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부단주님. 저라고 아무거나 다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도리안이 배 주머니를 쓰다듬으며 쩝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계약서 있어? 없어?”
라온이 있으면 빨리 달라며 손을 까딱였다.
“아, 있긴 하죠.”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 손을 넣고 꼼지락거리자 빳빳한 계약서 한 장이 튀어나왔다.
“펜이랑, 책받침도 필요해.”
“그것도 있긴 한데….”
녀석이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고, 펜과 책받침 하나를 꺼냈다.
“고맙다.”
라온은 펜과 책받침을 받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시죠? 저라고 항상 다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에요!”
“알아.”
“안 믿는 눈치네요.”
도리안은 입맛을 쩝 다시고, 옆에 놓아둔 몽둥이의 피를 쓱쓱 닦은 뒤에 배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 거대한 몽둥이가 작은 배 주머니에 들어가는 모습에 구경꾼들이 한 번 더 감탄을 터트렸다.
“우와아….”
“지그하르트가 여간내기가 아니네.”
“그러게 말이야. 이닐드를 꺾는 어린 검사에, 저리 특이한 검사까지….”
“북방의 거인이 잠에서 깨어난 건가?”
“하긴 지그하르트가 움직이면 아무도 못 막지.”
방금 보여준 모습들이 놀라웠기 때문인지 구경꾼들은 모두 발카르는 잊고, 지그하르트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라온은 구경꾼들의 호들갑을 들으며, 빠르게 계약서를 작성했다.
‘이 정도면 됐겠지.’
내용은 간단했다. 이번 임무가 끝날 때까지 살라만은 광풍단의 지시에 복종을 해야 하며 폭력이나 욕설은 물론이고, 반말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적었다. 물론 광풍단 쪽에서도 목숨을 걸 정도로, 과한 요구는 할 수 없다는 부분도 작성했다.
“보시죠.”
“꼭 계약서까지 작성해야 했나?”
모렐은 계약서를 받아들고 인상을 구겼다.
“일은 확실한 게 좋으니까요.”
“우리 부단주는 나처럼 설렁설렁하지 않아. 조심해야 할걸?”
리메르는 계약서를 힐끔 살피고선 헤죽 웃었다.
“자랑인가?”
“자랑이지. 네 제자는 이빨 뽑힌 채로 엎어졌는데, 내 제자는 저리 당당히 서 있잖아.”
그는 이닐드와 라온을 차례로 가리키며 씩 웃었다.
“끄으윽….”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던 모렐이 참지 못하고 이를 바득 갈았다. 제자가 비교당하는 건 그에게도 큰 충격이 되는 모양이다.
“계약서엔 별문제 없네. 빨리 서명이나 하셔.”
“시끄럽다.”
모렐은 어깨를 쳐서 리메르를 밀어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젠 백이 넘는 구경꾼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되다니….’
지그하르트의 콧대를 납작하게 누를 기회라고 생각하여 결투를 제안한 건데 이런 상황이 될 줄은 몰랐다. 왕녀와 이닐드가 나대고, 자신이 한 말이 있었기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후우….”
모렐은 다시 계약서를 살핀 뒤에 계약서에 서명했다.
“거봐. 어차피 할 거면서.”
“입 좀 다물어!”
“예이!”
리메르가 모렐을 조롱할 때 라온은 제이나 왕녀와 이닐드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닐드는 육체적 충격에, 왕녀는 정신적 충격 때문에 아직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치료소로 보낼 겁니까?”
“예. 다행히 대로 중간에 유명한 치료소가 있습니다.”
자티스가 이닐드를 업으며 도로 중간쯤에 있는 4층 건물을 가리켰다. 그는 진심으로 패배를 인정했는지 얼굴에 구김이 없었다. 오히려 말을 걸어줘서 고맙다는 듯 웃었다.
“그렇군요. 다녀오세요.”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머니에서 붉은색 핀 두 개를 꺼냈다. 재빠르게 손을 놀려 이닐드와 제이나 왕녀의 옷에 핀을 끼워 넣었다.
“흐음….”
“라온!”
업혀서 내려가는 이닐드와 제이나 왕녀를 보고 있을 때 종이가 팔랑이며 날아왔다.
“서명 다 됐다!”
“쯧.”
뒤를 돌아보니 리메르는 히죽 웃고 있었고, 모렐은 똥 씹은 표정으로 바닥의 돌을 걷어차고 있었다.
“오늘의 굴욕은 잊지 않을 거다.”
“예. 잊으시면 안 되죠. 그 굴욕을 만든 당사자시지 않습니까.”
“끄윽, 너….”
“단주님.”
라온은 손을 떠는 모렐을 뒤로 하고 리메르에게 다시 계약서를 건넸다.
“계약서는 단주님이 챙기셔야죠.”
“아, 귀찮아. 네가 챙겨.”
리메르는 계약서를 받지 않고, 깍지 낀 손으로 뒷머리를 감쌌다.
“단주님! 라온이 다 해놓은 밥상에조차 앉지 않겠다는 건 심하지 않습니까!”
“하는 일 더럽게 없네. 교관 때보다 더해.”
“으윽….”
버렌과 마르타의 차가운 눈빛에 리메르가 찔끔 어깨를 떨고서 계약서를 챙기려고 했다.
“아닙니다. 제가 가지는 게 낫겠네요.”
라온이 고개를 젓고 계약서를 품에 넣었다.
“단주님이 가지시면 저쪽에 팔 거 같아서 안 되겠어요.”
지금까지의 리메르를 본다면 금화 몇 개만 준다고 하면 계약서가 아니라, 계약서 할아버지도 팔 사람이었다.
“가자. 이 난리가 났으니, 시장도 준비를 끝냈을 테지.”
라온은 시청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광풍단과 이젠 하인이 된 살라만도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따랐다.
“아….”
시청 앞에 홀로 남은 리메르는 빈손을 보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젠장! 계약서를 파는 방법도 있었구나!”
* * *
끈적하고 붉은 물기가 바닥에 가득 깔린 지하. 복도 양옆으로 줄지어 세워진 철장에서 사람들의 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14살이나 되었을까. 앳된 얼굴의 적발 소녀가 그 비린내 나는 복도를 지나간다. 철장에서 흐느끼는 신음을 즐기듯 콧노래를 부르며 복도의 끝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지하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산뜻한 분위기의 방 안에는 회색 머리칼을 부드럽게 늘어뜨린 인자한 외모의 노인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예정대로 지그하르트와 발카르가 도착했어.”
소녀는 친구라도 되는 듯 노인에게 말을 놓으며 책상에 걸터앉았다.
“정확한 날이로군. 준비는 어떻게 됐지?”
노인은 소녀를 보지 않고, 책에 시선을 둔 채 물었다.
“뭘 물어. 절반은 마셨고, 절반은 그대로 놔뒀지.”
“곧 사도께서 오실 거다. 이동에 차질이 없도록 확실히 계산하도록.”
“알겠어. 그런데 재밌는 일이 있었어.”
적발의 소녀는 작은 손을 펼치며 말을 이었다.
“지그하르트와 발카르가 오자마자 결투를 벌이더라고.”
“결투?”
“싸운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그하르트의 어린 검사와 이닐드가 붙었어.”
“이닐드가 이겼겠군.”
“아니.”
아니라는 말에 처음으로 노인의 시선이 소녀를 향했다.
“지그하르트의 어린 검사가 그야말로 압도했어. 검도 아니고, 몽둥이로 다 때려 부쉈지.”
“음? 몽둥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거기에서 그 금발의 꼬마가….”
소녀는 라온과 이닐드의 전투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진 내기까지 모든 내용을 말해주었다.
“셀린느.”
노인이 눈매를 좁히며 소녀를 불렀다.
“그 어린 검사에 대해 조사해 봐.”
“왜? 어차피 곧 떠날 거잖아.”
“우리와 지그하르트는 계속 부딪칠 수밖에 없다. 미래의 강대한 적이 될 놈이라면 미리 알아봐야겠지. 그리고 혹 기회가 된다면….”
“죽이라는 거지?”
셀린느라 불린 소녀가 두 손가락을 모아 목을 그었다.
“리메르나 모렐이 있다면 접근하지 말고, 정보만 모아. 그놈이 혼자 있을 때만 움직이도록. 마스터가 아니라면 네 주술을 눈치챌 수 없으니까. 어렵지 않을 거다.”
“그거야 쉽지.”
그녀는 아름다움과 귀여움이 어우러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빙긋 웃었다.
“지그하르트의 피 맛은 어떨지 궁금하네.”
“많이 먹어보지 않았느냐.”
“그 꼬마는 달라. 재능도 재능이지만 얼굴도 기깔나게 잘 생겼거든.”
“흥, 쓸데 없기는.”
노인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왕녀와 이닐드가 쓰러졌다고 했었나?”
“그래. 기절해서 치유실로 데리고 갔지.”
“흐음….”
노인은 턱을 긁적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거 일석이조가 될 수도 있겠군.”
* * *
포르반의 시장 오위스트는 풍채가 좋아 신뢰감을 주었다. 다만 얼굴에서 땀이 계속 흘러내려 불안한 인상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자, 잘 오셨습니다.”
오위스트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축이며 고개를 꾸벅였다.
“포르반의 시장 오위스트라고 합니다.”
“지그하르트 광풍단의 리메르라 합니다.”
리메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마주 인사했다.
“앉으시죠.”
시장의 손짓을 따라 리메르가 중앙에 앉고, 남은 사람들은 뒤에 섰다.
“지그하르트의 광검을 뵈어 정말 영광….”
“제가 잘나기는 했지만, 임무가 급하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죠.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리메르는 임무 이야기부터 하자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아, 알겠습니다. 저희 포르반은 본래 교역과 관광으로 먹고사는 곳이다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실종 사건이 조금 많은 편입니다. 다만 세 달 전부터 그 수치가 차츰 늘어났고 최근 2주 동안 실종신고만 100명이 넘게 들어왔습니다.”
포르반이 작지 않은 도시라고 해도 2주 만에 100명이 넘는 실종 신고가 들어온 건 이례적인 일이다. 시청을 믿지 않는 사람도 많으니, 실제 실종은 그보다 많을 가능성도 있었다.
“조사를 위해서 위장한 도시의 경비대와 용병에 기사까지 투입했지만, 저희를 비웃듯이 실종은 계속되었고, 투입한 용병이나 기사마저 사라졌습니다.”
오위스트는 뺨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면서 제발 해결해달라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렇게 실종이 많은 것 치고는 도시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던데요?”
리메르가 시장실 밖으로 보이는 도시를 살피며 입을 뗐다. 그의 말대로 오늘 본 포르반에 그림자는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실종에 대해 알리지 않았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조용히 있던 버렌이 눈매를 좁히며 앞으로 나왔다.
“마, 말씀드렸듯이 저희는 교역과 관광으로 살아가는 도시입니다. 실종이 급속도로 늘었다고 소문이 나면 관광객이나 상인이 찾아오지 않으니, 아, 알리지 않았습니다.”
오위스트도 그게 문제라는 걸 아는지 땀을 두 배로 흘렸다. 거의 비를 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게 말이 되는 겁니까! 빠르게 알려서 피해를 줄여야 하지 않습니까!”
“시, 실종에 대해 알려진다면 피해는 소수가 아니라 도시 전체가 받게 되어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지이랄! 무얼 어쩔 수가 없다는 거야!”
“버렌, 마르타.”
버렌만이 아니라, 마르타도 따지려고 할 때 라온이 손을 올려 두 사람의 시야를 막았다.
“단주님께서 이야기 중이다.”
“이걸 보고 어떻게 참으라는 거야!”
“포르반이라고 하면 관광이 떠오를 정도로 도시의 이미지라는 건 각인이 쉽다. 만약 대량 실종에 대한 이야기가 떠돈다면 관광객들은 다른 관광지를 찾아갈 것이고, 그에 따라 교역량도 줄어들게 될 거야.”
라온은 두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들을 수 있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되면 시장의 말대로 피해가 도시 전체로 번질 거다. 실종이 아니라, 일자리를 잃고 굶어 죽는 사람이 대량으로 쏟아질지도 모르지. 거기다 그걸 알린다고 실종이 사라진다는 보장도 없어. 2주간 100명을 데리고 갈 정도로 미친놈들이라면 문을 부수고라도 납치를 해갈 거다.”
2주 동안 100이 넘는 사람들을 납치할 정도라면 이미 인간의 거죽을 벗어던진 괴물들이다. 실종 사실을 알려서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집 안에 숨어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갈지도 모른다.
“도시의 시민을 생각한다면 이 사건을 빠르게 처리해주는 게 제일이다.”
“저, 정확합니다!”
라온의 말이 끝나자마자, 오위스트가 박수를 치며 일어섰다.
“이 사건이 도시 전체로 퍼져나간다면 실종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일들이 연쇄적으로 번지게 될 겁니다! 저, 저희 도시의 대체재는 정말 많으니까요!”
그는 감탄이 실린 눈빛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대체 저분은 누구십니까? 토, 통찰력이 보통이 아니십니다.”
“크흠, 우리 광풍단의 부단주이자 제 제자입니다. 보통이죠.”
리메르가 헛기침을 하며 본인을 가리켰다.
“광검님의 제자셨군요. 어쩐지 총명함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오위스트가 라온을 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대단하군.’
시간이 주어진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지만, 이 짧은 순간에 그 깊이까지 닿다니, 라온이라는 남자의 무력은 몰라도 통찰력은 범인을 한참 뛰어넘었다.
“놈들에 대해 알게 된 건 없습니까.”
“놈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있고 없고도 가리지 않구요. 도둑이 물건을 훔치듯 아무도 모르게 사람을 납치해갑니다. 흡사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실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조사를 나갔다가 실종되었다는 용병과 기사들의 무력 수위는 어떻게 되죠?”
“용병은 익스퍼트 하급 정도였고, 기, 기사는 익스퍼트 중급과 상급이었습니다.”
오위스트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익스퍼트 상급이 실종 되었다라….”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음, 그 이상의 정보는 없습니까? 놈들의 무학을 봤다든지, 외모나, 복장을 봤다든지.”
“죄송합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평범한 인신매매단은 아니겠어.”
리메르가 턱을 긁적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실제로 인신매매하는 놈들도 이 사이에 더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골머리가 아픕니다.”
오위스트가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니네. 오마일 가능성도 있겠어.”
“오, 오마요?”
리메르가 오마라는 단어를 꺼내자 시장의 볼이 파들파들 떨렸다.
“제, 제발 해결해주십시오! 이거 해결만 된다면 의뢰비는 물론이고, 포상으로 원하시는 건 다 해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오위스트가 고개를 확 숙였다. 그는 계속 본인의 안위보다는 도시 전체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외모에서 풍기는 느낌과 다르게 도시만을 생각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원하는 거 다 해준다는 말 잘 기억하고 계세요.”
리메르가 씩 웃으며 일어섰다.
“가자!”
그는 시장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 그런데 살라만 분들은 왜 다시 오셨습니까?”
시장은 라온의 뒤편에 서 있는 모렐과 마법사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경 쓰지 마세요.”
라온이 살라만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희 하인이니까.”
“허억! 그, 그게 무슨!”
오위스트가 기겁하며 일어섰다. 모렐이 난동을 부릴 줄 알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고 턱만 떨었다.
“꼬, 꼭 하인이라고 할 필요는 없지않느냐.”
“않느냐?”
라온이 모렐의 뒷말을 따라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않느….”
모렐이 허공을 보고 한숨을 푹푹 내쉰 뒤에 말을 이었다.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말했듯이 전 확실한 게 좋거든요.”
라온이 빙긋 웃으며 열린 문을 가리켰다.
“나가죠. 아래에서 단주님이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
그는 모렐의 어깨를 툭툭 치고서 시장실을 나갔다.
“후우욱….”
모렐은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그는 이글거리는 열기를 뱉어내며 오위스트를 노려보았다.
“허억!”
오위스트는 그 눈빛을 받고 마른침을 삼켰다.
‘마, 말하면 죽인다는 뜻이야.’
모렐은 오늘 일을 어디에다가 말했다간 전신을 홀라당 태우겠다는 눈빛을 보내고서 시장실을 나갔다.
“끄윽!”
“윽!”
“젠장….”
“이게 무슨 꼴이야!”
다른 마법사들도 이를 바득 갈거나, 입술을 깨물며 모렐의 뒤를 따라갔다.
“허억! 허억!”
홀로 남은 시장실에서 오위스트는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대체 뭐가 뭔지….”
* * *
시장실 밖으로 나온 광풍단과 살라만은 리메르의 앞에 모였다.
“들었듯이 실종 사건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대충 예상가는 놈들은 있지만, 섣불리 말할 수는 없어.”
리메르는 뒷짐을 진 채로 말을 이었다.
“익스퍼트 상급의 검사도 실종되었을 정도이니, 개인행동은 절대 금지다. 사람 수대로 광풍단 2인 그리고 살라만 1인을 넣은 3인 1조로 움직인다.”
“예!”
“모렐 불만 없지?”
“…….”
모렐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대답하셔야죠.”
라온이 모렐에게 턱짓했다.
“끄응, 아, 알겠다.”
“알겠다?”
“알겠… 알겠습니다.”
“좋네요.”
라온은 계속하라는 듯 리메르에게 손을 올렸다.
“푸하하하하! 모렐! 어우 배 아파!”
리메르는 모렐을 보며 배를 잡고 웃더니, 힘이 빠졌다면서 라온에게 조를 짜라고 지시했다. 귀찮아서 넘긴 게 분명했다.
“하아, 정말이지….”
라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각기 실력의 균형이 맞도록 적절하게 조를 짜주었다.
“이 조대로 조사를 시작한다. 나와 모렐은 이 근처에서 대기할 테니까. 3시간마다 이곳으로 돌아와서 진행 상황을 보고 하도록. 일을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보고부터 해라.”
리메르는 그 말과 함께 수련생 때 주었던 무음 피리를 하나씩 넘겨주었다.
“나도 줄 게 있다.”
라온은 주머니에서 빨간 핀을 하나씩을 꺼내서 광풍단원의 옷에 끼워 넣었다.
“이건 뭡니까?”
버렌이 옷에 끼워진 붉은색 핀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화인석으로 만든 옷핀이다.”
라온이 눈을 깜빡이는 루난에게 옷핀을 달아주며 말을 이었다.
“내 오러가 깃들어 있어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지. 절대 빼지마.”
이 옷핀은 발칸에게 부탁해서 만들어낸 장비로 만화공의 오러가 깃들어 있어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기물이다. 아직 완벽하게 정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미완성품이라도 일단 써야 할 것 같았다.
“쯧, 뭐, 이런 걸….”
마르타가 혀를 찼지만, 완전히 싫지는 않은지 옷핀을 다는 걸 막지 않았다.
“우리 부단주가 준비성 하나는 철저….”
“광풍단 공금에서 뺄 거니까 준비해 두시죠.”
“크흠….”
리메르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자, 그럼 출발해라. 실종 장면을 목격하던가,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면 바로 보고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광풍단과 살라만으로 이루어진 임시 조는 우렁차게 대답하고서 각자 정해진 구역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모렐이 리메르의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어렵겠지.”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놓고 지그하르트와 발카르가 왔다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머리가 텅텅 빈 놈들이 아닌 이상 몸을 사릴 거야. 다만….”
“다만?”
“우리 예상대로 오마 중 하나라면 큰불 하나 지르고 도망갈지도 모르지.”
“으음….”
모렐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인상을 찡그렸다.
“우리 영역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었다. 내가 지원을 나가자마자 귀신처럼 실종 사건이 사라졌지만.”
“그래서 여기로 온 거였나?”
“그래. 꼬리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다만 네놈들 때문에 다 망했다.”
모렐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런데 네 제자라는 라온은 대체 뭐 하는 놈이냐. 무력은 그렇다 치고, 머리까지 굴릴 줄 알다니….”
시장실에서 라온이 오위스트 생각을 읽었을 때는 육성으로 욕이 튀어나올 뻔했었다.
라온이라는 놈은 보면 볼수록 놀라움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그 녀석이 방계라는 걸 믿을 수가….”
“아, 갈 곳 생각났다.”
리메르는 모렐의 말을 막고서 손을 흔들었다.
“무음적 들을 줄 알지? 너는 여기서 애들 문제 있나 좀 살펴줘.”
“리메르!”
모렐이 소리를 질렀지만, 리메르는 어느새 바람이 되어 사라졌다.
“이런 망할!”
모렐이 리메르가 사라진 곳을 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스승이나, 제자나 사람 열받게 하는데 도가 텄어!”
* * *
라온은 도리안, 자티스를 데리고 도시 외곽으로 향했다.
“쉬셔도 되는데요.”
내상과 외상을 입은 자티스에게 무리하지 말고 쉬라고 했지만, 그는 숫자를 맞춰야 한다며 끝까지 따라왔다.
“괜찮습니다. 라온 님과 함께 가다니 영광일 뿐입니다.”
고작 한 번의 대련을 했을 뿐인데, 자티스는 무슨 은사를 만난 듯한 눈빛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저보다 어린 분의 검술을 보고 감탄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극한의 노력과 재능이 어우러진 검술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자티스 님도 빠른 순간에 자세를 전환한 걸 보면 더 위로 올라가실 수 있을 겁니다.”
“에이, 일검도 받지 못한 제 얼굴에 금칠해주실 필요 없습니다.”
“진심입니다.”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자티스의 성격과 검술의 속성을 볼 때 그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 빨리 성장할 체질이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자티스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검술 실력과 달리 어리숙한 느낌이었다.
“저기 두 분? 저도 있는뎁쇼?”
도리안이 배 주머니를 쓰다듬으며 옆으로 왔지만 라온과 자티스는 검술에 관한 이야기로만 이야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쪽은 저희가 수색해야 하는 영역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티스가 점차 어두워지는 골목 사이를 둘러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네. 아닙니다.”
“그런데 왜 여기로….”
“우리에겐 정보가 많지 않으니까요.”
라온은 일을 해결하기엔 정보가 부족하다고 말하며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본래 이런 정보는 위가 아니라, 아래를 봐야 하는 법입니다.”
그는 한 번 와본 듯 더럽고, 어둑한 골목을 거침없이 나아갔다.
“으음, 괜찮으려나….”
자티스가 바닥의 피 묻은 유리 조각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따라가면 돼요.”
도리안은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과자를 입에 넣고 옆으로 다가왔다.
“저 사람을 따라가다 보면 일이 알아서 해결되더라구요. 좀 무섭긴 하지만….”
그는 오싹하다는 듯 어깨를 한번 떨고서 라온의 뒤를 따라갔다.
“음….”
자티스가 라온의 등을 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왕국의 수많은 기사들과 검을 부딪쳐 보았지만, 감동을 했던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라온의 검에는 힘과 기술을 넘어선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그 검을 다시 보고 싶어.’
그는 망설임을 부추기던 유리 조각을 짓밟으며 라온의 뒤를 쫓았다.