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83화 (183/653)

제183화

“저, 저기 부단주님.”

도리안이 옆으로 붙으며 제이나 왕녀가 있는 방을 힐끔 돌아보았다.

“저 싸가지. 아니, 저 왕녀가 발카르로 돌아가서 꼰지르면 전쟁 나는 거 아니에요?”

그는 이후의 일이 걱정되는지 라온의 손에 들린 계약서를 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절대 말 안 해.”

라온은 계약서를 팔랑거리게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예? 왜요? 아주 진창 당했는데?”

“저 여자 자존심 강한 건 너도 알고 있지?”

“당연하죠. 물건 안 팔았다고, 경매까지 쫓아와서 방해한 독종이잖아요!”

도리안은 그래서 걱정이 된다며 배 주머니를 쓱쓱 문질렀다.

“그래서야.”

라온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여자가 죽기 싫어서 지그하르트 방계와 호구 계약을 했다고 어디서 떠들고 다닐 거라 생각해?”

“아….”

“지금쯤이면 옆에 있던 이닐드가 그걸 들었는지 확인하느라 뺨이라도 치고 있을걸. 물론 그 녀석은 기절해 있었지만.”

그 말이 맞았는지, 방에서 무언가를 후려치는 듯한 찰진 소리가 들렸다.

“우어….”

도리안은 어처구니가 없는 눈으로 라온을 올려 보았다.

“그러면 그 계약서는 어떻게 쓰실 거예요?”

“이거? 이건 안 쓰는 게 제일 좋아.”

라온은 특수 계약서를 곱게 접었다.

“예? 왜요? 일방적으로 이득 볼 수 있는 기회잖아요.”

“이건 목줄이야. 그 왕녀가 우리를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목덜미를 잡아 둔 목줄. 앞으로 그 왕녀는 내가 어떤 지시를 내릴지 겁나서 나를 피하려고만 들걸.”

“아….”

“그래서 세 가지라고 한 거야. 두 가지 명령을 한 후 나머지 하나는 평생 안 쓰고 놔두는 거지.”

“으억….”

도리안은 그런 쪽으로는 아예 생각조차 못 했는지 입을 떡 벌렸다. 살짝 겁에 질린 듯했다.

-아, 아귀. 아귀이니라….

라스는 푸른 눈동자를 일그러뜨리며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이놈은 인간의 탈을 썼을 뿐 마계에 있는 아귀들과 다를 바가 없노라! 아니! 더 심해! 만족할 줄을 모르고 있다!

‘또 무슨 소리야.’

-이런 식으로 온 세상을 네놈의 노예로 만들려는 것 아니냐! 타고난 왕의 기질과 현명함이 아니었다면 본왕도 네놈의 노예가 되었겠지. 무서운 놈 같으니….

‘어, 음….’

-본왕은 마계의 군주. 누구의 밑에도 들어가지 않는 성격이니, 절대 넘보지 말도록.

라스는 목줄을 쥘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무슨 소리야. 네가 호구 1호인데.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능력치를 낳는 마왕의 배를 가를 수는 없어서 참았다.

“그런 생각은 대체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도리안이 계약서를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나랑 같은 나이라는 게 믿기질 않네.’

라온이 무언가를 결정하고 움직이면 항상 최선이자, 최고의 결과가 도출된다. 이젠 그의 무력보다 행동 방식과 심계가 더 놀랍다. 양파를 까듯 볼 때마다 새로운 사람이었다.

“네가 나보다 신기해.”

라온이 도리안의 배 주머니를 보며 피식 웃었다. 맨날 별거 없다면서 주문하면 다 나오는 녀석보다 신기한 게 어디 있겠는가.

“저요? 저는 평범 그 자체죠.”

“평범한 사람 다 죽었겠네.”

“진짜예요. 저처럼 평범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평범한 사람은 몽둥이나, 통나무, 바위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

“그건 생필품이라니까요. 그것들 다 쓸모 있었다는 건 부정하시지 못할 텐데요.”

“음, 그건 그렇지.”

맞는 말이다. 통나무도, 바위도, 몽둥이도 모두 쓸모가 있긴 했다. 특이하면서도 재밌는 녀석이다.

‘이제 오는군.’

뒤에서 들린 발걸음 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복도 끝에 있던 방에서 제이나와 이닐드가 비틀거리며 나오고 있었다.

“저기 그런데….”

알아서 올 거라 생각하고 위로 올라가려 할 때 도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아까 천장이랑 벽은 어떻게 흔드신 거예요?”

“간단해.”

라온이 오른발을 바닥에 댄 뒤 오러를 운용하여 떨기 시작하자, 그 진동이 벽과 천장으로 이어지며 복도가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다, 다리 떨기?”

“간단하지?”

그는 씩 웃으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와아….”

도리안은 진동이 멎어가는 벽과 천장을 보며 확실하게 다짐했다.

라온의 적이 되느니, 차라리 단칼에 죽겠다고.

‘무서운 분이야….’

*     *      *

라온이 위층으로 올라가자마자 힘이 실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열은 자세를 정비해! 다시 온다!”

목소리를 따라가 보니, 버렌과 3조 단원들이 소광풍진을 유지한 채로 몰려오는 백혈교도의 공세를 완벽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혈신의 이름 아래 죽어라!”

백혈교도는 죽어도 그냥 죽지 않고, 피의 주술 중 하나인 혈연을 터트렸다. 혈기가 깃든 뿌연 연기가 버렌과 3조를 덮쳤다.

“혈연이다! 호흡을 멈추고, 다섯 보 후퇴! 좌열은 연신, 우열은 정결의 자세를 취해라!”

버렌은 혈연이 퍼져도 당황하지 않았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지시를 내린 뒤에 달려오는 백혈교도를 망설임 없이 베었다.

“혈귀 놈들에게 지그하르트의 힘을 보여주어라!”

“우와아아아!”

“악귀들을 죽여라!”

버렌의 딱 들어맞는 명령 덕분에 3조의 단원들은 용기백배하여 백혈교도를 몰아쳤다. 몇몇 부상자가 보였지만 그리 심하지 않았다. 어렵지 않게 이 전투를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라온은 전투에 집중한 버렌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없을 때 광풍단을 맡을 사람은 역시나 버렌이었다. 녀석이 돌아오니 확실히 안정감이 들었다.

“안 도와주십니까?”

도리안이 백혈교도와 싸움을 이어가는 3조를 가리켰다.

“다 도와주면 저 녀석들은 언제 성장하겠어.”

실전은 무인이 성장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다. 생명의 위기라면 모를까. 이런 전투까지 참여하는 건 도와주는 게 아니라, 저 녀석들의 가능성을 죽이는 일이었다.

“로비 쪽으로 가자.”

버렌과 3조를 확인했으니, 이제 전방으로 침투한 1조를 확인할 차례였다. 후방보다 전방에 있는 백혈교도가 많았으니, 그쪽은 더 힘겹게 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르타도 마음에 걸리고.’

-확실히 소고기 소녀의 눈빛이 이상했었느니라.

‘그래. 원한이 있는 거야.’

침투 전에 보았던 마르타의 소름 끼치는 눈빛을 떠올리며 로비 쪽으로 향했다.

푸카악!

화령의 폭발 때문에 구멍 난 지붕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얼굴을 스칠 때 로비에서 살이 찢겨나가는 듯한 절삭음이 터져 나왔다.

마르타다. 그녀가 내지른 검이 백혈교도의 몸을 반으로 갈라버리는 소리였다.

“또, 또 어디 있어….”

마르타는 검은 머리와 하얀 피부는 탁한 피로 물들어 있었고, 눈동자에선 아까보다 더 지독한 살기가 피어났다.

“히이익….”

도리안은 그 귀기 서린 눈빛을 마주하지 못하고, 입을 막은 채 뒷걸음질 쳤다.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데….’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자신을 향한 살기가 아님에도 손등에 소름이 돋아 오를 정도였다. 보통의 원한이 아닌 것 같았다.

“아아아악!”

마르타는 짐승 같은 울음을 터트리며 백혈교도의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말이 투레질을 하듯 오러를 폭발시키며 주변을 휩쓸었다.

“젠장! 조장님을 도와!”

“진 유지는 포기한다! 조장님에게 시선이 쏠렸을 때 외곽을 공격해!”

조장인 마르타가 광분한 호랑이처럼 날뛰고 있었기 때문에 1조는 광풍진을 유지하는 대신 당황한 백혈교도를 하나씩 처리해 나갔다.

1조는 마르타의 광기 때문에 진을 운용하지 않고 있음에도 3조보다 더 빨리, 더 많은 백혈교도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으음, 본왕이 실수를 했군.

라스가 쩝 입맛을 다셨다.

-소고기 소녀에게 갔어야 했나. 꽤 마음에 드는 분노이니라.

‘분노….’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타의 검에 실린 건 지독할 정도의 분노다. 적을 인간이 아니라, 벌레처럼 여기며 혈해에 잠기고 있었다.

마르타의 검에 날아간 백혈교도의 숫자가 스물이 넘었다. 그녀는 허리를 베이고, 허벅지에 칼을 맞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이를 드러내며 백혈교도의 머리를 날렸다.

“조장을 따라가! 끝까지 보조해!”

“절대 물러서지 말고 싸워!”

1조는 싸움보다도 마르타를 따라가기 바빴다. 나름 미운 정이라도 들었는지 마르타가 최대한 다치지 않게 보조하면서 전투를 조율했다.

“저, 저건 못 말리겠죠?”

“그래.”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렸다가는 저 살기 짙은 칼날이 이쪽으로 날아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냥 둘 수는 없지.’

전투가 끝난 뒤에 잔소리를 좀 퍼부어줘야겠다. 그래도 정신을 차릴지는 모르겠지만.

*     *      *

“도망친 곳이 고작 거기야?”

리메르가 막다른 골목에 몰린 다리곤을 보며 검을 빙글 돌렸다.

“이익! 돌비르테….”

다리곤이 양손을 모으고 재빠르게 주술을 외우려 할 때 리메르의 손목이 부드럽게 휘었다.

콰아아아아!

그의 검날에 어린 푸른 기운이 무지개처럼 번지며 다리곤을 둘러싸고 있던 벽들을 모조리 무너뜨렸다.

“아아….”

바스러지는 벽을 보는 다리곤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벽을 타고 이동하는 주술이라니, 재밌는 능력이야.”

리메르는 무너진 벽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사람들을 빼 갈 수 있었지. 그렇지만 벽이 없으니까. 아무 의미도 없네.”

“이, 입 다물어라!”

“내 입은 우리 가주님도 못 다물게 했는데, 고작 네가?”

“이 노오오오놈!”

다리곤이 양손을 모으고 새로운 주술을 사용하려는 순간 리메르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아….”

다리곤은 주술을 다 외우지 못하고 어깨를 떨었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고통. 어느새 움직인 리메르의 검이 손목을 갈라버린 것이다.

“끄아아악!”

다리곤이 떨어져 나간 손목을 부여잡고 뒷걸음질 쳤다.

“사도급이 아니라면 너희들의 주술을 막는 법은 간단하지. 입을 다물게 만들든가, 혹은 손을 잘라버리든가.”

리메르는 바닥을 적시는 다리곤의 피를 밟으며 빙긋 웃었다.

“그 녀석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참 잘한단 말이야. 그 천재성은 나를 참 많이 닮았어.”

“끄윽….”

다리곤이 한 손으로라도 주술을 외우려고 했지만, 리메르는 그걸 봐주지 않았다. 그의 손목이 다시 한번 움직인 순간 다리곤의 왼쪽 팔뚝까지 땅에 떨어졌다.

“으으으….”

다리곤은 살벌한 양의 피가 뿜어지는 양쪽 손을 보며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고작 팔목 가지고 왜 그래.”

점차 다가오는 리메르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들거렸다.

“너희는 산 사람의 목에 구멍을 내고, 피를 빨아 먹잖아. 그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교지. 애교.”

“리메르….”

다리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다쳤다고 하더니….’

단전과 마나 회로가 망가졌다고 하더니, 조금도 약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광기 어린 눈동자와 가벼운 말투. 지그하르트의 광검이라 불리던 미친 엘프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자아, 그럼.”

리메르가 검을 역수로 잡은 뒤 다리곤의 허벅지를 내리찍었다. 바람의 오러를 운용하고 있었기에 허벅지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아아아아악!”

“납치한 사람들은 지하에 있던 게 다인가?”

“끄윽….”

“그들을 어디로 보내려고 했지?”

“…….”

이번에도 다리곤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 이래야 백혈교도지. 바로 답이 나왔으면 섭섭할 뻔했어.”

리메르가 히죽 웃으며 다시 바람의 오러를 운용했다. 허벅지에 박힌 칼날이 진동하자, 다리곤이 침을 질질 흘리며 전신을 떨었다.

“끄아아아악!”

“셀린느라는 여자는 믿지 마. 그쪽에는 내 제자가 갔거든. 절대 살아서 못 와.”

“후욱, 후욱….”

다리곤은 고통을 참는 듯 거친 숨을 뱉어내며 이를 악물었다.

“난 그 망할 년을 믿는 게 아니다.”

“오, 그 여자 때문에 여기가 들킨 걸 알았나 보네.”

“벌레 새끼도 아니고, 그걸 왜 모르겠냐.”

“그럼 뭘 믿고 그런 눈빛이지?”

리메르가 아직 희망을 가지고 있는 다리곤의 눈동자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지하에선 라온이 셀린느를 처리했고, 지상에선 마르타가 학살을 벌이고 있었다. 다 끝났는데, 다리곤이 왜 희망을 가지는 건지 모르겠다.

“너희는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했어.”

“뭐?”

“크흐흐흐. 오늘 오는 건 두 분이시다.”

다리곤이 피를 토하면서도 입이 쫙 찢어지는 미소를 지었다.

“그분들이 오셨으니, 네놈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1층에서 일순간 무시무시한 기운이 치솟았다.

*     *      *

마르타는 어깨와 허리, 허벅지에 길쭉한 상흔이 생겨난 것도 모른 채 검을 휘둘렀다.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죽인다.

백혈교는 모조리 죽인다.

오직 그 생각만이 머리에 가득 찼다. 다른 감정도, 다른 의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앞에 보이는 악귀들을. 12년 전. 마을의 담을 부수고 들어온 저 백색 악귀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이 영혼에 족쇄를 채웠다.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를 따라 베고, 베고 또 벴다.

적이 다섯이 있어도 들어가고, 열이 모여도 돌진해 칼을 휘둘렀다. 검술조차 잊어버린 듯이 그저 휘둘렀다.

얼굴이 베이든, 머리칼이 잘리든 신경 쓰지 않고, 백색 코트를 향해 끝없이 검을 내리쳤다.

이렇게 싸우면 안 된다는 걸 안다. 조장으로서 조원을 챙겨야 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백혈교를 본 순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진 본능처럼 백혈교의 목을 베었다. 그들의 탁한 피가 전신을 뒤덮을 때까지.

싸움이 계속될수록 오히려 힘이 넘친다고 생각할 때 로비 바닥을 적신 백혈교도의 탁한 핏물들이 스스로 움직이며 기이한 문양을 그렸다.

우우우웅!

문양의 중심에서 새하얀 빛이 돋아나며 오싹할 정도로 거대한 기운이 치솟았다.

“아….”

전투가 시작한 이후로 마르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빠득.

백색 코트의 왼쪽 가슴에 열 개의 구슬이 새겨진 걸 보고 이를 악물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흑단 같은 장발 뒤로 넘기고, 눈은 매처럼 날카로운 중년인이 턱을 치켜 올렸다.

놈이다. 그놈이다!

마을을 불태우고, 경비대의 피를 마시고, 엄마와 사람들을 납치했던 악마. 백혈교주의 제자 10사도였다.

“지그하르트의 어린 것들이 쳐들어온 건가.”

무심한 듯한 목소리 역시 그대로였다.

10사도가 느릿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손아귀에 사선으로 갈라진 상처. 저 손에 수많은 사람들이 핏물이 되어 죽어갔고, 저 손에 엄마와 사람들이 끌려갔고, 저 손에 마을이 잿더미가 되었다.

죽어도 잊을 수 없는 악귀의 손이었다.

고오오오!

10사도의 손에서 응집된 혈기가 폭발할 것처럼 이글거렸다.

“아….”

뒤에 따라붙은 광풍단원들은 10사도의 손에 모여든 막대한 기운에 질려 발목이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 개새끼야!”

마르타는 분노로 본능적인 두려움을 이겨내고 앞으로 뛰어들었다. 조원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저 10사도를 죽이기 위해서, 저놈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서 검을 내리칠 뿐이었다.

콰아아아앙!

10사도의 손아귀에서 솟아난 무시무시한 기운과 부딪치자마자 손목이 부러질 것처럼 꺾이고, 입에서 핏물이 치솟았다. 아버지가 주신 청운이 아니었다면 단숨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끄으으으!”

1초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온몸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버티고 싶지만 버틸 수가 없다. 힘의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났다.

‘또. 또 야….’

저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저 악마에게 죽는 사람을 보고 싶지 않아서 목숨을 걸고 수련했지만 실력 차이는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엄마가 살려준 목숨을 이렇게 허무하게 버리게 되었다.

찌지직!

손아귀에 힘이 빠진다. 뒤에 있는 조원들이라도 도망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힘도 없었다.

“아….”

“다시 봤어. 좋은 선택이었다. 마르타.”

청운검이 손목에서 떨어져 나가려 할 때 귓가로 라온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혼자서는 무리야.”

덤덤하지만 조금의 따스함이 깃든 듯한 음성이 가슴을 울린 순간 눈앞이 새빨간 불꽃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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