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화
백혈교의 대주교 셀린느는 바닥에 떨어진 본인의 팔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뭐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라온이라는 아이를 보자마자 참고 있던 흡혈 욕구가 미친 듯이 샘솟았다. 특별한 힘이 그의 피에 깃들어 있다는 뜻. 그 피를 마시고, 더 강해지고 싶었다.
다리곤도 기회가 된다면 죽이라고 했으니, 바로 매혹의 주술을 읊조리며 라온에게 다가갔다.
거기까지는 완벽했다. 그는 품을 열어주었고, 눈동자는 풀렸으니까.
하지만 심장에 혈수를 박아넣으려는 순간 라온의 눈동자에 시퍼런 빛이 돋아나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단검을 내질러왔다.
다급하게 혈기를 응축시켰지만, 단검은 혈기를 가볍게 찢고, 자신의 팔을 갈라버렸다.
뚝뚝.
깔끔하게 베어진 팔뚝에서 피가 줄줄이 흘러내렸지만, 여전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크으….”
셀린느가 새파래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더럽게 아파.’
백혈교의 연공법인 백혼의 오러에는 정신과 육체의 고통을 감소시키는 공능이 있건만, 그 통증 감소 능력이 사라진 듯 지독한 아픔이 머리를 울렸다.
“어, 어떻게 내 주술을 벗어난 거야?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무슨 짓은 네가 했지.”
‘저 단검인가?’
지금 보니 라온이 쥔 단검에서 흉폭할 정도의 요기가 휘몰아쳤다. 단검에 어린 기운이 회복을 방해하고, 계속 고통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단검이 주술을 풀어주었군.”
셀린느가 단검을 노려보며 인상을 구겼다.
“글쎄?”
라온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에 쥔 단검을 휘돌렸다.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지 표정이 평온했다.
자신이 뿜어낸 혈기 앞에서 저리 여유롭다니, 뒤에 있는 바보 둘과는 차원이 달랐다.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나?”
셀린느가 호흡을 고르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을 뻗었다. 백혼의 오러가 열화처럼 퍼져나가며 잘려 나간 손이 스스로 날아와 팔에 달라붙었다.
치이이익!
하얀 김이 흐르며 단검에 베인 팔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백혼의 오러가 가진 재생의 공능이었다.
“그리 여유를 부렸다간….”
셀린느가 도로 붙은 팔로 주먹을 쥐며 금빛 눈동자를 번쩍였다.
“그 모가지에 구멍이 뚫릴 거야!”
* * *
라온은 다시 붙은 셀린느의 팔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재생의 공능이로군.’
백혈교의 연공법, 백혼의 오러는 트롤 이상의 재생력을 부여해준다고 한다.
팔을 붙이는 모양새를 보니, 저 여자의 계급은 대주교 이상인 것 같았다.
다만 얼굴빛을 보면 완벽하게 회복한 건 아니다. 진혼검의 요기가 계속해서 지독한 고통을 주고 있을 것이다.
-추한 힘이로구나.
라스는 우습다는 듯 콧방귀를 끼었다.
-남의 피를 갈취하여 강해지는 힘이라, 더럽고 조잡해. 본왕이라면 당장 얼려서 저 추잡한 것의 핏물을 모조리 빼버렸을 것이야.
녀석은 보기 싫으니 빨리 제거하라며 손목을 툭툭 쳤다.
“으헉!”
“허어….”
이제야 정신을 차린 도리안과 자티스가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배, 백혈교!”
두 사람 역시 앞의 여자가 백혈교의 간부라는 걸 알고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부, 부단주님!”
“괜찮으니, 물러서 있어.”
라온은 두 사람에게 손을 저어주고, 백혈교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팔을 붙이는 걸 보니, 대주교쯤 되나?”
“그걸 알고도 여유를 부려? 내게 시간을 준 걸 후회하게 될 거다.”
“글쎄?”
지금 공격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번 임무가 저 여자를 죽이는 게 아니라, 실종을 해결하는 것이었으니까. 최대한 정보를 빼내야 한다.
“죽여주지!”
대주교가 양손을 모은 채 알 수 없는 언어로 주술을 외운다.
고오오오!
그녀의 전신이 하얗게 물들고, 짙은 꽃향기가 골목 전체를 휘감았다. 향을 맡자마자 머리가 멍해진다. 조금 전의 매혹보다 훨씬 강력한 주술이었다.
‘어차피 소용없지만.’
불의 고리가 공명하는 순간 향기가 사르르 녹아내린다. 자신에게 저 정도 매혹술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맑은 눈빛으로 대주교를 굽어보았다.
“대, 대체 어떻게….”
대주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떨었다.
“고작 매혹술이 다라면 시간을 준 의미가 없네.”
라온이 차게 웃으며 진혼검을 역수로 쥐었다.
“끝내자.”
땅을 박차고, 혈기로 가득한 공간에 뛰어들었다. 몸이 짓눌리는 것 같았지만, 불의 고리와 진혼검이 혈기를 모조리 밀어냈다.
“이놈!”
대주교가 눈을 부라리며 수도를 내뻗었다. 당황한 상태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투로. 대주교라는 계급에 설 만한 혈수공이었다.
다만 주술에 비하면 조금 처진다. 앞의 대주교는 무학보다 주술을 파고든 것 같았다.
고오오오!
라온은 불의 고리를 전력으로 휘돌리며 대주교의 연달아 펼치는 혈수공에 집중했다. 혈수공은 백혈교 간부의 기본 무학이니, 제대로 보아둔다면 앞으로의 싸움에 큰 도움이 될 거다.
“죽어!”
흥분한 대주교는 라온이 봐주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계속해서 수도를 뻗어냈다.
골목 전체가 그녀의 손날에서 피어난 기운에 터져나갔지만, 라온은 자그마한 상처도 입지 않았다.
‘빠르고 강맹하면서 요사스럽군.’
단순하지만 그래서 강한 무학이었다.
“쥐새끼 같은 놈! 언제까지 도망만 칠 거냐!”
“그럼 그만두지.”
라온이 뒤로 빼려던 왼발에 다시 힘을 주고 앞으로 나아갔다.
“헉!”
당황하여 물러나던 대주교를 쫓아 오른손 진혼검을 내리그었다.
“이익!”
대주교가 눈을 부라리며 혈기를 가득 모은 수도를 뻗어왔다.
챠아앙!
검과 손날이 격돌했건만 쇳덩이끼리 부딪친 듯한 소리가 울렸다.
찌지직!
하지만 호각은 아니다. 원망으로 타오르는 진혼검의 맹렬한 요기가 대주교의 혈기를 찢으며 들어갔다.
“이익!”
대주교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라온은 오른손에 힘을 빼지 않은 채 왼손을 재빠르게 놀려 붉은색 핀을 대주교의 상의 끝단에 꽂아 넣었다.
뻐어어억!
핀이 제대로 꽂힌 걸 확인하자마자, 몸을 틀어 그녀의 허리를 걷어찼다.
“크윽!”
대주교가 신음을 흘리며 벽에 부딪쳤다.
푸카아악!
라온은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돌진해 진혼검으로 그녀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징그러운 빛의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끄아아악!”
대주교는 도망치기 위해서 진혼검이 박힌 어깨의 살을 뜯어내고 옆으로 빠져나갔다.
“죽어버리겠어!”
그녀가 손가락을 세워 앞으로 내뻗자, 손톱의 끝에서 치솟은 하얀빛이 섬광처럼 쏘아졌다. 검기와도 같은 기운을 손가락에서 뿜어내는 혈지공이었다.
고오오오!
라온은 이번에도 그 기술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혈지공의 흐름을 읽은 뒤 진혼검을 그었다.
치이이잉!
반원을 그리며 뻗어나간 요기의 칼날이 혈지공의 기운을 모조리 찢어발겼다.
“아직 안 끝났어!”
대주교가 끝장을 보겠다는 듯 계속해서 혈기의 선을 쏘아냈지만 진혼검이 뿌리는 요기의 벽을 뚫어내지 못하고 모조리 녹아내렸다.
“대, 대체….”
대주교는 당황한 듯 뒷걸음질 쳤다. 라온은 그녀를 압박하듯 그만큼 앞으로 나아갔다.
“오지 마!”
“여유 부리지 말라더니, 결국 그 수준인가?”
라온이 차게 웃으며 턱을 모로 틀었다.
“예상대로 백혈교가 포르반 실종 사건의 주역이었군.”
“예, 예상대로?”
“이런 추잡한 일을 벌이는 건 너희뿐이니까.”
“닥쳐!”
“난 왜 공격했지? 쉽게 피를 마실 수 있다고 생각했나?”
“닥치라고!”
대주교가 혈지공을 쏘아낼 때 앞으로 뛰어들었다. 손을 미처 빼지 못한 그녀를 향해 진혼검을 사선으로 베었다.
푸카악!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 검흔이 돋아나며 탁한 핏물이 허공을 뒤덮었다.
“끄아아악!”
대주교는 비명을 지르며 상처를 감싸 안았다.
“너희 지부는 어디에 있지? 납치한 사람들은 살아 있나?”
“끄으윽….”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다가 벽에 등을 기대고 멈춰 섰다.
“조, 좋다…. 여기서 끝을 보자. 너만큼은 죽여주지.”
대주교가 광기에 차오른 눈빛을 발하며 양손을 모아 삼각형을 그렸다.
우우우웅!
중얼거리며 외우는 주문이 허공을 퍼져나가자, 삼각형에서 시뻘건 빛이 뿜어지며 어마어마한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큭! 뭐야!”
그 기운이 터지기 직전 그녀가 등을 대고 있던 벽에 허연 구멍이 돋아나며 나선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젠장! 다리곤! 뭐 하는 짓이야!”
그 소용돌이는 주문을 외우던 대주교를 빨아들이고, 동그랗게 말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젠장! 내 이름은 셀린느다. 너는 내가 죽인다! 라온 지그하르트!”
셀린느가 스스로 이름을 밝히며 악을 지르고 나서 구멍이 완벽하게 닫혔다.
“뭐야. 도망쳤어?”
뒤에서 경쾌한 바람과 함께 가벼운 목소리가 들렸다. 리메르였다.
“아쉽게도 단주님을 보고 도망친 모양입니다.”
상황으로 보니 대주교가 아니라, 그녀의 동료가 리메르를 보고 도망칠 구멍을 만들어 준 것 같았다.
“음? 아쉬운 표정이 아닌데?”
리메르는 라온의 가라앉은 눈빛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런가요.”
라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말대로다. 딱히 아쉬움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더 큰 걸 위해서 일부러 놓아줬으니까.
“부, 부단주님!”
“괜찮으십니까?”
벽에 딱 달라붙어 있던 도리안과 자티스가 뛰어왔다.
“괜찮아.”
손을 젓고서 바닥의 혈흔을 살피는 리메르에게 다가갔다.
“예상대로 실종 사건의 뒤에는 백혈교가 있었습니다.”
“뭐, 그렇겠지.”
리메르가 알고 있었다는 듯 주홍색 핏물을 보며 쩝 입맛을 다셨다.
“이 정도면 대주교에서도 중급 이상인데, 압도하다니, 너 또 강해졌냐?”
“주술 위주로 힘을 쌓았는지 그리 강하지는 않았습니다.”
셀린느라는 여자의 주술은 강력했지만, 무력은 별 느낌 없었다.
“허….”
“그게 강하지 않았다고?”
도리안과 자티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백혈교의 대주교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 너뿐일 거다.”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그래도 아쉽게 됐군. 잡았다면 본부의 위치를 알 수 있었을 텐데.”
“힘들 겁니다. 놈들에게는 고문이 통하지 않으니까요.”
백혈교도들은 광신도답게 고문이 먹히지 않는 독종들이다. 전생에서 백혈교도를 며칠 동안 고문을 했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긴 걔네는 지독하지. 그러니 아직 백혈교 총단이 밝혀지지 않았고.”
“예. 총단은 모르죠. 다만….”
라온이 옷깃에 꽂아둔 붉은 핀을 만지며 옅게 웃었다.
“포르반의 백혈교 지부가 어디에 있는지는 곧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 * *
콰아아앙!
셀린느가 하얗게 물든 손을 휘두르자, 이중으로 설치한 벽이 가루가 되어 무너졌다. 라온이 진혼검으로 가볍게 막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위력이었다.
“씨이이이이발!”
그녀는 라온에게 당했던 상처를 손톱으로 쥐어뜯으며 악을 질렀다.
“아파! 아프다고! 통증이 사라지질 않아!”
백혼의 기운을 계속 운용하고 있어도 상처가 아물지 않고, 살을 지지는 듯한 고통이 계속되었다.
“다리곤! 어떻게 좀 해봐!”
“좀 진정해라.”
다리곤이라 불린 노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다가왔다.
“날 왜 소환한 거야! 놈을 죽였으면 이 고통도 없었을 텐데!”
“리메르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대로 있었다면 잡혔을 거야.”
“크윽….”
셀린느가 이를 바득 갈며 손톱으로 벽을 긁자, 벽이 푸딩처럼 갈라져 뭉개졌다.
“부수지 좀 마. 이 방은 계속 써야 한다고.”
다리곤은 혀를 차고서 셀린느의 상처를 살폈다.
“지독하군.”
대주교급인 셀린느의 오러라면 이미 모든 상처를 아물게 만들어야 하건만 검흔에 깃든 기이한 힘이 재생을 방해하고 그녀에게 화상 같은 통증을 안겨주고 있었다.
“요기. 그것도 꽤 지독한 요기가 스며들어있다. 지우려면 한참 걸리겠어.”
“그러니까 그놈을 죽여야 해. 무조건!”
셀린느의 눈동자에서 소름이 돋아 오를 정도의 살기가 치솟았다.
“내가 죽일 거야! 살을 뜯고, 뼈와 피를 갈아 마실 거라고….”
“라온이라는 놈을 죽인다고 사라질 상처가 아니다. 오히려 원한이 깃들어 평생 지워지지 않을 수도 있지. 거기다….”
그는 셀린느의 상처에 혈기를 주입해주고서 몸을 돌렸다.
“곧 그분들이 오신다.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마치도록.”
“크으, 젠장! 젠장!”
셀린느가 악을 지르며 땅을 내리쳤다. 다리곤의 사무실이 무너질 것처럼 뒤흔들렸다.
“그러게 내가 정보부터 모으라고 하지 않았나. 괜히 식욕만 앞서서….”
“닥쳐! 그놈을 보면 네놈도 피를 빨 생각부터 했을 테니까!”
“그 정도인가.”
“후욱, 그놈은 내 꺼야. 이렇게 당하고 넘어갈 수는 없어! 어떻게 해서든….”
“당하기만 한 건 아니다.”
“뭐?”
“네가 그 어린놈에게 찢기는 동안 이쪽도 계획에 성공했으니까.”
다리곤이 손가락을 튕기자,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새하얀 로브를 입은 남자가 들어와 기절한 두 남녀를 내려놓았다.
라온에게 당한 후 치료소에 입원해 있던 이닐드와 제이나 왕녀였다.
“치료소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직접 가서 잡아 왔지. 이 둘을 데리고 간다면 이득도 보통 이득이 아니다. 발카르 국왕이 미쳐 날뛸 거야. 지그하르트에 전쟁을 걸지도 모르지.”
“모렐이 마법 아티팩트를 설치해 두었을 텐데?”
“당연히 제거한 후 데리고 왔다. 내가 너처럼 아마추어인 줄 아나?”
비웃음을 흘리듯 다리곤의 주름진 입매가 가늘게 올라갔다.
“그분께서 허락하신다면 이닐드를 줄 테니, 마시고 그 상처를 회복해라.”
“능구렁이 같은 영감.”
셀린느는 못 당하겠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분노도 가라앉은 듯 눈동자의 금빛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다만 그 둘 모두 이닐드와 제이나의 옷에 끼워진 핀이 붉게 번들거리는 걸 보지 못했다.
* * *
라온은 본래 도둑 길드에 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리메르와 함께 시청으로 향했다.
남아 있던 모렐과 복귀한 검사, 마법사들을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일단 적의 정체는 밝혀졌다.”
라온은 회의실의 소리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기막을 친 뒤에 회의실 단상 위로 올라갔다.
“어?”
“정말입니까?”
“이렇게 빨리요?”
“오오!”
광풍단만이 아니라, 모렐과 살라만의 마법사들도 깜짝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시청이 몇 달을 뒤져도 찾지 못한 걸 몇 시간 만에 밝혀냈으니, 그들이 경악하는 건 이상한 게 아니었다.
“예상한 사람이 꽤 있을 텐데, 납치의 주범은 백혈교다.”
백혈교라는 말을 하며 셀린느의 피가 묻은 천을 앞으로 꺼냈다. 생물의 핏물 같지 않은 탁한 빛에 사람들의 시선이 흔들렸다.
“기분 나쁜 색깔….”
“백혈교!”
“역시 그놈들이었군.”
“크윽….”
“지독한 놈들!”
광풍단과 살라만은 육황의 무력단체답게 오마 중 하나인 백혈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투지를 불태웠다.
다만 그 이상으로 지독한 살기를 일으키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고오오오!
마르타. 지옥의 불꽃 같은 검은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오싹할 정도의 살기를 일으켰다. 이 회의실에 있는 모두가 그녀를 돌아볼 정도로 사나운 기세였다.
-소고기 소녀가 왜 저러는 것이냐.
‘백혈교였나.’
라온이 마르타의 눈동자에서 타오르는 귀화를 보고 눈매를 좁혔다.
지금까지 너무 악바리처럼 굴어서 단순히 성격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그하르트에 들어오기 전 백혈교에게 당했던 것 같다.
“그 피는 어떻게 구했고, 백혈교와는 어디서 부딪쳤지?”
모렐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셀린느의 피가 묻은 천을 가리켰다.
“부딪쳤지?”
“부, 부딪쳤습니까. 크윽.”
라온이 뒷말을 따라 하자, 모렐이 이를 악물고 존댓말을 흘렸다.
“도둑 길드를 찾으러 가는 길에….”
라온은 셀린느와 싸우고 그녀가 도망친 것까지 모두 말해주었다.
“대, 대주교를 베고, 도망치게 만들었다고?”
“이제 막 검사가 된 사람이….”
“허어….”
모렐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를 떨었고, 살라만의 마법사들 역시 마른침을 삼켰다.
“너라는 놈은 대체….”
버렌 역시 당황했는지 평소처럼 반말을 내뱉었다.
“…….”
“백혈교….”
루난과 마르타는 피에 젖은 천을 지그시 바라만 보았는데, 그 감정은 너무도 달랐다. 별 느낌 없이 보는 루난과 달리, 마르타는 당장에 씹어 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그렇지만 아쉽군.”
모렐이 고개를 돌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놈들은 나타나지 않을 거다. 아무리 백혈교가 미쳤다고 해도 지그하르트와 발카르에 정체를 들키고도 움직일 놈들은 아니야.”
그의 말이 맞다. 놈들은 납치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야 하니, 이제 빠질 준비를 할 것이다.
다만 이번의 경우는 달랐다.
“이번에는….”
콰앙!
라온이 말을 하려고 할 때 회의실 문이 거칠게 열리고 치료소에 다녀온다던 자티스가 들어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그가 손을 바르르 떨며 바로 말을 이었다.
“치료소에 있던 제이나 왕녀님과 이닐드 님이 사라지셨습니다!”
“뭐?”
“어?”
왕녀와 이닐드가 사라졌다는 말에 모두가 벌떡 일어섰다.
“치료소에 있던 치료사들만이 아니라, 기사와 마법사들이 기절한 것처럼 잠에 빠졌고, 왕녀님과 이닐드 님만 감쪽같이 사라지셨습니다!”
“말도 안 돼! 아티팩트에선 아무런 반응도….”
“아티팩트는 두 분이 계시던 침상 위에 있었습니다!”
자티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아귀에는 두 개의 목걸이와 반지가 있었다.
“젠장! 당했어!”
“이, 이런!”
모렐과 마법사들은 벌떡 일어나서 주먹을 말아쥐었고, 광풍단 검사들 역시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짝!
모두가 당황하여 혼이 반쯤 빠져 있을 때 정신을 일깨우는 손뼉이 울렸다.
“진정하세요.”
“지금 진정하게 됐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어떻게 해서든 왕녀님을 찾지 않으면 이 마을 전체가 불바다가 될 거야! 지그하르트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괜찮습니다.”
라온은 평소와 같이 담담한 눈빛으로 모두의 시선을 받았다.
“왕녀와 이닐드가 어디로 납치되었는지.”
옷깃에 끼워둔 붉은 핀을 빼서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만화공의 기운을 일으키자, 핀이 스스로 떠올라 방향을 가리켰다.
“도망친 대주교가 어디에 있는지.”
라온은 입을 떡 벌린 사람들을 보며 옅게 웃었다.
“전부 알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