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87화 (187/653)
  • 제187화

    로엔이 회색 봉투를 가지고, 알현실로 들어갔다.

    “가주님. 광풍대주에게서 보고가 왔습니다.”

    그는 옥좌에 앉아 있는 글렌의 앞으로 다가가 손에 들고 있던 회색 봉투를 내밀었다.

    “보고라….”

    글렌은 봉투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놈이 제대로 보고서를 쓸 수 있을지나 모르겠군.”

    “수석 교관 시절에도 대부분이 구두긴 했죠.”

    “그래. 자료와 보고서를 내민 건 생존 시험 하나뿐이었지.”

    “하하.”

    로엔이 빙긋 웃었다. 리메르는 대부분의 보고를 입으로 전했다. 미리 준비했다고 할 만한 건 생존 시험 때 수련생에 맞는 장소를 적어둔 정도였다.

    우우웅!

    글렌이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로엔의 손에 있던 봉투가 저절로 떠올라 그 앞에 내려앉았다.

    “일단 보도록 하지.”

    봉투 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낸 글렌의 손아귀가 바르르 떨렸다.

    “이 미친놈이 보고를 이런 식으로….”

    “무,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네가 직접 봐라.”

    글렌이 로엔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그곳에 적힌 내용은 딱 두 줄이었다.

    [라온 7사도를 상대로 승리. 와우!]

    [임무 끝!]

    로엔은 보고서 내용을 보고 한순간 말을 잃었다. 그 간단함에 어이가 없었고, 내용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가, 간단한 건 둘째치고, 사도라는 이름이 붙었다면 최소한….”

    “그래. 마스터지. 그 늙지 않는 괴물이 벽을 넘지 못한 자에게 사도의 지위를 줄 리가 없으니까.”

    글렌은 로엔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은 아직 익스퍼트일 텐데 어떻게 마스터를 이겼을까요?”

    “나도 그게 의문이다. 거기다 이 망할 놈이 너무 간단하게 적어놔서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다. 무사한지, 다쳤는지도 안 적혀져 있으니 원….”

    “저리 간단하게 표현한 걸 보면 크게 다치시진 않았을 겁니다.”

    “또 모르지. 그 도박쟁이 놈의 사고방식은 우리와 다르니까.”

    “다른 건 몰라도 7사도를 꺾은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런 걸로 거짓말할 사람은 아닙니다.”

    로엔이 서류를 쥔 손을 떨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겠지.”

    “익스퍼트의 경지로 마스터를 꺾다니, 나이를 먹고 놀랄 일이 거의 없었는데, 라온 도련님 때문에 매번 놀라게 되는군요. 제가 알기론 대륙 최초 같은데….”

    “나도 들어본 적 없다. 하여튼 평범하게 살지를 않는구나. 신경 쓰이게 시리.”

    글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는 매서웠지만, 입꼬리는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왜 사도를 꺾어서 이렇게 궁금하게 만드는지 모르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익스퍼트로 마스터를 잡느다라, 세상이 난리가 날지도 모르겠어. 크흠!”

    “후후.”

    로엔은 어설프게 손주를 자랑하는 글렌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비연회를 움직이고 싶지만, 그 아이에게 직접 듣는 게 낫겠지. 빨리 복귀시켜서 무슨 일인지 들어보고 싶군.”

    “예. 저도 궁금합니다.”

    “그리고 리메르 그놈은 좀 맞아야겠다.”

    “…….”

    *     *      *

    라온은 광풍단과 함께 시청으로 향했다. 별관은 대로의 아래에 있어서 시청까지는 조금 걸어 올라가야 했다.

    “자, 잠깐! 저 사람….”

    “금발에 붉은 눈! 지그하르트의 제복!”

    “맞네! 7사도를 꺾은 광풍단 부단주!”

    “라온 지그하르트!”

    대로에 있던 사람들은 라온을 알아보고 탄성을 흘렸다.

    “큰 부상을 입었다고 하더니, 멀쩡한데?”

    “초인들은 회복력도 빠르잖아.”

    “저렇게 어린 검사가 대주교를 잡고, 사도를 베었다니, 믿기질 않네.”

    “그게 전부가 아니야. 백혈교 지부를 찾는 것도 저분이 한 거라고!”

    “10사도에게 죽이겠다고 선전포고까지 했다던데?”

    “역시 지그하르트인가?”

    사람들은 이미 라온이 했던 일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뭐지?”

    라온은 주변을 돌아보며 눈매를 좁혔다. 저들 모두가 자신에 대해 아는 것 같았다.

    “이미 소문이 다 퍼졌어. 네가 대주교를 죽이고, 7사도를 쓰러뜨렸다는 사실이.”

    “누가… 아, 뻔하군.”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할 일 없는 도박쟁이 단주님이 분명했다.

    “뭐, 단주님이 일등 공신이긴 하지만, 그곳에 남아있던 인질들도 네 이야기를 많이 했지.”

    버렌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 덕분에 광풍단 자체의 인지도가 굉장히 높아졌다. 첫 임무를 했을 뿐인데 육황의 어린 무인 중 최강이라는 소리가 퍼지고 있어.”

    “흐음….”

    라온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인상 쓰니까 더 멋있는데?”

    “암! 지그하르트는 저런 냉정함이 있어야지.”

    “아직 부상이 낫지 않은 건가?”

    “그렇겠지. 익스퍼트로 마스터를 쓰러뜨렸는데, 내상이 심할걸? 지금은 참고 있을 거야.”

    “그런 상태에서 10사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니, 타고난 영웅이구만.”

    하지만 사람들은 그 인상 쓴 것도 마음에 드는지 더 큰 탄성을 터트렸다.

    이런 것도 좋게 해석하다니, 리메르가 일단 유명해지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색한 표정으로 시청에 들어가려 할 때 안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왔다. 모렐과 살라만 그리고 제이나 왕녀였다.

    “힉!”

    왕녀는 자신을 보자마자 귀신을 본 듯 숨을 들이마시며 뒤로 물러섰다.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자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라온이 모렐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몸은 괜찮은가.”

    “괜찮은가?”

    “아, 아니! 임무가 다 끝났지 않은가…요?”

    모렐이 당황한 듯 눈을 부릅떴다. 그 와중에 마지막엔 다시 요를 붙였다.

    “맞습니다. 임무는 끝났죠. 농담입니다.”

    “윽….”

    농담이라고 말하자, 모렐이 인상을 찌푸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기보다 장난기가 있군.”

    “죄송합니다.”

    라온이 옅게 웃었다.

    “어쨌든 정말 대단한 활약을 했네. 백혈교 지부를 찾고, 대주교를 쓰러뜨린 것으로 모자라 7사도까지 꺾었으니까.”

    차가운 듯한 그의 눈동자엔 아직도 경악이 어려 있었다.

    “인정하지. 이번에는 우리 발카르가 지그하르트에 완전히 패했어.”

    “임무였는데 승패가 어디 있습니까.”

    “아니, 패한 게 맞네. 자네 이곳으로 올라오면서 발카르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던가?”

    “그건….”

    모렐의 말이 맞았다. 이곳까지 오며 들은 건 자신의 이름과 지그하르트 그리고 광풍단 뿐이었다.

    “육황은 동맹이지만 또한 경쟁 관계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오늘 일을 통해 지그하르트의 위상은 한층 위로 올라가고, 발카르는 내려갔지.”

    “한 번의 임무로 그 이름값까지 움직인다는 겁니까?”

    “육황의 이름을 건다는 건 그런 거네. 거기다 자네가 한 일 중에 놀랍지 않은 건 없었잖나. 대주교는 그렇다 치고, 7사도를 쓰러뜨렸다고 했을 땐 나도 깜짝 놀랐어. 그 때문에 식량 창고의 불을 제대로 끄지 못했지.”

    모렐이 아쉽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쯧,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라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혀를 찼다.

    -빨리 일이나 처리하고 식당이나 가라.

    녀석의 머리에는 음식과 식당 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패자는 이만 물러가겠네. 이곳에서 우리가 할 일은 없으니까.”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무슨 수고. 다 자네 손 위에서 놀기만 했지. 리메르 같은 별종 아래에서 어떻게 자네 같은 사람이 나왔는지 모르겠군.”

    “그래도 할 때는 하는 분입니다.”

    “그때가 거의 없지 않은가.”

    “뭐, 그거야….”

    “됐고, 다음에 볼 때는 오늘의 굴욕을 갚도록 하지.”

    모렐은 손을 휘적이고서 대로를 내려갔다. 나름 좋게 말했지만 자존심이 꽤 상한 것 같았다.

    “라온 님. 다음에 또 뵙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나중에 또 보죠.”

    티아스가 스쳐 지나가며 직각으로 고개를 숙였다. 라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제이나 왕녀는 혹시나 눈이라도 마주칠까. 마법사들 사이에 껴서 움직였다.

    “왕녀님. 그래도 구해줬는데, 감사 인사 한번 안 해주십니까?”

    도망치듯 빠지던 제이나가 몸을 움찔거리고서 멈춰 섰다.

    “고, 고마워…요.”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황급하게 몸을 돌렸다.

    ‘역시.’

    라온이 피식 웃었다. 예상대로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저 왕녀는 그때의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어이.”

    마지막으로 가장 뒤에서 움직이던 이닐드를 불렀다.

    “예? 아, 예!”

    이닐드는 군인이라도 된 듯 차려자세로 섰다. 자신에 대한 소문을 듣고, 아예 범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심하게 다친 곳은 없지?”

    “물론입니다!”

    대답하는 그의 앞니가 훤히 비어 있었다.

    “앞으로는 자리를 잘 보고 다리를 뻗는 게 좋을 거야. 함부로 나섰다간 목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예! 구,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자 이닐드가 몸을 바르르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보도록.”

    “옙!”

    그는 또 부를 새라 부리나케 모렐에게 달려갔다.

    라온은 피식 웃고서 시청의 문을 열었다. 시청에도 소문이 다 퍼졌는지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들의 놀라는 시선을 덤덤하게 받으며 시장이 있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오오! 깨어나셨군요!”

    시장실로 들어가자마자 포르반 시장 오위스트가 벌떡 일어나 달려 나왔다. 큼지막한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배려해주신 덕분에 괜찮아졌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는 커다란 미소를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앉으시죠.”

    “예.”

    라온은 시장의 손짓을 따라 의자에 앉았다.

    “정말 대단한 일을 해주셨습니다. 제 생명의 은인. 아니, 이 포르반 시의 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시장이 맹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백혈교를 떠나서 납치된 왕녀님을 구하지 못했다면 발카르에 의해서 포르반이 불바다가 되었을 겁니다. 지부를 찾아내고, 왕녀님을 구하셨으며, 대주교와 사도를 물리치셨지 않습니까.”

    오위스트가 하는 말이 완전 아부는 아니었다. 실제로 발카르 국왕이 왕녀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이야기는 사실이었으니까.

    “저와 시민, 이 시 자체를 구해주신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그저 감사하다는 듯 의자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게 굽혔다.

    “저는 내려온 임무를 마쳤을 뿐입니다.”

    라온은 일단 한 번 겸손을 떨었다.

    -돈 받겠다고 와놓고, 뭐라는 것이냐! 본색을 드러내라!

    라스는 헛짓 부리지 말고, 빨리 본모습을 보이라고 떠들어댔다.

    ‘기다려봐. 바로 말할 수는 없잖아.’

    담담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포르반에 있는 백혈교의 지부를 통째로 지우고, 사도마저 쓰러뜨려 주셨으니,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드리고 싶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단주님과 대화할 때 임무를 마치면 포상을 준다고 하셨죠?”

    “예! 그리 말했습니다!”

    오위스트는 말만 하라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뭐, 그러시다면….”

    리온이 우측에 있는 도리안에게 손을 뻗었다.

    “옙.”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작은 글자가 빼곡하게 차 있는 계약서 한 장을 꺼냈다.

    “사실 저희가 신생 단체라 필요한 물품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그걸 모두 보급해주신다니, 고마울 뿐이군요.”

    “예? 모, 모두라는 말은 안 했는데….”

    “일단 저희 연무장에서 먼지가 좀 많이 일어납니다. 수련장에 사용하는 흙 중 가장 좋다는 연성토로 좀 채워야 할 거 같고.”

    오위스트의 말이 끝나기 전에 계약서에 첫 번째로 적힌 물품을 말했다.

    “여, 연성토는 가격이….”

    “다음으로 이번에 싸우느라 애들 기력이 좀 떨어져서 작은 영약을 하나씩 주고 싶군요.”

    “여, 영약은 가격도 가격이지만 물량이….”

    “그리고 검을 관리할 수 있는 형선천도 사람 수대로 있으면 좋겠네요.”

    “혀, 형선천은 고급 비단보다 더 비싼….”

    “말씀드렸듯이 저희가 신생 단체라 활동 자금도 좀 필요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 정도 금화면 포상으로 적절하지 않을지….”

    “물건에 금화까지?”

    “예. 꼭 필요하죠.”

    라온은 오위스트의 작은 반박을 모조리 무시하고, 계약서에 적힌 필요한 물품들을 나열한 뒤 금화 그것도 확실한 액수까지 보여주었다.

    “어으으그….”

    물품과 액수를 확인한 오위스트의 눈이 탁하니 풀렸다.

    “너희는 필요한 거 없어?”

    “저는 이번 임무를 진행하면서 사용한 물품을 보충하고 싶습니다!”

    도리안이 냉큼 손을 들어 올렸다.

    “임무 중에 사용한 물품이니, 해주시겠죠?”

    “그, 그건 당연히 해드려야죠.”

    오위스크는 당황한 와중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요? 그럼 이것들 좀 구해주세요!”

    도리안은 배 주머니에서 라온이 꺼낸 것보다 더 길고 넓은 종이를 꺼냈다.

    “일단 대형 몽둥이 하나, 소형 몽둥이 하나, 특별 계약서에, 일반 계약서 그리고 텐트와 침낭 17개. 연막 구슬이랑 발광 구슬도 사용했고….”

    “몽둥이랑 텐트는 너한테 있잖아.”

    “에이, 감가상각이라는 게 있잖아요.”

    “자, 장이 꼬이는 느낌이야….”

    오위스트의 얼굴이 점차 창백하게 질려갔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나는 수련복을 관리할 수 있는 장비가 필요하다. 오는 길에 봤는데 수속성 마법석과 풍속성 마법석을 이용한 제품이 있더군.”

    버렌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옷을 관리하는 물품을 말했다.

    “난 없어.”

    “구슬 아이스크림.”

    마르타는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루난은 예상대로 아이스크림을 말했다.

    “아이스크림? 그 정도야 얼마든지….”

    “가게.”

    오위스트의 표정이 처음으로 환하게 밝아졌지만, 이어지는 루난의 말에 다시 노랗게 죽어갔다.

    “응?”

    “구슬 아이스크림 가게.”

    “…….”

    *     *      *

    라온은 오위스트의 서명을 받은 계약서를 가지고 시청을 나왔다.

    직접 한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경련이 온 듯한 배를 부여잡은 채로 계약서에 서명해주었다. 덕분에 사인은 삐뚤빼뚤했다.

    -지독한 놈….

    라스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곳에 있는 모든 걸 받아낼 줄은 몰랐던 것 같다.

    ‘기회는 확실하게 잡아야지.’

    이런 기회가 또 올지 모르니, 있을 때 제대로 잡아야 한다. 거기다 자신이 놓쳤다면 이 어마어마한 액수가 리메르의 판돈이 되었을 것이다.

    ‘꽤 많이 벌었는데.’

    도박장에서 벌었던 금화와 오위스트에게 받은 금화를 합치니 대륙 어디에 가서도 자리를 잡을 만한 양이 되었다. 속이 든든했다.

    만족스럽게 금화가 들어 있는 품을 두드릴 때 입을 살짝 내밀고 있는 루난이 보였다.

    아이스크림 가게를 사달라는 부탁은 들어주지 못해서 살짝 삐진 것 같았다.

    “가게는 못 사주지만, 아이스크림은 종류별로 사줄게. 밥 먹고 가자.”

    “응.”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전부 사준다고 하자 루난이 입을 쏙 집어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가고 싶다는 식당이 어디라고 했지?’

    라온이 불만인 듯 팔짱을 끼고 있던 라스를 톡톡 쳤다.

    -드디어 가는 것이냐?

    ‘약속했으니 지켜야지.’

    -좋다! 그래야 인간이지! 이름은 동녘의 닭벼슬이다! 닭 요리로 유명한 곳이다!

    ‘거긴 어떻게 알았대?’

    -네놈이 그 미친놈들을 조사하는 동안 본왕은 음식점을 조사했느니라.

    ‘대단하네….’

    아무래도 청각을 이용해서 식당에 대한 정보만 쏙쏙 모은 것 같다. 녀석의 열정에 감탄이 나왔다.

    “임무도 끝났으니, 회식이나 하자. 오늘은 내가 낼게.”

    라온은 검사들을 모아 함께 식사를 하자고 말했다.

    “오오오!”

    “정말?”

    “통도 크네! 역시 단주님이랑은 달라!”

    “동녘의 닭벼슬이 괜찮다는데, 아는 사람 있어?”

    “저 압니다!”

    도리안이 냉큼 손을 들어 올렸다. 이 녀석도 참 모르는 게 없다.

    “닭 요리가 맛있다니까. 그곳으로 가자”

    “옙!”

    녀석의 안내를 따라 동녘의 닭벼슬로 가고 있는데, 맞은 편에서 어깨를 축 늘어뜨린 붉은 머리 엘프가 다가왔다.

    “단주님?”

    “라온? 일어났구나!”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리메르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혈색 좋네. 벌써 일어날 상처가 아니었는데?”

    “빨리 조치해주신 덕분이죠.”

    “뭐? 아, 그렇지. 내가 좀 잘하긴 했어.”

    그는 맞는 말이라며 히죽 웃었다.

    “그런데 표정을 보니 다 잃으신 모양이네요.”

    “이, 잃기는 무슨….”

    목소리가 바닥을 뚫고 들어가는 걸 보니 도박장에서 탈탈 털린 모양이다.

    “어떤 도박장에서 하신 겁니까?”

    “고양이의 젤리.”

    “…….”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았고, 사기꾼들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도박장의 이름이었다.

    “회식하려고 하는데 같이 가시죠.”

    “회식? 그럼 당연히 나도 가야지! 다만 이 단주님은 아직 할 일이 남았거든. 먼저 가 있어.”

    “알겠습니다. 그럼 동녘의 닭벼슬로 오세요.”

    라온은 고개를 숙이고 우측 도로로 향했다.

    “그래. 그래.”

    리메르는 손을 휘적이고 시청으로 향했다. 어색했던 그의 표정에 미소가 살금살금 피어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일어났구만.’

    이제 가도 되겠어.

    라온이 깨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돈 이야기를 하기에는 양심에 찔려서 가만히 있었는데, 이제 시장을 찾아가도 될 것 같았다.

    “후후후. 다 뒈졌어!”

    도박이란 본래 판돈으로 하는 법. 시장에게 거액의 포상금을 받아서 도박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웃음이 나왔다.

    “흐흥!”

    리메르는 기대감이 실린 콧노래를 부르며 시장실로 찾아갔다.

    “광검께서도 오셨군요!”

    오위스트는 어딘가 불편한지 파리한 안색으로 배를 부여잡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안 좋아 보이시는데.”

    “아, 속이 좀 쓰려서….”

    “몸조심하셔야죠.”

    리메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오위스트의 위아래를 살폈다.

    “괘, 괜찮습니다.”

    오위스트는 직접 차를 타서 리메르의 앞에 놓아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전에 저희가 한 이야기가 있잖습니까. 이번 임무가 끝나면 추가 포상을 주신다고 하신….”

    “아, 확인하러 오신 거군요. 후우, 정말 대단한 부하들을 두셨습니다.”

    “예?”

    돈을 받기 위해 손을 벌리던 리메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청하신 것 중에 하나 같이 고급이 아닌 게 없고, 지금 포르반에서 구할 수 있긴 한 물건들이라 거절할 수도 없네요. 정말 준비 단단히 하신 것 같습니다.”

    오위스트가 앞에 계약서를 꺼내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건….”

    리메르는 그 계약서에 적힌 물건과 이름을 보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했다. 자신이 오기 전에 라온과 광풍단이 선수를 친 것이다.

    “시장으로 살면서 이렇게 탈탈 털린 건 처음입니다. 이래서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다시 느꼈습니다. 한 다섯 가지만 들어준다고 할걸.”

    오위스트는 속이 쓰린지 다시 배를 꽉 움켜쥐었다.

    “광풍단이 거래를 잘했는지 걱정해서 오셨겠지만,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라온 님부터 해서 아주 대단한 친구들이에요. 허허!”

    “그, 그런데 혹시 추가 금화는….”

    “당연히 받아 가더군요.”

    그는 뒤쪽에 있는 금고를 가리켰다. 문이 열린 금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물품만이 아니라, 활동비까지 받아 가시다니, 시예산은 물론이고, 제 사비까지 쓰게 생겼습니다.”

    “아하하! 그, 금화도 받아 갔군요….”

    리메르는 어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산이 아니라, 사비까지 쓰겠다는 사람에게 돈을 더 달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못했다.

    “화, 확인했으니, 저는 이만….”

    돌아서는 도박꾼의 왼쪽 눈동자에 서글픈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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