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글렌은 별관 공터에 가서 멈춰 섰다.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는 그의 눈빛은 평소와 달리 그늘처럼 옅어져 있었다.
‘음….’
라온은 글렌의 뒤에 서서 조용히 그를 지켜보았다.
‘무슨 생각이지?’
왜 이 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낮에 주지 못한 포상을 준다는 건지 이해를 못 하겠다. 웬만한 사람의 심리는 대충이라도 파악할 수 있지만, 글렌만큼은 예측되지 않았다.
-기이하구나.
라스가 글렌의 등을 훑어내리며 눈매를 좁혔다.
‘뭐가?’
-저 늙은이 이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다.
‘더 강해졌다고?’
-그래. 확실히 성취가 올랐느니라. 인간 주제에 저기서 더 나아가다니, 건방진 늙은이로다.
녀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입술을 찌그러뜨렸다.
‘허….’
라온이 헛바람을 흘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최근 글렌이 누구와 싸웠다던가 수련을 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가만히 있었는데, 저 경지에서 더 나아갔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본왕이나, 저 늙은이 수준이 된다면 육체적인 수련은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이거지.
라스는 손가락으로 본인의 왼쪽 가슴을 가리켰다.
‘정신력?’
-정신력이 아니라, 정신 그 자체이자, 마음이다.
‘마음?’
-무학을 넘어 자신의 마음을 다듬는 것이지. 그저 남이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길을 여는 것이니라.
‘너도 그런 건가?’
-당연하다. 본왕 역시 경지에 오른 이후로는 다른 이의 길을 버리고, 자신만의 길을 걸었지. 본왕이 마계에 있을 당시….
라스는 본인 자랑을 하면서 절대자들이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이야기해주었다.
'그랬서였군.'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루스 로베르트도 특별한 훈련을 하지 않았는데, 점점 강해져서 그저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놈 역시 마음과 정신을 계속 다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어렵네.'
정신과 마음을 다듬어 새로운 길을 연다니, 아직 마스터도 되지 않은 자신이 가늠할 영역이 아니긴 했지만, 지금부터 그런 식으로 수련하면 더 높은 곳에 더 빨리 오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불가능한 건 아니다.
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지금의 네가 하기에는 효율도, 수준도 한참 떨어진다. 그 어려움에 비해 큰 효과를 보기는 힘들 것이니라.
'상관없어.'
어렵고 버거운 길은 전생부터 수없이 걸어왔다.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앞으로 정신적인 부분의 성장도 함께 끌어 올린다고 생각했을 때 글렌이 뒤를 돌았다. 조금 가라앉았던 눈동자는 어느새 평소보다 더 냉정한 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전에 네게 알려주었던 태화보는 어디까지 익혔지?”
글렌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오며 턱을 살짝 들었다. 큰 키와 싸늘한 시선이 어깨를 짓눌렀다.
“첫걸음뿐입니다.”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민망하지만 첫걸음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한심하구나.”
글렌이 인상을 찌푸렸다. 기온이 떨어진 것처럼 공터에 찬 기운이 흘러내렸다.
“태화보의 첫걸음이 중요하고, 뛰어난 건 맞지만, 그것에만 안주한다면 네게 발전이란 없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차라리 잘 되었다.”
“예?”
“새로운 무학을 전해줄 필요 없이. 태화보를 전수하는 게 좋겠구나. 네가 게으른 탓이니 날 원망하지 말도록.”
그는 더 좋은 무학을 받지 못한 건 게으름 탓이라며 손을 저었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주려 했던 게 얼마나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원하던 건 보법이었다. 태화보면 넘치고도 남는 무학이었다.
고오오오!
불의 고리를 극성으로 운용했다. 예전보다 무학의 경지도 올랐고, 불의 고리의 성취도 상승했으니, 훨씬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시작하지.”
글렌이 코트를 살짝 걷고서 왼발을 뻗었다. 이전과 같이 천하 그 어디라도 닳을 듯한 일보가 밤이 녹아내린 대지에 스며든다. 이 공터에도, 저 하늘의 달 위에도 그가 서 있는 것 같았다.
두 번째 걸음은 빨랐다. 불의 고리를 전력으로 돌리고, 서리연이 눈에 익은 안력으로도 쫓기 힘든 속도. 너무 빨리 사라져서 글렌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듯 보였다.
세 번째 걸음은 화려하다. 별 무리 같은 빛과 함께 글렌의 몸이 순식간에 열 개로 불어난 뒤 다시 하나로 합쳐진다. 환상이 깃든 듯한 신비로움이 그 걸음에 담겨 있었다.
네 번째 걸음은 무겁고 느리다. 이 공터. 아니, 지그하르트 영역 전체를 발아래에 둔 것 같은 장악력이 그의 걸음에서 퍼져나갔다.
그 이후로도 글렌은 다섯 번의 걸음을 더 걸었다. 움직일 때마다 세상이 그와 함께 변해갔다.
“아….”
라온이 살짝 벌린 턱을 덜덜 떨었다. 전율이 인다. 온 우주의 기운이 글렌에게 휘감겨 있는 듯했다.
‘이전에 본 건 빙산의 일각조차 되지 않았어.“
경지가 올라가고, 불의 고리가 성장한 덕분에 깨달았다. 지난번 알현실에서 글렌이 보여준 태화보는 지금 발휘한 것의 10분지 1조차 되지 않았다. 저건 하늘 위에 있는 위대한 무학이었다.
“보았나?”
태화보를 연달아 두 번 펼친 글렌이 멈춰 섰다. 현실 같지 않은 무학을 선보였음에도 그의 머리카락은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보았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익히는 건 다른 이야기지만, 글렌이 보여준 태화보는 모두 눈에 담았다.
“대답은 좋군.”
글렌이 차게 웃으며 코트를 털었다.
“그럼 해보아라.”
“알겠습니다.”
라온이 오른발을 앞으로 뻗고, 숨을 골랐다.
‘모두를 보여줄 필요는 없어.’
하급이나, 중급 무학이 아닌 상승의 무학을 2번 본 것으로 따라 하는 건 무리다. 글렌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전처럼 느낀 대로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터억!
날카로운 달빛을 꿰뚫는 일보가 나아간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지를 가슴에 새기는 순간 육체와 대지가 호응하며 어디로든 뻗어나갈 수 있는 일보가 완성되었다.
이어서 두 번째 걸음을 걸었다. 서리연에서 얻었던 극쾌의 호흡을 발걸음에 녹여 내렸다. 시야가 한순간에 좁혀지며 몸이 칼날이 된 듯 질주했다.
세 번째는 변화와 환상. 동굴에서 얻었던 화련의 심득을 담아 육체를 움직였다. 붉은 꽃잎이 허공을 수놓듯 자신의 육체가 환상처럼 번져가는 게 느껴졌다.
네 번째는 무게. 오러를 가득 실어 진각을 밟았다. 어깨 위로 퍼져나가는 기세가 묵직한 파도가 되어 서늘한 기운을 짓누르고 공간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치이이잉!
라온은 심장이 아릴 정도로 불의 고리를 휘돌리며 글렌이 보여주었던 태화보를 재연했다. 위력과 속도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지만, 방향만큼은 비슷했다.
“허억! 허억!”
걸음을 멈춘 라온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땀을 줄줄 흘렸다. 한 번 따라 했을 뿐인데 하루종일 수련을 한 것처럼 육체와 정신이 피곤했다.
“한심하군.”
글렌은 무릎을 잡고 헉헉대는 라온을 굽어보며 콧등을 찡그렸다.
“자세만이 아니라, 방향도 약간 어긋난 부분이 보인다. 마지막이니 확실하게 보도록.”
글렌은 귀찮은 듯 손을 젓고 다시 한번 태화보를 보여주고, 구결을 불러주었다.
“감사합니다.”
자세와 구결을 확실하게 외운 라온이 고개를 숙였다.
“보법이란 바닥에 찍힌 족적을 맞춘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상황에, 그 순간에 맞는 적재적소가 깃들어야 보법의 완성이라 할 것이야.”
“예.”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보법에서 중요한 건 어느 때에 무엇을 펼치느냐에 있었다.
“마스터의 벽을 쉽게 뚫지 못한다고 조급해할 필요 없다. 네가 해왔던 대로 육체와 정신을 단련하면 어느 순간 벽은 무너져 있을 것이다.”
글렌은 보법만이 아니라, 마스터에 이르는 조언까지 마치고 등을 돌렸다.
“저….”
라온이 떠나려던 글렌의 뒤로 다가갔다.
“제게 왜 이리 잘해주시는 겁니까?”
이 밤에 찾아와서 태화보를 전수하고, 마스터에 이르는 조언까지 해준 건 분명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잘해준다?”
글렌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태화보는 경지가 낮은 제가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천고의 보법입니다. 이런 걸 주시고 마스터에 오르는 조언까지 해주시는 걸 보면….”
“후, 착각은 자유지만 너무도 무지하구나.”
그의 입술이 살짝 말려 올라간 걸 보니 비웃음을 흘리는 것 같았다.
“본래. 신입 단주나, 부단주가 임명되면 내가 직접 적절한 무학을 전수해주고, 조언해준다. 넌 그 기회를 얻지 못했고, 오늘 서고에서도 책을 받지 못했으니, 그 대가를 한 번에 주려 했을 뿐이다.”
“아….”
“거기다 네가 마스터가 되면 너만 좋은 게 아니다. 지그하르트에 최연소 마스터가 탄생했다는 업적으로 다른 육황과 오마를 짓누를 기회가 생기지. 네가 이뻐서가 아니라, 해주어야 할 일이니 했을 뿐인데, 무엇을 잘해준다고 착각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죄송합니다.”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이 밤에 찾아와서 무학을 가르쳐주기에 무언가 다른 심정이 있나 싶었지만, 착각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이전부터 느꼈던 대로 공평을 따지고 가문을 생각할 뿐이었다.
글렌이 다시 등을 돌렸다. 바로 떠날 것 같던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나만 물어보지.”
“예.”
“아까 도둑 길드원을 찾기 위해서 도박장의 돈을 모조리 쓸어모았다고 했는데, 도박은 어디서 배웠지?”
“어….”
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글렌은 별관에서 계속 산 자신이 도박할 기회가 없었다는 걸 알고 있다. 전생의 삶을 말할 수 없는 이 순간 생각나는 이름은 딱 하나였다.
“과, 광풍단주에게 배웠습니다.”
“리메르인가. 역시 그렇군.”
글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이 공터가 북해의 파도에 휩쓸린 듯 서늘한 기운으로 가득 찼다.
“태화보는 나에게 맞게 만들었다. 너는 나의 태화보를 익혀서, 너만의 태화보를 완성해보도록 해라.”
그는 잠시 자신을 바라보다가 흩날리는 눈발처럼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만의 태화보라….”
라온은 글렌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옅은 숨을 뱉었다. 아까 라스가 했던 말과도 이어지는 듯한 조언이었다.
-이제 다 끝났으니, 자러 가라. 본왕은 피곤하느니라.
‘잠시만.’
고개를 젓고, 바닥에 찍힌 글렌의 발자국을 눈에 담았다. 기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 흔적이 눈앞에 있는데 잠을 잘 수는 없었다.
라온은 불의 고리를 회전시키며 바닥에 찍힌 글렌의 족적을 따라 태화보를 밟았다.
긴장이 풀렸는지 첫 시도는 실패했지만, 자세를 잡고 될 때까지 계속 반복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태화일보도 글렌과는 천지 차이가 났기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하며 반복 또 반복했다.
몸으로는 보법을 밟고 머리로는 글렌의 움직임만을 그리다 보니,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고 온 세상에 족적과 자신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라온은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도 모른 채 족적을 보며 계속하여 태화보를 밟았다.
[극한의 집중 상태에 들어갑니다.]
[태화보의 습득이 빨라집니다.]
* * *
먼지 하나 없는 새하얀 공간에 피처럼 붉은 기둥이 줄줄이 세워져 있다. 가장 안쪽에는 높은 단상이 솟아 있었는데, 붉은 발이 내려와 있어 그 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끄으으윽!”
흡사 신전처럼 보이는 이 기이한 공간의 중심에서 7사도의 살기 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파…너무 아파….”
7사도는 진혼검에 베였던 가슴과 팔, 허벅지를 만지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백의 위로 회색 핏물이 번져갔다.
“아픔이 가시질 않아! 혈공을 운용해도 이 상처가 사라지질 않는다고!”
그는 본인의 살을 쥐어뜯으며 이를 까득 깨물었다. 계속 백혼의 오러를 운용해도 상처가 사라지질 않고 지독한 고통만 계속되었다.
“곧 사부님이 오신다. 입 닫아라.”
기둥에 등을 기댄 채 그를 보고 있던 10사도가 눈매를 좁혔다.
“흐읍!”
7사도는 그의 기세에 짓눌려 입을 다물고, 어깨를 움츠렸다. 다만 고통 때문에 계속 몸을 떨었다.
샤아아아.
청아한 바람 소리가 울리고, 비어 있던 붉은 발 뒤편에 여성의 굴곡이 도드라진 그림자가 졌다.
“사부님을 뵙습니다.”
“사, 사부님을 뵙습니다.”
10사도가 무릎을 꿇었고, 7사도도 고통을 참고 고개를 숙였다. 사도가 사부라 부르고, 무릎을 꿇는 건 세상에 오직 하나. 백혈교의 주인 백혈교주뿐이었다.
“일어나렴.”
붉은 발 안쪽에서 가볍게 손이 흔들렸다. 10사도와 7사도가 동시에 머리를 들었다.
백혈교주는 다른 초월자들과 달리 기세가 강대하지 않았다. 존재가 없는 것처럼 희미한 기운을 피워냈지만, 신비롭고 우아한 분위기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래. 지그하르트의 아이에게 당했다고?”
붉은 발 안쪽에서 영혼을 녹이는 듯한 달큼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 당한 게 아닙니다!”
“이쪽으로 와보거라.”
“아, 예….”
7사도가 일어서지 못하고 기다시피 해서 단상으로 다가갔다.
“흐음.”
백혈교주는 열기가 담긴 눈길로 7사도의 상처를 차례로 살폈다. 그녀의 눈빛이 향할 때마다 7사도가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요기로구나. 그것도 백혈에 원한을 가진 요기야.”
그녀가 발 위로 길쭉한 손가락을 내뻗자, 7사도의 상처에서 샛노란 핏물이 빠져나와 허공으로 떠올랐다.
“토, 통증이….”
7사도가 눈을 부릅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천 마리의 개미가 물어뜯는 듯한 통증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저 노란 핏물에 지독한 악의가 담겨 있었던 것 같았다.
“가, 감사합니다! 사부님!”
백혈교주는 가늘게 고개를 끄덕이고 턱을 모로 틀었다.
“누구에게 당했다고 했지?”
“저, 정말 방심했을 뿐입니다! 다음에 만난다면 놈의 목을 물어뜯어서….”
“마스터가 방심했다고 익스퍼트에게 질 수가 있나?”
“그게….”
“내가 널 잘못 키운 모양이지?”
“끄어어억….”
붉은 발이 살짝 들춰지며 검은 눈동자가 요요롭게 번쩍인다. 그저 눈빛만 보였을 뿐인데, 7사도는 숨을 쉬지 못하는 것처럼 목을 움켜쥐었고, 10사도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물은 전부 놓치고, 지그하르트의 어린 것이 사도를 꺾었다는 소문까지 퍼지고, 나름 기대를 걸었는데, 아쉽게 되었구나. 여기까지겠어.”
바닥 그 이하였던 백혈교주의 기운이 한순간에 하늘이 되었다. 단단하게 여문 공간이 무너질 것처럼 뒤흔들렸다.
“제,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7사도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며 입을 뗐다.
“그놈을 죽이고, 소문을 퍼뜨린 놈들까지 모조리 지워버리겠습니다. 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그가 이마에서 피가 터지도록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온 세상이 백혈교를 두려워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제발 기회를….”
“백혈교의 두려움은 너 따위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끄으윽!”
차갑게 번쩍인 백혈교주의 눈빛에 7사도의 얼굴에 핏줄이 가득 섰다.
“그래도 한 번의 실패로 죽이는 건 너무하겠지.”
“윽….”
정말 죽이려고 했다는 걸 깨닫자, 7사도의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이걸 가져가렴.”
백혈교주가 손가락을 튕기자, 발 안쪽에서 작은 유리병이 날아왔다. 물처럼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이, 이 귀한 걸 제게….”
“네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야.”
발 안쪽에 있는 백혈교주의 턱선이 틀어져서 올라갔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네 몸에서 그 이상의 피를 쥐어짤 테니까.”
“그,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7사도가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숙였다.
“가보도록 해.”
“예!”
그는 머리를 땅에 박고서 이 공간에서 사라졌다.
“어땠지?”
백혈교주의 시선이 우측에 부복해있는 10사도에게 향했다.
“감탄이 나오는 그릇입니다. 곧 쓰러질 상태에서도 제게 선전포고를 해오더군요.”
10사도는 백혈교주가 7사도가 아니라, 라온에 대해 묻는 걸 알아차리고 바로 대답했다.
“그 정도야?”
“가진 무기도 위협적이고, 이대로 놔둔다면 교에 큰 장애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흐응….”
백혈교주가 옅은 신음을 흘리며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했던가.”
“맞습니다.”
“다음에 일곱째가 진다면 그 아이를 데리고 와.”
“산채로 말입니까?”
“당연하지. 내 제자로 받아들일 거니까.”
“…….”
“왜? 네 옛날 생각이 나서?”
“아닙니다.”
백혈교주는 미소를 흘렸고, 10사도가 고개를 저었다.
“후후, 지그하르트의 최고 재능이 백혈교에 입교하면 재미있지 않겠어?”
그녀의 들뜬 웃음소리가 백색 공간을 적셔 들어갔다.
“그 늙은이의 표정이 궁금해지네.”
* * *
천검대주는 북망산에서 별관의 공터를 지켜보고 있었다.
글렌이 떠났음에도 라온은 그 자리에 남아 계속 태화보를 연습하고 있었다.
“뭐하러 여기까지 따라왔나.”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천검대주가 뒤를 돌았다. 글렌이 뒷짐을 진 채 평소와 같은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정해진 임무가 없다면 가주님을 따르는 게 제 임무입니다.”
천검대주는 살짝 턱을 숙이며 대답했다.
“어떻게 봤지.”
글렌은 천검대주의 옆에 서서 보법을 수련하는 라온을 내려다보았다.
“과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천검대주가 눈을 내리감았다.
“과하다?”
“태화보를 내어준 게 과하다는 게 아니라, 지금의 광풍 부단주가 익히기에 태화보가 과한 무학이라는 뜻입니다.”
라온에게 다가온 건 기연이긴 하지만 독이 든 기연이다. 그가 천재라고 해도 시간 낭비만 될 게 뻔했다.
“그런가.”
글렌은 반박도, 동의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라온을 지켜보다가 등을 돌렸다.
“그 아이가 돌아갈 때까지만 지켜봐 주거라.”
“가주님께서는….”
“손을 좀 봐야 할 놈이 있다.”
“아….”
손을 볼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훌륭한 원석에게 도박을 가르친 미친놈이겠지.
“알겠습니다.”
천검대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글렌은 그림자에 스며든 듯 사라졌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지만 천검대주는 자세를 바로 한 채 라온을 지켜보았다. 글렌이 직접 임무를 내렸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비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겠군.’
라온이 보법을 밟는 걸 보니, 실패의 연속이고, 조금의 발전도 없었다. 감도 못 잡은 상태에서 저 지루한 수련을 계속할 리가 없으니 곧 포기하고 돌아갈 것이다.
다만 예상과 달리 그는 몇 시간이 지나도 공터를 떠나지 않았다. 지쳐 쓰러지고, 실패해 넘어지면서 해가 뜰 때까지 보법을 밟았다.
턱.
떠오르는 태양이 공터를 비추기 시작할 때 라온의 발이 멈췄다.
‘이제 끝인가?’
근성 하나는 괜찮네.
단 한 차례의 휴식도 없이 실패만 하면서 8시간 넘게 보법을 밟는 라온의 끈기에 감탄이 나왔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라온은 별관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시 자세를 낮췄다.
‘징하군.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어?’
금빛 여명을 가르며 나아가는 라온을 본 천검대주가 눈을 부릅떴다.
‘저, 저 녀석!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