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80화 (180/653)
  • 제180화

    리메르는 도시 중앙에 있는 첨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포르반 전체를 내려보았다.

    “귀찮지만 어쩔 수 없나.”

    시장의 말을 들어보면 실종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단원들에게 일 시켜놓고 도박장에서 놀 때가 아니었다.

    ‘오마는 확실해. 백혈교냐, 아니냐의 문제지.’

    하는 짓거리를 보면 오마 중 백혈교와 비슷했다. 다만 세상에는 워낙 미친놈들이 많아서 한쪽으로 확정 짓는 건 위험했다.

    ‘누가 되었든 도망치기 전에 잡아야 해.’

    지그하르트와 발카르가 온 걸 확인했으니, 놈들도 지금까지처럼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도망칠 가능성이 높으니, 그 전에 찾아야 했다.

    “후우….”

    리메르가 눈을 감았다. 그의 주변을 맴도는 푸른 바람이 실타래처럼 풀리며 포르반 전체로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바람의 정령술과 오러가 어우러진 기예였다.

    주변에 한정되던 감각이 시곗바늘처럼 길게 솟구쳐 도시의 방위 하나를 끝까지 뒤덮었다.

    상세한 것을 느끼기 힘들고, 오러와 정신력 소모가 심하지만, 소란이 일어난 곳의 위치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버렌은 정해진 곳만 딱딱 돌아다니네. 마르타는 지시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움직이고, 루난은 지금 자는 거야? 아니지?’

    광풍단원이 무엇을 하는지 하나하나 살피고 있던 그가 감은 눈을 번쩍 떴다.

    “라온?”

    가장 믿고 있던 라온이 상상도 못 한 곳에 있었다.

    “네가 왜 거기 있어!”

    나도 일하는데!

    *     *      *

    포르반은 관광 도시답게 다양한 도박장이 있었다.

    가장 좋은 도박장을 말하라고 하면 사람마다 의견이 갈리겠지만, 가장 많은 돈을 따고 싶다고 한다면 모두가 한 입으로 ‘오크의 욕망’으로 가라고 외쳤다.

    오크의 욕망은 두 가지로 특별한데 포르반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높은 배율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곳에 가면 빈털터리가 되어서 나오던가, 벼락부자가 되어 나오던가 둘 중 하나였다.

    물론 대부분이 쪽박을 쳤고, 대박을 치는 건 극소수였지만, 오늘은 그 극소수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와아아아!”

    “또 땄어! 또 3배로 땄다고!”

    “어떻게 한 번을 안 잃지?”

    “계속 이긴 건 아니야. 상대 패가 높을 때마다 귀신같이 피할 뿐이지!”

    “미쳤구만. 운빨이 장난이 아니야.”

    “한두 번 해야 운이지. 저건 실력이야. 실력! 진짜 도박꾼이라고!”

    본인의 판에만 관심을 가지는 진성 도박꾼들이 구석 테이블에 몰려들어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환호를 지르고 있었다.

    “진짜 부럽다. 저 정도면 한 달에 한 번 터지는 대박 수준인데….”

    “캬아, 이대로 빠져도 집 하나는 사겠네.”

    “돈도 돈인데, 딴 걸 그대로 지르니까. 판이 장난 아니게 커지고 있어. 무슨 어린 친구가 저리 배포가 크지?”

    그들이 주목하는 포커 테이블의 중심에는 제복을 벗고, 여행객 복장을 한 라온이 앉아 있었고, 그의 앞에는 칩이 언덕처럼 쌓여 있었다.

    “저, 저분이 저렇게 도박을 잘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자티스는 라온의 앞에 쌓인 칩을 세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건 별거 아니에요. 전에는 카멜룬 지하 카지노에 가서도 다 털었다니까요.”

    “정말요?”

    “네. 그쪽의 싸가지 왕녀. 아니! 제이나 왕녀님도 거기서 털려서 지금까지 성질내는 거잖아요.”

    도리안은 싸가지라고 하자마자 황급하게 본인의 입을 때렸다.

    “말했듯이 저희 부단주님은 못 하는 게 없어요. 귀신같다니까요.”

    “와아….”

    자티스는 도리안이 제이나를 싸가지로 불렀다는 것도 듣지 못하고, 멍하니 라온을 바라보았다. 무력과 지혜에 이어 저런 재주까지 가지고 있다니, 자신도 모르게 감탄이 터졌다.

    다만 도리안이나 도박꾼들의 생각과 달리 라온은 포커에 재주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그가 돈을 계속 따는 이유는 딱 하나. 음식에 미친 분노의 마왕 덕분이었다.

    -저 노인네 풀하우스다. 이번 판은 죽어라.

    라온에게만 보이는 라스가 허공을 노니며 도박판에 앉은 상대의 패를 모조리 읽어주고 있었으니,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었다.

    ‘한 끗 차이네.’

    라온은 짧게 혀를 차고서 패를 버렸다.

    “죽어.”

    “윽!”

    “끄응….”

    죽는다고 하자마자 우측에 앉은 노인과 좌측에 앉은 청발의 미녀가 가는 신음을 흘렸다.

    지금까지의 반응을 보면 이 둘과 앞의 딜러까지 전부 도박장에서 붙인 전문가들이었는데, 셋이 합심을 해도 이기질 못해서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상태였다.

    -확실하게 기억해라. 구슬 아이스크림 5개 세트에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 세 가지다.

    ‘물론.’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노의 마왕을 부리는 대가로 너무 싸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난 약속은 지키잖아.’

    -지이이이이랄! 네놈이 무엇을 해준다고 해놓고 제대로 된 적이 없느니라! 그 검을 만들 때도 돼지 통구이를 못 먹지 않았더냐!

    ‘그건 천재지변이….’

    -네놈이 막을 수 있는 천재지변이었느니라! 이번에도 약속을 어기면 다시는 네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니라.

    ‘알겠어. 확실히 지킬게.’

    라스를 달래듯이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이리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노동력이 사라지면 곤란했다.

    “그, 그럼 다음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딜러의 이마에도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전 판부터 도박장 하루 매출이 왔다 갔다 하니, 그도 죽을 맛인 것 같았다.

    -다녀오겠노라.

    딜러가 카드를 뿌리고, 교환을 끝내자마자 라스가 기다렸다는 듯 움직였다.

    -계집은 풀하우스, 노인네는 플러시이니라.

    ‘이번에는 질러야 할 때네.’

    라온이 덤덤한 표정으로 카드를 확인했다. 숫자가 같은 네 장의 카드. 포카드였다.

    “올인.”

    테이블 위에 있는 언덕 수준의 칩을 모조리 밀어 넣었다.

    “또 전부 넣었어!”

    “대박….”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로티플이라도 나온 건가?”

    도박에 미친 구경꾼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판이 어떻게 돌아갈지를 기대했다.

    “도, 도련님. 여기서 멈추는 것도….”

    “아직이야.”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우린 도박하러 온 게 아니잖아.”

    “아! 맞다!”

    도리안이 눈을 치켜떴다. 지금까지 포커에 너무 몰입해서 도박하러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후우, 잠시 숨 좀 고르겠습니다.”

    “대체 뭘 먹었길래 그렇게 배포가 커요? 심장이 떨려서 못 참겠네.”

    딜러가 감탄사를 흘리고, 옆에 앉은 여성이 다리를 꼬며 농염한 미소를 지었다. 시선을 끄는 행위. 즉, 작업을 친다는 뜻이었다.

    “북쪽에서.”

    라온은 두 사람에게 시선을 주는 척하며 감각으로는 우측에 있는 노인을 살폈다. 그의 손이 카드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이질적인 소리가 들리는 순간 팔을 뻗었다.

    “동작 그만. 바꿔치기냐?”

    노인의 손목을 움켜쥐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뭐, 뭐야! 놔!”

    “언제까지 그런 허접한 수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어.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즈, 증거 있… 끄아아악!”

    라온이 손목을 비틀자, 노인의 소매에서 판에 있는 것과 똑같은 형태의 카드들이 쏟아져 나왔다.

    “증거 여기 있네.”

    바닥의 카드 중 조금 전 바꿔치기한 다섯 장을 위로 올렸다. 뒤집으니, 라스의 말대로 플러시가 나왔다.

    “플러시는 좋은 패지. 근데 이건 어떨까.”

    노인이 바꿔치기 한 패를 뒤집었다. 무늬가 똑같으며 숫자가 연속으로 이어지는 카드 다섯 장. 스트레이트 플러시였다.

    “너도 알고 있었지?”

    “그, 그게….”

    “모를 수가 없잖아. 이렇게 패를 짠 게 넌데.”

    딜러에게 살벌한 시선을 보내자, 그가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스트레이트 플러시! 플러시를 스트레이트로 바꾼 거네!”

    “저 새끼 타짜였어? 나 매번 저놈한테 다 빨렸는데!”

    “딜러랑 타짜랑 한패라고? 시발! 오크의 욕망이 타짜를 쓰다니!”

    “다 사기였잖아!”

    도박꾼들이 악을 지르자, 도박장의 모든 게임이 멈추고, 테이블이 뒤집히며 난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파괴, 난동, 분노! 좋구나!

    라스는 오랜만에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았다며 히죽거렸다.

    -이게 네놈이 바라던 모습이냐?

    ‘아니.’

    라온은 고개를 젓고서 이 소동을 즐기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손님.”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말끔하게 넘긴 깔끔한 인상의 청년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크의 욕망을 운용하는 지배인 켄트라고 합니다. 게임에 문제가 일어났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전부 이쪽이 잘못했다는 듯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 시켜놓고 모른 척이야?”

    라온은 코웃음을 치며 손을 저었다.

    “됐으니까. 돈이나 가져와. 저 칩의 세 배를 줘야 하는 건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다만 액수가 액수이니, 위에서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만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허튼짓하진 않겠지?”

    “이렇게 많은 눈이 있는데 무슨 짓을 하겠습니까.”

    “좋아.”

    고개를 끄덕이고 지배인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도리안과 자티스는 멍하니 그 뒤를 따라갔다.

    “소란을 일으키게 해서 죄송합니다. 대신 여기 있는 손님 모두에게 은화 50개짜리 칩을 드리겠습니다!”

    지배인과 함께 온 도박장 직원이 칩을 뿌린다며 테이블 위에 은색 칩을 올려놓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동을 부리던 도박꾼들이 걸신들린 듯 달려와 칩을 챙겼다.

    라온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지배인실로 들어갔다. 넓은 사무실이지만 가구는 그리 많지 않았고, 덩치가 큰 장정들이 석상처럼 벽에 붙어 있었다.

    철컥!

    도리안과 자티스까지 사무실에 들어오자 뒤에 서 있던 덩치 하나가 문을 잠갔다.

    “후우….”

    지배인이 등을 돌렸다. 조금 전 부드러운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악귀가 어린 듯한 서늘한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너 이 새끼. 어디서 보냈어. 엘프의 계곡이야? 거인의 발자국이야! 아니면 새로 연 고양이의 젤리냐?”

    “도박장 이름들이 참 유치하네. 고양이 젤리라니.”

    라온은 지배인이 말했던 도박장의 이름들을 읊으며 피식 웃었다.

    “너 여기가 도둑 길드가 보호하는 곳이라는 걸 알고 깝친 거냐? 쥐도 새도 모르게 뒤지고 싶어? 앙?”

    지배인이 손짓하자, 병풍처럼 서 있던 덩치들이 움직였다. 위협하듯 주먹을 풀고, 어깨를 돌렸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신경 안 쓰나?”

    “그 개돼지들에게는 사료를 뿌려놨거든. 도박에 미친 놈들이라 너희가 시체가 되어 나가건, 살아나가건 신경도 쓰지 않을 거다.”

    “참 다행이야. 마음껏 패도 문제없는 쓰레기들이라.”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미친놈이!”

    “어쨌든 여기가 도둑 길드 소속이라는 거지? 그럼 제대로 찾아왔네.”

    “제대로 찾아온 건 네 제삿날이고! 뭣들 하냐! 저 새끼들 죽여!”

    지배인이 손가락을 겨누자, 덩치들이 땅을 박차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말이 필요 없으면 나야 편하지.”

    라온이 도리안에게 손을 뻗었다.

    “몽둥이. 좀 작은 거.”

    *     *      *

    “그러니까 너희들 중에서도 실종자가 많다는 거지?”

    “예에! 그렇습니다! 사, 상당히 많았습니다.”

    지배인은 흘러내리는 쌍코피를 닦지도 못한 채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옆으로는 피투성이가 된 덩치들이 낙엽처럼 널려 있었다.

    “실종 때의 상황은?”

    라온은 피가 덕지덕지 묻은 몽둥이로 땅을 찍으며 물었다.

    “끄윽, 그게….”

    가볍게 내리찍은 몽둥이가 돌로 만든 바닥을 파고드는 걸 본 지배인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소, 솔직히 잘 모릅니다. 함께 길을 걷고 있다가도 정말 갑자기 사라지니까요. 누가, 언제, 어떻게 했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다만?”

    “주변에서 사람이 사라지면 그때마다 소름이 끼치는 기분이 들었다는 증언이 좀 있었습니다.”

    “소름이 끼친다라….”

    라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본인에게 영향이 닿지도 않았는데, 소름이 끼친다면 마기나 요기 혹은 혈기처럼 좋지 않은 기운이 분명했다.

    “단순하게 관광객이나, 행인만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밤사이에 한 가족 전체가 사라진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것도 너무 자연스럽게….”

    “자연스럽다고?”

    “예. 문이나, 창문을 뜯어낸 흔적도 없고, 반항한 흔적도 전혀 없이 사람만 사라진 경우도 몇 번 있었습니다.”

    지배인은 맞아서 그런 건지, 실종이 무서워서 그런 건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시청에서 그런 말은 해주지 않았는데.”

    “그 돈만 밝히는 놈들이 실종에 관심이나 있겠습니까. 몇 번 이야기해도 들어 먹질 않았습니다.”

    그는 보고를 올려도 시장에게 닿기 전에 끊긴다고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시청에도 인신매매와 관련 있는 자가 있는 것 같았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실종이 이 정도 규모로 퍼질 리가 없지.“

    이런 실종 사건이 일어난 지 3달이 지나고 나서야 지그하르트에 지원을 요청했으니, 반응이 상당히 느린 편이다. 시청에 있는 누군가가 중간에 계속 방해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은폐하기에는 시청만 한 곳이 없었으니까.

    “도둑 길드는 어디에 있지?”

    “도, 도시 서쪽에 녹음서리라는 다루가 있습니다.”

    “다루?”

    다루는 전통 과자와 차를 파는 찻집이다. 도둑 길드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암호는?”

    “그….”

    지배인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다.

    “푸른 차와 붉은 차 중에 붉은 차를 달라고 하면 됩니다.”

    “그거 피를 보자는 뜻이잖아. 아직 덜 맞았네.”

    “히익! 정말입니다! 그게 암호에요.”

    라온이 몽둥이를 쥐고 일어서려 하자 지배인이 손을 마구 저으며 머리를 박았다.

    “저, 정말 솔직히 말씀드리면 암호도 필요 없을 겁니다. 가자마자 알아볼 테니까요.”

    “흐음….”

    그 말이 맞다. 정보력이 뛰어난 도둑 길드의 특성상 자신이 도박장을 여러 의미로 거덜 냈다는 걸 알고 먼저 공격하든, 머리를 숙이든 할 것이다.

    “알겠다.”

    라온은 몽둥이에 묻은 피를 털어낸 뒤 도리안에게 돌려주었다.

    “아 또 피!”

    도리안은 인상을 찡그리며 남은 피를 슥슥 닦고서 배 주머니에 넣었다.

    “와아….”

    자티스는 아직도 적응 안 되는지 헛바람을 흘렸다.

    “가, 가시는 겁니까.”

    “가야지. 그 전에 받을 건 받고.”

    라온이 모은 네 손가락을 까딱였다.

    “금화부터 내놔. 칩의 세 배로.”

    “아어….”

    일말의 희망을 가졌던 지배인의 표정이 창백하게 굳었다.

    *     *      *

    라온은 도리안과 자티스를 데리고 도박장에 나와 도둑 길드가 있는 서쪽으로 향했다.

    “도, 도둑 길드를 찾으려고 하신 거였군요.”

    자티스가 볼을 긁적이며 다가왔다.

    “이런 일은 윗대가리보다는 밑바닥에 있는 자들이 더 잘 알고 있으니까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종 사건 같은 건 따로 호위를 두는 편인 귀족들보다 서민, 그것도 이런 뒷골목에서 사는 하층민에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도둑 길드라면 시청에서 모르는 정보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둑 길드가 의뢰를 받을까요?”

    도리안이 오크의 욕망을 가리키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금화도 거덜 내고, 지배인이랑 가드를 곤죽으로 만들었는데, 칼부터 날아오는 거 아닐지….”

    “도둑 길드도 저 꼴이 되고 싶지 않으면 의뢰를 받아야지. 내가 사기 친 것도 없잖아.”

    이번 일에서 자신이 잘못한 건 없다. 도박에서도 술수를 쓴 것도, 먼저 공격한 것도 저쪽이니까.

    -양심도 없는 놈! 본왕이 움직였지 않느냐!

    ‘너야 나한테만 보이잖아. 그건 사기가 아니라, 내 능력이지.’

    -끄응.

    ‘화내지 말고 참아. 아이스크림이 기다리고 있다고.’

    -윽! 너어어란 놈은 정말….

    라온이 인상을 찌푸린 라스를 밀어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에는 엄청 시원시원하게 움직이시네요.”

    “급하니까.”

    예상대로라면 이번 일의 원흉은 오마 중 하나 백혈교다. 그 미친놈들을 막으려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힘들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서라도 빨리 처리해야 했다.

    “실종자를 줄이려는 그 노력! 감동했습니다!”

    자티스가 갑자기 두 손을 모은 채 눈동자를 빛냈다.

    “라온 님은 욕을 먹더라도,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시는 거군요!”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도망치기 전에 잡고 싶을 뿐….”

    “겸손까지! 정말이지 기사의 귀감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배우겠습니다!”

    그는 감탄했다며 부담스러울 정도로 깊게 고개를 숙였다.

    “어, 뭐….”

    라온이 뭐라 대꾸를 할지 고민할 때였다.

    꺄아아아악!

    바로 옆 골목에서 여자의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순식간에 기감으로 위치를 파악한 뒤 벽을 넘어 소리가 들린 장소로 향했다.

    “끄흐흡!”

    로브를 입은 건장한 남자 세 명이 입에 재갈을 물린 여자아이를 보자기에 집어넣고 있었다. 아이는 살려달라는 듯 다리를 마구 흔들었다.

    “이런 젠장!”

    “빨리 처리해!”

    세 남자 중 가장 가까이 있던 장발의 장한이 단검을 꼬나쥐고 달려왔다.

    뻐억!

    라온은 찔러오는 단검을 가볍게 피한 뒤 장발 남자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살짝 쳤음에도 남자는 기절하여 바닥에 축 늘어졌다.

    ‘이놈들은 아니야.’

    오러는커녕 육체만 조금 단련한 동네 건달 수준이다. 이런 놈들이 이번 실종 사건의 배후일 리 없었다.

    “저 자식들!”

    “이런 대낮에 납치를 하다니!”

    뒤늦게 따라온 도리안과 자티스가 달려가 당황한 두 놈을 때려눕혔다.

    “괜찮니?”

    도리안이 보자기에서 여자아이를 꺼내주었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찬란한 적발과 서리처럼 새하얀 피부 그리고 영롱한 금빛 눈동자가 어우러져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소녀였다.

    “고, 고맙습니다.”

    외모만이 아니라, 목소리에도 매력이 넘쳤다. 새벽이슬이 나뭇잎을 촉촉이 적시듯 가슴을 울리는 음성이었다.

    “아, 아냐.”

    “아, 아닙니다….”

    도리안과 자티스는 무언가 홀린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 절 구해주셨죠.”

    소녀가 이쪽으로 다가오며 고개를 들었다. 금색 눈동자가 시선을 쭉 빨아들였다.

    “저, 정말 고마워요.”

    소녀가 걸음을 걸을 때마다 얼굴이 확대된 것처럼 크게 보이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당장 아이를 껴안고 위로해주고 싶다는 감정이 치솟았다.

    ‘이게 내 생각이라고?’

    절대 아니야.

    암살자로 살아온 자신이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위로부터 한다는 생각을 가질 리 없었다.

    우웅.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 등 뒤에서 미약한 진동이 일었다. 진혼검. 적을 느꼈을 때만 반응하는 요검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백혈교!’

    라온이 본능적으로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고오오오.

    여섯 개의 고리가 공명하며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들었다.

    이제야 여자아이의 얼굴이 제대로 보인다. 아름다운 건 여전하지만 끼워 맞춘 듯한 불쾌한 느낌이 드는 기이한 얼굴이었다.

    ‘후우….’

    정신을 차렸다는 티를 내지 않고, 도리안과 자티스를 따라 눈동자를 탁하게 풀었다.

    속을 드러내지 않고, 표정을 관리하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덕분에 살았어요.”

    코앞까지 다가온 소녀의 눈빛이 한층 더 반짝인다. 지금까지 맡지 못했던 오묘한 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치이잉!

    다시 한번 머리가 멍해지려 했지만 회전하는 불의 고리가 그 탁기를 지워버렸다.

    “아, 아니다.”

    라온은 소녀의 매혹에 완벽하게 빠진 것처럼 어눌하게 발음하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무서웠어요.”

    소녀가 한 발 더 다가왔다. 팔을 내밀면 닿을 거리에서 안아달라는 듯 손을 내뻗었다.

    “아….”

    그녀의 의도대로 팔을 벌렸다. 진혼검의 진동이 더 거세졌다. 모른 척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고마워요.”

    안아주기 위해 허리를 숙였을 때 소녀의 눈동자가 오싹할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날 위해 죽어줘서.”

    그녀가 새하얗게 빛나는 손으로 심장을 찔러왔다.

    후우웅!

    대비하지 않았다면 피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와 강맹한 기운이었지만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왼쪽 가슴에 그녀의 수도가 닿기 직전 진혼검을 뽑았다.

    치이이잉!

    기다렸다는 듯 부드럽게 뽑혀 나온 붉은 칼날에서 샛노란 요기가 불을 뿜었다.

    촤아아아악!

    백색과 황색의 기운이 나선으로 꼬인 순간 하얀 피를 뿌리는 팔뚝 하나가 치솟았다.

    “꺄아아아악!”

    소녀는 잘려나간 팔을 부여잡고, 괴수와도 같은 비명을 터트렸다. 팔뚝에서 하얀 물감을 탄 듯한 탁한 핏물이 흘러내렸다.

    “역시 백혈교였군.”

    “부, 분명 주술에 빠졌는데 어떻게….”

    라온은 진혼검에 묻은 더러운 피를 털어내며 차게 웃었다.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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