
‘설마….’
천검대주가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라온을 보았다.
“이런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그의 보법은 천천히 그리고 미세하게 글렌의 태화보를 닮아가고 있었다.
* * *
라온은 별관 공터에서 세 번째 달을 마주하고 나서야 걸음을 멈췄다.
“후우….”
한숨을 쉬고서 족적으로 가득 찬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무 몰입했는지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그대로 누워서 하늘을 올려보았다. 이틀 전보다 조금 더 차오른 달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몸과 정신은 녹초지만 기분이 좋다. 지금까지의 태화보와 앞으로의 태화보가 다르다는 걸 알기에 나오는 웃음이었다.
‘확실히 나아갔어.’
태화보의 완성은 멀고도, 멀다. 글렌처럼 되려면 몇십 년을 더 수련해도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평범조차 되지 않던 보법이 이제 실전에서 쓸 수 있을 정도로 싹이 텄다. 고작 이틀의 수련치고는 어마어마한 발전이었다.
‘다만 모자란 부분이 있어.’
글렌이 보여주었던 태화보를 아예 머리에 그대로 새겼기에 알 수 있다. 자세와 구결,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 했지만, 그의 보법과 무언가 달랐다.
‘그게 뭘까.’
단순히 무학의 경지나, 태화보의 성취의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부분 같은데,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음, 머리를 너무 썼나.’
머리만이 아니라, 육체도 한계에 달해 정신이 멍해지고, 나른해진다. 글렌과의 차이점은 일어난 뒤에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이 망할 놈이….
막 잠이 들려고 할 때 라스가 이를 바득 갈았다.
-이틀 동안 설쳐서 한숨도 못 자게 해놓고, 너만 자려는 것이냐.
‘라스. 오랜만이야.’
-오랜만? 오오오오랜만? 네놈도 못 잔다! 잠도 못 자고, 눈앞에서 여덟 끼가 사라진 원한은 이대로 넘기지 못하느니라!
끼니가 사라졌다는 걸 보니, 시녀들이 식사를 가지고 왔다가 도로 가져간 걸 말하는 것 같았다.
콰아아아아!
라스가 매섭게 눈을 뜨며 분노와 냉기를 일으켰다. 대해의 해일처럼 치솟은 냉기가 마나 회로와 단전을 휘감고, 가슴 깊게 가라앉아 있던 25의 분노가 영혼을 짓이기기 시작했다.
-본왕이 네놈의 육체를 가지고, 미식을. 아니, 대륙 정복을 하겠노라!
‘너 미식이라고 하려고 했지?’
-그 입 닫아라!
라스는 분명 전력을 다해 분노와 냉기를 일으켰지만, 생각보다 통증이 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지쳐 쓰러진 지금도 불의 고리는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고오오오오!
이젠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진 불의 고리가 라스의 냉기를 녹이고, 분노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이익! 어, 어째서!
라스는 지쳐서 죽을 듯한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것에 당황했는지 입을 떡 벌렸다.
‘넌…나한테 안 된다고.’
-말할 힘도 없는 놈인데 왜 뚫어내지 못하는 거이냐!
‘…말할 힘은 없지만 넌 막을 수 있어.’
라온이 힘 빠진 웃음을 흘리며 불의 고리를 계속 운용했다. 불의 고리 여섯 개를 동시에 휘돌릴 기운은 없었지만, 고통을 견디며 다섯 개의 고리를 공명시켰다.
-네, 네놈은 대체 무엇이냐! 어떻게 인간 따위가….
라스가 당황하며 이를 악물 때 녀석의 패배를 선언하는 메시지가 올라왔다.
[탈진 상태에서 <분노>의 방해를 견뎌내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합니다.]
평소라면 개별 능력치 1 정도를 올려줬겠지만, 탈진 상태에서 라스의 방해를 견뎠다고 모든 능력치를 올려주었다. 역시나 공평한 시스템이었다.
-제에에에엔장! 이러면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능력치도 빼앗기는 거잖느냐!
‘그니까 하지 말라고 했잖아.’
자기 전에 선물이 추가되어 꿀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육체와 정신을 바닥까지 사용하셨습니다.]
[<나태>의 효과로 수면의 질을 최대한 상승시킵니다.]
눈꺼풀이 무겁게 느껴질 때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 이거 그거지 않느냐! 잠 좀 잘 잤다고 능력치 마구 올려주는 그 사기 능력!
라온은 라스의 비명을 자장가 삼으며 눈을 감았다.
-슬로스 이 멍청한 자식! 나중에 무조건 찾아가겠노라! 너희 두 놈 때문에 본왕의 본체가 거덜나고 있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