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89화 (189/653)
  • 제189화

    라온은 가주전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엔의 안내를 받아 알현실에 들어왔다. 다만.

    ‘정말 선물 주려는 거 맞아?’

    이 거대한 방의 주인인 글렌은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처럼 입매가 비틀어져 있었다. 기세도 평소보다 무거워서 숨을 쉬기 거북할 지경이었다.

    -선물이 아니라, 욕이라도 한 사발 퍼부으려는 것 같구나.

    라스도 글렌을 올려보며 피식 웃었다.

    “음.”

    라온이 광풍단원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글렌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의 턱이 살짝 틀어졌다.

    “광풍 부단주.”

    “예!”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내린 채 대답했다.

    “포르반 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 입으로 말해보아라.”

    “알겠습니다. 처음 포르반에 가서 만난 건 발카르 왕국의 마법사 모렐과 살라만이었습니다. 그들과 작은 내기를 한 뒤….”

    “내기?”

    “가벼운 대련이었습니다.”

    “이겼나?”

    질문과 동시에 기세가 한층 무거워졌다. 졌다고 하면 이 방의 공기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예. 이겨서 임무 동안 살라만을 하인으로 삼았습니다.”

    “하인이라. 좋구나.”

    글렌의 좋다는 말과 동시에 묵직했던 분위기가 단숨에 사그라졌다. 세상에 달관한 듯 보여도 같은 육황의 경쟁만큼은 신경 쓰는 것 같았다.

    “계속 말해보아라.”

    “예. 그 뒤로 시장 오위스트에게 가서….”

    조금 가벼워진 분위기에서 포르반 시의 일을 모두 이야기해주었다. 도박장에서 정보를 모으려고 했다고 말했을 때 글렌이 잠시 멈칫했지만 다른 부분은 부드럽게 지나갔다.

    “…그렇게 되어서 10사도가 쓰러진 7사도를 데리고 떠났습니다.”

    “부상자는?”

    “저와 마르타가 내상을 입었고, 경상자가 몇몇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완쾌되었습니다.”

    “허….”

    사정을 모두 들은 로엔은 감탄했다는 듯 헛바람을 들이켰다.

    “흠.”

    글렌은 표정 변화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반응이 너무 덤덤하네.’

    -말하지 않았더냐. 본왕이나, 너희 가주 같은 자들에게 그 정도는 별 게 아니라고.

    ‘나도 알아.’

    요리와 아이스크림을 양껏 먹고 기운을 차린 라스는 중간중간 끼어들어 얄밉게 주절댔다.

    “수고했다.”

    다만 라스의 예상과 달리 글렌의 입에서 처음 나온 소리는 칭찬이었다.

    “검사로서 책임을 다하는 첫 임무라 긴장을 했을 텐데, 좋은 활약을 하고 왔구나. 특히 발카르를 조연으로 만들어버린 점이 좋았다.”

    “아,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날카로운 알현실의 분위기와 다른 글렌의 말에 광풍대원들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오마와 정면에서 부딪치고도 한 명도 죽지 않은 건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게 첫 임무를 시작한 신입 검사라면 더더욱.”

    “가, 감사합니다!”

    검사들은 글렌의 칭찬을 받았다는 것에 감격하여 몸을 떨었다. 북멸왕이라는 남자의 입에서 칭찬이 나오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기에 모두가 감동한 눈빛이었다.

    “그래서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글렌이 천천히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강대한 기파. 산이 움직이는 듯했다.

    “너희를 모르는 자들은 지금까지처럼 무시하며 시비를 걸어올 테고, 이번 사건을 통해 너희를 알게 된 자들은 그 실력이 진짜인지를 확인하려 들 것이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글렌의 말대로 소문을 듣지 못한 자들은 이번 발카르처럼 무시하고 시비를 걸 테고, 소문을 들은 자들은 정말 백혈교를 물리칠 무력이 있는지 시험하려 들 테니, 전보다 더 위험하고 귀찮아질 것이다.

    “그때 필요한 건 단결력과 무력이다. 수련생부터 함께 지낸 너희의 단결력은 다른 단과 대 못지않겠지만, 무력 면에서는 확실히 부족하다.”

    말을 마친 글렌이 왼 손가락을 튕겼다. 알현실을 경쾌하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무너진 것처럼 진동했다.

    쿠구구궁!

    뒤흔들리던 알현실 바닥에서 금색의 불꽃이 나선으로 회전하며 타올랐다.

    고오오오!

    천장까지 치솟은 불기둥이 사그라들며 한 눈으로도 보기 힘든 거대한 원형 책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백 개가 넘는 칸막이에는 가지각색의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이건 그때 그….”

    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예전 만화공을 얻었던 바로 그 책장이었다.

    “깨, 깨달음의 서고!”

    버렌이 책장을 올려다보며 눈을 부릅떴다.

    “이걸 직접 보게 되다니….”

    그는 감격스럽다는 듯 가슴을 움켜쥐고, 코를 훌쩍였다.

    “와….”

    “내 눈으로 깨달음의 서고를 볼 줄이야….”

    “꿈만 같아.”

    다른 광풍대원들도 책장을 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저 책장의 이름이 깨달음의 서고인 것 같았다.

    “첫 임무에서 발카르를 누르고, 백혈교를 물리친 업적을 세운 너희들에게 주는 포상이다. 서고의 중앙 부분에 손을 올려서 너희에게 맞는 무학서를 하나씩 가져가도록 해라.”

    “가,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광풍단원들이 다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인사는 되었다. 빨리 시작해라.”

    “예.”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버렌을 보았다. 그는 그 뜻을 알아듣고 먼저 앞으로 나갔다. 흥분되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책장의 중심에 손을 얹었다.

    우우우웅!

    책장이 진동하며 회전하더니, 중간에서 책 하나가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아!”

    버렌은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책을 받고서 두 눈을 빛냈다. 어깨 너머로 제목을 보니, 제형술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름을 보니 몸 자체를 다루는 무학서 같았다.

    ‘그게 부족하긴 하지.’

    버렌에게는 삭풍이라는 특별한 검술이 있으니, 그 검술을 더 잘 운용할 수 있도록 몸을 쓰는 방법의 무학이 나온 것 같았다.

    ‘정말 필요한 게 나오긴 하나 보네.’

    만화공 때도 그렇고 저 서고는 손을 올린 무인에게 가장 필요한 무학이 나오긴 하는 것 같다. 어떤 마법과 진법과 기술을 사용했는지 모르겠지만 신의 솜씨가 아닐 수 없었다.

    “좋구만.”

    흥겨운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리메르가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네.’

    아까까지만 해도 돈이 없어서 죽으려 하더니, 제자들이 포상을 얻는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도박만 안 하면 참 괜찮은데.’

    제자를 생각하는 마음 하나는 확실한데, 돈과 도박만 걸리면 사람이 추해진다. 조만간 도박 근절 운동이라도 열어야 할 것 같다.

    “루난.”

    “응.”

    라온은 다음으로 루난을 내보냈다. 그녀에겐 수속성 오러를 더 화려하고, 날카롭게 다룰 수 있는 검술이 나왔다.

    마르타에게는 그녀에게 어울리는 강대하면서도, 파괴적인 힘이 깃든 보법이 내려왔다.

    도리안은 회피가 주가 되는 보법서와 종이 한 장이 내려왔는데, 그 종이에는 기이하게도 무학이 아니라, 짐을 더 효율적으로 보관하고 다루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그렇게 광풍대 검사들이 본인들에게 맞는 책을 하나씩 가져갔고, 마지막으로 라온의 차례가 되었다.

    ‘뭐가 나오려나.’

    라온이 책장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보법이 가장 좋을 텐데.’

    검술은 아직 익혀야 할 게 많이 남았고, 몸을 다루는 법은 불의 고리를 이용하면 충분하다. 태화보는 반쪽짜리였기 때문에 지금 가장 필요한 건 가람 보법 이후에 익힐 보법이었다.

    적당한 보법이 나오기를 바라며 책장의 중심에 손을 얹었다.

    우우우웅!

    깨달음의 서고가 다른 검사들 때보다 2배 이상으로 크게 진동하며 회전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도 책은 떨어지지 않았다.

    “어?”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리고서 다시 서고에 손을 얹었지만, 책장은 요지부동이다. 이젠 진동도 없고, 돌지도 않은 채 멈춰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당황하여 글렌을 보았지만,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지금 네게 필요한 무학이 이곳에 없는 모양이로군.”

    “그럴 수도 있습니까?”

    “책장이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구나.”

    “아….”

    라온이 다시 손을 올렸지만 역시나 책장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인 모양이군,”

    글렌이 손가락을 튕기자, 처음처럼 금색 불꽃이 일어나며 깨달음의 서고가 땅속으로 가라앉았다.

    “가, 가주님.”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마르타가 떨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뭐지?”

    “저희는 라온 덕분에 이번 임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받은 이 보법을 반납하더라도 라온에게 다른 포상을 챙겨주셨으면 합니다.”

    그녀는 글렌의 시선이 주는 강대한 압박감을 견디며 끝까지 할 말을 마쳤다.

    “마르타?”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버렌이라면 모를까. 그녀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책장에서 책이 나오지 않은 것보다 더 놀라웠다.

    “으윽….”

    마르타는 라온을 보지도 않고, 글렌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마, 맞습니다.”

    “저희가 이곳에 있는 건 라온 덕분이니 저 녀석이 받지 못한다면 저희도 이 책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버렌과 루난 다른 검사들 역시 마르타의 옆으로 다가가 조금 전 받은 책을 내밀었다.

    “큰 착각을 하고 있구나.”

    글렌은 그런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뒷짐을 치고 단상의 끝에 섰다.

    “예?”

    “서고에서 책을 받지 못했다고 끝은 아니다. 광풍 부단주에게는 조만간 다른 방식으로 포상을 줄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역시.’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학을 받지 못한 건 아쉽지만, 글렌은 이런 신상필벌은 확실한 사람이다. 한참 걸릴지도 모르지만, 분명 다른 방식으로 보상을 챙겨줄 것이다.

    “아, 감사합니다! 제, 제가 주제넘게….”

    마르타는 얼굴을 붉히며 책을 도로 챙겼다.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해라.”

    글렌은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단원들에게 선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온은 글렌에게 깊게 허리를 굽히고 일어났다. 리메르를 보았지만, 그는 먼저 가라는 듯 옅게 웃었다.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광풍단을 데리고 알현실을 나갔다.

    쿠우웅!

    알현실 문이 닫히고, 이제 가주전에 남은 사람은 글렌과 로엔 그리고 리메르 세 명뿐이었다.

    “뭐랄까. 광풍단은 새로 만든 단체 같지 않군요.”

    로엔이 빙긋 미소 지었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보기 좋습니다.”

    “나도 마르타가 라온을 챙겨주라는 말을 할 줄은 몰랐구나.”

    글렌이 모두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포상을 받지도 못했는데, 아쉬워하지 않고, 모두에게 축하를 보내는 라온 도련님의 모습을 보니 확실히 그릇이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크흠, 그렇긴 하지.”

    그는 라온의 칭찬을 듣자마자 굳어 있던 입꼬리를 부드럽게 풀며 헛기침을 했다.

    “그게 다 누구 때문이겠습니까.”

    리메르가 활짝 웃으며 로엔의 옆에 섰다.

    “다 제가 중심을 딱 잡아주고 있으니, 가능한 일이지요!”

    그는 히죽 웃으며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켰다.

    “그래. 수고했다.”

    글렌이 리메르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수고는 뭘요. 이번 임무는 정말 저 애들이 다했습니다.”

    리메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이들을 칭찬할 때는 본인을 자랑하고, 본인을 칭찬할 때는 아이들에게 공을 돌린다. 정말이지 특이한 인간이었다.

    “10사도는 어느 정도 수준이었지?”

    “두 번째 벽을 넘었습니다. 제대로 싸우지 않아서 정확한 수준은 모르겠지만, 그랜드 마스터는 확실합니다.”

    “그런가.”

    그랜드 마스터라는 말을 들어도 글렌의 표정은 덤덤했다.

    “처음 보았을 때 죽여놓을 걸 그랬군.”

    “그때는 어쩔 수 없었죠. 백혈교주와 에덴의 대가리 두 놈이 함께 있었는데.”

    리메르는 금색 햇볕이 들어오는 창문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이번에는 정말 라온 덕을 톡톡히 봤습니다.”

    “그런가?”

    “예. 라온이 7사도를 쓰러뜨린 덕분에 10사도가 물러갔으니까요. 발카르를 입 다물게 만든 것도 라온이고. 모렐이 라온에게 존댓말 하는 건 직접 보셨어야 하는데.”

    염화의 뱀이라 불리는 모렐이 17살의 신입 검사에게 존댓말을 하는 장면은 돈을 주고도 보지 못할 장관이었다.

    “그러니, 라온 좀 잘 챙겨주세요. 서고에 장난치지 마시고.”

    “장난?”

    글렌은 그런 적 없다는 듯 눈썹을 살짝 내렸다.

    “무형기로 서고에서 나오려는 책을 막으셨잖아요.”

    리메르가 책장이 있던 바닥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왜 그러신지는 알겠지만.”

    라온이 책장을 만졌을 때 분명 하나의 책이 움직이려고 했었지만 글렌이 무형기를 사용해서 그 책을 막았다. 그래서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서고에서 나오는 책을 막고, 직접 가르침을 주려고 하신 거죠? 할아버지가 손주를 생각하는 지극한 마음을 우리 라온도 알아야 하는데….”

    “시끄럽다!”

    글렌이 혀를 차며 손을 저었다.

    “옙! 시끄러운 놈은 물러갈 테니, 저도 좀 챙겨주셔야죠.”

    리메르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물론 네게도 포상을 줄 생각이었다.”

    글렌이 고갯짓을 하자, 로엔이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가지고 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아하하하! 감사합니다!”

    주머니를 열고 안의 금빛을 확인한 리메르의 얼굴이 밝아졌다.

    “보상은 충분한가?”

    “아, 물론이죠! 이 정도면 얼마든지 놀 수 있어요!”

    “그게 있어도 그자에게는 안 될 텐데, 괜히 도박으로 대륙에 이름을 떨친 자가 아니다.”

    “그래도 사람인데 계속 이기기만 하겠어요?”

    “정신 좀 차려라. 네가 돈을 잃는다고 해도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진 않아.”

    “가주님. 그건….”

    “하, 지나간 이야기는 됐고, 이젠 잘못에 대해 따질 차례구나.”

    글렌이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묵직하게 내리밟는 걸음에 가주전 전체에 서늘한 한기가 피어났다.

    “예? 자, 잘못이요? 무슨 잘못?”

    리메르가 금화 주머니를 뒤로 돌리며 뒷걸음질 쳤다.

    “이거.”

    글렌의 손에서 종이 한 장이 펄럭인다. 이전에 보낸 보고서였다.

    “2줄. 사도와 부딪쳤으면서 고작 2줄의 보고서를 보내?”

    “그, 그게 빨리 속보로 보내야 하니까….”

    “상황이 다 끝난 상태에서 어떻게 이겼는지, 아이들이 얼마나 다쳤는지를 적을 시간은 충분했을 텐데.”

    “아아! 라온이 걱정되어서 그러셨구나! 그러면 진즉에 말을….”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던 리메르가 우뚝 멈춰 섰다. 벽이 아닌데, 뒤로 도망칠 수가 없었다.

    “무, 무형기? 무형기로 벽을 만들었어?”

    기겁하며 다시 앞으로 나가려 했지만, 꼼짝할 수가 없었다. 네 방향이 모두 무형기로 막혀 있었다.

    쿠르르르릉!

    그리고 머리 위에서는 붉은 벼락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보고는 단주의 필수 임무 중 하나다. 임무를 완수했다고 해도 그 뒤처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으니, 그에 따른 벌을 내리마.”

    “버, 벌이 아니라, 저거 맞으면 죽겠는데요?”

    “죽지는 않아. 그래. 죽지는 않는다.”

    글렌의 손짓에 허공에 일렁이던 붉은 벼락이 굉음과 함께 내리꽂혔다.

    “검계현…! 끄아아악!”

    리메르가 검계를 열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수십 줄기의 벼락이 열리려던 검계를 찢어발기고 그의 전신을 뒤덮었다.

    콰아아아아앙!

    그날 알현실에서 붉은빛이 한참 동안 번쩍였다.

    *     *      *

    라온은 별관에서 실비아, 시녀들과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돌아와 한숨을 내쉬었다.

    “힘드네.”

    글렌에게 한 번, 별관의 모두에게 두 번. 포르반에서 있었던 그 긴 사건들을 하루에 두 번이나 이야기를 했더니, 전투를 치른 것보다 더 피곤했다.

    -그런 재미 없고, 별거 아닌 거 2번이나 들어야 하니, 본왕도 죽겠느니라.

    라스가 빨리 잠이나 자자며 손을 휘적였다.

    “그래야겠네.”

    지그하르트까지 모두를 이끌고 왔기 때문인지, 말주변도 없는데 두 번이나 사건 이야기를 했기 때문인지 몸이 나른했다.

    똑똑똑.

    씻고 자기 위해서 겉옷을 벗었을 때 문에서 세 번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주디엘의 신호였다.

    “들어와.”

    “예.”

    문이 열리고 주디엘이 얇은 책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고개를 꾸벅이고 가지고 온 책을 건네주었다.

    “이건?”

    “임무를 다녀오시는 동안 지그하르트 내부의 무력 단체에 대한 자료를 더 상세하게 모았습니다.”

    “음.”

    주디엘에게 받은 책을 펼쳐보았다. 선택식 때는 자료가 대주와 단주 쪽에 집중이 되어 있었다면, 지금은 단과 대의 성격과 주요 인물들에 대해서도 적혀 있었다.

    앞으로 다른 단이나 대와 함께 싸울 일이 많을 테니, 미리 조사를 해둔 것 같았다.

    “중무전에서 도련님의 진짜 무력을 파악해보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조심스러워졌군. 실력을 확인하고 움직이겠다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이번에 사도를 꺾으면서 중무전 쪽도 함부로 움직일 생각을 접은 것 같았다.

    “그럼 수련 장면을 우연히 본 척하면서 적당히 흘려. 마스터 직전인 것 같다고.”

    “알겠습니다.”

    주디엘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무력 단체를 조사하면서 백혈교에 대해서도 조금 알아봤는데 도련님이 싸우신 7사도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자 같고, 10사도는 30년 전부터 10사도의 위치에 있었다고 합니다.”

    알고 있다. 자신이 암살자 라온으로 살 때도 10사도는 그대로였었으니까.

    “참고로 사도 중에서 30년 넘게 그 자리를 유지하는 자는 딱 네 명입니다. 그들이 백혈교의 진짜 괴물들이죠.”

    “그렇겠지.”

    무력 단체의 힘은 숫자보다 고수의 수준이 우선이다. 육황과 오마가 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이유도 그 안에 있는 최강자들 덕분이었다.

    “앞으로도 몸조심하시길.”

    주디엘은 줄 건 다 주었으니 가겠다는 듯, 담백한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고마워.”

    “아닙니다.”

    그녀는 무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문밖으로 나갔다.

    “흐음….”

    라온은 책자를 펼쳐서 내용을 쭉 살폈다. 대주와 단주, 부대주, 부단주들에 관한 정보들도 나름 상세하게 적혀져 있었다.

    “우리 단주 말고도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네.”

    내용을 쭉 살피는데, 도박을 좋아하는 부대주가 한 명 있었다. 다만 이 사람은 도박을 꽤 잘해서 갈 때마다 따오고, 자신감이 넘친다고 되어 있었다. 리메르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괜찮군.”

    책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훑어보고서 서랍에 넣고 일어났다. 옷을 걸치고 제천검을 쥐었다.

    -뭐냐. 안 자고 어딜 가려는 것이냐.

    ‘이걸 보니까. 몸이 근질근질해졌어. 수련 좀 하고 올게.’

    -올 게가 아니라, 본왕도 같이 가야 하지 않느냐! 세입자 주제에 왜 자꾸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냐!

    ‘세입자? 내가?’

    -그렇다. 네놈은 지금 본왕의 배려로 그 몸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니라.

    ‘하긴 넌 세입자가 아니라, 기생충이지.’

    -무, 무슨 말이냐! 본왕이 그 몸의 진짜 주인이니라. 언제라도 그 몸을 빼앗을 수 있었느니라.

    ‘그럼 지금 해보든가.’

    라온이 덤비라는 듯 손가락을 까닥였다.

    -끄으응….

    라스는 함부로 달려들지 못하고, 분노의 기운과 냉기만 피워냈다. 본인도 아는 것이다. 덤볐다간 역으로 자신에게 능력치만 퍼준다는 걸.

    ‘오래 안 걸리니까. 조금만 참아.’

    라온은 피식 웃고서 별관 밖으로 나갔다. 호수 앞 공터로 가려고 할 때 본관 쪽에서 누군가가 걸어온다.

    느리지만, 위엄이 서린 발걸음. 달빛을 받은 금발이 찬란하게 빛나고, 붉은 눈이 어둠을 밝혔다.

    ‘이, 이 사람이 왜 여기에?’

    글렌이다. 자신이 100일 때 이후로 한 번도 별관에 들리지 않은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가, 가주님을 뵙습….”

    무릎과 고개를 숙이려고 했지만, 허공에서 무언가가 굽히려던 허리와 목을 막아섰다.

    “밤에 시끄럽게 굴지 마라.”

    글렌은 자신의 앞에 서서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빛냈다.

    “먼저 나와 있다니, 수고를 덜었군.”

    “예?”

    “따라와라.”

    그는 본인의 뒤를 따르라는 듯 등을 돌리고 손짓했다.

    “어, 어디를 가시길래.”

    “아까 말했잖느냐.”

    글렌이 슬쩍 뒤를 보았다. 차가운 눈빛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방식으로 포상이 갈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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