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화
“그건 아까 우리한테 준 핀이잖아.”
버렌이 라온의 손바닥 위에 올라간 붉은 핀을 보고 눈매를 좁혔다.
“위치를 찾을 수 있으니까. 가지고 있으라고 한 거 맞지?”
그가 주머니에서 핀을 꺼내서 손에 쥐었다. 다른 검사들도 핀을 꺼내놓았다.
“맞아. 내 오러가 들어가 있어서 너희들의 위치를 알 수 있지.”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어떻게 왕녀와 이닐드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는 건데? 그 둘에게는 핀이 없잖아.”
“있어.”
“어?”
“이, 있다고?”
“정말입니까?”
“그게 왜 왕녀님에게!”
있다고 하자 검사들만이 아니라, 마법사들도 눈을 부릅떴다.
“둘이 기절했을 때 옷에 끼워뒀지.”
라온이 피식 웃으며 꺼낸 핀을 다시 옷깃에 꽂아 두었다.
“대, 대체 왜?”
“어떻게 알고서?”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만약 내가 오마 중 하나고, 왕녀와 이닐드가 쓰러졌다는 걸 알면 분명 두 사람을 노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그걸 예측했다고?
“예측이라기보다는 아니면 좋고, 만약 납치가 일어난다면 놈들의 위치를 잡을 수 있으니까.”
“허어….”
“정말이지….”
라온의 덤덤한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리메르만 홀로 깍지 낀 손으로 뒤통수를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잠깐.”
조용히 듣고 있던 모렐이 손을 들어 올렸다.
“네가 핀을 꽂을 때 사용한 수는 신입 검사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하지만….”
“뛰어났다?”
이닐드를 압도하며 때려눕힐 때도 나름 놀랐지만, 지금은 그와 차원이 다를 정도로 경악스럽다. 저게 17살짜리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 녀석보다 더해….’
발카르에도 숨겨둔 어린 괴물이 하나 있지만, 무력은 따라가도 라온의 심계와 행동력은 절대 쫓지 못할 것 같았다.
“북멸왕께서 직접 키우시기라도 하는 건가? 저런 괴물이 어떻게 나타난 거지?”
“그럴 리가.”
리메르가 피식 웃었다.
“조금 도움을 주긴 했지만, 저 녀석은 혼자 힘으로 컸어. 내 손도, 가주님의 손도 벗어나서 스스로 성장했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잘 봐두는 게 좋을 거야. 지그하르트가, 아니 대륙의 역사가 라온에 의해서 새로 써질 테니까.”
그는 손을 빙글 흔들고서 회의장을 나갔다.
“역사라….”
모렐은 리메르가 나간 문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평소라면 비웃어주었겠지만, 이상하게 그의 말이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후우, 가자. 우리도 우리가 할 일을 해야지.”
그는 조금 지친 얼굴로 살라만의 마법사들을 데리고 회의실을 나갔다.
* * *
라온은 리메르와 광풍단원들을 데리고, 백혈교의 지부로 의심되는 곳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에 섰다.
“저깁니다.”
손가락으로 언덕 아래에 있는 고풍스러운 저택을 가리켰다. 포르반 시 북쪽에 있는 상인 가문으로 평소 선행으로 이름이 높은 곳이라고 했다.
상인 가문은 마차를 이용하기 좋으니, 사람들을 납치하기도 편했을 거다.
“저기가 백혈교의….”
마르타는 당장 달려갈 것처럼 거친 숨을 내뱉었다. 검은 눈동자에 어린 건 살기라는 단어로도 표현되지 않는 무언가였다.
‘생각보다 심각하네.’
본인이 죽더라도 칼을 날릴 기세. 아무래도 오늘 전투에서 마르타를 자세히 봐두어야겠다.
“저거란 말이지.”
리메르가 턱을 긁적이며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저길 그냥 칠 수는 없잖냐. 전부 백혈교는 아닐 거 아니야.”
“그냥 쳐도 됩니다.”
라온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울부짖는 진혼검을 움켜쥐며 대답했다.
“지하에 잡혀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백혈교도니까요.”
“어? 진짜?”
“예.”
울부짖는 진혼검이 말해준다. 저택 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백혼의 오러를 익히고 있는 백혈교였다.
“1조는 전방, 3조는 후방을 친다. 2조는 우측으로 침투해서 지하에 있는 인질들을 구해. 항상 광풍진은 유지하면서 움직이도록.”
“그럼 좌측은?”
“나와 단주님이 간다. 2조처럼 바로 아래로 내려가서 간부를 상대할 거다. 제가 셀린느를 맡을 테니, 단주님은 이동 주술을 사용한 간부를 맡아주세요. 그놈을 빠르게 제압해야 놈들의 도주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근데….”
리메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네가 단주 같지 않냐? 나 존재감이 너무 없는데?”
“원래 없으셨습니다.”
버렌이 코웃음을 치며 손을 저었다. 루난이 차분히 일어서고, 마르타는 닭살이 돋아오를 정도의 살기를 피워냈다.
“선공은 제가 날리죠.”
라온이 진혼검을 역수로 잡고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극성으로 일으킨 만화공의 기운을 진혼검이 가진 요기의 흐름에 끼워 넣었다.
화아아아아아!
요기를 담은 만화공 화령이 허공을 가득 수놓으며 저택의 중심에 적화의 폭격을 일으켰다.
* * *
셀린느는 중앙에 세 줄이 그어진 대주교의 코트를 입고 다리곤의 사무실로 향했다. 다리곤 역시 대주교의 코트를 입은 채 머리를 정돈하고 있었다.
“준비 끝난 지 한참 지났는데, 대체 언제 오는 거야?”
“곧 오실 거다.”
“그 어린놈에게 허리를 굽혀야 하다니, 속이 뒤집어지네.”
“말조심해라. 네 밑에 있었다고 해도 지금은 교주님의 제자다. 거기다 그분 혼자서 오시는 게 아니야.”
“뭐?”
“연수 차원에서 10사도께서 함께 오신다고 하신다. 몸가짐을 단정하게 해라.”
“그 깐깐한 인간? 빌어먹을!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셀린느가 아직 완벽하게 붙지 않은 팔을 주무르며 이를 바득 깨물었다.
“너는 여기서 저 둘을 지키고 있어라.”
다리곤은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뒤에 벽에 묶어둔 제이나 왕녀와 이닐드를 가리켰다.
“나보고 인질들이나 감시하라고?”
“그럼 네가 사도님을 모실 건가?”
“이익….”
셀린느는 인상을 찌푸리고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들을 이곳으로 모시고 올 테니, 절대 건방 떨지 말도록.”
“알아. 안다고!”
“다녀오지.”
다리곤은 머리 위로 백색 후드를 써서 얼굴을 완전히 감춘 뒤에 사무실을 나섰다.
“시발. 내가 왜 이 꼴이…윽!”
셀린느가 뜯겨나갔던 어깨의 상처를 매만지며 이를 갈았다. 다리곤에게 혈기를 받았는데도, 상처가 회복되질 않았다. 지독할 정도의 검흔이었다.
‘그 자식….’
라온 지그하르트. 그 망할 놈 때문에 이런 고통과 굴욕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죽일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놈과 관련된 모든 인간을 죽이고 피를 빨아 마시겠어.”
셀린느가 팔을 상처를 보며 복수를 다짐할 때였다.
콰아아아앙!
윗층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리고, 지진이라도 난 듯 지하 전체가 뒤흔들렸다.
“뭐, 뭐야!”
셀린느가 눈을 부릅뜬 채로 위를 보았다.
‘사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지부를 폐한다면 모를까. 사도가 다짜고짜 이 저택을 공격할 리가 없다. 지금 상황은 다리곤도 예측하지 못한 비상사태가 분명했다.
‘그러면… 아!’
윗층의 기운을 느낀 셀린느가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몇 시간 전에 직접 싸웠던 막강한 기운. 라온 지그하르트의 기세였다.
“그 미친놈이 왜 여기에!”
깜짝 놀라서 사무실을 나가려 할 때였다.
콰아아아앙!
두 번째 폭발음이 터지고,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시커멓게 그을린 먼지 속에서 태어난 이후 가장 큰 분노를 일으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백혈교 지부인가.”
“너….”
가라앉는 먼지 사이로 섬뜩한 붉은 눈이 번쩍였다.
“라, 라온 지그하르트! 네가 왜 여기에!”
무너진 천장 위에 서 있는 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씹어 먹고 싶었던 라온 지그 하르트였다.
* * *
라온은 당황한 셀린느를 보며 피식 웃었다.
“왜라니. 네가 알려줬잖아.”
“뭐?”
“겉옷은 걸쳤지만, 옷은 안 갈아입었네.”
손가락을 들어 셀린느가 입은 백혈교 코트 안쪽을 가리켰다.
“옷?”
셀린느가 콧등을 찡그리며 백혈교의 코트를 벗었다. 원래 입고 있던 옷의 끝단에 걸린 붉은 핀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뭐야!”
“이거랑 세트거든.”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옷깃에 꽂혀 있는 핀을 가리켰다.
“네 덕분에 백혈교 지부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어. 고맙다.”
“아아….”
셀린드가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면 네놈은 날….”
“그래. 그냥 보내줬지. 거기서 널 죽인다면 지부를 찾을 방법이 뚝 끊길 테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필요 없긴 했지만.”
라온은 벽에 걸려 있는 제이나와 이닐드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 동료는 지금 우리 단장님이 잡으러 갔으니까.”
“잘 났군. 아주 잘 났어! 하지만 네가 하나 모르는 게 있다.”
셀린느의 기운이 폭주하듯 치솟고, 어깨 위로 새하얀 기운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여기서 네가 뒤지면 다 끝난다는 걸!”
“글쎄.”
그녀가 혈공을 운용하려는 순간 라온이 태화보를 밟았다.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일보. 순식간에 공간을 격하고 셀린느의 앞에 이르렀다.
“무, 무슨!”
“네게 주어진 기회는 끝났다.”
“크윽!”
셀린느가 다급하게 공격에 쓸 혈기를 방어로 돌렸지만, 의미 없었다. 진혼검의 요기와 만화공의 정심한 기운이 어우러지며 타오른 샛노란 불꽃이 공간을 휩쓸었으니까.
화아아아아!
강대한 기운이 어린 칼날이 셀린느의 요기를 가르고, 그녀의 팔뚝을 또 한 번 찢어버렸다.
“꺄아아아악!”
어마어마한 고통에 셀린느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터트렸다. 단검에 베인 팔뚝에서 살벌한 양의 핏물이 흘러내렸다.
“어, 어떻게….”
“말했잖아.”
라온은 단검을 휘돌리며 찬 웃음을 흘렸다.
“아깐 봐줬다고.”
“다, 닥쳐!”
마지막에 본능적으로 팔을 뺐는지 셀린느의 팔은 완전히 잘리지 않았다. 다만 재생이 힘든지 팔을 붙이지 못하고 계속 핏물을 뱉어냈다.
“끄으으, 죽여 버리겠어!”
셀린느가 스스로 손바닥의 피부를 뜯어낸 후 양손을 모았다. 손아귀와 손목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중앙으로 모여들 며 어마어마한 기운이 끓어올랐다.
“밖을 보니, 잡혀 있는 사람의 숫자만 200명이 넘더군.”
라온은 셀린느가 뭉치는 기운을 보며 복도 쪽을 가리켰다.
“그 정도라면 죽여서 피를 마신 숫자 역시 200명 넘는다는 뜻이겠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널 살려둘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개소리! 죽는 건 너야!”
셀린느가 가득 모은 혈기를 앞으로 쏘아냈다.
쿠와아아앙!
수십 줄기의 혈기들이 덩굴처럼 꼬이며 공간을 뒤덮었다. 피할 곳도, 물러설 곳도 없어 시야 전체가 혈기의 파도로 가득 찼다.
찌직!
라온은 진혼검을 고쳐 쥐고, 만화공의 기운을 극성으로 운용했다.
우우우우웅!
진혼검의 요기가 허공에 노란 빛의 궤적을 만들어 준다. 혈기를 가를 수 있는 최적의 검로를 따라 만화공의 기운을 얹었다,
콰아아아아!
시뻘겋게 번쩍이는 칼날에서 솟구친 원망의 빛이 혈기의 광채를 완벽하게 갈랐다.
“이, 이건 말이 안 되는….”
찢겨나간 혈기 사이로 눈을 부릅뜬 셀린느가 보였다. 그녀는 왼쪽 가슴에 생겨난 거대한 구멍을 보며 탁한 핏물을 뿜어냈다.
“라, 라온 지그….”
셀린느는 라온의 이름을 다 뱉지도 못한 채 뒤로 넘어가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역시 백혈교를 상대할 때는 진혼검이 제일이군.”
라온은 셀린느의 핏물을 빨아들이는 듯한 진혼검을 쓰다듬어주었다. 제천검도 전설급 명검이지만, 백혈교를 상대할 때만큼은 진혼검이 최고였다.
“라온.”
문 쪽에서 들린 부드러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루난과 도리안이 와 있었다.
“인질 다 구했어.”
그녀는 임무를 마쳤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다친 사람은?”
“없어.”
“수고했어. 그럼 구출한 사람들을 저택 밖으로 보내줘.”
“응.”
루난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복도 쪽으로 향했다.
“그럼 저도 가보겠….”
“넌 남아.”
루난을 따라가려는 도리안에게 손을 까딱였다.
“예?”
“할 일이 있다.”
라온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제이나 왕녀를 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만날 때마다 짖는 개는 목줄을 걸어놔야지.”
* * *
짝. 짝.
누군가가 뺨을 치는 듯한 느낌에 제이나가 천천히 눈을 떴다.
“어?”
앞에 있는 건 세상에서 가장 꼴 보기 싫은 라온 지그하르트였다.
“너 뭐야! 네가 왜 내 눈앞에 있…어?”
제이나는 움직이려던 손이 무언가에 걸린 걸 보고 눈을 부릅떴다.
위를 보니, 손과 발이 벽에 박힌 족쇄에 묶여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 방 역시 처음 보는 곳이었는데,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천장과 벽이 뒤흔들리고 있었다.
“뭐, 뭐야! 여긴 어디야! 날 어떻게 한 거야!”
“여긴 백혈교의 지부다.”
라온은 손에 쥔 단검을 휘둘리며 턱짓했다.
“배, 백혈교의 지부?”
“그래. 네가 여기 있는 이유는 백혈교에게 납치당했기 때문이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주변을 보면 알잖아.”
바닥에 차오른 탁한 핏물과 시체가 된 셀린느를 가리켰다.
“그, 그럼 뭐 하고 있는 거야! 구하러 왔으면 빨리 이거 풀어!”
“내가 왜?”
라온은 차가운 눈빛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무, 무슨!”
“날 건드릴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찬 널 내가 왜 구해줘야 하냐고.”
“무슨 미친 소리야!”
“딱 좋잖아. 네가 여기서 죽으면 백혈교의 죄로 뒤집어씌울 수 있으니까.”
“미, 미친! 발카르가 그냥 있을 거 같아?”
“천장이 무너져서 죽으면 누가 알겠어.”
라온은 곧 무너질 것처럼 구멍 나고, 뒤흔들리는 천장을 가리켰다.
“왜, 왜 이래! 발카르와 지그하르트는 동맹이잖아!”
제이나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말만 동맹이지. 실제로는 견원지간이지. 너와 나도 그렇고. 납치되기 전까지만 해도 네 머릿속에 있는 건 날 어떻게 죽일지에 대한 것뿐 아니었어?”
“그, 그건….”
“그러니 잘 가라고.”
라온이 손을 흔들며 등을 돌렸다.
“잠깐! 사, 살려줘! 다시는 건드리지 않을게. 밖에서 봐도 모른 척하고,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제발!”
그녀가 발버둥을 치자, 천장과 벽이 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히이익!”
“그 말 정말이지?”
“그래! 그림자도 쳐다보지 않을 테니까! 빨리!”
“말투부터 마음에 안 드는데?”
“제, 제발 살려주세요! 시키는 건 다 할 테니까!”
“그 말 정말이지?”
라온이 빙긋 웃으며 옆으로 손을 뻗었다.
“특별 계약서.”
“어휴….”
도리안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배 주머니에서 금박이 씌인 계약서와 펜을 꺼내주었다. 녀석은 주면서도 다 있는 게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트, 특별 계약서?”
“알고 있지? 이거 너희 나라에서 만든 거니까.”
특별 계약서는 일반 계약서와 달리 마법의 힘이 깃들어 있어서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무조건 지켜야 했다.
“이게 좋겠네.”
라온은 계약서에 제이나 발카르는 라온 지그하르트가 원하는 일 세 가지를 무조건 들어준다고 적어놓았다.
“서명해.”
“이, 이런 내용에 어떻게 서명을 하라는 거야!”
“거야?”
“거야요….”
“시키는 대로 한다며.”
“하지만 이 내용은….”
“좋아. 네 목숨이 위협되는 일은 절대 시키지 않겠다고 추가하지. 그럼 됐나?”
“아….”
“싫어. 싫으면 그만 둬도 돼.”
라온은 아쉬울 게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계약서를 집어넣었다. 그는 스튜처럼 끓어오르는 천장을 가리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1분도 남지 않았으니까. 세상에 작별 인사나 하라고.”
“제, 젠장!”
제이나가 악을 지르고 손가락을 흔들었다.
“알겠어! 알겠다고! 서명할게!”
“서명할게?”
“서, 서명할 테니까…요.”
“탁월한 선택이야.”
“끄흑….”
라온은 흐느끼는 제이나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제이나는 손가락만 이용하여 계약서 서명 부분에 본인의 이름을 적었다.
찌이이잉!
계약서에서 금색 광채가 치솟으며 두 줄기 선이 피어나 라온과 제이나의 몸에 스며들었다. 만약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제이나의 심장에 강한 충격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런 섬뜩한 대가가 있었기 때문에 특별 계약서는 굉장히 비쌌고, 사용하는 경우도 흔치 않았다.
“그럼 이제 풀어줘야지.”
라온이 단검을 가볍게 휘두르자, 제이나의 몸을 억제하고 있던 수갑과 족쇄가 과자처럼 바스라졌다.
“흐윽….”
“이렇게 된 거 나도 비밀 하나를 밝혀주지.”
제이나가 아릿한 통증을 주는 손목과 발목을 움켜쥐고 있을 때 라온이 단검을 집어넣고, 몸을 일으켰다.
“비밀? 무슨 비밀?”
“뭐?”
“무, 무슨 비밀이요?”
“네가 경매장에서 샀던 나비 있잖아.”
라온이 등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거 내가 가져갔어. 미안하다. 아, 사실을 밝히니까. 속이 시원하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더 어이가 없는 건 그가 나가자마자 무너질 것 같았던 천장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거다.
“아, 아아….”
제이나는 그제야 당했다는 걸 깨닫고 손을 부르르 떨었다.
“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이제 원수 같은 그 이름을 외쳤다.
“라온 지그하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