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86화 (186/653)

제186화

라온이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직각과 곡선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예술품 같은 화려한 천장이 보였다.

‘여긴 또 어디지?’

저 웅장해 보이는 천장을 보니, 치료소가 아님은 분명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리메르가 이쪽으로 데리고 온 것 같았다.

“윽….”

주변을 살피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안 아픈 곳이 없다. 손가락부터 단전까지, 전신에 찌릿한 통증이 일었다.

‘역시 마스터를 꺾는 건 쉽지 않군.’

살기를 담은 마스터의 강기는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했다. 다섯 번째로 검을 부딪칠 때부터 내상이 일어났고, 놈과 마지막 접전을 벌일 때는 목구멍에서 역류하는 피를 간신히 참아야 했다.

치료사도 왔다가 갔을 테고, 나태의 효과를 받으며 자고 일어났는데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걸 보면 몸 상태는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최악이었던 것 같다.

“후우우….”

라온이 천천히 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통증은 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야 일어나다니….

이불을 걷고, 침대 밖으로 나가려 하자 얼음꽃 팔찌에서 라스가 불쑥 튀어나왔다.

-고작 그런 놈 하나를 이겼다고 그 꼴이라니, 한심하다. 허약하기 그지없어.

라스는 본인이 부끄럽다며 혀를 쯧쯧 찼다.

“그러냐.”

라온이 동그란 눈동자를 내리고 있는 라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인사도 제대로 못 했네.”

-무슨 인사를 못 했다는 것이냐.

“7사도와 싸울 때 네가 두 번이나 도와줬잖아. 고맙다.”

라스는 자신이 느끼기 전에 10사도의 기습을 경고해주었고,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10사도에게 싸움을 걸려는 것도 막아 주었다. 만약 리메르와 라스가 아니었다면 지금 자신과 광풍단은 전멸했을지도 모른다.

“너도 10사도는 상당히 강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네. 하긴 마스터에서 벽을 넘었다면 그랜드 마스터니까.”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것이냐.

라스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는 듯 인상을 팍 구겼다.

-마스터고, 그랜드 마스터고 그 딴 건 너희 인간들이 나눠놓은 버러지 같은 단계일 뿐이다. 본왕에게 있어서는 개미인가, 날개 달린 개미인가 정도의 차이이니라.

‘어….’

-너희 가주 정도가 아니라면 본왕의 입장에선 모두 손가락으로 눌러 죽일 수 있는 벌레다.

‘그럼 왜 싸우지 말라고 경고까지 한 거지?’

라스의 행동이 평소와 달라서 이제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말을 들어보니 큰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야 당연히 약속 때문이지.

‘약속?’

-네놈이 약속하지 않았더냐. 구슬 아이스크림 세트와 이곳의 특별 요리 2가지를 먹겠다고.

‘…그랬지.’

도박장에서 라스를 이용하며 그런 약속을 했었다. 다만 지금 그게 왜 나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넌 못 느꼈겠지만, 당시 네 상태는 심각했다. 만약 내상이 더 심해진다면 이곳을 떠날 때까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할 수도 있고, 혹은 멍청한 네놈이 죽을 수도 있으니, 말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느니라.

라스가 몸 상태를 확인하듯 라온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역시 본왕의 계산은 틀리지 않았다. 나태의 효과를 받으니 꽤 많이 회복했군. 모레쯤이면 식당에 가도 될 것이니라.

녀석은 이번만큼은 절대로 특선 요리를 놓치지 않겠다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 그러니까 날 도와주려는 게 아니라, 내가 다치면 네가 요리를 먹지 못해서 말렸다는 거지?”

-그렇다.

라스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얄미울 정도로 크게.

-이곳의 특선 요리는 이미 본왕이 조사를 끝냈느니라. 먼저 닭고기를 야채와 함께 볶아서….

“하.”

라온은 뭘 먹을지 고민하는 라스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럼 그렇지.’

걱정해주길래 좀 바뀌었나 했더니, 크나큰 착각이었다. 저 마왕 녀석은 약속한 음식을 먹지 못하거나, 늦게 먹을까 봐 자신을 막아선 거였다.

“질린다. 질려.”

그 상황에서 분노보다 식욕을 탐하다니, 음식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있는 식탐의 마왕다웠다.

-시끄럽고, 본왕이 말하는 음식의 이름부터 기억해라. 랜슬랭 닭볶음과….

우우우웅!

라스가 들소처럼 머리를 들이밀며 음식 이름을 말할 때 탁상 위에 있던 진혼검이 진동을 일으켰다.

“진혼검?”

라온은 떨고 있는 진혼검을 손에 쥐었다.

“그래. 너도 수고했다.”

이번 싸움의 일등 공신은 진혼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혼검이 아니었다면 7사도에게 그 정도로 충격을 주지 못했을 테니까.

“다음에는 10사도를 베고, 네 원수도 찾아줄게.”

[진혼검이 정화한 혈기를 바칩니다.]

고맙다고 말하며 검병을 쓸어줄 때 진혼검에게서 정심한 기운이 밀려오고,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

진혼검이 피를 마신 숫자는 대주교와 7사도 둘 뿐이었지만 예전에 수십 명을 한 번에 베었을 때보다 더 짙은 기운이 마나 회로를 통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숫자가 아니라, 혈기의 수준에 따라 그 양이 정해지는 것 같았다.

우우우웅!

정화된 혈기는 순수한 마나처럼 전신의 마나 회로를 타고 내려가 근육과 뼈를 강화하고, 손상되었던 장기마저 회복시켰다.

“후우.”

라온은 본인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워낙에 순수한 기운이기 때문에 몸이 기운을 받아들이는데 조금의 부담도 없었다.

[정화한 혈기가 어긋난 육체를 회복시킵니다.]

[모든 능력치가 6포인트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 6포인트. 예전보다 능력치가 훨씬 높아진 걸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상승량이다. 하지만 메시지는 더 남아 있었다.

[특성 <요기 적응>의 단계가 3성으로 상승합니다.]

요기를 더 잘 다룰 수 있게 만들어주는 요기 적응의 등급도 올랐다. 진혼검에서 피어나는 요기가 몸속에 있는 오러처럼 더 친숙하게 느껴졌다.

“후우….”

라온이 몸을 일으키고,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통증이 많이 줄어들었고, 육체에선 이전보다 더한 힘이 느껴졌다. 확연한 성장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좋군.’

거의 완쾌된 몸 상태를 확인하고 고개를 돌리자, 뚱한 표정의 라스가 둥둥 떠 있었다.

“웬일로 네가 조용하냐?”

평소라면 벌써 난리를 쳤어야 했는데, 오늘따라 반응이 없었다.

-본왕은 마계에 있을 때 무게감이 있고, 여유 넘치기로 유명한 군주였느니라. 그 고고함에 모두가 고개를 숙였지.

라스가 진혼검을 보며 코를 찡그렸다.

-그 미물이 혈기를 정화하는 건 네놈이 쓰러지기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놀랄 리가 있겠느냐.

‘그러냐.’

라온은 라스가 무게감 있다고 할 때부터 한숨을 내쉬었다. 깃털보다 더 가벼운 녀석이 무겁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이 분노의 군주를 당황하게 만들고 싶다면 대륙의 절반이 사라지는 수준의 사건은 가지고 와야….

라스가 코를 훌쩍이며 말을 하려 할 때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길 수 없는 결투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불의 고리>의 성취가 크게 상승합니다.]

[특성 <불굴의 의지>의 단계가 3성으로 상승합니다.]

[특성 <집중>의 단계가 3성으로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6포인트 상승합니다.]

연속적으로 올라오는 메시지에 라온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와….”

진혼검이 준 요기 덕분에 몸을 회복하고 능력치가 오른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는데, 추가로 특성의 등급과 능력치까지 오를 줄은 생각 못 했다.

고오오오!

능력치가 또 한 번 상승하는 즐거움에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온몸에 생기가 차오르며 쓰러지기 전보다 더한 기운이 전신에서 흘러넘쳤다. 큰 부상을 입었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당장 7사도와 재대결을 벌여도 문제없을 정도였다.

-이, 이게 무엇이냐.

라스는 두 번째 메시지들을 살피며 입을 떡 벌렸다.

-애송이 하나를 꺾었을 뿐인데 뭐가 이리 많이 오른단 말이냐! 본왕의 본체를 아예 거덜 내려고 하는 것인가!

“마스터였는데, 애송이는 아니지.”

-본왕이 애송이라고 하면 애송이이다! 본체로 돌아간다면 손가락 하나로 찍어 죽일 수 있느니라.

“근데 못 하잖아.”

-어흑….

갑작스레 찔린 정곡에 라스의 난동이 잠시 멈췄다.

-어, 어쨌든 이건 아니니라. 고작 벽 하나를 넘은 버러지를 이긴 대가로 너무 과하느니라!

라스는 항상 가지고 있다는 여유와 무게를 훨훨 떠나보내고, 나뭇잎 같은 가벼움을 드러냈다. 이런 추함이 바로 라스의 진짜 얼굴이었다.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느니라!

녀석이 안 된다는 듯 시스템 창을 노려보았다. 물론 시스템은 대답하지 않고 이미 사라진 것 같지만.

-본왕이 머리에 칼을 맞지 않고서는….

라온은 라스가 머리에 칼을 맞았다는 소리를 하자마자 진혼검을 뽑지 않은 채 라스의 뒤통수를 때렸다.

-이익! 뭐 하는 짓이냐!

“칼 맞았으니까 됐지?”

-이 또라이 자식이 진짜!

라스는 왕의 어투마저 포기한 채 당장 달려들 것처럼 몸집을 부풀렸다.

“근데 너 마계의 군주잖냐. 그것도 최상위 군주 중 하나라며.”

라온이 라스의 뾰족한 머리를 툭툭 누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 본왕은 마계 7대 군주 중 하나이니라! 모두가 경배하는 옥좌에 올라섰지!

“그런 대단한 군주시면 능력치도 엄청나겠네.”

-물론! 네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느니라!

“그럼 내가 조금 받아 간다고 해도 간의 기별도 안 가는 거 아니야?”

-당연하…다?

라스는 이제 조금 이상함을 느끼고 말끝을 살짝 올렸다.

“당연하면 좀 줘도 상관없잖아.”

-주, 주더라도 이런 가벼운 일이 아니라, 좀 더 확실한 일을 치르고 나서….

“시스템을 이렇게 만든 사람 누구?”

-끄응….

라스는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삐죽 내밀며 라온을 노려보았다. 본인이 한 말이 있으니, 이제 따지질 수도 없었다.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 몸도 완전히 회복했으니, 이제 남은 건 네 약속을 지키는 것뿐이니까.”

-저, 정말이냐?

“진혼검 덕분에 내상도 거의 완치되었으니, 바로 식사해도 될 거야.”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낫자마자 배가 밥을 달라며 요동쳤다.

-켈베로스 똥도 쓸 곳이 있다더니, 저 미물도 도움이 될 때가 있구나.

우우우웅!

라스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진혼검이 거친 진동을 일으켰다.

-그럼 무얼 하는 것이냐. 빨리 가서 아이스크림부터 땡기자꾸나.

“좀 기다려.”

라온이 허공에서 춤을 추는 라스를 자제시키고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멀리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문이 열렸다.

“라온.”

“어! 부단주님! 일어나셨군요!”

루난과 도리안이었다. 두 사람은 침대 옆으로 달려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괜찮아?”

“괜찮아.”

“미안해….”

루난이 어깨를 축 내렸다. 중요한 순간에 옆에 없어서 미안하다는 것 같았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웃으며 손을 저었다. 루난이 있었다면 광혈귀 때와 같은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여긴 어디야?”

“시에 귀빈이 왔을 때 여는 별관이라고 하더군요. 시청보다 더 화려해요.”

도리안은 방을 쭉 둘러보며 헤죽 웃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올게요!”

그는 말릴 새도 없이 손을 흔들로 방 밖으로 나갔다.

-시간 끌지 말고, 이대로 나가서 바로 식당에 가자. 본왕이 들었던 곳이 있느니라.

‘일 하나만 좀 하고.’

-일? 또 무슨 일을….

‘이건 간단한 거야.’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 좀 내야 할 녀석이 있거든.”

*     *      *

마르타는 멍하니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아….”

어둑한 회색 하늘을 보고 있자니, 사흘 전 그날이 생각난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원수를 만났건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했던 그 순간이.

“젠장.”

십여 년 전 마을의 벽을 부수고 들어와 사람을 벌레처럼 죽이던 10사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그때보다 더 강해졌다.

지금까지 수련해온 시간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과 큰 차이가 났다.

더 한심한 건 7사도를 베고, 10사도에게 선전포고를 한 건 자신이 아니라, 아무 원한도 없던 라온이라는 점이다.

“정말 미친놈이야.”

라온의 내상은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누워 있었으니까.

그런 심각한 내상을 가진 상태에서 10사도와 싸울 생각을 하고, 미래에 죽이겠다고 선언하다니, 정신이 나갔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대단하다라는 감정을 넘어 감탄과 경악만 일었다.

‘이게 그릇이 다르다는 건가….’

무력, 정신력, 그리고 투쟁심까지. 말로만 떠들던 자신과 라온은 너무도 큰 차이가 났다. 한 살 어린 녀석에게 이런 자괴감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다만 그 이상으로 라온이 고마웠다. 그가 아니었다면 10사도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죽었을 테니까.

물론 자신 때문에 진법을 유지하지 못한 1조 역시 몰살당했을 거다.

라온에게는 여러 가지로 고맙다는 생각만 들었다.

“하아….”

“부단주님이 일어나셨어! 라온 님이 깨어났다고!”

마르타가 입술을 깨물고 일어서려 할 때 뒤쪽에서 도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라온이 머무는 방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     *      *

도리안에게 라온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광풍단원들이 방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라온!”

“괜찮아?”

“어디 아픈 곳은 없어?”

“야! 말을 높여야지! 부단장인데!”

“임무 끝났잖아. 이제 평소처럼 해도 되는 거 아냐?”

“어? 나, 나도 모르겠다.”

라온은 방을 가득 채운 광풍단원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쪽도 이젠 가족이 다 되었군.’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 견제하고, 조롱하기 바빴지만 지금 이들의 눈빛에 어린 건 걱정과 안도 뿐이었다. 그 감정들이 피부에 와닿아 가슴이 따스해졌다.

“부상자는?”

라온은 중앙에 선 버렌을 보며 물었다.

“마르타는 내상이 조금 남아 있지만, 대부분은 경상이라 치료를 끝냈습니다.”

버렌은 아직 임무라고 생각했는지 말을 높였다.

“인질은 어떻게 됐지?”

“전부 무사해.”

침대 옆에 앉아 있던 루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이사항은?”

“부단주님이 예측하신 대로 지부가 무너지자마자 포르반 시에 숨어 있던 백혈교도들이 움직였습니다. 살라만이 바로 움직여서 백혈교도를 제압했지만, 놈들이 도망치며 불을 질러서 식량창고 몇 곳이 전소되었습니다.”

“인명피해는?”

“없습니다.”

“다행이네.”

라온이 버렌의 보고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주님은 어디 계시지?”

“치료사가 부단주님을 치료하는 걸 확인한 후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버렌은 푹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찡그렸다.

“도박장에 갔겠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이 심하긴 하지만 죽지 않을 정도라는 걸 확인했고, 임무도 끝났으니 좋다며 도박장에 간 게 분명했다.

-참으로 일관적인 귀때기이니라.

‘그러게.’

라스가 감탄을 흘렸다. 마왕의 인정을 받다니 역시 리메르는 대단한 엘프였다.

“전부 수고했다. 각자 제 역할을 해준 덕분에 사망자 없이 임무를 끝낼 수 있었어.”

라온이 광풍단원을 쭉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단주가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가 사라졌으니, 자신이 임무 이후의 반성회를 열어야 했다.

“엑?”

“아닙니다.”

“우리가 뭘 했다고….”

“맞아. 부단주님이 다 했죠.”

“사도를 꺾다니….”

라온이 잡은 백혈교도는 둘 뿐이었지만 그게 대주교와 7사도였기 때문에 광풍단원은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다만 전부 잘한 건 아니야. 먼저 2조.”

“응?”

라온의 부름에 2조 조장인 루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시대로 인질들을 대피시키고, 자리를 지킨 건 잘했지만, 저택에 남아 있던 소수의 인질을 챙기지 못했어.”

“어….”

“다음에는 모든 인질의 숫자를 세고, 한 명도 놓치지 말고, 전부 대피시키도록 해.”

“응. 아니, 네.”

루난이 대답하며 머리를 꾸벅였다.

“다음 3조.”

“예.”

버렌이 목과 허리를 바로 세웠다. 긴장했는지 눈을 빠르게 깜빡인다.

“훌륭했다.”

“어?”

“훈련에 늦게. 아니, 훈련에 참여 자체를 못 했음에도 밤을 새며 진법과 전략을 연구한 덕분에 거의 완벽한 광풍진을 운용하더군. 3조가 가장 부상자가 적은 건 버렌. 네 덕분이다. 고생했어.”

“아….”

칭찬을 들을 줄은 몰랐던지 버렌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입술을 꽉 깨문 걸 보니 감정이 요동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저희는 사도와의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너희 임무는 후방 침투와 차단이었다. 후방에서 들어오는 백혈교도를 막아 준 것으로 충분해.”

뒤쪽이 숫자는 적었지만, 사제와 주교의 수가 더 많았다. 그들을 차단해준 것만으로도 3조는 완벽하게 임무를 완수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마지막으로 1조.”

라온의 부름에 뒤에 숨어 있던 마르타와 1조는 찔끔 놀라서 어깨를 떨었다.

“너희는 최악이었다.”

라온은 그들을 보며 차가운 눈빛을 발했다.

“분노에 휩싸여 혼자 미쳐 날뛰는 조장. 그런 조장을 따라가며 파리처럼 흐느적대는 조원. 습격이 아니라, 정면에서 부딪쳤다면 분명 사망자가 나왔을 거야.”

“저, 저희가 잘못한 겁니다. 조장을 따라갈 실력이 안 되어서….”

1조 부조장이 앞으로 나오려고 할 때 라온이 손을 들어 올렸다.

“네 문제도 물론 있다. 하지만 조원을 신경 쓰지 않고, 발광을 한 조장의 문제가 가장 커. 마르타.”

라온의 부름에 마르타가 입술을 깨물고 앞으로 나왔다.

“네가 백혈교와 원한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건 임무. 네 원한보다 조원과 인질의 생명을 먼저 생각했어야 해.”

“…….”

마르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질책을 들었다.

“중앙으로 움직인 2조가 인질을 놓치고 간 것에는 너희의 책임도 있다. 1조가 진법을 세우고 확실한 공간을 만들었다면 모든 인질을 챙길 수 있었을 테니까. 1조 조장은 어떻게 생각하지?”

“…미안해.”

라온의 물음에 마르타는 모든 걸 인정하겠다는 듯 고개를 직각으로 숙였다. 어깨나, 목이 떨리지 않는 걸 보면 억지로 굽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음?”

“어….”

그녀가 저렇게 목을 굽히는 걸 처음 보았기 때문에 광풍단 전원이 눈을 부릅떴다.

“1조 조원들 역시 제 독단에 당황했을 겁니다. 소통하지도 않았으니, 전부 제 잘못입니다.”

고개를 들어 올리는 그녀의 눈빛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빛이 어려 있었다. 슬픔, 고통, 분노 혹은 감사. 여러 감정이 섞인 듯했다.

“잘못을 인정한다는 건가.”

“그래.”

“알랭 마을이라고 했었지?”

라온이 마르타와 눈을 마주하며 그녀가 10사도에게 외쳤던 마을의 이름을 꺼냈다.

“…….”

“네 복수가 우리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광풍단은 이미 한배를 탔다. 분명 다시 백혈교와 부딪치게 될 테지.”

그녀만이 아니라, 다른 광풍단원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언젠가 마음의 준비가 된다면 우리에게 네 사정을 말해줬으면 좋겠다.”

“알겠어.”

마르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뜬 뒤 고개를 끄덕였다.

“허억!”

“뭐, 뭐지?”

“와….”

또 예상외의 대답이 나오자 광풍단원들이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너도 하나는 잘했어.”

“뭐?”

“10사도가 나타났을 때 너희 조원을 구하려고 앞에 뛰어들었잖아.”

“어?”

“정말입니까?”

“그, 그건 아니야! 그냥 놈을 방해하고 싶어서 움직인 거야!”

1조 조원들이 돌아보자 마르타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고개를 저었다.

“뭐, 어쨌든 반성회는 이걸로 끝.”

라온이 마르타의 핑계를 무시하고, 일어나서 리메르처럼 손뼉을 쳤다.

“단주님은 시장에게 갔었나?”

“일이 전부 끝난 뒤 보고할 때 저와 함께 갔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가지 않았을 겁니다. 지부 일을 처리하느라 시장도 굉장히 바빴으니까요.”

버렌은 리메르 역시 노느라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을 거라 중얼거렸다.

“딱 좋군.”

라온이 옅게 웃으며 환자복을 벗었다.

“아직 회복이 안 됐는데 어딜 가려는 겁니까?”

“단주님이 오기 전에 시장을 만나야지.”

시장은 일만 해결되면 모든 것을 해준다고 말했었다. 능력 면에서 받을 건 다 받았으니, 이제 물질적인 걸 챙길 차례였다.

그 도박쟁이가 오기 전에.

-아니이이이! 밥 먹는다며!

라스의 칭얼거림은 일단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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